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연구논문및사례

[스크랩] [이몽일의 영남 신 풍수기행 . 9] 성주 월항 태실터

장안봉(微山) 2013. 11. 25. 22:45
[이몽일의 영남 신 풍수기행 . 9] 성주 월항 태실터

풍수지리 비판론이라고 해서 모두 다 받아들일 만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조선왕조의 멸망과 풍수효력의 별무 신통함을 연계 시키면서 애꿎게 풍수를 공박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왕실이 더없는 길지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또 한결같이 빼어난 명당에다 왕릉과 태실(胎室)을 앉혔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왕조가 500여년만에 망하게 되었느냐는 얘 기이다.

다시 말해 그만큼 신경써서 좋은 터를 골랐다면 풍수 발복론(發福論)에 따라 왕조가 영원토록 번영을 누려야 마땅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사실 각 종 풍수서에는 말할 것도 없고 '고려사(高麗史)'나 '조선왕조실록'같은 역 사책 속의 풍수 관련 항목에도 어김없이 길흉해석이 덧붙여져 있는 실정이 고 보면, 사람들이 발복론을 풍수의 핵심되는 내용으로 착각할 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풍수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땅 바로 그 자체다. 풍수 사(風水師)들이 남듣기 좋게 입버릇처럼 말하는 형이상학적이면서도 일관 성이 없는 발복론은 실제로는 풍수 의뢰인의 심리상태를 고무시키거나 위 안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다. 땅에는 분명 좋은 땅도 있고 나쁜 땅도 있으며, 명당도 있고 흉지(凶地)도 있다. 풍수논법으로 땅이 지닌 그 런 속성을 파악하고 또 각종 용도에 적합한 터를 고르는 일은 인간이 땅에 몸을 얹어 살아가는 이상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 점이 바로 오랜 세월 동안 풍수를 존속시켜 온 근본적인 힘인 것이다.

성주군(星州郡) 월항면(月恒面)의 선석산(禪石山) 품안에 안겨있는 세종 대왕 왕자 태실터는 우리들에게 풍수의 그같은 본질적인 힘을 깨닫게 해준 다.

요컨대 조선왕조의 멸망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 터가 원래부터 지닌 명 당성은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다는 말이다. 예부터 어머니의 태반(胎盤)과 태아의 배꼽을 잇는 탯줄은 생명의 근원줄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신성하게 다루어져 왔다.

민간에서는 아기가 태어날 때 삼가른 태를 땅에 묻거나 태웠다. 주로 왕 겨 속에 묻어 태우고, 그 남은 재를 다른 사람이 안보는 새벽녘에 강에 뿌 렸다. 그렇게 해야만 아이에게 복록이 따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네 왕실에서는 왕손의 무병장수와 혈통계승을 기원한다는 명분하에 태실이라는 것을 만들기 시작했다. 더구나 풍수에 정 통한 사람을 태실증고사(證考使)로 임명한 후, 지방 각지로 파견하여 안태 (安胎)할 길지를 물색케 하였던 바, 태실터가 여간 예사로운 터가 아님은 이미 미루어 짐작되는 바이다.

비록 터 선정 과정에서 간혹 지방 사대부들이 선점(先占)하고 있었던 명 당 묘역(墓域)을 강제로 수용하는 바람에 물의를 빚기도 했지만, 적어도 태실터 자체가 풍수적으로 명당이라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이다.

왕조시대의 태실들은 마치 본원(本源)회귀라도 하려는 듯 하나같이 아기 가진 어머니 배처럼 봉곳한 돌혈처(突穴處)의 산봉우리 위에 터잡고 있다.

월항 태실지(址)도 물론 그 기본 양식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터 는 여느 태실지와는 비교가 안되는 두 가지의 뚜렷한 명당성을 지니고 있 다.

그 첫째는 판에 박은 듯한 명당 지세(地勢)다. 주산(主山)인 선석산에 올라 태봉(胎峰:후일 왕위에 오른 왕자의 태실을 흔히 태봉이라 부르는데, 이곳에는 수양대군의 태실이 있어서 그렇게 불러도 무방한 것이다)쪽을 한번 내려다 보라. 좌우로 청룡.백호 지맥이 힘차게 뻗어내린 가운데, 좌 청룡 한 줄기가 우선 태봉의 면전에 안산(案山)을 일궈놓았다.

그리고 또 다른 청룡 한 줄기는 더 멀리 달려내려 가다가 남서쪽으로 방 향을 틀어 장산(長山)과 어산(漁山)이라는 조산(朝山)을 솟구치면서 겹으 로 명당판을 감싸고 있다. 이른바 혈(穴) 전후좌우의 사(砂)가 완벽하여 내외 명당이 뚜렷하고, 용호(龍虎)마저 혈 뒤의 내산(來山)에서 양팔처럼 나온 최상의 본신(本身)용호이니, 그 형세는 더할 나위없이 좋다.

그 뿐만 아니다.주산은 좌우의 청룡, 백호 지맥으로 기운을 불어넣고 남은 여력으로 곧장 골짜기 한가운데로 또 하나의 가느다란 지맥을 뻗어내 리게 했는데, 그 여력의 최종 응집처가 바로 태봉이다. 그러기에 그 형상 은 마치 태봉이라는 뱃속의 아기가 가느다란 지맥의 탯줄과 연결되어 내명 당이라는 자궁 안에 들어앉아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더구나 탯줄 지맥 좌우로 흘러내리는 명당수는 태봉 앞에서 일차적으로 합수한 후 내명당을 빠져 나가, 안산과 조산 사이에 있는 까치마을(鵲村) 앞에서 외명당수와 이차적으로 합수한다. 그리고 또 그 물이 백호지맥 끝자락과 어산 사이의 수구(水口)를 완전히 빠져나간 후, 국(局) 밖에서 외수(外水 또는 客水)인 백천(白川)과 합류하니, 월항 태실터는 그야말로 훌륭한 지세에 못지않은 수세(水勢)도 겸비한 셈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같은 풍수전문적인 해석은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기도 힘들 뿐더러 오히려 풍수를 매우 난해한 것으로 오해하게 할 소지가 다분 히 있다. 수많은 풍수술법들도 알고보면 오직 하나의 개념을 위해 존재한 다. 그것은 기(氣)다. 기는 관심만 조금 기울이면 누구나 감지할 수 있다. 겨울철에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을 택해 월항 태실터를 한번 찾아가 보라. 밖과는 달리 내명당은 바람 한 점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안온하기 그지없다.

자연적으로 바람을 잘 갈무리하는 장풍국(藏風局)의 지세다 보니 저절로 그런 명당 위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월항 태실터가 지니고 있는 두번째 명당성이다.

풍수를 아는 사람이든 전혀 모르는 사람이든 간에 누구든지 월항태실의 지세가 좋다는 것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또한 그 터가 찬바람을 피할 수 있는 장풍 명당이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명당을 판별하는 객관적인 잣대가 엄연히 그런 점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터의 본질이 통속적인 풍수 이야깃거리로 심하게 왜곡돼 있다는 것은 실로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태봉에 조상의 뼈를 암장(暗葬)한 사람치고 잘 된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고 지역주민들이 입을 모아 얘기하는 것도 그러하거니와, 태실지로 결정되기 이전에 이미 그곳에는 성산(星山 혹은 星州) 이씨 시조 농서군공 (농西郡公) 이장경(李長庚)의 묘가 있었는데, 어쩔 수 없이 분묘를 대가면 오현(梧峴)으로 이장(移葬)한 뒤로는 가문에서 예전처럼 큰 벼슬을 한 인 물이 많이 나오지 않았다는 얘기도 무척 귀에 거슬린다.

그렇다면 앞에서 이미 언급한 내용을 역설적으로 표현해보건대 도대체 그런 길지에 태실을 쓴 조선왕실은 왜 망하게 되었다는 말인가. 더구나 세 종대왕이 아마도 그 터의 빼어남에 탄복하여 무려 적.서자(嫡.庶子) 18명 의 태실을 그 한곳에다 모으도록 한 것 같은데, 후일 왕 자리를 놓고 그들 형제간에 서로 반목질시한 사실만 보더라도 역시 모든 인간사(人間事)를 묘터 탓으로 돌리는 것은 그만큼 땅 자체를 욕되게 하는, 크게 잘못된 사 고방식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땅이 지닌 본래의 자연적인 속성은 원칙적으로는 풍수를 비롯한 인간의 그 어떤 논리에 의해서도 좌지우지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땅은 결코 거짓 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역시 인간의 논리가 문제다.

삶의 무대가 되는 터를 보살피는데 열중하는 것은 고사하고, 숫제 땅에 다 온갖 인간중심적인 논리를 공간적으로 투영시켜놓고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단방법을 총동원하여 그럴싸하게 해석한다.

풍수도 예외는 아니다. 그저 마음을 비우고 터 자체를 살피는 것만으로 도 훌륭하다할진대 굳이 말도 안되는 화복론(禍福論)을 갖다붙여서는 그야 말로 자승자박의 화(禍)를 자초한다. 그렇게 되면 본인의 양심을 속인다는 자책감에 시달릴 가능성도 충분히 있거니와, 무엇보다도 풍수논리의 과학 적인 발전과 계발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월항 태실터는 땅 자체를 직시하는 것이 곧 풍수본령이라는 중요한 가르침을 우리들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풍수학자.지리학박사

출처 : 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
글쓴이 : 초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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