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연구논문및사례

[스크랩] [이몽일의 영남 신 풍수기행 . 10] 구미 옛 인동읍기

장안봉(微山) 2013. 11. 25. 22:46
[이몽일의 영남 신 풍수기행 . 10] 구미 옛 인동읍기

풍수에서 산을 보는 시각은 남다른 구석이 있다. 산을 용(龍)이라 하여 살아있는 생명체로 여기는 것도 그러하거니와 보통 사람들처럼 그저 높고 크면서, 기암괴석의 절경을 이루고 있는 산을 반드시 명산으로 쳐주지도 않는다. 요즘 한창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금강산(金剛山)의 경우도 예 외는 아니다. 비록 조선조 일이승(一耳僧)의 답산록(踏山錄)에서 금강산 비로봉이 상제봉조형(上帝奉朝形)의 조선 제일 갑지(甲地)로 선정된 바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명혈(明穴)의 신비성과 그 구득(求得)의 어려 움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풍수에서 말하는 명산은 오히려 그 연결성이나 공간적인 배합체계와 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가 흔히 명당으로 인식하고 있는 도읍터나 마을 터를 한번 생각해 보자. 산과 강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이른바 산래수회(山 來水廻) 또는 산돈수곡(山頓水曲)의 길지에, 마을을 지키고 보살펴주는 진 산(鎭山)과 주산(主山)을 받쳐 주는 종산(宗山)이 저 멀리 우뚝 솟아 있다. ㈀藪? 서는 안산을 의미함)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가운데 좌청룡, 우백호 지 맥이 서로 대대(對待)하면서 명당판을 감싸고 있다. 그 산들이 비록 고대 (高大)하다거나 빼어난 경치를 지닌 것은 아니지만, 어딘지 모르게 우리들 로 하여금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그 점이 곧 산을 논하 는 풍수 지세론(地勢論)의 본령이자 극미(極美)인 것이다.

구미시(龜尾市) 낙동강 동편에 있는 옛 인동읍기(仁同邑基)가 바로 그런 아름다움을 지닌 명당터다. 이미 판국 내부의 대부분 지역이 공단이나 주 택지로 개발되어 옛 자연의 모습이 온전하게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풍수 지세론의 묘미를 깨치기에는 그만한 장소도 드물 것이라는 생각이 든 다. 먼저 읍 후면을 멀리 뒤에서 받치고 있는 일자문성(一字文星)의 천생 산(天生山)에 올라 주변 일대의 용세(龍勢)를 한번 폭넓게 조망해보라. 팔 공산 서쪽 가산(架山)으로부터 줄곧 서북쪽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지맥이 고을의 진산인 유학산(游鶴山)을 일으킨 후에, 그 남은 여력을 다하여 종 산인 천생산을 솟구쳐 놓았다. 그리고 한줄기 큰 지맥의 종결처가 되는 이 천생산이 서쪽의 낙동강과 금오산을 향해 팔을 벌리고 있으니, 그 팔이 마 치 옷깃(襟)과 같고, 그 앞을 흐르는 낙동강 줄기가 허리띠(帶)와도 같다.

그러니까 그 품안에 들어앉아 있는 인동읍기는 동쪽의 천생산을 뒤로 하 고, 서쪽의 낙동강에 면해있는, 음양조화의 영락없는 산하금대(山河襟帶) 명당이다. 그런 빼어난 환포형(環抱形) 국세(局勢)에 걸맞게 맥세(脈勢)의 흐름 또한 생동감으로 넘친다. 천생산 정상에서 읍기쪽 주산을 향해 내리 뻗고 있는 산 능선을 눈여겨 내려다보라. 그 완연(완연)함이란 말 그대로 뱀이 구불구불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형상이다. 무릇 지세의 좋고 나쁨은 그 내맥(來脈)의 굽이침과 판국의 환포성 여부로 판단될 수 있는 바, 인동 읍기는 그 두 조건을 충족시키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더할 나위없이 좋 은 명당지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동읍기 명당성의 극치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은 단연 주산인 옥 산(玉山) 위에서다. 인동중학교 입구 오른편에 마치 인공으로 만든 거대한 고분같은 원형(圓形)의 자그마한 산이 하나 있다. 그 높이나 크기가 어찌 나 작은지 도저히 산으로 믿기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그 작은 봉우리가 바로 읍기의 주산인 옥산이다.

그 위에 올라가서 전후좌우를 한번 살펴보라. 비록 낮은 봉우리일지언정 그 '중심성'만큼은 확연히 느껴진다. 내.외의 용호(龍虎) 지맥이 이중으로 옥산을 감싸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지각(支脚)들이 이 옥산을 향해 공 읍(供揖)하고 있다. 옥산을 보필하는 내청룡 지맥인 남산(南山)줄기는 긴 편이지만, 내백호 지맥은 무척 짧다. 그러나 타산룡(他山龍)인 유학산에서 이어진 외청룡격의 봉두산(鳳頭山) 줄기와 본신룡(本身龍)인 천생산에서 이어진 외백호격의 황상산(凰상山) 줄기가 좌우로 길게 감아 뻗어내리면서수구(水口)를 교결관쇄(交結關쇄)하니 보국상(保局上)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 더구나 이들 내.외 용호 사이에는 명당수가 흐르고 있어서 용호지세 의 품격을 한층 더 높여준다. 그 뿐이 아니다. 옥산의 바로 뒤를 받치는 부모산 능선 너머로 마치 다락집이 치솟은 듯한 너럭바위 머리의 천생산이 몇 개의 아름다운 봉우리와 함께 가까이 우뚝 솟아있고, 또한 수구에는 3 수에서는 震.庚.亥 방위에 있는 길한 봉우리를 三吉峰이 라 하고, 艮..丙.丁.兌.辛 방위에 있는 길한 봉우리를 六秀峰이라 한다) 가 흘립(屹立)해 있으니, 인동 조상들이 옥산을 읍기의 중심되는 산으로 받든 이유를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옥산의 고결함은 그 내맥상으로도 뚜렷이 입증된다. 현재는 물론 낙맥처 (落脈處)의 중간에 주택도 들어서고 해서 지맥이 제대로 연결돼 있다고 보 기는 어렵다. 그러나 천생산 여록(餘麓)이 굴곡을 이루어 가파르게 내려오 면서 일단 그 맥이 끊어진 듯 하다가 다시 힘차에 옥산을 불쑥 솟구쳐 놓 은 것을 보면, 그 모양은 분명 부모에서 태(胎).식(息).잉(孕).육(育)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입수(入首) 형세다. 뒷산 중턱에 도도록하게 솟은 성신 (星辰)이 부모라면 옥산이 잉이 되고, 또 그 사이를 연결하는 난맥이 태라 면 옥산을 솟구치기 직전에 속기(束氣)된 잘룩목이 곧 식인 것이다.

정작 흥미로운 것은 바로 육이다. 옛 인동 사람들은 잉 아래의 혈처 (穴 處)인 육에 해당하는 곳에 지세향(地勢向)과 일치되게 향교를 서향(西向) 으로 앉혔다.그리고 수구 밖으로 멀리 바라보이는 다소 억압적인 금오산을 과거(科擧)급제를 염원하는 탕건봉(宕巾峰)으로 승화시켰다. 아닌게 아니 라 서쪽의 금오산을 바라보니 현월봉을 중심으로 한 높은 주능선과 그 앞 쪽의 낮은 효자봉 능선이 턱을 이루면서 꼭 탕건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예 전에 인동고을에서 많은 급제자가 나왔다는 얘기가전해오지만 거기에는 그 같은 지혜로운 환경심리적인 의미부여도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미루어 짐 작할 따름이다.

오늘날 인동읍기에는 옛 풍수경관(景觀)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차수설 (遮藪設)에 따라 서쪽 수구의 공허함을 비보(裨補)하기 위해 낙동강변을 따라 조성되었던 인공숲인 양정수(羊亭藪)와 황양수(黃楊藪)가 사라진지도 오래됐고, 혈처에 있던 인동향교를 낙동강변으로 이전한지도 수년이 흘렀 다. 주민들은 삶터의 역사지리적인 명당성은 고사하고 주변의 산이름 조차 도 제대로 모르는 실정이다. 하기야 희뿌연 매연 때문에 옥산에서 금오산 도 잘 보이지 않는 지경이니 어찌 주민들의 삶터에 대한 무관심만을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나마 형체라도 남아있는 옥산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는 느낌이다. 산은 크다 고 해서 반드시 명산인 것은 아니다.

일찍이 동산(東山)에 올라 노(魯)나라를 작다고 여기고, 태산(太山 또는 泰山)에 올라서는 천하를 작다고 여긴 공자(孔子)도, 말년에 집 옆의 작은 동산에 올라서는 그 산이 곧 천하 제일 명산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지 않 은가. 학생들이 옥산에서 각종 탈선행위를 한다는 이유로 그곳을 무성하게 덮고 있는 아카시아 나무들을 베내고, 또 학교.학생 정화구역이라는 경고 판만을 형식적으로 세워놓을 것이 아니다.

차라리 인동장씨(張氏) 세보(世譜)에 나오는 옥산기지도(基址圖)와 그역 사지리성을 기록한 안내판을 세워놓고 옥산을 본격적으로 성역화 (聖域化) 해 볼 일이다. 필자는 인동장씨들이 지금도 사후(死後)의 묘비에만은 반드 시 옥산장씨로 석각(石刻)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동안 신흥공업 도시의 색채만 띠었던 구미시가 시역(市域) 확장을 계기로 인동, 선산과 같은 역사가 오래된 고을들을 흡수, 병합하게 되면서 그야말로 전통과 현 대를 함께 아우르는 도시로 거듭 태어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두 가지 사실때문에 어쩌면 필자는 옛 인동고을의 정신적 상징물인 옥산의 미 래를 낙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풍수학자.지리학 박사

출처 : 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
글쓴이 : 초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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