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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 23] 안동 고산정사터 | ||||
안동시 남후면 광음리(光音里)에 있는 암산(岩山) 일대는 그 지세가 매 우 기이한 곳이다. 광암(廣岩)이라는 옛 지명이 시사하듯이 깎아지른 듯한 암벽이 여러 군데에 우뚝 솟아있으며, 그 사이로 맑고 깨끗한 미천(眉川) 이 여러 번 크게 굽이 돌아 흐른다. 그것은 미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서쪽 암산과 동쪽 암산의 여러 연봉(連峰)들이 연출하는 절경이다.
그렇다면 이 암산들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영천 보현산의 한 지맥이 서북쪽으로 치닫다가 의성땅 솟재(鼎嶺)에서 남북 두 줄기로 나뉘어지는데, 그 남쪽 줄기가 서쪽으로 100여리를 달려 송현(松峴:작은 고개라는 뜻)을 이룬 후,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몽현(夢峴)을 이루고, 또 다시 그 줄기가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원수봉(圓秀峰)을 정점으로 하는 서쪽 암산을 일궈놓았다. 그리고 솟재의 북쪽줄기는 서북을 향해 달리다가 갈라산(葛蘿山)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지고, 그 서쪽 지맥이 원수봉의 맞은편에 일제봉(日제峰),제 월봉(霽月峰), 정수봉(靜壽峰)과 같은 동쪽 암산의 여러 봉우리들을 솟구 쳐 놓았다. 이 서쪽 암산의 지맥 끝이 凸자 형태이고, 그 맞은편 동쪽 암 산의 줄기가 凹자 형태를 이루면서, 이 두 암산은 마치 톱니바퀴의 이와 이가 서로 꽉 맞물려 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 그 사이를 흐르는 강물도 크게 굽이쳐 돌아 흐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그같은 기이한 지세를 이루고 있는 이 암산 골짜기를 과연 풍수 적인 명당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아마도 대부분의 풍수연구가들 은 결코 사람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곳으로 쉽게 단정해 버릴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계곡 전체가 온통 암벽 투성이여서 토심(土深)이 깊은 곳도 거의 없을 뿐더러 골짝을 따라 강하게 부는 바람마저 늘 기(氣)를 흩 뜨릴 것이므로 풍수이론상으로는 결코 좋은 터가 아닌 것이 너무나 명백하 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계곡이라도 시인(詩人)이 보는 눈과 화가가 보 는 눈, 그리고 풍수학자가 보는 눈은 제각기 다를 수밖에 없는 법, 어찌 풍수적인 안목 하나만 가지고서 땅의 됨됨이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있겠는가. 그런 풍수 이상의 그 어떤 땅의 진면목을 참되게 깨닫게 해주는 집이 바 로 서쪽 암산 기슭에 있는 고산정사(高山精舍)다. 현재의 고산서원정면 오 른쪽 밑에 터잡고 있는 3칸짜리의 작고 아담한 고산정사는 그곳으로부터 10여리 남쪽에 있는 일직면 소호리(蘇湖里) 출신 대산(大山) 이상정 (李象 靖) 선생이 60세 되던 해에 지은 집이다. '택리지(擇里志)'라는 책에 이르 기를, "기름진 들을 끼고 있는 집으로부터 십리 밖이나 또는 한나절 걸을 수있는 거리쯤에 산수경치가 아름다운 터를 사두어, 매양 생각날때마다 그 곳에 가서 시름을 잊고, 혹은 유숙한 다음 돌아올 수 있다면, 그것은 자손 대대로 이어나갈 방법이다"라고 했으니, 고산정사 만큼 '택리지'의 그런내 용에 잘 부합하는 장소도 드물 듯 싶다. 어쨌든 보다 흥미로운 사실은 30세때부터 이미 암산계곡의 높은 산과 깊 은 물, 그리고 골짜기에 서린 신비스런 기운에 매료된 대산이 57세때에 먼 저 미천변에 집을 지었다가 물이 너무 가깝고 바람이 많아 가히 오래 거처 할 곳이 못됨을 인지하고 3년 뒤에 언덕 중간쯤 되는 현재의 위치로 고산 정사를 이건(移建)하였다는 것이다. 현재의 터는 홍수시에 수해를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보국(保局.주변 지맥의 둘러쌈)도 어느 정도 되고, 특히다소 높은 지대로 올라감으로써 앞 쪽에 높이 솟아있는 동쪽 암산의 억누름이 한결 완화되어 환경심리적으로 도 이전의 강변터에 전혀 견줄 바가 아니다. 더구나 원수봉의 주맥이 뻗어 내리는 서쪽 암산의 한가운데를 점하여 앞쪽의 굴곡하는 산줄기와 물줄기 가 고루 둥글게보이니 그 또한 길격(吉格)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풍수학적인 해석일 따름이고, 고산정사터가 지닌 가 치는 어디까지나 대벽임류(對壁臨流)의 지세에서 철학자로서의 대산이 성 취한 주변 자연에 대한 인식에서 그 참뜻을 찾아보는 것이 옳다. 그가 대 산이라는 아호를 생가인 만수재(晩修齋)가 기대어앉아있는 대석산(大石山) 에서 따오고, 더구나 암산마을 사람들이 흔히 얘기해 온 고암(高巖)과 암 산이라는 두 지명을, '시경(詩經)'에 나오는 '고산앙지(高山仰止.높은 산 은 우러러 보아야 한다)'와 적절히 결부시켜 고산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창 출해 낸 것만 봐도 자연에 대한 그의 사상이 어딘가 모르게 남다른 면이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의 삶터관은 그가 남긴 '고산7곡시기(高山七曲詩記)'에 뚜렷이 드러나 있는데, 그 중에서도 '만대암(晩對巖)'과 '광영담(光影潭)'은 누구나 세한 대(歲寒臺)에 앉아 그 내용을 한번 음미해 볼만하다. 반면(半面)의 깎아지른 듯한 바위가 차가운 공기에 기대서서/ 석양빛이 어른어른하니 원기(元氣)가 서려 있네/ 뜬구름 오나가나 관계치 않고/짙푸 른 그 한 빛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만대암)// 해맑은 한 빛이 티끌하 나 없는것은/ 새어나는 넓은 근원 끊임없이 솟기 때문이라/ 삼라만상이 진 체(眞體)만이 맑으리라/ 푸른 허공 차가운 달이 밤 깊은데 비췄더라 (광영 담)// 필자가 여기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돌과 물이라는 자연지물(自然地 物)에서 체득될 수 있었던 불변과 청정함의 그런 선비정신이 아니다. 대산 이 고산정사 주변의 자연을 마음 속에 품은 행위 바로 그 자체가 중요하다. 그것은 분명 고산정사 터 자체의 좋고 나쁨을 논하는 차원을 능가하는 것이다. 땅을 사랑하고, 주변 자연과 교감하는 그같은 물아일체(物我一體) 의 경지가 곧 터잡는 술법으로서의 풍수가 아닌 철학으로서의 풍수가 지 향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겠는가. 대산 선생이 직접 그린 '고산7곡도 (圖)'에는 산봉우리는 물론 바위 하나하나에도 모두 그 이름이 붙여져 있 다. 거기에는 대자연과 함께 호흡하면서 암산 골짜기를 또하나의 도원경(桃 源境)으로 인식하고자 했던 대산 선생의 소박한 꿈이 담겨있다. 암산계곡 은 여느 골짜기와 다름없는 그런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객관적인 풍수판 단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고산정사를 중심으로 한 고산7곡은 이미 조선후기 영남학파를 이끈 한 거유(巨儒)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훌륭한 명당 터였던 것이다. 우리는 그같은 정신적인 유산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 다. 고산서원의 안내 입간판에 개인의 벼슬 이력이나 건물배치구조만 적어놓 을 것이 아니라 '고산7곡도'를 그려넣고 방문객들에게 산봉우리를 위시한 각종 주변 자연지물들과 보다 친숙해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한다. 고산정사터가 주변의 모든 자연지물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는 까닭도 있거 니와 무엇보다도 그것이 자연에 대한 외경심, 아니 더 나아가서는 생명존 중의 정신을 길러나가는 데도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고산정사터와 암산마을의 후맥(後脈)을 끊으면서 황량하게 나 있는 저 4차로의 구안(邱安)국도를 한번 보라. 취벽(翠壁)을 두 동강낸 그 끔찍한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인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 모습 은 동쪽에 있는 구 도로의 암산굴(窟)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과학기 술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자본주의 논리때문에 더욱 원시 적인 방법으로 국토개발을 해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루속히 아치형의 어떤 구조물이라도 덮어 양반고을 안동의 남쪽 얼굴을 조금이라도 회복시 켜주기 바란다. 고산정사터는 우리들에게 말한다. "자연보다 더 훌륭한 스 승은 없으며, 이 땅에 함부로 손댈 터는 한 군데도 없다"고. 풍수학자.지리학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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