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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 16] 의성 점곡 | ||||
풍수를 우리 한민족의 자연을 해석하는 자연관(自然觀)이자, 삶터 자연 을 가꾸고 다듬는데 유익하게 활용됐던 일종의 생활 지리철학이라 정의(定 義)한다면, 그런 정의를 공간적으로 잘 함축하고 있는 지역이 한 군데 있 다.
의성군(義城郡)의 북부에 위치한 점곡면(點谷面)이 바로 그곳이다. 높이 200-500m의 구릉성 산지들이 남쪽과 북쪽에 각각 연이어 솟아 있고, 그 사 이에 동서(東西)로 긴 골짜기를 이루고 있는 점곡은, 얼핏 봐서는 이 땅의 여느 골짜기와 별반 다를게 없어 보인다. 그러나 점곡이라 할 때의 점(點) 이 곧 증자(曾子)의 부친 증점(曾點)의 점자(字)를 따온 것이고, 더구나 점곡의 곡저평야를 따라 동에서 서로 흐르는 미천(眉川)을 예전에는 증자 의 시구(詩句), 즉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바람을 쏘이다"라고 한 구절에 서 기(沂)자를 따와 기천(沂川)이라 부른 것을 보면, 벌써 지명 자체에서 부터 점곡은 영남의 전통있는 유향(儒鄕)임을 직감케 한다. 점곡(오늘날 沙村里의 원래 명칭)의 지세는 마을 남쪽의 병봉(丙峰)에서 한눈에 조망된다. 기천 북녘의 기름진 들판 너머로 바라보이는 마을 뒤쪽 에 올록볼록 솟은 산봉우리들은 비록 크게 높지는 않지만 그 하나하나가 영기(靈氣)로 뭉쳐진 옹찬 봉우리들이다. 마치 상여(喪輿)모양과 흡사하다 하여 생이봉(生峰)이라 이름붙여진 마을의 종산(宗山)이 북쪽 가장 높은 곳에서 하늘금을 이루고 있고, 그 앞쪽으로 뒷뫼와 주산(主山)인 자하산 (紫霞山),그리고 기령산(寄靈山)이 한 몸체안에서 병립해 있는 가운데, 동 쪽으로는 달봉산이, 그리고 서쪽으로는 진산(鎭山)인 매봉산(鷹峰)이 각각 주산을 위호하고 있다. 보국(保局)을 이루는 용세(龍勢)는 북의 주산쪽에서 남쪽을 바라볼때 그 절정에 달한다. 서쪽에서 10리 장벽(長壁) 건마산(乾馬山)이 미천을 거슬 러 역세(逆勢)로 달려오고 있고, 거기에 응해 동쪽에는 병봉이 아름답게 솟구쳐 있다. 그 사이로 60리 남쪽에 있는 금성산(金城山)이 아련히 눈에 들어오니 그 또한 사촌(沙村)의 아름다운 안산(案山)이 된다. 그 뿐만이아 니다. 명당판 위쪽에서는 걸마천(乞馬川)과 이수천(伊水川)이, 그리고 아 래쪽에서는 대곡천(大谷川)과 옥곡천(玉谷川)이 각각 남북으로 대대(對待) 를 이루며 미천에 합류하니, 사촌은 그야말로 사방의 산과 물이 그곳으로 집중되는 명기(明基) 중의 명기에 다름아닌 것이다. 하지만 알고보면 과거(科擧)에 급제한 사람의 수가 많다는 사실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점곡에 터잡은 여러 가문의 수많은 은사(隱士)들이 열성껏 삶터를 가꾸고, 후진을 양성하고, 이재민을 구휼하고, 국난기에는 의병을 일으키는 데 앞장섰으니 점곡의 지령과 혼연일체가 된 바로 그같은 선비정신의 현시(顯示)적인 발로가 곧 점곡 풍수의 백미가 아니었겠는가. 혹자는 세명의 정승이 난다는 안동김씨 사촌파의 종택인 만취당(晩翠堂) 과, 그 외손(外孫)인 서애 유성룡의 탄생지로 신비화돼 있는 서림에 더 많은 관심을 둘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걸출한 인물이 등장하면 으레 그와 관련된 온갖 풍수설이 난무하게 마련이지만, 사실상 그런 식의 의미 부여와 해석들은 한국풍수의 과학화를 위해서 반드시 시정돼야만한다는 것 이 필자의 평소 지론이다. 서림은 무엇보다도 사촌이 길지(吉地) 반촌으로서의 위의를 갖추고 또한 서쪽의 긴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공간적으로 개발된 매우 합리적이면서도 과학적인 풍수 비보숲으로 먼저 이해돼야만 한다. 더구나 만취당은 그 중수기(重修記)에 기록돼 있는 바, 비가 많이 오면 마루 밑에 서 물이 솟아날 정도여서 썩고 좀먹은 기둥과 서까래들을 자주 개체(改替) 해야만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객관적으로 그렇게 좋은 집터는 아닌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옳다. 발복을 희구하는 인간의 이기적인 심리에서 비롯된 가당찮은 풍수 의미 부여가 어찌 터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능력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말이던가. '만취당기(記)' 라는 소설에, 그 집에서 태어난 아들이 행정고시에 합격 하자 그 아버지의 말인즉, 총리나 장관이 되면 그것이 곧 정승이 되는 것 이나 다름없다고 얘기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같은 얼풍수적인 사고방식 이 비단 소설에 그치지 않고, 아직도 우리 사회에 현실적으로 만연해 있다 는 것이 실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런 선입견 탓인지는 몰라도 병봉에 올라 사촌리를 내려다보는데 유독 두 지물(地物)에서 쉽게 눈길이 떼지지 않는다. 물론 그 하나는 관념적인 이미지보다는 실용적인 이미지가 훨씬 더 강하게 느껴지는 서림 비보숲이 고, 또다른 하나는3정승 배태의 인위적인 풍수관념이 설정돼 있는 만취당 이다. 아마도 이기적인 발복 속신으로 인해 타락할대로 타락한 작금의 풍수세 태를 걱정하다보니, 저절로 그같이 대비(對比)되는 지물이 미래의 한국풍 수가 나아가야 할 진로를 판단하는 상반된 준거(準據)로서 필자의 눈길을 잡아끈 때문이리라.풍수학자.지리학 박사
건마산 동쪽 끝자락에서 사촌리를 바라본 모습. 중앙의 마을 뒤 멀리 생 이봉이 하늘금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그 앞쪽으로 자하산과 기령산, 그리 고 달봉산의 지맥이 내려와 있다. 오른쪽 앞으로 일부 보이는 산자락이 병 봉이고, 왼쪽 앞으로 우뚝 솟은 봉우리가 매봉산이며, 점선 안의 숲이 바 로 그 유명한 서림이다. 만취당 서쪽 담장 밖에서 남쪽을 바라본 모습. 처마끝 아래로 안산을 이 루는 병봉이 보인다. 세명의 정승이 태어난다는 인위적인 풍수관념이 설정 돼 있기는 하지만, 객관적인 판단으로는 결코 좋은 집터가 아니다. 그토록 맑고 밝은 터전을 어찌 사람들이 일찍부터 거주지로 삼지 않았으 랴만은 점곡이 일개 무명의 산간촌락에서 이름난 유향으로 거듭나게 된 데 는 조선조개국연도인 1392년에 지금의 안동김씨 사촌파가 안동 회곡(檜谷) 에서 이곳으로 이주, 조기(肇基)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사진 촌(沙眞村)을 본떠, 마을 이름을 사촌이라 새로이 명명하고, 서당과 정자 같은 건물이 세워지면서 사촌은 서서히 반촌(班村)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 기 시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더구나 입향과 동시에 지형적으로 서쪽이 허하면 인물이 나지 않는다는 풍수설에 따라 마을 서쪽의 매봉산자락 와구 (瓦丘)에서부터 남쪽으로 길이 약 600m, 폭 40m에 달하는 서림(西林)이라 는 비보수(裨補藪)를 조성한 후, 연년이 심고 가꾸어 왔으니 600여년이 지 난 지금도 그 숲은 사촌 조상들의 숨결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울창함을 자 랑하고 있다. 그러나 점곡의 풍수 백미(白眉)는 기실 다른 점에 있다고 해도 결코 과 언이 아니다. "어질고 두터운 풍속이 있는 마을이 아름다우니, 그런 마을 을 가려서 살지 아니하면 그 옳고 그름의 본심을 잃어서 슬기롭게 되지 못 한다"는 옛말이 있듯이, 점곡 일대는 명망있는 안동김문에 이어 의성김씨, 안동 권씨, 반남박씨, 영양남씨, 창녕조씨 등과 같은 명문가들이 잇따라 입향하게 되면서 많은 뛰어난 인재들이 배출된다. 그 원동력은 과연 무엇 이었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명문가들 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의의 경쟁이 가장 큰 역할을 해주었을 성싶다. 그렇다고 점곡의 지령(地靈)과 풍수가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우선 점곡에 있는 산봉우리들 과 계류수 하나 하나가 제각기 다른 고유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실에 한 번 주목해보라. 그것은 곧 점곡내에서 성씨별로 주거지가 확대돼 가면서 각각의 가문이 그들 자신의 삶터를 의도적으로 명당화하려고 무척 애썼다 는 것을 암시한다. 하기야 예로부터 '인걸은 지령이다'라고 했으니, 양택(陽宅)입지 조건에 서부터 한 수 꺾이고 들어가면 아예 심리적으로 풀이 죽어 제대로 경쟁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인즉, 그것이 그저 단순한 형이상학적인 풍수 의미부여 였든 어쨌든간에 자연히 개기(開基)할 터에 대해 그만큼 더 신경을 쓸 수 밖에 없었던 것도 틀림없다. 바로 그런 연유로,비록 사촌의 안동김씨가 자 하산과 병봉을 주안(主山과 案山)으로 삼았다고는 하지만, 중리(中里)의 의성김씨는 매봉산과 건마산을, 월촌(月村)의 안동권씨는 달봉산과 병봉 을, 단의실(丹儀 혹은 丹厓)의 반남박씨는 단산(丹山)과 청학산 덕봉(靑鶴 山 德峰)이라는, 각기 다른 산들을 주안으로 삼은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단의실은 사촌리와 비슷하게 마을 서쪽에 비보수를 조 성하였으면서도, 마을 앞을 흐르는 미천을 금포(錦浦)라 별칭함으로써 독 자적인 풍수 영역을 구축하고자 한 의도를 강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미천 북쪽 월촌에서 이거(移居)한 영양남씨들의 세거지인 윤이실(尹伊谷 혹은 尹岩)의 경우는 또 어떠한가. 평소에 중국의 옛 성현 이윤(伊尹)과 이천 (伊川)을 흠모한 나머지 마을 이름을 윤이실이라 짓고, 마을 앞을 굽이쳐 흐르는 미천의 지류를 이수천(伊水川)이라 명명한 것은 물론, 휑하게 열려 있는 마을 북쪽이 허전하다 하여 동서로 300m에 달하는 비보수를 만들어 마을터의 위의(威儀)를 진작시켰다. 바로 그 작은 마을에서 대과(大科)에 8명, 소과(小科)에 5명의 급제자가 나왔다고 전해오니, 사촌리 안동김문의 대과 13명, 소과 28명의 배출에 비 해 전혀 손색이 없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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