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왕능)

[스크랩] 왕릉 여행 [09] 지역별 왕릉군(16) - 동구릉지구(3편)

장안봉(微山) 2012. 12. 26. 18:18

왕릉 여행(9) - 지역별 왕릉군(16) - 3편

16. 동구릉지구 관리소

동구릉 능역 배치도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경릉은...

경릉은 원릉을 돌아 나와서도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한 50여미터 안쪽으로 들어가야 할 겁니다. 경릉은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봉분 3개가 나란히 있는 왕릉입니다. 일반 묘도 나란히 봉분이 3개가 있는 곳이 여러 곳 있습니다.

▲ 경릉의 수복방 터

▲ 당시 보수 중인 정자각과 비각

▲ 경릉의 우측 석물

경릉 역시, 다른 왕릉에 비해서 3연릉이란 것 이외에는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당시는 정자각과 비각을 보수 중이라서 주변이 어수선했었습니다.

▲ 경릉의 능역 전경

▲ 경릉의 능역 후경

경릉(景陵)은 동구릉의 마지막 능으로 제24대 헌종(憲宗)과 효현(孝顯) 황후와 효정(孝定) 황후의 능이다. 헌종은 순조의 손자이며 요절한 문조의 아들로 1827년 태어났다. 1830년 왕세손으로 책봉되고 순조의 승하 후 1834년 즉위하였다.

당시는 대왕 대비 순원 황후 김씨의 수렴 청정과 세도 정치로 국정이 혼란하였다.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발표하고 오가작통법을 강화하여 천주교 신앙을 엄금하였다. 헌종은 1849년 후사없이 승하하였고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장사지내고 성황제(成皇帝)로 추존되었다.

 

헌종의 옆에 있는 봉분은 효현 황후 김씨의 것이다. 효현 황후는 1828년 태어났고 1837년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1843년 후사없이 승하하였다. 다른 한 봉분은 계후 효정 황후 홍씨의 것으로 그녀는 1831년 태어났고 1844년 왕비에 올랐다.

헌종이 승하하고 철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1904년 춘추 73세로 승하하였다. 1908년 두분 모두 황후로 추존되었다. 왕과 왕비 계비 3위(位)의 능을 한 영역에 동원 이봉하였고 이에 3연릉(連陵)의 형식을 더한 조선 왕릉 중 유일한 형식이다.

혜릉은...

혜릉은 숭릉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며, 설명상으로는 서쪽에 머리를 두고 있는 유일한 왕릉이라고 하는데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 것 같고, 지형상으로나 세자빈때 이미 이 곳에 자리잡아 그대로 왕릉으로 추봉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석물들도 아주 왜소합니다.

▲ 혜릉 입구에서 바라 본 전경

▲ 혜릉의 수복방 터

▲ 뒤에서 바라 본 정자각과 비각

혜릉은 유일하게 장명등이 없는 왕릉입니다. 자세히 주변을 보니 장명등이 놓일만한 자리에 장명등의 밑둥이 드러나 있는 것을 보니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언젠가 훼손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혜릉의 좌측 석물 전경

▲ 사진 앞쪽에 장명등 밑둥 흔적

▲ 혜릉의 우측 석물 전경

혜릉(惠陵)은 제20대 경종(景宗) 대왕의 원비(元妃) 단의(端懿) 왕후의 능이다. 단의 왕후는 1686년 태어나 1696년 11세에 세자빈에 책봉되어 1718년 33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그녀는 타고난 품성이 어질고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덕을 갖추어 양전(兩殿)과 병약한 세자를 섬기는 데 손색이 없었다고 전한다. 승하 후 숭릉 왼쪽 산줄기에 모셔졌다가 경종이 즉위하자 단의 왕후에 추봉되었다.

특히, 조선의 왕릉들은 대부분 북침(北枕)을 하고 있는데 단의 왕후는 서쪽에 머리를 두고 다리를 동쪽으로 향했다. 간략화된 능침의 짜임이 엿보인다.

숭릉은...

숭릉은 혜릉 입구 좌측 길로 들어가면 되나 비공개 능으로 더 이상은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숭릉 초입에 가드레일을 쳐 놓았으나 까치발을 하면 건너갈 수는 있습니다. 동구릉에서 그 동안 비공개이던 목릉이 공개되었으니 조만간에는 숭릉도 공개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 동구릉의 방지원도

▲ 숭릉의 금천교

▲ 입구에서 바라 본 숭릉 전경

숭릉 초입을 들어서면 좌측에 사람 손이 타지 않은 연못(방지원도)가 있으며, 최근에는 숭릉 가는 길을 명성황후 초장지 터로 지나가게끔 길을 만들어 놓았더군요. 숭릉의 금천교를 지나면 사방이 확 트인 숭릉이 보입니다.

▲ 숭릉의수복방 터

▲ 우측에서 바라 본 숭릉 전경

▲ 숭릉의 비각

조선조 왕릉 중에서 숭릉의 색다른 점은 다른 왕릉 정자각과 같이 엄숙한 분위기의 맞배지붕 아니라 화려한 팔작지붕의 정자각입니다. 그 시대의 유행하는 양식을 따르다 보니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왕릉 중에 유일하게 팔작지붕인 숭릉의 정자각 모습

숭릉 정자각의 크기는 다른 왕릉의 정자각 크기인 정면 3칸에서 좌우로 한 칸씩 익랑이 나와서 5칸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앞면도 일반 정자각에 비해서 1칸이 더 긴 3칸으로 지어졌습니다. 유일한 팔작지붕에 다른 정자각에 비해서 규모가 크다보니 화려하고 조금은 웅장하게 보입니다.

▲ 숭릉의 예감들

숭릉에는 축문을 태우던 예감도 세 개씩이나 있더군요. 둥근 예감도 있고... 이유는 모르겠으나 시대적으로 여러 번 만든 것 같습니다. 위 맨 우측과 아래 맨 좌측 사진에서 3개의 예감이 보일 겁니다.

▲ 능역에서 바라 본 정자각과 예감

▲ 숭릉의 좌측 석물 전경

▲ 숭릉의 우측 석물 전경

능역으로 올라가 보면 다른 왕릉에 비해서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동구릉에서 숭릉을 마지막으로 간단히 사진으로만 소개했습니다만, 동구릉은 답사하기도 힘들고 소개하기도 힘들어서 4년간을 미루다가 이제서야 동구릉편을 마치게 되니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 숭릉의 능역 전경

▲ 숭릉의 능역 후경

숭릉(崇陵)은 제18대 현종(顯宗)과 명성(明聖) 왕후의 능이다. 현종은 조선의 역대 왕 가운데 유일하게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다. 현종은 1641년 청의 심양에서 당시 청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봉림(鳳林) 대군 즉 효종과 풍안부(豊安府) 부인 즉 인선 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봉림 대군은 형인 소현(昭顯) 세자의 병사로 1645년 귀국하여 세자로 책봉된 후 효종으로 즉위하게 되었고 1659년에는 효종의 뒤를 이어 바로 현종이 등극하게 된다. 현종은 대동법을 시행하고 천문관측과 역법의 연구에 이바지하였다. 지방관의 상피법(相避法)을 제정하고 동성통혼을 금했고 부왕의 북벌 계획을 이어 국제관계와 군비 제정에 힘쓰기도 하였다. 1674년 갑작스런 병으로 승하하였다.

명성 왕후는 1642년 태어나서 1651년 세자빈에 책봉이 되고 1659년 왕비에 책봉되었다. 지능이 비상하고 성격이 과격하여 궁중의 일을 다스림에 거친 처사가 많았고 숙종 즉위 초에는 조정의 정무에 관여를 하여 비난을 받았다고 전한다. 1683년에 42세로 승하하였다. 숭릉은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들어진 쌍릉이다

명성황후의 초장지로 조성된 터는...

▲ 명성황후의 초장지로 조성된 숙릉(肅陵)터 전경

▲ 땅에서 드러 난 석물들(사진 윗 부분이 능역 측면)

2005년 4월 어느 날, 동구릉 관리소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었습니다. "광나루! 지금 동구릉 숭릉 우측 산등성이 명성황후의 초장지 터로 추정되는 곳의 개울 옆에서 석물들이 발견되었으니 조만간 한 번 오시게나." 라는 전화를 받고나서 며칠 뒤에 조선일보에서 신문 기사화 되고, 얼마 뒤에 가서야 확인하였습니다.

▲ 장마로 드러 난 숙릉의 석물들(우측 사진의 우측편에 보이는 통로가 숭릉 홍살문이 있음)

죽어서도 쫓겨다닌 명성황후 첫 무덤 발견
 
2005년 04월 25일 (월요일)

시해 발표도 못하고 왕비폐위 서인으로
고종 황제된뒤 홍릉에 고종죽자 남양주 옮겨


[조선일보 신형준 기자] 을미사변(1895년 10월 8일)으로 시해당한 명성황후를 애초 묻으려 했던 동구릉(사적 193호·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안 홍릉이 처음 확인됐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25일 “숭릉(崇陵) 오른쪽 언덕에서 석물(石物)이 발견됐다는 제보를 받아 현장과 각종 문헌을 확인한 결과 위치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곳에서는 봉분 주변에 두르기 위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난간석주(欄干石柱)와 동자석(童子石) 등 석물 3점이 발견됐다. 이 석물들은 땅 속에 묻혀 있다가 빗물 등으로 땅이 씻기면서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명성황후릉은 이곳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급변하던 당시 정치 상황 때문이다. 을미사변으로 집권한 김홍집 내각은 시해 사건 이틀 뒤 시해 사실조차 발표하지 않은 채 “왕비가 인민을 착취했다”며 황후를 서인(庶人)으로 폐위시켰고 50여일 후에야 시해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막상 능 조성 공사가 한창이던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이 단행되면서 고종은 김홍집 등을 ‘을미4적’으로 규정해 체포령을 내렸고, 내각은 붕괴됐다.

명성황후릉은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로 등극(1897년 10월 12일)한 뒤인 1897년 11월 22일, 현재의 홍릉수목원(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2동)에 모셔졌다. 또 이후 고종이 1919년 1월 21일 승하하자 같은 해 2월 16일 경기도 남양주시 현재의 홍릉으로 이장됐다.

한영우·이태진 서울대 교수(국사학)는 “명성황후릉의 조성과 이장은 굴곡많은 조선 말기의 역사를 대변한다”며 “동구릉 안 홍릉을 근대사 교육의 장으로 보존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구리=신형준기자 [블로그 바로가기 hjshin.chosun.com])

명빈묘도 동구릉에서 관리를...

동구릉에서 관리하는 유일한 외부 묘입니다. LG 구리 축구장 우측의 삼거리 건너편 능선에 있습니다. 차로 올라 갈 수 있으나 언덕 길로 교차가 힘들 정도로 좁습니다. 이 곳은 비공개 묘입니다. 봉분 앞에는 묘비와 상석, 향로석 그리고 묘역 좌우로 문인석이 서 있는 단촐한 묘역입니다.

 

※ 명빈묘도 최근에 공개되었다고 하는데, 한 번 확인하러 가 봐야 겠습니다.

▲ 명빈묘 입구에서 바라 본 전경(비공개)

▲ 명빈묘 전경

조선 3대 태종(재위 1400∼1418)의 후궁 명빈 김씨의 무덤이다. 명빈 김씨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태종의 후궁으로 성종 10년(1479)에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무덤은 일반 사람들의 무덤처럼 눈에 띄지 않고, 몇몇 석물만이 갖추어져 있다. 무덤에 있는 비석 앞면에는 ‘명빈김씨지묘(明嬪金氏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동구릉 찾아가는 길

소재지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산2-1

버스
- 청량리에서 7-8, 202→상봉역(7-8, 202)→
   구리시→동구릉
- 강변역에서 1,1-1,14,9-2→구리시→동구릉

승용차
- 서울 → 동서울 → 구리시 → 동구릉
- 서울 → 의정부 → 퇴계원 → 동구릉
- 서울 → 화랑대사거리 → 구리시 → 동구릉

※ 구리시내에서 퇴계원 방향(43번국도)으로 약 2㎞

명빈묘 위치도

소재지 : 경기 구리시 아천동 산14

 

강변역에서 구리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LG 축구장 부근에서 내려서 삼거리까지 걸어 가서 길을 건너서 언덕길을 한 100여미터 올라가면 우측에 철조망으로 두른 곳에 명빈묘가 있습니다.

 

자차로는 워커힐 방향에서는 삼거리를 지나서 U턴을 해야 하고, 구리 방향에서 오면 삼거리 비나자마자 바로 우측 언덕길로 올라가야 합니다.

출처 : 한국의 능원묘
글쓴이 : 광나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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