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 6] 칠곡 선봉사터 | ||||
금오산(金烏山)은 구미시와 김천시 남면, 그리고 칠곡군 북삼면에 걸쳐 있는 영남의 명산이다. 지금까지 널리 알져지지 않은 금오산의 남쪽 골짜 기 깊숙한곳, 즉 북삼면 숭오리(崇烏里) 절골 가장 안쪽에 선봉사(僊鳳寺) 라는 절이 자리잡고 있다. '봉황(鳳)이 훨훨 춤춘다(僊)'는 것은 곧 '도 인(道人)이 해탈했다'는 뜻이니, 벌써 절이름 자체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특이한 것은 절이름 뿐만이 아니다. 그 일대의 지명(地名) 모두가 신비롭 기 그지없다. 부상(扶桑), 약목(若木), 숭산(嵩山), 금오(金烏) 등 하나같 이 그 어떤 내력을 지녔음직한 땅이름들이다. 사실 선봉사터를 제대로 알 기 위해서는 주변의 이들 땅이름부터 먼저 이해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 모 두가 어떤 식으로든 금오산과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산해경(山海經)'에 이르기를, '대황(大荒)의 한가운데에 얼요군저라는 산이 있다. 양곡(陽谷)이라는 골짜기 위에 부상이 있는데, 이곳은 열 개의 태양이 목욕을 하는 곳이다. 물 가운데에 큰 나무가 있고, 한 개의 해가 막도착하자 또 한 개의 해가 막 떠오르며, 모든 해가 까마귀를 싣고 있다' 라고 하였다. 조선조의 부상일월도(扶桑日月圖)라는 민화에도 나타나듯이, 부상은 동쪽 끝에 하늘만큼 높게 자라고 있는 뽕나무에서 해와 달이 뜬 다고 믿었던 상상 속의 신화적인 나무다. 게다가 해는 옥(玉), 금(金), 하 늘, 둥근 것, 크게 붉은 것 등을 상징하는 주역(周易)의 건괘(乾卦)와 밀 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기에 해는 곧 금이요, 해에 실린 까마귀는 곧 금오이며, 금오는 곧 태양의 정기를 지닌 형체를 뜻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고려조에 수백 개 의 절이 들어앉으면서 국가적으로 숭앙받았던 남숭산(南嵩山)이 금오산으 로 이름이 바뀌게된 연유다. 물론 대각국사(大覺國師)가 저녁놀에 물든 황 금빛 까마귀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금오산으로 고쳤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러나 조선조에 와서도 불가(佛家)에서는 예로부터 절이 많기로 유명한 중국 하남성의 숭산을 그대로 본떠 지은 남숭산이라는 이름을 끝까지 고집 해서 사용했다는 점을 감안하면,그것은 낭설일 가능성이 다분한 것이다.숭 산이라는 옛 지명은 지금도 절골 안에 그대로 남아있는데, 그곳에는 강릉 유씨(劉氏)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경호천(鏡湖川) 주변의 넓은 들판을 배경으로 발달한 약목은 신라시대에 는 대목(大木)과 계자(谿子)현으로 불리던 곳이었다. 그러나 '신증동국여 지승람'에 의하면, 약목이라는 지명은 고려시대때 처음으로 사용되었으며, 일찍부터 곤산(昆山)이라는 별칭도 쓰이고 있었던 듯하다. 그렇다면 약목 또한 해와 관련된 곳 이름임이 틀림없다. '산해경'에는 약목이 '곤륜 (昆 侖)의 서쪽에서 생겨나 서쪽 끄트머리에 기대어 있는데, 그 꽃빛이 땅 위를 붉게 비춘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약목은 물론 해가 뜨는 양 곡의 약목이 아니라 해가 지는 서극(西極)의 약목을 지칭한다. 그러고 보 니 부상리는 태양을 상징하는 금오산의 서남쪽에 자리잡고 있고, 약목은 금오산의 동남쪽에 위치해 있다. 결국 전자는 해가 뜨는 곳으로, 후자는 해가 지는 곳을 뜻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정된 지명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양(陽)적인 금오산에 상응하는 음(陰)적인 곳 이름으로 금오의 정남방에 월항(月恒)이라는 지명까지 두었으니, 고려조에 금오산은 그야말 로 국가적인 영산(靈山) 내지 성산(聖山)으로서 굉장한 예우를 받았던 셈 이다. 그러나 마치 세월의 무상함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지금의 금오산 남쪽 절 골은 크게 퇴락해 있다. 선봉사만 하더라도 말이 절일 따름이지 실상은 여 느 암자보다도 훨씬 작다. 불상을 모신 민가형(民家型) 기와집 한 채와 보 물 제251호로 지정된 대각국사비(碑)가 그 전부다. 그것도 산 밑에 사는 어느 보살이 40여년 전에 꿈에 계시를 받고 폐허 위에 기와집을 세우면서 대각사(大覺寺)라는 절이름을 하나 덧붙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선봉사는 사람의 마음을 강렬하게 끄는 그 어떤 면모를 가지고 있다. 절터 자체가 풍수적으로 남다른 명당성(明堂性)을 지니고 있는 까닭이다. 하기야 고려 제11대 문종의 넷째아들인 의천(義天) 대각국사의 공적비를 세울 정도의 터였다면, 고려 왕실에서도 선봉사터를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명당으로 평 가하지 않았겠는가. 선봉사는 금오산 정상의 한 지맥이 동쪽으로 뻗으며 솟구쳐 놓은 효자봉 의 남사면 중턱에 터잡고 있다. 굳이 내맥(來脈)의 종주(宗主)관계를 따지 자면 산 정상의 현월봉이 종산(宗山 : 主山 위에 있는 主山)이고, 절 뒤쪽 의 효자봉이 주산(主山)인 셈이다. 그러나 절 왼편의 좌청룡 지맥 위로 조 금만 올라가서 서쪽 정상을 바라보노라면 그같은 개념 설정이 한낱 부질없 는 일임을 곧 깨닫게 된다. 마치 현월봉을 머리로 하는 거대한 봉황 한 마 리가 둥그런 알 모양의 선봉사터를 품고 있는 듯한, 이른바 봉황포란형(鳳 凰抱卵形)의 지세가 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더구나 성수(性修) 스님 이 친절하게도(?) 봉황이 대각국사비를 언제나 자상하게 내려다볼 수 있도 록 백호 지맥의 숲 공간 일부를 훤히 틔워 놓았다. 그런 틔움을 하지 않은 들 봉황이 어찌 자신이 품고 있는 알을 돌보지 않으랴마는 스님의 절터에 대한 넘치는 충정(衷情)이 그런 행태(行態)를 가져왔으려니 생각하니 저절 로 웃음이 나온다. 선봉사터는 훌륭한 내맥에 못지않은 아름다운 조안(朝案)을 갖추고 있다. 아마도 그토록 절터에 합당한 안산(案山)과 조산(朝山)도 찾아보기 힘들듯 싶다. 청룡 지맥의 일부가 절터 바로 코앞에 안대(案對)를 마련해 놓았 는데, 그 모양이 꼭 책을 펼쳐놓은 형상이다. 풍수를 모르는 사람이야 규 국(規局)을 협소하게 만들어 답답함을 불러일으키는 그 안산을 눈엣가시처 럼 볼 지 모르지만, 아는 사람은 선인독서형(仙人讀書形)이니 뭐니 하여 오히려 길격(吉格)의 지세로 간주한다. 절골밖 멀리 조산을 이루고 있는 영암산(鈴岩山)의 생김새 또한 기이하다. 스님들이 사용하는 밥그릇인 바 리때를 엎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영락없는 연꽃봉오리 같 기도 하다. 알고보면 명당 전면부의 공결(空缺)함을 메울 수 있는 산이 있 다는 것만으로도 족한데, 그 형국(形局)마저 모두 절터다운 명당을 만드는 데 일조를 하고 있으니, 그 어찌 선봉사터의 복록이라 하지 않을 수 있으 랴. 그렇다고 선봉사터에 결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좌우 명당수의 흐름이 극히 부진하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손바닥만한 절마당에 우뚝 솟아있는 거대한 은행나무 두 그루와 단풍나무가 눈에 거슬린다. 스님의 얘기로는 1957년경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기념식수한 나무라고 하지만 그 진위여 부야 내 알 바 아니고, 어찌하여 나무들이 그 정도까지 자라도록 마냥 내 버려두었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절집이든 일반 민가이든간에 지붕을 덮을 정도로 크게 자란 나무는 마땅히 담장 밖으로 멀리 떨어져 있 게 해야 한다. 나무 뿌리가 집의 기초를 망가뜨리는 것도 문제이지만 채광 마저 제대로 안돼 종래는 집안 내부 전체가 음습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 이다. 더욱 염려되는 것은 오히려 최근에 와서 절집 바로 턱밑의 대숲을 없애고 주차장을 만든 일이다. 절 진입로를 약간 손질한 것은 그렇다치더 라도 대숲을 없앤 것은 분명 절집의 품격을 한단계 떨어뜨린 것이다. 하지만 그 몇 가지의 결점들 때문에 선봉사터의 명당성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절집은 대개 산골짜기의 가장 깊숙한 곳에 터잡고 있다. 그 만큼 세속을 멀리한다는 상징적인 뜻도 있지만, 거기에는 득도(得度)를 위 한 참선 수행에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겠다는 실질적인 의도도 깔려있다. 절터의 본령(本領)이 그러할진대, 절의 규모가 크다거나 혹은 절 진입로 가 잘 닦여져 있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절집인 것은 아닌 것이다. 진정한 명찰(名刹)은 일단 찾아든 방문객에게 마음의 평온을 가져다 주어, 곧장 되돌아 나올 수 없도록 어딘가 잡아끄는 구석이 있어야 한다. 선봉사터는 바로 그런 점들을 두루 갖추고 있는 변함없는 절터 명당이다. 혹자는 절터로서 그렇게 좋은 곳이라면 어찌하여 선봉사가 폐사(廢寺)되 는 불운까지 경험하게 되었는가 하고 의문을 가질는지 모른다. 그런 어리 석은 의문은 오로지 발복 이기심에 눈이 멀어 땅의 논리와 인간의 논리를 제대로 분별치 못하는 데서 생긴다. 지금 절골 입구에는 금오산 자락을 십 리 길이나 뚫는 경부고속철도 터널공사가 한창이다. 그런식으로 인간의 논 리에만 자꾸 집착하다 보면 언젠가 우리는 이 땅위의 터다운 터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지도 모를 일이다. 풍수학자.지리학 박사 |
'풍수지리연구논문및사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 7] 대구 파계분지 (0) | 2013.11.25 |
|---|---|
| [스크랩] [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 7] 대구 파계분지 (0) | 2013.11.25 |
| [스크랩] [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 5] 김해 구지봉 (0) | 2013.11.25 |
| [스크랩] [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 4] 경주 양동 (0) | 2013.11.25 |
| [스크랩] [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 3] 칠곡 석우리 음양지맥 (0) | 2013.11.2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