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몽일의 영남 신풍수기행 . 17] 구미 오태리 | ||||
자고로 빼어난 지세를 갖춘 명기(明基)라면 으레 그곳에는 양.음택(陽. 陰宅) 명당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돼 지어낸 온갖 풍수설이 전해져 오게 마련이다. 하기야 우리나라 전통 풍수론이 터의 명당성과 인간사(事) 의 길흉을,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인과(因果)관계가 있는 것으로 인식 해 온 이상 이 땅의 터라는 터는 거의가 풍수적인 얘깃거리를 지닐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같은 풍수설의 대부분이 터 자체를 직 시하는 자연과학적인 내용이 아니라 발복(發福) 중심의 인문과학적인 성격 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수백년 된 조상묘의 봉분이 허물어지지 않 고, 또 잔디도 잘 자란다면 그 터는 두말할 나위 없이 터로서의 기본 요건 을 훌륭히 충족시켜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후손들의 잘 되고 못됨을 가지고 그 터의 명당성을 판별하려 드니 실로 기가 막힐 노릇인 것 이다.
구미시(龜尾市)의 남쪽 끝에 위치한 오태리(吳太里) 역시 그 훌륭한 지 세에 걸맞게 다양한 풍수설을 담고 있는 마을이다. 가히 풍수향(風水鄕)이 라 일컬을 수 있을 만큼 오랜 세월동안 마을의 역사가 갖가지 풍수설로 점 철돼 왔으니, 전통 풍수의 허(虛)와 실(實)을 살펴보기에는 더없는 적격의 장소인 셈이다. 오태리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는가 하는 것은 정확히 알 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조선초에 나라에서 국풍(國風)을 파견하여 마을 뒷산에다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묘소를 터잡으면서부터 그곳이 풍수적 으로 세인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만은 분명하다. 더구나 음택과 양기(陽 基)는 어디까지나 명당 판국(版局)의 크기에서 차이가 날 뿐이고 적용되는 원리는 같으므로, 일단 국풍이 묘터를 잡은 곳이라면 그 아래의 국(局)이 비록 마을이 들어서기에 협소하다 할지라도 여러 명문가들이 세거지(世居 地)로서 눈독을 들였을 법하다. 아닌게 아니라 후일 벽진이씨(碧珍李氏) 감무공파(監務公派)와 인동장씨 (仁同張氏) 남산파(南山派)의 일부가 오태리를 세거지로 정하고, 또 야은 의 묘소에 뒤이어 감무공파의 분파조(祖) 이수지(李粹之)와 여헌(旅軒) 장 현광(張顯光)이 다같이 나월봉(蘿月峰) 자락에 자신들의 유택(幽宅)을 마 련함으로써 오태리는 이른바 3선생의 묘가 터잡은 더없는 길지로 알려지게 된다. 이를테면 음택명당이 양기명당을 낳고, 또 그 양기명당이 음택명당 과 양택명당을 낳는 순환고리 속에서 오태리의 풍수일화도 그만큼 더 다양 하면서도 풍부한 내용으로 꾸며지게 된 것이다. 어쨌든 현재의 오태리에 실존하는 경관(景觀)을 중심으로 하여 그런 일 화들을 재검토하면서 풍수지리의 참된 가치를 한번 되새겨 보도록 하자. 먼저 오태리의 전체적인 자연지세를 살펴보면 그 내맥(來脈)은 명산 금 오산(金烏山)에서 비롯되었으며, 마을 앞 동쪽으로는 낙동강이 유유히 흘 러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길지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금 오산 주령(主嶺)에서 이어져 내려온 효자봉(孝子峰) 능선의 한 지맥이 남 동쪽으로 꿈틀거리며 내려오다가 오태마을 뒤에 나월봉에 솟구쳐 놓았는데, 그 나월봉의 지맥이 서쪽에서 북쪽으로 걸쳐 왼편은 길게 감아돌고, 오른 편은 짧게 매듭지어진 가운데 그 사이로 당산(堂山) 줄기가 뻗어나와 있다. 예부터 그런 지세를 마치 금계(金鷄)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抱卵形)과 같다고 얘기하지만, 만약에 지금처럼 남구미 인터체인지에서 시내로 들어 오는 진입로를 만들기 위해 낙동강변에 제방을 쌓지 않았다면, 마을 자체 가 낙동강물의 공격사면(혹은 침식사면)에 놓여 있어 예전처럼 마을 턱밑 까지 범람하는 위험을 여러 번 겪어야만 했을 것이다. 더구나 공단 유수지를 만들면서 샛강 너머로 둑을 쌓은 후 그 위에 나무 를 심어 수구(水口)를 적당히 관쇄(關鎖)시킨 것은 그야말로 오태마을의 복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원래는 풍수와 무관하게 둑 위에 나 지막하면서 길다란 숲을 조성하여 마을 앞을 가린 것 같은데, 그 과정이야 어떻든 그 결과가 허결처(虛缺處)를 보완하는 풍수 비보숲과 다름없는 역 할을 하고 있으니, 우연치고는 실로 공교롭기 그지없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어찌 그같은 사실이 세속적인 풍수 관심사가 될 수 있으랴. 오태 마을의 경관 구성요소 중에서 뭇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것은 야은의 묘소와 창랑(滄浪) 장택상(張澤相)의 생가터라는것을 필자도 익히 알고 있다. 야은의 묘소는 금계포란 지세의 알(卵)이 놓인 자리에 해당하는 혈처(穴 處)로 알려져 있는데, 그에 못지 않게 빼어난 점이 바로 서남간에서 동북 간을 향한 안대(案對)이다. 야은의 묘소에 앉아 앞쪽을 한번 바라보라. 본신룡(本身龍)에서 왼쪽으 로 길게 감아돌아 내려간 나월봉의 동쪽 끝자락이 안산(案山)을 이루고, 낙동강 너머 멀리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천생산(天生山) 줄기와 그 뒤쪽 능선이 조산(朝山)을 이루고 있다. 게다가 묘소에서 낙동강물이 흘러 들어 오는 것은 보이지만 나가는 것은 보이지 않으니 그 또한 길격(吉格)이다. 내맥의 향(向)과 일치하면서도 산수(山水)와 조안(朝案)이 그토록 조화 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 곳은 전국적으로 찾아보기 힘들거니와, 그것은 묘 터 자체에서 느껴지는 토기(土氣)의 후덕함과 더불어 야은의 묘소를 더없 는 명당으로 격상시킨다. 하지만 그 터가 본래부터 지닌 그같은 객관적인 빼어남을 도외시한 채, 닭이 알을 품으면 21일이 되어야 부화된다는 점에 착안하여, 야은의 후손 들은 21대가 지나야 자손이 크게 번창하여 부귀현달할 자가 많이 나올 것 이라고 한 전설같은 얘기는 역시 우리나라 전통풍수의 한 난맥상을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창랑의 생가터에 대한 풍수설은 또 어떠한가. 집터가 오태마을 내에서도 나월봉 능선이 왼쪽으로 감아도는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보니, "금오산의 아래에 있지만 금오산이 보이지 않고(烏山之下 不見烏山), 낙동 강이 바로 곁에 있지만 강물이 보이지 않는다(洛江之邊 不見洛水)"고 한 것까지는 물론 옳은 표현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명당터였기에 몇 대에 걸 쳐 큰 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고 떠들어대다가, 막상 그 집안이 몰락하자 태도가 돌변하여 이제는 "집터의 기운이 약해 여자들만 살아야 할 집"이라 고 망발을 한 풍수가들도 있었으니, 인생의 부침(浮沈)을 오로지 풍수 잣 대 하나로만 해석하려 드는 그런 어리석은 사고방식은 이제는 우리네 풍수 학에서 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터 자체보다는 사람의 길흉사를 우선해서 생각하는 그같은 발복풍수론적 인 의식을 버리고 마을내의 어느 곳에서든 한참동안 앉아 있어 보라. 마을 앞쪽의 강변 도로에는 남구미 인터체인지에서 빠져나오는 차들이, 그리고 마을 뒤 나월봉 능선 너머의 경부고속도로 상으로도 수많은 차들이 쉴새없 이 달리지만, 마을 안은 너무나 조용하다. 더구나 공단과 마을 사이에 온 전히 버티고 있는 나월봉의 왼쪽 지맥이 오염된 대기의 마을 유입을 원천 적으로 차단시켜 주고 있기 때문에 공기도 매우 맑다. 비록 경부고속도로 가 효자봉과 나월봉을 잇는 후맥을 훼손시키면서 개설되었다고는 하지만, 만약 원래의 설계대로 고속도로가 오태마을을 관통하면서 지나갔다고 가정 하면, 그 폐해는 차치하고서라도 아예 마을 자체가 쑥밭이 돼 버렸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고 보면 오태마을 역사상 그 풍수환경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볼 수 있는 경관은 역시 마을을 비켜 간 경부고속도로가 아니겠는가. 그 계기 를놓고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알고보면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장(張) 씨 문중의 양.음택명당과 길(吉)씨 문중의 음택명당 중에 그어느 것을 고 려하여 고속도로를 우회시키도록 하명했는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 다. 오히려 그 내면에 깔려 있는, 좋은 터를 아끼고 보전할 줄아는, 그런 정신 자세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그 역사적인 관심사야 어떠했든 간에 현대에 와서 오태리의 삶터 환경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풍수 덕분이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음택명당에 초점을 맞추어 오태리를 이해 하려 든다. 전국적으로 풍수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오태리를 답사하면 기껏 해야 야은 선생의 묘터를 둘러보는 것이 전부이고, 더구나 최근에는 3선생 의 묘역을 능가하는 초호화 분묘가 마을 뒷산에 버젓이 들어서서 보는 이 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다. 오태리는 분명 풍수적으로 여러가지 교 훈을 담고 있는 공간이다. 다만 우리가 얼마만큼 이기적인 발복풍수에서 벗어나 그런 교훈을 후손들에게 전승시켜 줄 값진 환경이론으로 개발하느 냐 하는 과제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유택을 마련하는 일은 결코 삶터 환경 을 개선시키는 일에 우선될 수 없다. 풍수학자.지리학 박사 |
'풍수지리연구논문및사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 19] 군위 불로리 (0) | 2013.11.25 |
|---|---|
| [스크랩] [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 18] 청송 감람묘 (0) | 2013.11.25 |
| [스크랩] [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 16] 의성 점곡 (0) | 2013.11.25 |
| [스크랩] 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15] 청도 주구산 (0) | 2013.11.25 |
| [스크랩] [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 14] 군위 옥녀봉 (0) | 2013.11.2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