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상도)

[스크랩] 충남 공주 금강변 전의 이태사 (全義 李太師) 공 묘

장안봉(微山) 2015. 1. 6. 05:01

 

 전의이씨(全義李氏)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으며 조선조에서 상신(相臣) 5명, 대제학 1명, 청백리 6명, 공신 6명, 문과 급제자 178명을 배출한 명문이다.

 

 이태사공은 전의이씨 시조 이도(李棹)공의 웃대 조상으로 알려졌으며 이곳은 마음씨 착한 뱃사공이 스님의 도움으로 부모를 모셨다는 등 많은 이야기 거리가 전하여 내려오고 있다.

 

 묘소는 충남 공주시 시목동 금강 홍수통제소 뒷산에 있다. 홍수 통제소 정문 앞 마당에서 보면 동쪽 방향에 산으로 오르는 길옆으로 큰 비석이 있는데 비석을 뒤로 하고 비교적 가파른 산길을 몇 백 미터 오르면 산 중턱에 이태사공의 묘가 나타난다.

 

 

 오늘은 여러 가지 전설에 대한 선입관은 머리에서 지우고 오로지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분석해 보고자 한다.

 

 혈장(穴場)에 올라 묵례를 올리고 입혈맥(入穴脈)을 따라 뒤에서 받혀주는 혈성(穴星)을 올려다보니 봉우리 정상에서 중출(中出)로 맥이 내려오고 양족 옆으로 날개를 드리운 형태가 글에서 본 개자비아(个字飛鵝)의 형태로 아름다웠으며 혈장을 뒤에서 감싸 보호하고자 하는 정이 느껴졌다.

 

 중출로 내려온 맥(脈)도 분수(分水)가 뚜렷하고 속기(束氣)가 잘 되었다. 이곳에 자리를 잡은 지관은 이 모습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묘 뒤의 8척 만두(八尺 巒頭)인 승금(乘金)에 올라보니 천연적인 모습이 아니고 사초(莎草)하면서 배토(培土)하여 돋우었고 양쪽의 사성(莎城)도 옛날보다 더 높게 쌓아 올렸는데 주변 지형과 자연스럽지 못 하였다 따라서 혈증(穴證)의 하나인 천연의 뇌두(腦頭)와 선익(蟬翼)을 볼 수 없어 아쉬웠다.

 

 

 그러나 다른 혈증(穴證)을 찾기 위해 혈장 주변을 돌아보니 좌우(左右)는 가파른 절벽 같았으며 앞에는 맥이 빠져나가서 다시 작은 봉우리를 일으키고 오른쪽 올라 왔던 방향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청룡 쪽의 가파르게 비탈진 아래로는 나무들 사이로 금강물이 내려다 보였으며 백호 쪽도 멀리 금강물이 흘러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좌우(左右)로는 가파른 절벽 같아 마음이 불안하였으며 좌우에서 치고 올라오는 강바람을 막을 수가 없는 형태였다. 그렇다면 대강수(大江水)와 혈장의 사이에 완전한 막힘이 없이 청룡 쪽으로 강물과 직접 만나니 이곳은 용(龍)의 여기(餘氣)인 대궁진처(大窮盡處)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옛글에 보면 무릇 간룡(幹龍)의 대지(大地)는 용의 기운이 장성(長盛)하여 결혈(結穴)이 이미 끝났어도 산세가 멈추기 어려워 반드시 남은 기운의 산이 있는데 혹 수리(數里)를 가거나 혹은 수십 리를 간다. ~ 대지(大地)결작(結作)은 대궁진처(大窮盡處)에 있지 않고 대부분 사방의 산이 감싸 따르는 가운데에 있다. ~ 대부대귀(大富大貴)의 자리는 대궁진처에 있지 않으며 대궁진처는 대부분 풍취 수겁(風吹 水刦)을 받는다.~(凡幹龍大地龍氣長盛結穴已完山勢難止必有餘氣之山或去數里或去數十里 ~ 大地結作不在大窮盡處多才四山擁從之中 ~ 大富大貴之地必不在大窮盡處大窮盡處多是風吹水刦~)고 하였다.

 

 따라서 이런 곳은 대지(大地)는 기대할 수 없고 소지(小地)에 만족해야 할 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구체적인 혈증(穴證)을 찾아보기 위해 다시 혈장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니 혈장의 백호 쪽 아래로 상하(上下)에 두 개의 지각(枝脚)이 내려갔는데 혈장 중심의 위쪽과 아래쪽에 각각 위치하여 혈장 중심을 받쳐주지 못하니 정작 혈장의 원만(圓滿)에 도움이 되지 못하였고 다만 내맥(來脈)과 혈장이 우선으로 완만하게 굽어 도는데 요도(橈棹)의 역할 만 할 뿐이었다 혈장의 청룡 쪽 아래로 내려간 지각도 혈장 중심을 받쳐주지 못하고 아래쪽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겸가지(蒹葭枝)처럼 지각이 엇갈려 있었다. 차라리 오동지(梧桐枝)같이 대절(對節)하였더라면 혈장의 원만(圓滿)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지각이 엇갈려 내려갔다는 것은 기운이 완전히 멈추지 못하는 형태로 기운의 통로가 되는 과협(過峽)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형태를 보자니 이곳이 혈을 맺을 수 있는 혈장(穴場)인지 아니면 과협(過峽)에서 볼 수 있는 봉요학슬(蜂腰鶴膝)의 학슬(鶴膝)인지 의심이 들었다.

 

 혈장의 앞부분은 새로 사초(莎草)를 하여 순전(脣氈)을 둥글고 높게 쌓아 올려 자연적인 옛 모습이 아니었으나 그 아래로 맥이 살아서 흘러나가 앞에 봉우리를 일으키었다. 앞의 작은 봉우리를 보자니 이곳이 혹시 괴혈(怪穴)의 일종인 기룡혈(騎龍穴)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하고 내려가서 앞에 있는 봉우리를 살펴보았다.

 

 기룡혈에 관한 옛 글을 보면, 혈법(穴法)을 보면 일반적인 혈법과 한 가지이며 용의 등성마루에 와(窩)를 열고 운기(暈氣)를 이루고, 앞으로 나간 산은 원근(遠近)간에 모두 거두어 돌아와야 하며 사방의 산들이 모여 둘러 감싸 금두(金斗)같이 이루어져야 하고, 열 개의 기룡혈 중에 아홉 개는 가혈(假穴)이다 (胥來穴法一般同 當脊開窩成暈氣 ~ 去山遠近皆收回 四山圍聚成金斗 ~ 十个騎龍九个假) 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곳이 기룡혈 이라면 앞으로 나간 봉우리 좌우로 줄기가 8자(八字)형태로 뻗어 혈 쪽을 감싸고자 해야 하는데, 뒤돌아보지 않고 무정하게 자기의 갈 길을 가고 있었으니 기룡혈의 형태도 부족하고 혈장의 물이 양쪽으로 나뉘어 흐르니 분류수(分流水)의 단점만 노출되었다.

 

 

 옛글에 보면 분류(分流)라는 것은 혈 앞의 물이 여덟팔자로 나뉘어 흐르는 것으로 물이 이미 나뉘어 흐르면 용은 멈추지 못하여 결작(結作)이 없음을 알 수 있다 ~ 오직 기룡혈은 비록 그것에 구애되지 않는데 거듭거듭 막아 끊기고 관쇄(關鎖)되어 수세(水勢)가 나뉘어 나가는 것이 보이지 않고 또 사방의 산이 주밀하게 끼고 따르며 용진혈적(龍眞穴的)하므로 꺼리지 않을 뿐이다. (分流者穴前水分八字而流也水旣分流龍則不住其無結作可知 ~ 惟騎龍雖不拘此水却重重攔截關鎖不見水勢分去又且四山周密夾從而穴的龍眞故不忌耳)라고 하여 참된 기룡혈이 아니면, 부자(父子)가 동서(東西)로 갈리고 자손이 오역(忤逆)한다 하여 꺼리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좌우(左右)가 요함(凹陷)한 것이 마음에 거슬렸다. 옛글에 보면 입혈처(立穴處)에는 주밀하게 막아 가려 주어야 귀한 것이고 좌우로 공결(空缺)하면 꺼린다. 만약 적당한 혈처(穴處)에서 요함(凹陷)하여 바람이 혈(穴)을 쏘면 가장 불길하다~(當立穴之處貴其周密遮障忌其左空右缺若適當穴處凹缺折陷賊風射穴最爲不吉~)고 하여 크게 꺼리는 것이다.

 

 다시 혈장에 올라 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려한 전설에 그 유명하다는 자리가 왜 내 눈에는 차지 않을까 내가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는지, 아니면 신안(神眼)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여 땅속을 들여다보지 못한 탓인지, 부족한 나의 안목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때 일수록 기본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

 

 

 풍수지리에서는 땅의 생기(生氣)가 멈추어 모여야 하고 바람을 타서 흩어지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떨까 우선 큰 강바람을 타니 장풍(藏風)에 문제가 있으며 아래로 맥이 살아서 달아나고 있으니 기운이 멈추지 못하였고 혈장(穴場)의 양 옆이 가파르게 비탈져 살기(殺氣)를 띠며 혈장이 어느 정도 평탄함은 갖추었으나 기운이 모인 흔적 즉 원만(圓滿)과 정이부동(靜而不動)의 형태에 미흡하니 세인들이 말하는 대지(大地) 진혈(眞穴)이라는 것에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혹자는 괴혈(怪穴)은 천장지비(天藏地秘)하여 속안(俗眼)으로는 알 수 없다 하나 필자는 동의할 수 없다. 옛 글에, 사람들이 괴혈을 말하는데 내가 볼 때는 괴이하지 않다 괴혈도 결국에는 혈법이 있다 (人言怪穴我不怪 怪穴畢竟穴法在) 고 하여 기본적인 혈법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말하였다 그리고 괴혈은 보통의 안목으로는 알 수 없다면 풍수지리 학문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고 혈도 아닌 곳을 진혈(眞穴)이라 하며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앞에 흐르는 금강 물도 이곳을 감싸 돌아보지 않고 무정하게 흘러나가니 수성(水城)의 형태뿐 아니라 앞에 펼쳐진 큰 강물에 빗겨 잘린 명당(明堂)과 사(砂)의 모양도 모두 이곳을 위한 유정한 형태라고 단정하기 어려웠다. 물론 어느 곳이나 장점과 단점이 공존하며 전길(全吉)한 곳은 없는 법이다. 그러나 이곳은 장점도 많이 있으나 단점은 사소한 것이 아닌 기본적인 원칙에 어긋난 것이기에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었다.

 

 이곳은 풍수지리적 해석을 떠나서 오랜 세월동안 자리가 보존되었고 후손의 발복도 있었다고 전하여지며 지금도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니 별도의 관점에서 연구하여 볼 곳이라 생각된다. 끝으로 이곳 후손들의 무궁한 번창을 간절히 기원하면서 산을 내려왔다.

출처 : 민중원
글쓴이 : 민중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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