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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 5] 김해 구지봉 | ||||
사람들이 명당(明堂)에 집착하는 것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때 로는 자신이 점유한 명당을 가꾸거나 새 명당을 찾아나서기도 하지만,다 른 사람이 소유한 명당을 가로채거나 해코지하기도 한다. 만약 한 장소가 오랜 세월동안 그 모든 유형의 명당행태(行態)를 번갈아 경험하였다면, 누 구든지 그 땅은 참으로 기구한 팔자를 타고났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낙동강 하류에 위치한 김해(金海)의 구지봉(龜旨峰)으로부터 가락로를 따라 가면 산전수전을 다 겪은 명당터다. 서상동(西上洞) 평지에 터잡은 수로왕릉(首露王陵)으로부터 가락로를 따라 2km 정도 북쪽으로 가면 구지 봉을 만날 수 있다. 구지봉은 지리산 영신봉에서 시작하여 줄곧 동쪽으로 달려온 낙남정맥 (洛南正脈)이 그 끝맺음을 하면서 일궈놓은 분산(盆山)의 서남쪽 지맥이 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그 봉우리가 마치 10마리의 거 북이 엎드린 모양같다고 해서 구지라 칭한다고 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 지 맥 전체가 흡사 한 마리의 신령스런 왕거북이 산에서 내려오는 듯한 영구 하산형(靈龜下山形)의 지세다. 현재 아래쪽 거북머리 부분에는 '구지봉석(石)'이란 큰 글자가 새겨진 남방식 지석묘 뚜껑돌 1개와 1908년에 참봉 허선이 세웠다는 '대가락국 태 조왕 탄강지지(大駕洛國太祖王誕降之地)' 라 씌어진 돌비석 1개, 그리고 6가야 시조들의 탄강설화를 전해주는 석란(石卵)이 재현돼 있다. 또한 위 쪽 거북 몸통부분에는 자좌(子坐)의 허왕후릉(許王后陵)이 자리잡고 있다. 필자는 80년대 중반에 이 구지봉을 처음으로 찾은 적이 있다. 일제(日帝) 가 구지봉의 맥을 끊어놓았다는 소문을 현장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대하는 구지봉의 모습은 무어라고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기 그지없 었다. 거북의 목부분이 댕강 잘려나간 곳으로 국도가 나 있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왜 급소에 해당하는 목을 자르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 것도 잠시, 이내 주민들로부터 그 내막을 들을 수 있었다. 이 땅을 강점한 일제가 김해를 그들의 식민지 수도로 삼고자 했으나, 가 락국의 후예들인 김해 김씨와 허씨들이 조상이 물려준 유서깊은 터전을 그 런 장소로 도저히 내줄 수 없다고 거세게 반발하자, 마침내 도로를 낸다는 구실을 붙여 그 결집력의 근원이 되는 구지봉의 목을 끊어버렸다는 것이다. 하기야 일제 측으로 봐서는 그 영구하산형의 지세를 그대로 보존시켜 둘 경우, 우리 민족이 거북처럼 끈기와 저력을 가지고 오래 버티면서 언젠가 는 국력을 회복하여 왕업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라 쉽게 단정지을 수도 있 었겠다. 그런 저의가 없었다면 어찌 구지봉의 급소에 해당하는 거북의 목 부분을 그토록 정확하게 단맥(斷脈)할 수 있었겠는가. 어쨌든 옛 가락국 왕도(王都)의 상징물이자 삶터의 성역(聖域)과도 같던 구지봉의 명당성을 교묘한 빌미로 파괴당한 당시의 김해 사람들은 낙심천 만했을 것이다. 해방이 되자마자 김해 사람들이 그 끊겨버린 구지봉의 맥 을 다시 이어보려고 부단히 노력해 온 것만 봐도 그때 심정이 충분히 헤아 려진다. 그들은 구지봉 지맥을 끊은 주체가 일본 사람들이고, 또 그 터가 금관가야의 건국설화를 간직한 국가적인 문화재임을 부각시키면서, 정부 당국과 후손들이 힘을 모아 그 복원기금을 한번 마련해보자는 제의를 내놓 을 정도였다. 그들의 염원은, 90년에 김해시가 찬란했던 가야문화유적지 복원사업의 일환으로서 잘려나간 거북 목줄기를 잇는 공사를 실시함으로써 드디어 결 실을 보게 된다. 이미 도로가 돼버린 그 목길을 사용하고 있는 주민들의 불편도 생각해야만 하다보니 잘린 결인(結咽)목 위로 인공 육교를 만들고, 그 위에 복토하여 나무를 심고 지맥을 잇는 수밖에 없었다. 필자가 93년에 다시 구지봉을 찾았을 때 그동안 김가, 허가라 불리며 천 대받던 김해의 시조씨(氏)들이 다시 김씨, 허씨로 불려지고 있었으며, 때 마침 여섯명의 김해출신이 각종 고등고시에 한꺼번에 합격한 것을 두고 지 역주민들은 구지봉 지맥의 기운이 되살아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입을 모으고 있었다. 어찌 그같은 경사를 지맥 복원의 힘만으로 돌릴 수 있으랴마는 김해 사람들의구지봉에 대한 자긍심이 그런 사유(思惟)를 낳 았으려니 짐작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95년 7월초에 김해에 있는 바로 그 수로왕릉과 허왕후릉 능역에 서 식칼 10개를 땅속에 파묻고 쇠말뚝 3개를 박은 후, 그것도 모자라 그 구덩이 안에 폐유까지 뿌려놓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식칼과 쇠말뚝이 녹슬 지 않도록 흠뻑 기름칠을 해놓았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더욱 가공할 일은 이들 염승물(厭勝物)들이 능침의 앞뒤로 각각 나뉘어 파묻혀 있어 나름대 로 전후단맥을 시도하려 했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항간에서는 김해김씨의 정기를 뺏기 위해 저주행위를 하였다느니, 혹은 김해김씨 대선후보를 해코지 하기 위해 그랬다는 등 온갖 구구한 억 측들이 나돌았다. 그러나 그 풍수해석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었다. 풍수의 기본이론은 양택 (陽宅)이나 음택(陰宅)할 것 없이 모두 다 기(氣)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음택풍수는 한마디로 땅속을 흐르는 우주의 기 위에 부모의 뼈를 올려놓 으면 혼백은 저승으로 가고 그 뼈만 남게 되는데, 바로 그 뼈를 통해 기가 후손에게 길흉화복(吉凶禍福)의 그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끼친다는 사상이 다. 따라서 묘터의 발복(發福)은 어디까지나 조상의 뼈를 그 매개체로 하며, 뼈가 없으면 음택의 동기감응론(同氣感應論)도 성립되지 않는 것이 원칙이 다. 수백년에서 수천년 묵은 분묘는 대부분 뼈가 토화(土化)된지 오래여서 그같은 묘역(墓域)은 사실상 가문의 뿌리를 알리는 상징적인 존재물, 그이 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에 정작 흥미로웠던 일은 왕릉관리사무소측의 신속한 판단과 그 대처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관리소 측은 이미 무속인의 영험 을 얻기 위한 소행으로 그 가닥을 잡고, 발견된 쇠말뚝과 식칼들을 즉각적 으로 소금더미에 찔러넣어둠으로써 그것들이 빨리 녹슬도록 하는 전통 무 속적인 역(逆)양밥의 비법을 사용하였다. 그것은 오히려 해코지한 사람에 게 사악한 기운을 되돌아가게 하는 방법이었으니 그야말로 이에는 이, 눈 에는 눈으로 맞섰던 셈이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른 99년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그때 김해 왕릉 묘란 (墓亂)을 일으킨 범인이 바로 부산에 사는 한 여자 무속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것도 충무공 이순신 장군 묘역을 비롯, 율곡과 퇴계같은 성현 들의 분묘와 조선조 여러 왕릉들이 동일인에 의해 큰 피해를 입고 난 뒤에 서야 말이다. 우리나라 풍수사(史)에는 봉분에 직접 쇠막대기나 식칼을 꽂는 범죄유형 은 나타나지 않는다. 예로부터 무속인들이 명묘(名墓)의 정기를 도용하기 위해 봉분에 식칼을 꽂는 경우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런 행위는 결코 풍 수적인 차원이 아니다. 풍수에서는 그럴 경우 혈장(穴場)이 손상을 입는다고 볼 따름이지, 그 쇠붙이를 통하여 정기를 도용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 무속인은 명묘나 왕릉에 쇠붙이를 꽂을 것 같으면 본인과 가족들이 그 정기를 받아 잘 살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고 한다. 무속신앙과 풍수발복 논리를 억지로 끼워 맞춘, 참으로 황당한 발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구지봉을 통하여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한국풍 수의 두 얼굴을 본다. 옛 가락국 사람들이 기이한 지세의 구지봉을 신화적 공간으로 설정하고, 또 현대에 와서 김해 사람들이 구지봉의 끊긴 지맥을 이은 것은 풍수의 긍정적인 측면이다. 그런 반면 일제가 구지봉의 목을 의도적으로 자르고, 또 한 무속인이 이 기적인 발복을 위해 허왕후릉 앞뒤로 식칼과 쇠말뚝을 박은 것은 분명 풍 수의 부정적인 측면이다. 지금 미국의 하버드대학에서는 풍수연구가 점점더 그 활기를 더해가고 있다는 소식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그네들이 묘지풍수에 관심을 둘 리 는 만무하다. 이제는 우리가 풍수의사람들이 기이한 측면이다. 지금 미국 의 하버드대학에서는 풍수연구가 점점 더 그 활기를 더해가고 있다는 소식 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그네들이 묘지풍수에 관심을 둘 리는 만무하다. 이제는 우리가 풍수의 어떤 것을 취하고, 어떤 것을 버려야 할지를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풍수학자.지리학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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