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연구논문및사례

[스크랩] 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 26] 동화사터

장안봉(微山) 2013. 11. 25. 22:52
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 26] 동화사터

팔공산 동화사(桐華寺)는 풍수 가람(伽藍)이다. 절(寺)의 터잡기와 경내 (境內) 토지이용의 역사적인 변화상, 그리고 오늘날 그 절집을 찾는 사람 들의 각종 행태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들이 풍수와 관련이 있다. 마치 온갖 풍수 주제들을 한 군데 모아 전시해 놓은 것 같은 곳이 바로 동화사 터인 것이다.

필자가 굳이 변화된 동화사터 모습의 시시비비를 논하고자 하는 것은 결 코 절집자체를 미워해서가 아니다. '터다움'을 잃어버린 그 절집을 통하여 어쩌면 오늘날 만신창이가 된 우리 국토 전체의 자화상을 반추해 볼 수 있 을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인품이 있듯이 그 모든 터에도 분 명 품격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 즉 어찌 "천하의 명산을 스님들이 다 차지 했다"는 옛말이 부끄러울 정도로 가람 품격이 그토록 철저하게 망가뜨려질 수 있다는 말이던가.

절터는 성소(聖所)라는 그 본색 하나만으로도 속세의 천박한 토지이용에 귀감이 되어야 마땅한데, 오히려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거꾸로 세속적 인 그릇된 환경심리와 공간감각을 심어주고 있으니, 그 잘못 변한 모습에 서 염려되는 바가 실로 적잖은 것이다.

동화사는 그 창건 설화부터가 잘못돼 있다. '삼국유사'는 "신라의 심지 대사(心地大師)가 팔공산 꼭대기에 올라 불골간자(佛骨簡子)를 날려 그것 이 떨어진 곳에 절을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택리지(擇里志)'는 "신라 의 승(僧) 진홍(眞弘)이 쇠지팡이를 공중에 날려 그것이 떨어져 멈추어 선 곳에 동화사를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과연 누가, 무엇을 날려 절터를 점정(占定)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터잡기 수준이 정녕 그런 황당한 방법에만 의존하고 있었던가 하는 것이다. 알고 보면 실상은 전혀 그와 정반대다.

동화사가 창건된 시기인 신라 말기에 이미 불가(佛家)는 밀교(密敎)적 택지법(擇地法)이라는 훌륭한 터잡기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주로 지방 의 선종(禪宗)계통 승려들에게 수용되어 절집,불탑, 부도(浮屠) 등으로 구 성된 도장(道場)을 개설하는데 널리 활용된 이 비법은 풍수 택지술보다더 나았으면 나았지 그것에 조금도 뒤떨어지지않는다.

지세, 유수(流水),수목등과 같은 땅의 겉모습을 관찰하여 길지와 흉지 를 판별하는 관지상법(觀地相法), 흙의 양(量)과 색, 그리고 냄새와 맛을 보고 땅 속의 성질을 감별하는 관지질법(觀地質法), 땅 속의 골석(骨石) 과 같은 더러운 물질들을 제거하고 향수와 우유 등을 뿌려 주위를 청정케 하는 치지법(治地法 혹은 淨地法) 등, 그 어느 것 하나 나무랄데 없는 택 지법이다. 나말(羅末)에 명산을 배경으로 건립된 대가람들이 한결같이 좋 은 터에 자리잡고 있는 까닭도 거기에 있는 즉 동화사가 들어선 원래의 터 가 팔공산 기슭의 어디였든 간에(혹자는 불골간자가 떨어진 자리를 상정 하여 현재의 금당암 극락전터나 혹은 그 북편의 수마제전(須摩提殿)이 있 는 곳을 원터라고 주장한다) 그 터를 잡는데 밀교적 상지법이 적용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 우리는 충분히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동화사는 지금의 본절이 있는 곳에 중창되면서 이른바 봉황포 란형(鳳凰抱卵形)의 길지에 터잡은 일종의 풍수 가람으로서 거듭 태어나게 된다. 혹자는 여기에서 절집이 밀교적 택지법이든 혹은 풍수적 상지법이든, 아니면 오늘날과 같은 서양식 토지개발 방법에 따라 터잡든 그것이 무슨 대수로운 일인가 생각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사람은 일단 터 선정 당 시에 기준이 된 토지관(觀)이 무엇이었느냐에 따라 차후의 경내 토지이용 양상이 천양지차로 달리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동화사터가 풍수상 봉황포란형의 지세로 인식된 후 나타났음직한 토지이 용 양상을 한번 살펴보자. 일주문을 봉황문으로, 대웅전의 안대(案對)를 이루는 누각을 봉서루(鳳棲樓)로 각각 이름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봉황 이 오동나무에 깃들이고, 또한 대나무 열매를 먹는다는 속설에 따라 절터 주위로 그런 나무들을 인공적으로 심은 것은 매우 바람직한 환경비보책(裨 補策)이다.

어디 그뿐이었겠는가. 혹여 봉황의 알이 깨질까봐 절터에 함부로 손대는 것을 자제했음은 물론 거대한 석상(石像)을 안치하는 불사중창은 아예 금 기시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지금의 봉서루 앞쪽 외명당에서 주변 산세를 한번 살펴보라. 뒤로는 동 봉(東峰)에서 염불봉, 신녕재와 능성재로 이어지는 장쾌한 팔공산 주릉(主 稜)이 병풍(혹은 御屛障)처럼 둘러쳐져 있고, 좌우로는 그 주릉에서 뻗어 나온 지맥들이 이중, 삼중으로 명당판을 위호하고 있다. 게다가 빈대골과 수숫골 사이를 힘차게 타고 내려오는 주맥(主脈)이 일단 절터 뒤쪽에다 현 무정(玄武頂)을 솟구쳐 놓은후, 계속해서 내백호(內白虎) 줄기를 이루며 내려오는데, 절터 바로 앞쪽에서 왼쪽으로 약간 용신(龍身)을 비틀며 안봉 (案峰)으로 멈춰섰다.

그야말로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듯한 봉황포란형의 아늑한 지세다.마치 어머니의 품에 안겨있는 아기처럼 봉황의 날갯죽지에 감싸인 대웅전을 바 라보노라면 저절로 포근함이 느껴진다. 그것이 바로 동화사터 지세의 본 색이다. 큰절과 금당암이 갈리는 길목에 있는 인악당(仁岳堂)의 인악대사 비(碑)가 흔히 볼 수 있는 거북 형상의 받침돌이 아닌 웅크리고 앉아 알 을 품고 있는 듯한 봉황 형상의 받침돌에 얹혀 있는 것도 알고 보면 동화 사터의 그런 풍수적인 본색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을 지키려고 애써 온 자만이 표현할 수 있었던 그 어떤 지리적인 정체성(正體性)이 아니었겠는 가.

그런데 문제는 바로 1990년대 초에 들어선 큰절 앞의 통일약사대불(統一 藥師大佛)이다. 미륵도량에 약사대불이 세워져 그만큼 동화사 본래의 사성 (寺性)이 퇴색되었다는 얘기는 내 알 바 아니지만, 적어도 그 대불이 들어 섬으로써 그토록 명미했던 판국(版局)이 엉망이 된 것만은 틀림없다. 큰절 서편의 외백호 줄기를 끊으면서까지 새 출입문을 내고, 고즈넉했던 비로암 의 후맥(後脈)을 짓눌러가면서까지 시멘트를 싸바른 대형 주차장을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 바로 그 대불의 뒤쪽 주맥에 길을 내어 사람들이 반드시 그것을 먼저 짓밟고 통과한 연후에야 통일대불을 참배할 수 있도록 만들어 져 있는, 저 우스꽝스런 공간개발 양상을 한번 보라.

대자연은 '나'라는 일개인(一個人)의 전체요, '나'라는 일개인은 어디까 지나 그 전체와 조화된 일개인이라는, '심물일경(心物一境)'내지 '귀복자 연(歸復自然)'과 같은 불교적 가르침은 도대체 어디에 내팽개쳐지고 그같 은 괴상한 몰골만 남았더란 말인가.

명분없이 산허리를 끊고 세워지다보니 아직까지 제이름으로 된 현판 하 나 걸지 못하고 있는 집단시설지구쪽의 서쪽 문에 한번 한참동안 서 있어 보라.(사람들은 제멋대로 後門, 北門, 桐華門, 심지어는 一柱門이라 부르 기도 한다) 용단(龍斷)된 곳을 통하여 판국 안으로 세차게 불어 들어오는 살풍을 직접 피부로 느낄 수 있는데, 그 바람이 원래는 제대로 된 터에 자 리잡고 있는 부도밭을 곧장 때리면서 기(氣)를 흩고 있다. 거기에다 패기 (敗氣)를 실어 나르는 자동차들까지 상시로 판국 안팎을 들락날락거리니 동화사터 전체가 잠시라도 안녕할 리 만무하다.

제몸체를 그토록 어리석게 자해(自害)해 놓았으니 그것이야말로 곧 자문 (自門)에서 말하는 인과응보가 아니고 무엇이랴. 대불이 들어선 터만해도 그렇다. 터파기 공사를 할때에 5색(五色)의 흙이 쏟아져 나오고, 또 그 밑을 대불의 좌대로 쓰기에 알맞도록 거대한 천연암반이 받쳐주고 있음이 확인되자, 그 터가 곧 약사대불과는 인연의 터가 틀림없다는 얘기가 나온 적도 있지만, 필자의 견해는 그와 사뭇 다르다.

대불의 원석(原石)은 전북 익산에서 캐내온 황동석으로 알려져 있는데, 불법(佛法)에 따라 국토전체를 하나의 만다라(曼茶羅)로 보자면 불상은 결 국 제 몸의 뼈를 파내어 다른 곳에 옮겨놓은 단순한 물질에 불과하다. 동 화사터 전체로 볼 때도 이제는 중심공간이 큰절인지 아니면 통일대불인지 모호해졌을 뿐만 아니라 108계단을 비롯한 대불터 전체의 형상이 마치 지 맥을 누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어 원래의 큰절이 지녔던 자연의 품 에 안긴 듯한 이미지와 크게 상충되고 있다.

게다가 통일대불이 뭇중생들에게 심어주는 심상(心想) 역시 반드시 긍정 적일 수는 없는 바, 사람들이 대불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팔공산의 정기를 제대로 느낄 수 없을 수도 있고, 또한 심적으로 대불에 위압되는 한편으로 속세에서 그 무엇이든지 큰것만을 지향하고 선호하는 마음이 생길 소지도 다분히 있는 것이다. 방문객들의 편의를 십분 고려하여(?) 판국내로 자 동차를 몰고 들어오도록 한것도 그런데, 지난 여름에는 모 기관이 통일대 불 앞에 무대를 만들어 놓고 이름있는 세속의 가수들을 불러들여 소위 산 사(山寺) 음악회까지 열도록 동화사측에서 배려해 주었다고 하니, 도대체 명찰(名刹)로서의 전통과 품격을 지키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모든 것 을 포기했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모르면 약이요,아는 게 병"이라는 속담을 뼈저리게 느끼며 예전부터 즐 겨 찾았던 동화사터 옛길을 되돌아 걸어내려오는데, 산천지맥이 살아있는 곳에 명당이 있고(生龍之處有明堂), 좋은 사람이 사는곳이곧 명당이다(吉 人主處是明堂)는 두 가지 옛말이 번갈아 뇌리에 떠오른다. 동화사터는 과 연 어디에 해당하는지 모든 중생들이 다 함께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풍수학자.지리학 박사

출처 : 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
글쓴이 : 초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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