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연구논문및사례

[스크랩] [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 13] 선산읍기

장안봉(微山) 2013. 11. 25. 22:47
[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 13] 선산읍기

구미시 선산읍기(善山邑基)는 역사와 시대를 초월하여 풍수의 여러가지 멋을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대체로 역사가 오래된 고을치고 어떤 면으로 든 풍수와 관련 안된 곳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이 땅에서 국도(國都)였던 서울(漢陽)을 제외하고는 선산읍기만큼 다양한 풍수 주제(主題)를 담고 있 는 공간도 드물 것이다. 예컨대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朝鮮人才 半在嶺南),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嶺南人才 半在一善)"고 한 인걸 지령론(人傑地靈論)적 말이라든가, 혹은 "임진왜란 때 명군(明軍)을 따라 온 술사(術士)가 조선에 큰 인물이 많이 나는 것을 시기한 나머지 군사를 시켜 선산읍의 후맥(後脈)을 끊어 불타는 숯으로 지지고, 또 큰 쇠못을 박 아 명산 정기를 눌러버린 뒤로는 더이상 인재가 나지 않는다"고 한 단맥 (斷脈)풍수론적 말 등이 곧 선산을 상징하는 풍수 어록이 되다시피하여 오 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러나 그런 말들은 선산읍기의 풍수적 실체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 이 되지 않는다. 알고보면 보다 흥미로우면서도 삶터 환경에 대한 지혜가 번뜩이는 풍수적인 내용들이 읍터 곳곳에 스며있는 것이다. 선산읍기는 멀 리 속리산으로부터 상주의 갑장산을 거친 한 지맥이 읍기 후면에 마치 봉 황이 날아오르는 형상과 같은 맑고 반듯한 길격(吉格)의 지세를 솟구쳐 놓 은 가운데, 그 앞쪽으로 감천(甘川)과 낙동강을 낀 기름진 선산들(野)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비봉산(飛鳳山)은 북쪽에서, 금오산은 남쪽에서 안을 지키고 서출동류(西出東流)하는 감천은 동쪽에서 낙동강과 합류하여 외부 를 지키면서 이 고을을 금성탕지(金城湯池)로 만들었다. 사방으로 산이 멀 리 있어서 해와 달, 그리고 별빛이 거리낌없이 판국(版局)을 환하게 비추 니 읍기는 언제나 밝고 깨끗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 예로부터 선산 사 람들이 죄짓는 것을 두려워하고 간사함을 멀리하면서 순박한 풍습을 지켜 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같은 지덕(地德)의 소산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 가.

선산읍기의 풍수적 중심점은 단연 비봉산이다. 주위의 산들과 지명이 모 두 주산(主山)이자 진산(鎭山)인 이 비봉산과 연관돼 있다. 그러므로 비봉 산이 없는 선산읍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들녘에서 이 산을 쳐다보 면 동쪽으로는 교리(校里) 뒷산 지맥이 왼쪽 날개를, 그리고 서쪽으로는 노상리(路上里) 뒷산 지맥이 오른쪽 날개를 각각 이루고 있다. 그 한가운 데로 봉이 머리를 쑥 내밀고 있으며, 그 부리되는 자리에 구미시 선산출장 소(옛 선산군청)가 터잡고 있다.

봉은 닭의 머리에 제비의 턱, 뱀의 목, 거북의 등, 물고기의 꼬리 등 여 러 짐승의 형상을 조합시켜 만들어 낸 상상의 새로 6척의 키에다 몸과 날 개는 오색의 빛이 찬란하고 오음(五音)의 소리를 내면서 오동나무에 깃들 이고 대의 열매를 먹으며 예천의 물을 마시며 산다는 상념적인 큰 새다.이 상서로운 신조(神鳥)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옛 선산 사람들의 노력은 실로 애틋하다 할 정도였다.

감천 너머로 보이는 물목마을 뒷산을 황산(凰山: 輿地圖書에는 浮來山) 이라 칭하여 음양의 짝을 맞춰주는 것은 물론, 들 한중간에 있는 자그마한 동산 (東山: 여지도서에는 冬至山)을 알봉이라 하여 봉황이 날아가지 않고 그알을 품어주기를 고대하였다. 그렇게 하고도 안심이 안되어 고아읍의 대 황당산(大皇堂山)을 망장산(網障山)으로 명명하면서 그물을 쳐놓기까지 하 고, 또 봉황의 풍수형국에 합치되게 많은 동네 이름들을 풍수지명 (地名) 으로 통일시켰다. 대나무를 심어 봉황이 그 열매를 먹을 수 있도록 한 죽 장리(竹杖里), 온갖 새들이 꽃밭에 모여들어 봉황을 받든다는 화조리(花鳥 里), 다른 곳의 봉황이 놀러온다는 무래리(舞來里), 오는 봉황을 맞이한다 는 영봉리(迎鳳里) 등이 모두 그런 지명들이다.

혹자는 바로 그러한 노력의 결실로 선산읍기의 지기(地氣)가 지켜졌기 때문에 그곳에서 많은 뛰어난 인재들이 배출될 수 있었다고 얘기한다. 그 러나 선산고을의 문학적 전통과 풍수, 그리고 경제력이라는 삼박자가 맞아 떨어졌기에 그런 좋은 결과가 왔다고 보는 것이 옳다. 여기에서 말하는 문 학적 전통이란 별다른 게아니라 바로 향토출신의 대학자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야은 길재(吉再), 강호 김숙자(金叔滋),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단계 하위지(河緯地) 등이 모두 선산 사람인데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돼 있는 바와 같이 벼슬길에 나갔던 사람들도 물러난 뒤에는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매진했다고 하니 그 향학열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 덧붙여 멀리 남쪽으로 바라보이는 붓끝 모양의 금오산을 필 봉(筆峰)으로 수용하면서 이름난 대문장가나 학자가 되기를 꿈꾸고, 또 남 문 밖의 연못을 의수지(衣繡池)라 이름지어 늘상 '수의사또'를 연상한 것 도 심리적으로 어느 정도는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인 영 향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는 것은 과거시험에 유달리 장원 급제자를 많이 배출한 영봉리를 고을 사람들이 장원방(壯元坊)이라 별칭하고, 또 지금의 선산여중고 뒷산 첫봉우리를 장원봉이라 이름붙인 일이라 할 것이다.

비록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하찮은 성(城) 서쪽의 영봉리를 학도들 은 아직껏 장원방이라 말한다"라고 하여 사뭇 업신여기는 투로 표현을 하 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산산고을 사람들의 삶터에 대한 자긍심이 흔들릴 리는 만무했을 것이다.

오늘날 선산읍기는 과거에 비해 많이 변모되었다. 하기야 풍수를 우리 민족이 지녔던 일종의 토지관(土地觀)이라 정의한다면, 시대와 사회가 바 뀌면서 사람들의 토지관도 변화했을 것인즉, 그에 따라 그 객체가 되는 산 천도 물리적으로 크게 변모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되는 바이 다.

그러나 선산고을 조상들이 그토록 아끼고 숭앙하던 비봉산의 머리 앞쪽 으로 1955년에 충혼탑이 들어서더니, 급기야 1982년에는 산정에다 봉기대 (鳳起臺)라는 것을 앉혀 아예 봉의 머리를 짓눌러 놓았다. 비문의 내용인 즉, "한반도 정기가 서린 선산땅, 비바람이 고르고 농민의 피땀이 맺히어 유례없는 풍작을 만나 이를 기념하고 연년세세 풍년을 기약하는 선산 풍년 제를 마련한다. 봉기대 앞에서 시작되는 이 축전은 군민의 자랑과 기쁨을 나누고 재주와 힘을 겨루는 흥겨운 행사로서 해마다 이어져 힘차고 알차며 살기좋은 고장으로 발전할 것이다"라고 돼 있다.

왜 하필이면 비봉산 꼭대기에서 풍년제를 시작해야 한다는 말인가. 일제 강점기하에서 일본이 신사(神社)를 봉의 머리부분에 세우려 할 때, 온고을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그것을 조금이라도 산 아래쪽으로 끌어내리려 애썼 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가.

선산읍기에 대한 실망은 비단 그 뿐이 아니다. 지금은 죽장사의 대나무 밭을 제외하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풍수경관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우 선 봉황이 다섯개의 알을 낳는다는 이유로 자연적인 알봉 옆에 네 개의 인 공적인 조봉(造峰)을 더 만들었다고 하는데, 1996년 경지정리를 하면서 그 아름다운 풍수경관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더구나 점필재가 조성하였다고 전해오는 감천변의 동지수(冬至藪)와 무 래수(舞來藪)역시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을 보면, 지금의 우리들은 선 조들의 이른바 자연을 위한 자연개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수컷인 봉과 암컷인 황을 위한 인공 알봉을 조성하고, 또한 감 천의 범람을 막는다는 뚜렷한 실용적인 목적이 있음에도 그것을 굳이 무 래수라 이름한 것 등은 모두 삶터 자연을 위한 비보환경책(裨補環境策)의 극치인 동시에 자연의 질서에 융화하고자 한 우리 선조들의 이상적인 환 경이념의 또다른 표출에 다름아닌 것이다.

오늘날 과학적인 세계관은 분명 우리들로 하여금 무색, 무취의 객관적이 면서도 표준화된 시각으로 자연을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바로 그점이 보 다 정감있고 특색있는 지역 고유의 풍수환경문화를 하나 둘씩 파괴시켜 나 가는 주범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봉산을 내려와 일부러 해평쪽으 로 돌아오면서 낙동강변을 따라 울창하게 우거져 있는 해평숲을 찾는다.

고려때부터 가꾸어진 숲으로 알고 있기에 볼 때마다 한결 새로운 기분이 다. 혹시 당시에 국토관리를 담당했던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의 걸 작품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부질없이 해본다.

풍수학자.지리학박사

출처 : 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
글쓴이 : 초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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