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김씨(淸道金氏)
청도(淸道)는 경상북도 남쪽 중앙에 위치한 지역으로 선사시대에는 이서소국(伊西小國)의 땅이었으나 신라 유리왕 때 신라에 병합되었다가 후에 구도성(仇刀城)의 경내 솔이산(率伊山) · 경산(驚山) · 오도산(烏刀山)의 3성(城)을 합하여 대성군(大城郡)을 두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구도를 오악현(烏岳縣)으로 개칭하였고, 경산을 형산현(荊山縣)으로, 솔이산을 소산현(蘇山縣)으로 고쳐 밀성군(密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940년(고려 태조 23) 오악 · 형산 · 소산현을 통폐합하여 청도군이라 하였다가 밀성군에 속하게 하였다. 1109년(예종 4) 감무를 두었고, 충혜왕 때 이 고을 사람 김선장(金善莊)의 공로로 청도군이 되었다가 곧 다시 감무가 파견되었다.
1366년(공민왕 15) 청도군이 되었다. 1405년(태종 5) 10도제 실시로 경상도 청도군이 되었다가 태종 때 좌우도로 분할할 때 경상좌도에 속하였다. 1413년 지방제도 개혁에 따라 대구도호부에 속하였고, 1433년(세종 15) 다시 밀양도호부로 환원하였다가 1458년(세조 4) 대구진에 속하였다. 1832년(순조 32) 상읍내 · 차읍내 · 내서면 · 외서면 · 내종도 · 상북 · 차북 · 하남 · 상남 · 외종도 · 적암 · 중동 · 동일위 · 동이위 등 14개 면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 청도군이 되었고, 1896년에 경상북도 청도군이 되었다. 1906년(광무 10) 대구군(大邱郡) 각북면(角北面) · 현내면(縣內面) · 각이동면(角二洞面 : 풍각면) 및 각초면(角初面 : 각남면)을 편입하였으며, 1979년에 청도군청이 화양면으로 이전하면서 화양면이 화양읍으로 승격되었다. 현재 화양 · 청도읍과 각남 · 풍각 · 각북 · 이서 · 운문 · 금천 · 매전면의 2읍 7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청도김씨 시조 김지대(金之岱)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8세손이다. 그는 고려 고종 때의 문신으로 초명은 중룡(仲龍)이다. 1217년(고종 4) 3만명의 거란병이 침입하였을 때, 〈충효쌍수(忠孝雙修)〉라는 시를 남기고 아버지를 대신해 출전하였다. 당시 모든 군사들이 방패머리에 기이한 짐승을 그렸으나, 그는 “국가의 어려움은 신하의 어려움이요, 어버이의 근심은 자식의 근심할 바이다. 어버이를 대신하여 나라에 보답한다면 충과 효를 닦을 수 있을 것이다(國患臣之患 親憂子所憂 代親如報國 忠孝可雙修).”라는 시를 지어 붙였다. 원수 조충(趙沖)이 병사를 점검하다가 이것을 보고 놀라서 그를 중용하였다.
1218년에는 조충이 시험관으로서 지공거가 되어 그를 일등으로 발탁하고 전주사록(全州司錄)에 임명하였다. 그는 고아와 과부 등 어려운 사람들을 구휼하고 강호(强豪)를 억제함으로써, 이민(吏民)이 모두 그를 존경하였다. 그뒤 내직으로 들어와 보문각교감(寶文閣校勘)을 맡았고, 1240년 전라도안찰사(全羅道按察使)로 있을 때, 진도에서 최우(崔瑀)의 아들 최만전(崔萬全)이 진도에 숨어 횡포를 부리면서 자기의 수하인 통지(通知)라는 사람을 김지대에게 보내 그의 요구를 주장하였다. 처음에는 응하지 않고 김지대가 직접 최만전을 만나 그의 요구를 즉석에서 들어주었다. 그러나 최만전이 또다시 통지를 보내 여러 가지를 요구하므로, 통지를 결박하여 강물에 던져버렸다.
최만전은 원망을 하였으나 김지대가 청렴하고 근엄하여 감히 해치지를 못하였다. 1255년에는 판사재사(判司宰事)가 되어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진사를 뽑았고, 1258년에는 몽골군이 북쪽 변방을 침입하자 조정에서는 당시 군무를 소홀히 하던 북계지병마사(北界知兵馬事) 홍희(洪熙)가 여색만 탐하고 군무를 제대로 돌보지 않자, 김지대를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에 승진시켜 파견하자 서북 40여 성이 안도하게 되었다. 1260년(원종 1) 12월 정당문학이부상서(政堂文學吏部尙書)에 오르고, 1261년 5월에는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자, 조정에서는 수태부 중서시랑평장사(守太傅中書侍郎平章事)로 치사(致仕)하고 오산군(鰲山君 : 鰲山은 지금의 淸道)에 봉하였다. 그의 무덤은 청도에 있으며, 시호는 영헌(英憲)이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청도(淸道)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그곳에 살면서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명문으로 명성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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