금요반 수강생 중 일부와 봉고차에 올라 현장 실습지인 노성을 향하여 갔다. 노성에는 명재 윤증선생 고택과 파평윤씨 선영이 있는 곳이다.
윤증선생(1629~1714)은 예학(禮學)에 밝은 학자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과 덕망이 높아 백의정승이란 대우를 받으며 당대에 선비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고택은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6번지에 있는데 양쪽에 노성학교와 공자의 유상(遺像)을 모신 권리사가 함께 자리하고 있어 성스러운 공간으로 옷깃을 여미게 하고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한다. 고택은 300년 동안 보존되었고 지금도 후손이 살고 있었다.
고택 진입로 오른쪽으로 열녀(烈女) 공주이씨(公州李氏) 정려(旌閭)비각이 눈길을 끌었다. 공주이씨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 피난처가 함락되자 순절한 분으로 윤증선생의 어머니다. 입구에 이르니 바깥마당 아래에 연못이 있는데 방지원도(方池圓島:네모난 연못에 둥근 섬)로 조성되어 있었다.
이것을 보자니 문득 옛글이 생각났다. 옛글에 보면 연못은 자연적으로 생긴 것을 논하는데(論天生自然者) 혹시 순전을 파내어 당지(堂地)를 손상시키면(或反剮破氈脣鑿傷堂地)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何益之有)라 하였고 연못의 형태상 다섯 가지로 분류하는데 이와 같이 네모난 것은 토성(方爲土)의 못(土池)이라 하여 천연의 것은 부(富)를 이룸이 틀림없다(生就土池其富無疑)고 하였다.
그리고 연못 속에 둥근섬(圓島)을 만들었는데 이는 수구(水口)에 있는 나성(羅星)을 생각할 수도 있으나 집터나 묘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아야 좋다. 옛글에서는 만약 청룡, 백호 안에서 보이면 양자를 들이거나 아녀자가 유산이 되거나 눈병이 생긴다(兩手中有一墩阜,謂之抱兒殺,兩脚中有一墩阜,謂之墮胎殺,堂目前有一墩阜,謂之患眼殺)고 하여 꺼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집터에서 보이지 않으므로 해당되지 않으나 만약 장차 이 인공 섬을 더 높인다든가 안채에서 보이게 하면 안 된다. 대개 산림 집에 연못이 가까이 있음을 꺼리는 바이나 고택과 조화를 이루어 풍광(風光)은 아름다웠다.
연못을 뒤로하고 바깥마당에서 올려다보니 층계를 두 곳 거쳐 내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것은 지세가 평탄하지 못하고 완만한 경사지에 택지(擇地)한 때문이다. 따라서 바깥마당이 상하(上下)로 돌층계로 구분되어 있었다. 아래 마당에는 길옆에 우물이 보였고 물이 맑게 흐르고 있었는데 물맛도 나쁘지 않았다. 돌계단을 올라 윗 마당에 이르니 오른쪽으로 사랑채가 우뚝 서있어 명당을 조망할 수 있게 하였고 안채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층계위에 있는 대문을 들어서기에 앞서 옆으로 가서 담장을 따라 뒤로 내려온 용을 살피고자 뒷담 너머에 있는 뒷동산에 올랐다. 대개 좋은 양택 자리는 나지막한 산줄기가 병풍을 두르듯 면궁(眠弓)으로 뒤를 감싸주고 줄기가 갈라져 골이 패이지 않아야 좋은데 이곳의 뒷산은 생각보다 높고 가파르게 줄기가 갈라져 내려오다 집 뒤 근처에서 다소 완만한 경사지로 내려와 끝을 펼쳐 집 뒤를 가볍게 받쳐주고 있었다.
그러나 내맥(來脈)이 중출(中出)이 아닌 좌편출(左偏出)로 내려와 좌선(左旋)으로 돌면서 뒤의 골짜기 물길을 역수(逆水)하여 막아주는 것은 좋으나, 집터를 감싸지 못하고 뒷산 쪽을 감싸니 집터에서 보면 약간 반궁(反弓)의 형태가 되어 집터를 거부하고 밀어내는 듯 하여 아쉬웠다.
뒷산이 높으면 기복(起伏)을 하여 비룡입수(飛龍入首)형태를 하고 마지막으로 솟은 봉우리가 지붕보다 2~3배의 높이로 언덕을 형성하여 횡으로 넓게 벌려 감싸야 좋다. 이곳은 기복은 없지만 줄기 끝이 비록 약간 반궁(反弓)이나 다소 펼쳐져 집 뒤를 받치고 있는 형태이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내맥(來脈)과 백호사이에 골이 패여 집 뒤를 쏘고 있으나 집 뒤의 줄기가 비록 낮지만 그것을 가로질러 막고 있어 다행이었다. 집 뒤에서 내려다보니 집터를 너무 산 밑으로 바짝 올려붙인 듯하고 백호 쪽으로 다소 치우친 감이 있었다. 지금보다 안채를 조금 아래로 내리고 청룡 쪽으로 약간 이동하였더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터를 현재의 곳보다 조금 아래로 내렸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 광활한 외명당의 직풍(直風)으로부터 집터를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는 좌우 의 청룡, 백호와 앞의 안산(案山)이 적당한 높이보다 낮게 깔려있다.
둘째 : 전체 집터에 비교적 높은 층계를 두 곳이나 두어 3단으로 나누었는데 이것 은 비탈진 공간에 위치하여 전체가 평탄하지 못하고 가파른 살기(殺氣)를 범하였다. 따라서 아래의 평탄한 곳으로 약간 내려오면 3단에서 2단으로 나 눌 수 있어 안정감을 높인다.
셋째 : 원진수(元辰水)가 정면으로 흘러나가는 거수국(去水局)에 연못을 조성하여 비보(裨補)하였으나 지혈(地穴)을 택하여 허점(虛點)법을 써서 재물인 물이 앞으로 나가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해야 한다.
넷째 : 현실적으로 집터를 산 밑에 바짝 올려놓아 산불의 피해를 방비할 공간이 부족하고 뒷산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기복이 없기 때문에 바윗돌 이나 토사의 흘러내림을 방비하기 어렵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집터를 약간 아래로 내려 잡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리고 집터를 청룡 쪽으로 약간 이동하였더라면 하는 생각은 이곳의 내맥(來脈)이 안채에서 볼 때 약간 청룡 쪽으로 내려왔고 백호 쪽의 골짜기가 안채를 쏘고 내려오는 형태다. 물론 집 뒤의 줄기가 백호 쪽으로 벌려 낮게 막아주기는 하였으나 다소 불안한 마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청룡이 유정(有情)하게 감싸두르고 그 끝이 돌아 역수(逆水)한 형태가 이곳을 집터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니 비교적 넓고 유정(有情)한 청룡 쪽으로 약간 이동하였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다시 뒷산에서 내려와 대문을 향하였다. 층계를 올라 대문에 들어서자 들어선 방향은 막히고 오른쪽 옆으로 몇 발짝 움직여 안채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 참으로 절묘한 비보(裨補)가 아닌가! 풍수지리에서 곧은 바람과 곧은 물길은 살기(殺氣)가 되고 굴곡(屈曲)되어야 좋은데 이러한 구조를 활용하여 직풍(直風)을 막고 바깥바람의 속도를 완화하여 내부의 공기와 밖의 공기가 무리 없이 교류할 수 있게 하였다. 또 대문을 닫지 않아도 밖에서 내부공간이 드러나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지혜로운 대문간의 구조다.
그러나 지세(地勢)상으로 이곳은 현재의 백호문로(白虎門路)보다는 청룡문로(靑龍門路)를 내야할 곳이다. 옛 글에 보면 청룡이 역수(逆水)하면 혈은 청룡에 의지하고~청룡, 백호가 낮으면 혈(穴)도 낮으며~청룡이 유정(有情)하면 혈은 왼쪽에 있고~청룡이 먼저 이르면 청룡을 거둔다(龍逆水則穴依龍~龍虎山低則穴亦低~龍山有情穴在左~龍山先到則收龍~)고 하였다. 따라서 이곳은 대문뿐만 아니라 집터 자체도 청룡 쪽이 유리한 형세다.
안채 마당에 들어서니 안채 건물이 ㄷ자 형태로 앞쪽으로 터진 구조인데 대문간 채가 일직선으로 그 터진 곳을 가로막아 ㅁ자 형태를 이루었다. 그리고 지붕 높이도 뒤쪽은 높고 양 옆은 조금 낮으며 대문간 채는 더 낮게 되어 흠이 없었다. 이러한 ㅁ자 구조를 보자니 양택삼요(陽宅三要)의 글이 떠올랐다. 양택삼요는 바로 이런 구조에서 발생한 이론이기 때문이다.
먼저 마당중심(天井中心)인 사방의 낙수가 떨어진 곳을 경계로 열십자 중심에 서서 나경을 꺼내보니 대문(門)은 곤방(坤方)이고 안방(主)문은 해방(亥方)이며 부엌(灶)문은 경방(庚方)으로 서사택(西四宅)구조에 합당한 배치였다. 혹시 이집을 지을 당시의 주인에 맞춘 배치구조인가 하고 윤증선생의 출생년도를 보니 1629년 기사생(己巳生)이었다.
1624년이 하원갑자(下元甲子)의 시작이니 선생은 구궁의 7적태궁(七赤兌宮)에서 갑자(甲子)를 일으켜 남자이므로 역행(力行)하면 이흑곤궁(二黑坤宮)에 기사(己巳)가 닿으니 선생은 서사택(西四宅)에 맞는다. 따라서 집주인에 맞추어 집을 지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이곳은 지형 상으로 청룡이 원진수를 먼저 거두었기 때문에, 대문위치가 이와 같이 편문(偏門)을 낸다면 청룡 쪽이 상식인데 하는 의구심이 풀렸다.
곤문(坤門), 건주(乾主), 태조(兌灶)는 연년택(延年宅)이라 하여 옛글에 보면 땅이 천문에 일어나니 부귀가 창성한다(地起天門富貴昌)하였고 또 성(星:구성)과 궁(宮:팔괘방)이 상생(相生)하고 밖의 토성(土星)이 안의 금성(金星)을 생(生)하니 남녀가 장수하고 부부간에 화목하여 사내아이와 계집아이가 집안에 가득하고 자손이 효성스럽고 어질며 부귀가 영화롭고 왕성하며 착하고 아름다움이 극진하다(星宮相生, 外土生內金, 男女高壽, 夫婦和諧, 兒女滿堂, 子孝孫賢, 富貴榮昌, 善美盡矣)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 집의 배치구조는 양택삼요의 이론에 의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마당 한쪽에 절구통이 보였는데 청룡 쪽 앞에 치우쳐 있었다. 옛글에 보면 절구나 맷돌 또는 방아는 내룡(來龍)쪽에 놓지 말고 오른쪽 백호 쪽도 안 되며 왼쪽 청룡 쪽에 놓아야 한다(~來龍在後碓居前,不可舂撼龍有傷,震動不寧龍亦病,家宅不安事無常,來龍在左碓居右,來龍在右碓在左傍~堂前爲腹爲腸,故忌在右攪虎腸~)고 하였다.
좌향(坐向)은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남향집이고 천정방수(天井放水)인 안마당 물길은 우수도좌(右水倒左)에 손사방(巽巳方)으로 흘러가니 향법상 양향(養向)으로 길(吉)하였다.
다시 대문을 나와서 바깥마당에서 국세를 보니 내백호(內白虎)에는 노성향교가 눌러 앉았으나 청룡은 집터를 감싸고돌아 원진수를 가까이서 역수(逆水)하니 아름다웠다. 그러나 청룡이 낮으므로 청룡 줄기 위에 나무를 울타리처럼 빽빽하게 심어서 장풍(藏風)에 도움이 되도록 비보(裨補)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룡, 백호가 거리를 두고 교쇄(交鎖)한 셈이다. 외백호(外白虎)가 청룡보다 멀리 나가 앞을 막아 둘러 안산을 이루었다. 외명당의 물이 좌수도우(左水倒右)이니 백호가 더 멀리 나가 감싼 것이 합법하였다.
그리고 요즈음 이곳에 초가지붕을 한 별채 건물 두 동이 들어섰는데 사전에 풍수지리전문가와 상의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왜냐하면 백호방에 있는 별채는 뒤에서 내려오는 골짜기 물길을 막고 있어 수겁(水刦)을 범하였고 청룡방의 별채는 청룡 품안으로 들어와 안기지 못하고 청룡줄기 등성마루를 올라타고 있어 풍취(風吹)가 염려된다. 앞으로 만약 별채를 짓는다면 청룡이 잘 감싸 안고 있는 현재의 장독들이 많이 있는 공간이 좋아 보였다. 이곳에 거주하는 분들의 행운을 빌면서 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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