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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 4] 경주 양동 | ||||
양동(良洞)은 민속마을이자 풍수마을이다. 풍수를 모르고서는 양동을 제 대로 이해할 수 없다. 아니, 풍수를 뺀 양동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는 말이 더 맞는지도 모른다. 마을터의 입지 뿐만 아니라 고래등 같은 고 택(古宅)들이 마을 언덕배기마다 위용을 과시하며 앉아있는 것도, 동해남 부선 철도가 마을 앞에서 휘어져 비켜 나간 것도, 남향(南向)이었던 양동 초등학교 건물이 동향(東向)으로 바뀐 것도 모두 다 풍수와 관련이 있다. 500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그 마을에서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 났던 것일까.
양동마을의 역사는 곧 '물(勿)'자형 땅 생김새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마을의 입향조(入鄕祖) 손소(孫昭)는 현재의 마을내에서도 가 장 깊숙한 안골(內谷)의 능선 위에 집을 지었다. 지금의 월성손씨(月城孫 氏) 대종가 서백당(書百堂 또는 松첨*쪽자바람-竹 아래 詹)이 바로 그 집 이다. 애초부터 그렇게 깊숙한 곳에 집터를 정하게 된데는 그만한 풍수적 인 이유가 있었다. 안산(案山)인 성주산(聖主山)에 올라 마을쪽을 내려다 보면, 주산(主山)인 설창산(雪蒼山) 문장봉(文章峰)에서 동남향으로 뻗어 내린 지맥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네줄기로 갈라져 이른바 물(勿)자형의 능 선과 골짜기들을 이루고 있다. 서백당은 그 물(勿)자형 지세의 두번째 획 어깨부분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당시에 그 집터를 잡아준 풍수 사가, 설창산 혈맥의 기운이 가장 크게 응집된 곳이 바로 그 어깨부분이며, 그 터에서 앞으로 세명의 위대한 인물이 태어나리라 예언했다고 전해진다. 서백당이 왜 그곳에 터잡게 되었는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양동마을의 개기(開基)가 물(勿)자의 어느 지점에서부터 이루어졌든간에, 사실 우리는 그 주변 일대의 전체적인 지세를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을터가 갖는 나름대로의 지리적인 합리성을 찾아내기 위함이다. 먼저 눈 여겨 볼 것은 마을 밖으로 10리 이상 펼쳐져 있는 드넓은 안강평야다. 마 을을 지탱케 하는 경작지가 하천을 끼고 그토록 가까이에 있는데, 주거공 간이 산골짝에 푹 파묻혀 있다 한들 그 무슨 문제가 있었겠는가. 오히려 겨울철의 차가운 북서풍을 피하고, 여름철의 홍수 재해를 면하기에는 들판 보다는 골짜기 안이 훨씬 더 유리했을 것이다. 더구나 선비마을다운 주거 면모를 염두에 둬야할 반촌(班村)으로서는 그같이 생산과 주거공간을 분리 시키는 것이 어쩌면 더 바람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을안을 흐르는 원래의 명당수(明堂水)도 요즘같지는 않았다. 지금은 안계저수지가 만들어져 물흐름이 원활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안계리쪽의 물과 물(勿)자의 골짜기마다 흘러나오는 계류들이 합쳐져 마을 한가운데로 양동천(良洞川)이라는 명당수가 유유히 흘렀다. 이 양동천은 북(北)의 영 일쪽에서 오는 기계천과 동네 어귀에서 합류하여 안락천(安樂川)이라는 객 수(客水)를 이룬다. 그리고 그 안락천은 서(西)의 영천쪽 칠평천 물을 합 친 후, 북류(北流)해오는 형산강과 마을 밖에서 또 다시 합류한다. 물줄기 만 보더라도 양동마을은 안팎으로 이합수(二合水)가 세번이나 이루어지는 더없는 길지인 셈이다. 게다가 예전에는 형산강 뱃길을 따라 동구 밖까지 동해의 해산물들이 운 송돼 왔다고 하니, 이 마을에 해물을 쓰는 전통요리가 전해져 내려오는 것 도 모두 그런 빼어난 입지성(立地性)에 연유하고 있는 것이다. 큰 평야와 강으로 된 그같은 훌륭한 외곽환경에 비해 실제로 양동마을 내부는 물(勿)자라는 길상(吉相)의 지세 외에는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다. 주산과 안산사이의 거리가 엎어지면 코닿을 정도로 가까울 뿐더러 규국(規 局)마저 너무나 협소하다. 그런 곳에서 만약 골짜기 바닥에 주거지를 정 한다면 일조량, 배수, 습도조절, 조망 등의 측면에서 언제든지 심각한 문 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양동마을 사람들은 그런 점을 십분 고려하여 처음부터 산등성이 에다 집을 짓는 방법을 택했다. 거기에는 물론 물(勿)자 지맥을 통하여 인 물이 난다는 풍수설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대종가는 산등성이의 높고 넓은 터위에 위치하고, 파(派)종가들은 좀 더 낮은 자리에 터를 잡았으며, 외거(外居) 노비들이 사는 가랍집들은 또 그보다도 낮은 터에 자리잡았 다. 그것은 곧 양동마을의 주거 택지(擇地)에 물(勿)자라는 자연의 질서 외에도 유교 사회의 엄격한 신분제도와 관련된 인위적 질서가 공간적으로 반영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물(勿)자 능선을 따라 집들이 들어섰지만, 양동마을에서는 집이 숲 을 없앴다기 보다는 오히려 집이 숲속을 찾아들었다고 느낄 정도로 자연훼 손을 최대한 줄여보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안산인 성주산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여느 마을 앞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그 흔한 묘지 하나 눈 에 띄지않는다. 아마도 '깨끗하다'는 뜻의 물(勿)자와 '어질고 훌륭한 산' 이라는뜻의 성주산을 오래도록 보전하고픈 주민들의 삶터에 대한 애착심이 그런 좋은 결과를 낳았지 않았을까 미루어 짐작할 따름이다. 하지만 양동마을인들 어찌 순탄한 길만 걸어왔으랴. 일제때 양동은 마을 역사상 가장 큰 위기를 맞은 적이 있다. 일제가 1938년에 경주와 포항을 잇는 동해남부선 부설계획을 세우면서, 양동의 주산과 안산 사이를 흐르는 양동천을 따라 철도가 지나가도록 설계를 한 것이다. 마을 터가 반 동강날 지경이었으니 온 마을이 발칵 뒤집힌 것은 물론이다. 전전긍긍 하던 끝에 나온 묘안이 바로 물(勿)자의 자연지세에 만약 철로를 놓아 아랫부분에 획 하나를 더 보태게 되면 피 혈(血)자가 되어 마을에 큰 재난이 일어날 것이 불보듯 뻔하다는 주장이었다. 어쨌든 마을 안으로 철도가 통과하는 것을 결사반대하는 주민들의 단합된 힘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듯 했고 그 결과, 마침내 일제도 어쩔 수 없이 현재처럼 철도가 마을 앞에서 우회해 빠져 나가도록 원래의 노선 설계를 변경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만약 그때 마을을 통과하는 철도부설계획을 막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양동은 민속마 을은 고사하고 거의 폐촌이나 다름없게 변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물(勿)자형의 길지를 지켜낸 양동 조상들의 피나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지금의 후손들도 조상들의 삶터를 사랑했던 바로 그 마음 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8년에 양동 사람들은 또 하나의 대역사(役事)를 말끔하게 마무리했다. 일제때 지어진 후 그동안 마을의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던 남향의 양동초등학교 건물을 동향으로 바 꿔 앉힌 것이다. 두가지의 풍수적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동네는 전체적 으로 서향을 취하고 있는데, 학교 건물이 남향하고 있어 궁극적으로는 혈 (血)자 형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둘째, 예로부터 양동마을은 경주에서 북류해 오는 형산강 물을 맞이하는 북쪽 제1관문인데, 학교건물이 그토록 아름답게 굽이쳐 오는 길격(吉格)의 조수(朝水)를 바라 보지 못하도록 마을앞을 가리고 있어 마땅히 그 좌향을 바꾸어 신축해야한 다는 것이었다. 양동마을이 갖고 있는 상징성, 그리고 그 장소적 뿌리를 전승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유치하고 불합리한 것으 로 보일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의 지역이 함유하고 있는 상징성이나 장소성은 반드시 실용적인 측면에서 타당하거나 합리적일 필요는 없다. 그 자체가 바로 지역주민의 정신과 세계관을 반영 하고 있기 때문에 진실하다. 양동은 외부 관찰자의 객관적, 분석적인 눈에 비치는 그런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그 자체 장소성과 상징성, 그리고 지 역주민의 지리정신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 숨쉬고 있는 생명력 있는 공간인 것이다. 풍수학자.지리학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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