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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 21] 밀양시기(密陽市基)

장안봉(微山) 2013. 11. 25. 22:51
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 21] 밀양시기(密陽市基)

밀양에는 용(龍)과 관련된 지명(地名)이 유별나게 많다. 용두산(龍頭山) 이 있는가 하면, 용두소(沼 혹은 淵)도 있고, 용이 뿜어내는 불을 뜻하는 밀불뫼(한자어로는 推火山)가 있는가 하면 미리벌(혹은 미르벌)도 있으며, 용활리(龍活里)가 있는가 하면 용지리(龍池里)도 있다. 그러고 보면 밀 양은 '용의 땅'이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하기야 '밀(密)'은 곧 '미르'요, '미르'는 즉 '용'을 뜻하는 우리 고유어이니, 벌써 밀양이라는 지명 자체부터가 '용의 땅'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 않은가. 풍수에서 는 산줄기가 이리 꿈틀, 저리 꿈틀거리며 내닫는 모습을 마치 몸통을 좌우 로 틀며 하늘을 찢는 용의 형상과 흡사하다 하여 산세를 용이라 일컫거니 와, 그런 용의 건강함과 병듦, 길함과 흉함을 살피는 것을 풍수이론체계상 간룡법(看龍法)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용자(字)가 들어가 는 지명을 지닌 곳은 대저 그곳이 성터이든 집터이든, 아니면 묘터이든 간 에 평안과 부귀영화를 가져다주는 명당으로 인식돼 왔는데, 특히 용머리 (龍頭)는 과거시험의 장원급제와 입신양명을 상징하다보니 지세가 용의 머 리를 닮아서 생겨난 용두산이라는 지명이 있는 곳은 다른 그 어떤 산 이름 을 가진 곳보다도 사람들의 각별한 관심을 끌게 되었던 것이다.

밀양의 용두산은 전국 도처에 분포하고 있는 여타의 용두산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만큼 잘생겼고, 생동감도 넘친다. 만어산(萬魚山)의 한 지맥이 북으로 치닫다가 일자봉(一字峰)을 이룬 후, 서쪽으로 그 방향을 틀어 길 고도 활기찬 용두산 줄기를 일궈놓았는데, 그 굽이치는 모양새는 용틀임 바로 그 자체를 연상케 한다. 예로부터 밀양사람들이 고을의 진산(鎭山)인 화악산(華岳山)과 영산(靈山)인 종남산(終南山)에 못지않게 용두산을 소중 히 생각해왔던 것도 모두 그런 까닭에서다. 그러나 기실 밀양에는 용두산 만이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리저리 굽이치면서 흐르는 강줄기도 기묘하기는 마찬가지다. 산줄기가 휘어도니 물줄기도 자연히 따 라서 감돌아 흐르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읍기(邑基) 남쪽을 통과하는 밀양 강 구간을 남천(南川)이라 부르는 외에도 응천(凝川)과 을천(乙川)이라는 별호를 덧붙였을까.

그러나 밀양땅이 영남의 명기(明基) 중에서도 명기라 이를 수 있는 것은 용두산이 저혼자 잘나서도 아니요, 밀양강이 저혼자 잘나서도 아니다. 바 로 그 두 가지의 풍수요소, 즉 산과 물의 취합이 유달리 빼어나기 때문이 다.

종남산에 올라 밀양 주변의 산수지세를 한번 살펴보라. 멀리 북쪽으로 화악산이 우뚝 솟아 있고, 거기에서 소(小)화악산과 옥교산(玉轎山)으로 이어져 내려온 주맥(主脈)이 남쪽 밀양강변에 추화산을 솟구쳐 놓았다. 이 추화산의 지맥이 서쪽으로 뻗어 나가다가 그 끝자락에 나지막한 아북산(衙 北山)과 아동산(衙東山 혹은 舞鳳山)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두 산 사이가 곧 옛 밀양읍성터다. 그같은 내맥의 출중함을 잘 보필해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시기(市基)의 좌우측을 겹겹이 두르고 있는 강줄기와 산줄기다. 먼저 밀양강과 감천(甘川)이 북쪽을 제외한 3면을 에돌아 흐르니 주맥의 기운이 새어 나갈 틈이 전혀 없다. 게다가 동쪽으로는 낙화산(落花山).비학산(飛 鶴山).용두산.자씨산(慈氏山) 등이 외벽을 이루고 있고, 또한 서쪽으로는 고암산(高岩山).우령산(牛齡山).종남산 등이 내벽을, 열왕산(烈旺山).영취 산(靈鷲山).덕암산(德岩山) 등으로 이어지는 지맥이 외벽을 이루고 있다. 강과 산이 그같이 이중, 삼중으로 명당판국을 위호해 주고 있는 땅, 그런 내기불설(內氣不洩)의 천혜 명기가 곧 밀양인 것이다.

필자가 그토록 밀양을 좋은 터로 얘기하는 것은 그곳을 답사하면서 여전 히 살아있는 산수의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밀양은 분명 도시화 가정을 겪고 있는 비슷한 규모의 다른 중소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 어떤 기운 을 지니고 있다. 물론 밀양강 상류의 여러골짝으로부터 사시사철 맑은 물 이 명당수로 유입되고 있고, 또한 서쪽과 남쪽으로 넓은 들판이 끝없이 열 려 있어 밀양시역(市域)내에 악기(惡氣)가 머무를 여지는 전혀 없어 보인 다. 그러나 터 자체가 지닌 그같은 풍수역량도 알고 보면 인간이 땅과 조 화를 이루려고 노력할 때에 비로소 그 생명력이 지속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일제시대때 밀양에서 있었던 땅과 관련된 두 가지의 사건 (?)이 우리들의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그 하나는 철도 부설에 관한 문제 였고, 또다른 하나는 보(洑)와 수로를 만든 일이었다. 일제는 원래 밀양읍 성의 바로 북쪽에 있는 교동(校洞)에 경부선 밀양역사(驛舍)와 경전선 지 선(支線)역을 세우기로 계획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밀양유림의 압력으로 밀양역사가 성내(城內)지역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현재의 가곡동에 세원 진 것은 물론 경부선 철도도 추화산 동쪽의 밀양 강변을 따라 우회할 수 밖에 없었으며, 경전선 지선역은 아예 밀양의 끝인 삼랑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요즘 여러 도시에서 철도가 도시지역을 양분하고 있기 때문에 도시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을 이설해야 한다는 주장이 심삼 찮게 나오고 있는 실정이고 보면, 옛 밀양 조상들의 그같은 명당판국 보존 노력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셈이다.

용두산 기슭에 있는 지금의 용두보는 1905년에 만들어졌으며, 원래는 그 것을 만든 마쓰시다 데이지로라는 일본인의 이름을 따 송하보(松下洑)라 불리던 보였다. 그런데 그 보를 만들게 된 계기가 무척 흥미롭다. 경부선 철로부설공사를 위해 밀양에 들렀던 마쓰시다씨가 불모지나 다름없는 수백 ha의 상남(上南)들을 옥토로 만들기 위해 송하보에 대한 착상을 하게 됐다 는 것이다. 어쨌든 용두산 터널을 통과한 물이 가곡동의 긴 도수로를 거쳐 다시 예림교(禮林橋) 부근 밀양강 하상 밑 지하관을 통해 도합 1천177m의 긴 수로를 통과하게 되면서 상남들은 천수답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지금도 상남들은 그 도수로를 통해 농업용수를 공급받고 있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땅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며, 또한 그 상태를 직시할 줄 아는 안목이 언 제나 좋은 땅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깨침을 얻게 된다.

조선초에 어떤 학자는 "큰 강이 비껴 흐르고, 널려 있는 봉우리가 3면에 겹겹이 에워싸고 있고, 넓은 들이 아득하고 평평하기가 바둑판 같은데, 큰 숲이 그 가운데에 무성하여, 흐리고 맑고 아침해 뜨고 저무는 사시의 경치 가 무궁해서, 시로는 다 기록할 수 없고, 그림으로도 다 그려낼 수 없으니, 남방 산수의 신령한 기운이 밀양에 다 모여 있구나"하고 밀양 명기를 예 찬한 바 있다.

강과 산, 그리고 들과 숲이 밀양 명기의 기운을 낳는 모태가 되고 있음 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영남루에서 바라보이는 밀양시가의 오늘의 모습은 결코 예전과 같지 않다. 농지로 얼 마든지 이용될 수 있는 땅에 마구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는 것도 안타깝거 니와 우후죽순처럼 솟은 고층아파트들이 시야를 가려 주변 자연경관을 제 대로 조망할 수 없는 것도 무척 아쉽다. 이대로 가다가는 밀양은 영남의 명기라는 옛 영화를 뒤로한 채 무색무취의 특징없는 도시로 전락될 게 뻔 하다. 그리고 언젠가는 종남산이나 용두산과 같은 산이름을 형식적으로 내 세우면서 밀양을 무의미하게 상징해야만 하는 서글픈 날이 올지도 모를 일 이다.

"영남루의 경치가 좋아 13도 건달이 다 모여든다"고까지 했던 '밀양아리 랑'의 가사가 무색할 정도로 그 전망이 형편없이 변해버린 지금의 영남루 가 그런 사실을 충분히 예견해 주고 있지 않는가. 밀양을 영원한 '미르'의 땅으로 유지시키는 비결은 오로지 절제된 토지이용을 하는 길 뿐이다. 밀 양은 여느 대도시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 고유의 향기를 지니는 것이 곧 21세기가 지향하는 우리사회의 도시상(像)이기 때문이다.

풍수학자.지리학박사

출처 : 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
글쓴이 : 초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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