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연구논문및사례

[스크랩] [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 19] 군위 불로리

장안봉(微山) 2013. 11. 25. 22:50
[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 19] 군위 불로리

군위군 효령면 불로리(不老里)는 전통마을이자 풍수적으로도 매우 흥미 로운 마을이다. 그런데도 그곳을 다녀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별 로 볼 것이 없는 마을이라고 얘기한다. 심지어는 마을 사람들조차 몇몇 부 자(富者)들이 덩그렇게 지어놓은 전통 기와집을 빼고는 크게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 할 정도다. 마을의 풍수 내력에 대한 몰이해는 그렇다치더라도 산과 강과 들판이 그토록 잘 짜여진 삶터도 드물건만 농업이 경시되는 사 회풍조 탓인지, 아니면 그 마을에서 큰 인물이 배출되지 않은 탓인지 방문 객이든 거주자든 간에 그 모두가 마을 터의 조화로움을 올바르게 읽지 못 하고 있는 것이다.

불로리는 비록 마을이 들어앉은 국(局)은 협소하지만 주변 산수지세의 배합은 빼어나다. 칠곡 가산(架山)의 한 지맥이 줄곧 북쪽으로 달려와 마 을 뒤에 적라산(赤羅山)을 솟구쳐 놓았고, 한들(大坪)너머 동쪽으로는 신 녕 화산(華山 혹은 花山)에서 서북쪽으로 뻗어오던 산줄기가 그 끝맺음을 하면서 일궈놓은 매봉산(梅峰山)과 박타산(博陀山)이 적라산에 조응한다. 마을 바로 남쪽에는 오봉산(五峰山) 줄기가, 그리고 그 너머로는 응봉산( 鷹峰山) 줄기가 각각 서에서 동으로 비스듬히 내리뻗으면서 조안(朝案)을 이루고 있다. 게다가 멀리 남쪽에서 사창천(沙滄川)을 합수하여 북류해오 는 남천(南川)은 남강교(南崗橋) 부근에서 마을 앞을 빠져나가는 계류수와 합친 후 한들 북쪽에서 위천(渭川)으로 이어지는데, 마을의 동쪽을 항상 맑은 물이 흐르면서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는 셈이어서 수세(水勢) 또한 길격(吉格)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불로리의 풍수 백미는 역시 그 내맥(來脈)의 출중 함이라 할 수 있다. 마을 건너 오봉산 자락에 올라 주산(主山)의 내맥과 그 앞쪽의 혈장(穴場) 전개 형상을 한번 살펴보라. 적라산의 주맥(主脈)이 좌우로 버팀목역할을 해주는 지각(支脚)의 도움을 받으면서 여러 마디(節) 를 이루고 내려오다가 주산에 이르러 팔을 벌리면서 그 앞쪽에 또다시 현 무정(玄武頂)을 솟구쳐 놓았다. 주산 봉우리가 좀 더 힘차게 솟지 못한 것 이 다소 흠이기는 하지만 마을이 위치한 혈장 바로 후면에 그같은 현무정 이 있다는 것은 불로리 마을터의 위상을 높이기에 충분하다. 더구나 왼쪽 으로 길게 뻗어내려간 산줄기가 오봉산 끝자락과 더불어 마을 입구를 적당 히 관쇠(關鎖)해주어 바깥에서는 마을 안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심리적 인 안정감을 얻기에도 적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마을에 입향한 행주은씨(幸州殷氏)와 김해김씨(金 海金氏)들은 마을터의 동쪽이 허하다 하여 이른바 지기허결처(地氣虛缺處) 를 비보(裨補)하기 위한 방책으로 식수(植樹)를 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지금도 동네 어귀를 지키고 있는 조산(造山)나무다.

그러나 불로리 선조들이 애지중지하면서 가꾸어 왔던 그 삶터도 일제시 대에 와서 큰 상처를 입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제가 현무정 바로 아래쪽 내룡(來龍)이 입수(入首)하는 지점에 금광을 개발한답시고 30여m에 달하는 굴길을 뚫었기 때문이다. 강권에 못이겨 벙어리 냉가슴 앓듯하다가 해방 후에 굴 안쪽은 그대로 둔 채 그 입구만 대충 메우고 말았다고 하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역사야 어찌할 수 없다지만 6.25때 파손된 후 중건됐다는 경모재 (敬慕齋) 대청에서 필자는 은씨 후손으로부터 또다른 놀라운 얘기를 듣게되었다. 언젠가 불로리를 찾은 일본의 와세다 대학 교수가 경모재 터를 만 약 묘터로 썼더라면 은씨 가문에서 문무를 겸비한 훌륭한 인물이 날 뿐만 아니라, 부(富)도 보장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주산의 내맥과 시계(視界)를 동시에 고려하여 집을 동남향으로 앉힌 점 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필자로서는 그야말로 아연실색할 노릇이었다. 설사 판국(版局)상 집터보다 묘터에 더 적합한 땅이었다 할지라도 이미 마을이 들어서 있고, 더구나 복원된 재실을 두고 학자로서 어떻게 그런 망발을 할 수 있다는 말이던가. 그 여파는 후손들로 하여금 "증조할아버지께서 집을 짓는 바람에..."라는 식의, 이른바 증명불가능한 '풍수적인 탓의 문화'를 잉태하기에 딱 알맞다.

그런 망발은 알고 보면 불로리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풍수 형국론에 얽힌 두 가지 얘기보다도 훨씬 더 나쁘다. 너른 들판을 끼고 있어서인지 불로리의 풍수형국론은 모두 부유해지는 것과 연관돼 있다.

그 하나는 불로리가 와우형(臥牛形)에 적초안(積草案)을 갖춘 지세이기 때문에 부자가 날 수 있다는 얘기인데, 사람에 따라 적라산과 박타산을, 혹은 마을 바로 뒷산과 오봉산 끝자락을 각각 누운 소와 먹는 꼴로 비유하 지만 그것은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삶터라는 것이 생활기반을 마련해주는 것에 덧붙여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는 형이상학적이면서도 심미(審美)적인 차원을 지니는 것이 바 람직하다면 주변의 자연요소들을 그같은 풍수적인 방법으로 마음에 끌어들 이는 것도 그다지 나쁠게 없기 때문이다.

또다른 하나는 승지곡(承旨谷)의 홍판교(洪判校) 집터에 얽힌 얘기이다. 제비집혈(연소혈.燕巢穴)의 집터에 살던 홍 부자가 워낙 손님들과 시주를 구하는 스님들이 많이 찾아오자 그 접대를 피하기 위해 인각사 도승의 자 문을 구하게 되었는데, 집을 마주 바라보면서 날아오는 제비의 눈에 해당 하는 박타산 암벽에다 미륵불상을 조각케 함으로써 결국은 집안이 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장을 답사하여 그 집터가 연소혈이 될 수 없음은 확인했지만 적선(積 善)과 적덕(積德)을 강조한 그런 유(類)의 얘기가 조선시대 풍수의 주류였 던 점을 감안하면 전혀 이해못해 줄 바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불로리는 분명 큰 마을도 아니요, 그렇다고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마을 도 아니다. 반촌(班村)으로서 갖춰야 할 서원이나 정자같은 것도 없으며 마을터마저 비좁아 처음 방문하는 사람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답답함을 불 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같은 양식이 바로 우리나라 전통 촌락의 일반적인 입지형태이 다. 자연의 지세에 순응하면서 배수가 양호한 산자락에 마을 터를 잡고, 생산의 터전인 들판은 보존한다. 마을 주변의 산과 강, 이산과 저산들은 풍수철학적 차원에서 하나의 범주로 연계되며, 그것은 곧 조산나무를 심는 것과 같은 실천적 환경행태로 이어진다. 우리는 불로리의 생활공간에 침전 돼 있는 선조들의 그같은 전통적인 세계관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마을 어귀에서부터 분묘를 먼저 봐야 하고, 또한 한옥들을 무색 케 하는 현대식 건물을 마을 한가운데에서 봐야 하는 것도 모두 그같은 세 계관을 제대로 읽지 못한 탓이 아니겠는가.

전통을 포기하거나 파괴하기는 쉬워도 그것을 원상복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제 우리는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풍수학자.지리학박사

출처 : 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
글쓴이 : 초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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