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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 24] 포항 호미곶 | ||||
포항시의 호미곶(虎尾串)은 우리나라 풍수사(史)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 는 명소(名所)중의 명소다. 낙동정맥(洛東正脈)의 가지산(迦智山)에서 동 으로 뻗어나온 지맥이 치술령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진 후, 그 북쪽 줄기가 토함산(吐含山)에 이르고, 또 그 토함산의 북쪽 지맥이 추령(楸嶺)을 지나 운제산(雲梯山) 줄기와 함월산(含月山) 줄기로 양분되는데, 이 함월산 줄 기가 줄곧 동북쪽으로 치달으면서 대곡산(大谷山 혹은 三峰山)-운장산(雲 章山)-공개산(孔開山)-명월산(明月山)-봉화산(烽火山)과 고금산 등으로 이 어지는, 이른바 호랑이 꼬리의 연골을 일궈놓았다. 동해쪽으로 불쑥 튀어 나와 있는 그 돌출된 지세를 어찌 옛사람들이 그냥 지나쳐 보았을 리 있겠 는가.
고려 때에 이미 용미등(龍尾嶝)으로 부르면서 저 용담(龍潭 혹은 魚龍潭, 지금의 영일만)과 더불어 어룡승천형(魚龍昇天形)의 명형국지로 인식해 왔 거니와, 조선 중기에 오면 영일현(迎日縣) 터를 중심으로 하여 흥해의 용 덕곶(龍德串)이 좌청룡으로, 그리고 용미등은 호미곶으로 개명되면서 이른 바 우백호로서 포진하게 된다. 그외에도 대동여지도 등에서 호미곶이 마치 머리위에 덧붙이는 가짜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달비곶(혹은 冬乙背串)으로 명명하였으나, 그런 것들은 알고 보면 어디까지나 지역풍수론적물형론 (物 形論)이었을 따름이고, 호미곶은 일제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지금과 같은 국역(國域) 풍수론적 범꼬리의 지위를 확고히 굳히게 된다. 그렇다고 그 사이에 호미곶을 욕되게 한 일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1894년 5월에 호미곶 앞바다에 암살당한 개화파의 우두머리 김옥균의 여섯 토막난 시신 가운데 그 왼팔을 던진 일이 있다. 동해로 튀어 나온 호미곶 지세에 역모의 기운이 서려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지만, 그 어떤 사상이든 정치와 결탁하면 그같이 타락하기 십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전혀 안중에 둘 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오늘날의 호미곶이 갖는 위상은 일제의 한반도 풍수침략과 밀접 한 관계가 있다. '택리지(擇里志)'에 기록돼 있는 바와 같이 조선조에는 사실상 한반도의 땅 생김새를 행주형(行舟形)에 비유하거나 아니면 해좌사 향(亥坐巳向)의 노인형(老人形) 지세로서 마치 중국에 읍(揖)하고 있는 듯 한 형상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중국과 친근하다고 하는, 국역풍수설이 팽배 해있었다.그러나 조선 중엽에 강태희가 '근역강산맹호도(槿域江山猛虎圖)' 라는 그림을 내놓으면서 상황은 크게 바뀐다. 풍수사를 위시한 많은 사람 들 사이에서 이 땅을 호랑이 형상으로 인식하려는 풍조가 일어난 것이다. 그런 차에 때마침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분지로(小藤文次郞)가 한반도의 형상을 희생물의 상징인 토끼로 폄하하자 육당(六堂) 최남선이 그것을 반 박하기 위해 안출해 낸 것이 바로 맹호도이다. 이 두 그림은 한일합방 직 전인 1908년 11월에 발행된 '소년지(少年誌)' 창간호에 흥미로운 기사와 함께 실려 있다. 봉길이(鳳吉伊) 지리공부 난을 보면, "우리 대한반도는 맹호가 발을 들고 허우적거리면서 동아대륙을 향하여 나는 듯 뛰는 듯 생 기있게 할퀴며 달려드는 모양을 하고 있으니, 그것은 곧 이 땅의 생왕하면 서도 무량한 원기(元氣)와 진취적이면서도 무한한 팽창발전을 의미하는 것 인즉, 어찌 소년들이 이 그림을 통하여 더욱 굳고 단단한 마음을 가지지 않겠는가"라는 것이다.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시기에 좌절감에 빠져들 기 쉬운 소년들에게 새로운 기상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는 데 그보 다 더 적절한 방법이 어디에 또 있었겠는가. 그러나 알고보면 한.일간의 풍수공방전은 그것이 결코 처음이 아니었다. 일제는 1903년에 이미 우리 왕실로 하여금 호미곶에 등대를 세우도록 강 요했는데, 그것은 일본 수산실업전문학교의 실습선이 우리 동해안의 어군 (魚群) 분포와 수심 등을 조사하다가 지금의 대보리 앞바다에서 좌초된 것 이 빌미였다. 당시에 호미곶 주민들 중에는 만약 호랑이꼬리에 등대를 세 워 불을 켜게 되면 천벌을 받게 된다느니, 혹은 범이 뜨거워서 꼬리를 흔 들게 되면 등대가 넘어져 그 일대가 불바다가 될 것이라느니 하여 이사가 는 사람들까지 있었다고 전해지니 그 사회적 동요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던 셈이다. 혹자는 그런 역사적 사실을 현재의 지식과 안목으로 판단하여 부끄럽게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 당시 우리 민족의 토지관을 시대적 상황으로서 이해하고, 또한 그것을 우리 한민족의 정신문화말살정 책으로 교묘하게 역이용하고자 했던 일제의 간교한 속셈을 기억해 두는 것 이 오히려 문화민족으로서의 마땅한 도리라 할 것이다. 그러나 실로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는 일제시대때 한.일 풍수공방전이 남긴 교훈을 제대로 깨닫고 있지 못한 듯하다. 웅크리고 앉아 웅비할 태세 를 갖추고 있는 호랑이는 모든 힘을 뒷발에 모으고 있기 때문에 그 뒷발에 해당하는 서남해의 끝자락이 혈처(穴處)라고 한다든가, 혹은 호랑이는 돌 진할 때 몸의 균형과 속도, 그리고 희로애락을 꼬리로서 조절하고 또 꼬리 를 움직여 무리를 지휘하기 때문에 호랑이의 기운이 가장 집적된 부분은 역시 꼬리가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또 뭔가. 그런 황당한 주장들은 지 역이기주의에 풍수를 교묘하게 결부시킨 또다른 상징조작에 불과할 따름이 며, 한국 풍수의 발전에 지장을 줌은 물론 온국민들이 이 나라 땅을 사랑 하고 화합하는 데도 걸림돌이 될 뿐이다. 지리(地利)가 인화(人和)만 못하 다는 옛말이 있듯이, 인화를 해치는 그같은 부질없는 풍수 논의는 하루속 히 청산돼야 하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호미곶 일대가 새 천년의 뜻깊은 해맞이 장소로 사람 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거의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는 사실이다. 굳이 구룡 포읍 석병리가 남한 땅 육지의 동쪽 끄트머리라는 것을 강조할 필요도 없 이 그 일대 땅의 역사가 곧 그것을 증명한다. 지금의 연일(延日)과 오천 (烏川) 지역을 신라 때는 임정현(臨汀懸)이라 불렀지만 일월지(日月池)를 두고 일찍부터 그곳을 신성시했다.더구나 고려 초에 '해를 맞이한다'는 뜻 의 영일현으로 지명이 바뀐 후에도 장기읍성의 배일대(拜日臺)를 거쳐 호 미곶 해맞이에 이르기까지 그 장소가 큰 거리차이 없이 연면히 이어지고있 는 것을 보면, 호미곶 일대는 원래부터 일출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숙명 을 타고난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과연 그런 숙명에 얼마만큼 부합되게 현재 호미곶을 가꾸어 나가고 있느냐 하는 것인데 막상 현장을 답사해 보면 사태가 여간 심상찮다는 것이 단번에 느껴진다. 호미등(嶝)위로 마구잡이로 개설돼 있 는 임도(林道), 산꼭대기 위의 마을 쓰레기 처리장, 공원 묘지, 그리고 몇 해 전에 향토의 노거수회(老巨樹會)가 호랑이 꼬리도 털이 있어야 제격이 라며 심어놓은 각종 수목들을 모조리 없애가면서까지 무리하게 확장 개발 되고 있는 장기곶 등대공사 등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더욱 가관인 것은 포항시가 홍보하는 '2000년 해맞이는 호미곶에서'라는 선전문 구와는 사뭇 대조적으로 구룡포-포항간 도로 4차로 확장 포장공사가 진행 되면서 호미등의 연골들이 여지없이 잘려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운정산 동쪽의 산능선이 잘리고 있는 현장에 이르러서 필자는 좀 처럼 발길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줄기가 곧 호미곶의 주맥(主脈)임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가 거듭될수록 자꾸만 더 골병들어가는 호미등을 안타까워하며 무거운 발길을 되돌려 돌아오는데 영일만쪽 도구(都邱)마을의 푸른 솔숲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래도 배륙임해(背陸臨海)의 산기처(散氣處)다운 특징을 찾 아낼 수 있을 것 같아 마을을 찾아드니 역시 방사림(防沙林) 이상의 그 무 엇이 발견된다. 그것은 영일만 쪽에서 불어오는 강한 샛바람을 막기 위해 인공적으로 쌓아놓은 모래언덕이었다. 비닐하우스로 부추농사를 지으려는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들면서 인공모래언덕도 하나, 둘씩 늘어갔다고 하 는데 샛바람을 피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집의 좌향을 정해놓은 것도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다. 갑자기 바로 그같은 개발방식이 곧 풍수에 순응하는 환경친화적인 개발 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알고 보면 호미곶은 물형론적인 관념명당,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앞으로 호미곶을 어떤 방향으로 개발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해답은 도구마을에 모두 함축돼 있다고 해도 과언 이 아니다. 적어도 해맞이 명소로서의 호미곶의 본색과 상극(相剋)이 되는 개발만이라도 자제해 나간다면, 2000년대의 호미곶은 훨씬 더 밝은 모습 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올 것이다. 풍수학자.지리학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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