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 여행(9) - 지역별 왕릉군(16) - 2편 |
16. 동구릉지구 관리소 |
동구릉 능역 배치도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건원릉은... |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이 곳 동구릉의 건원릉에 묻힌지 600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에 건원릉 권역에 9번째 능인 익종(翼宗)의 수릉(綏陵)이 1855년에 조성되면서 동구릉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
▲ 건원릉 입구의 금천교 |
▲ 홍살문에서 바라 본 건원릉 전경 |
▲ 건원릉의 정자각 |
목릉을 돌아 나오면 바로 건원릉의 금천교로 연결됩니다. 홍살문을 지나면 정면에는 정자각이, 우측에는 수복방이 있으며, 좌측에는 수라간터의 주초석들이 보입니다. |
▲ 수라간터 |
▲ 소전대 |
▲ 수복방 |
정자각 좌측 뒷편에는 조선 초기에 예감대신 사용했다는 축문을 태우던 소전대가 있으며, 사초지 우측 아래편에 비각이 있습니다. |
비각 안에는 태조의 업적과 명복을 비는 신도비(神道碑)도 함께 있으며, 왕릉의 신도비는 태종의 헌릉에도 있습니다. 비석은 글씨를 새긴 부분을 비신(碑身), 정면 글씨를 표제(表題), 뒷면 글을 음기(陰記), 받침돌은 농대(壟臺)라고 합니다. |
건원릉으로 오르는 능역의 사초지는 높고 경사가 많이 졌습니다. 장명등 앞에는 다른 능에서는 볼 수 없는 정중석이 있습니다. |
▲ 건원릉 능역 전경(앞의 돌은 정중석) |
▲ 능역에서 내려다 본 비각과 정자각 |
건원릉 답사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봉분 위에 자라는 억새입니다. 늦가을에 가면 누렇게 자란 억새가 장관일 것 같습니다. |
▲ 건원릉의 봉분 위에 무성하게 자란 억새 |
병풍석의 면석에 새겨진 조각들은 크기는 작지만 계비인 현덕왕후의 정릉에 세웠던 것과 같습니다. 지금은 복원된 청계천 광통교에 가면 정릉의 면석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혼유석의 받침인 고석(족석)에 새겨진 조각도 다른 곳 과는 조금 모양이 다릅니다. 혼유석의 받침인 고석이 중앙에 한 개가 더 있는데, 좌측 뒤편의 고석이 반쯤 깨져서 받쳐 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 병풍석의 면석 |
▲ 혼유석과 고석 |
▲ 고석에 새겨진 귀면 |
건원릉(健元陵)은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능으로 동구릉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태조는 1335년 출생하여 1356년 중앙 정계에 등용된 후 홍건적을 방어하고 원나라를 격파하거나 남해 일대의 왜구를 초벌하는 등으로 이름을 떨쳤다.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반대파를 제거하고 정치적 실권을 잡게 되며 우왕(禑王)과 창왕(昌王)을 폐하고 전국의 병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어 옹립한 공민왕을 다시 폐하면서 경제적 기반을 잡게 되고 신흥 정치 세력을 배경으로 그는 1391년 7월 17일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랐다. 1393년 국호를 조선으로 고치고 오늘날의 한양으로 천도하게 되어 500여 년의 조선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태조는 1408년 승하했고 시호는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고, 묘호는 태조이며,1899년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로 추존되었다. 건원릉은 고려 왕릉 중 가장 잘 정비된 공민왕(恭愍王)과 노국(魯國) 공주의 현정릉(玄正陵) 제도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
휘릉은... |
동구릉에는 능이 많다보니 특별한 왕과 왕비가 아닌 다음에야 그저 한 곳의 왕릉인가 보구나 하고 갑니다. 휘릉 역시, 별다른 특징은 없습니다. 젊은 남녀가 정자각에 걸터 앉아서 한가로이 밀어를 속삭이는 모습을 보니 20수년 전에 동구릉에서 데이트하던 생각이 나는군요. 예나 지금이나 왕릉은 데이트 장소로도 좋은 것 같습니다. |
▲ 홍살문 앞에서 바라 본 휘릉 |
▲ 수복방터 |
▲ 비각 |
대부분의 왕릉이 그렇듯이 수복방터에는 주춧돌만 남아 있으며, 이 곳의 비각은 다소 초라합니다. 특히, 휘릉은 안쪽에 들어 앉아 있어서 사람들도 드문 편입니다. |
▲ 정자각 좌측에서 올려다 본 휘릉의 능역 |
▲ 휘릉의 능역 |
능역의 사초지도 그다지 높지 않으며, 능역내에 별다른 특징은 없으나 이 능역의 봉분 뒷 부분에서 곡장이 있는 곳 까지의 경사가 많이 졌는데, 그 곳에 석호를 배치해서 힘들게 앉아 있는 모습이 조금 안스럽네요... |
▲ 능역 좌측편 석물들 |
▲ 능침 뒤편의 석호 모습 |
▲ 능역에서 내려다 본 정자각 |
휘릉(徽陵)은 조선 제16대 인조(仁祖)의 계비 장렬(莊烈) 왕후 능이다. 건원릉 바로 서쪽에 보이는 능이다. 장렬 왕후는 1624년 태어났고 1638년 열 다섯의 나이로 인조의 계비로 책봉되었다.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스물 여섯에 대비가 되고 10년 뒤 효종마저 세상을 떠나자 대왕 대비에 올랐다. 1688년 64세의 나이로 소생없이 승하하였다. 이렇듯 인조 계비에 이어 효종, 현종, 숙종 대까지 4대에 걸쳐 왕실의 어른으로 자리 잡았다. 장렬 왕후의 상복에 관한 예송(禮訟) 분쟁으로 서인과 남인의 정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승하한 뒤에 장렬 왕후의 능침은 건원릉 서쪽 언덕에 모셔졌다. |
원릉은... |
원릉 역시, 휘릉을 돌아 나와서 동선을 따라가다가 우측 오솔길로 접어 들어야 합니다. 일부러 신경쓰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습니다. |
▲ 원릉의 참도 전경 |
▲ 수복방터 |
▲ 비각 |
원릉은 조선조 최장수(83세) 임금이자 제일 오랫동안 재위(52년)했던 영조와 15살에 66세였던 영조와 가례를 올린 정순왕후와 함께 쌍릉으로 조성되었습니다. |
▲ 원릉의 능역 전경 |
▲ 원릉의 능역 후경 |
영조는 정비인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서오릉에 쌍릉으로 조성하여 뒤에 자신도 서오릉의 홍릉에 묻히길 원했으나 사후에 영조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동구릉으로 능지가 정해지고 뒤에는 계비인 정순왕후와 함께 쌍릉으로 조성되었습니다.
정성왕후는 영조와 53년간을 함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사후에 대신들의 권력과 당쟁으로 인해서 태조와 함께 묻히지 못하고 지금까지 옆자리가 비워진 모습을 보면 개인적으로는 왕릉 중에서 서오릉에 있는 홍릉이 제일 안스럽습니다. |
▲ 능역 좌측 석물들 |
▲ 봉분과 봉분을 연결한 난간석 |
▲ 능역 좌측 석물들 |
원릉(元陵)은 제21대 영조(英祖) 대왕과 계비(繼妃) 정순(貞純) 왕후의 능이다.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자 경종의 동생으로 1694년 태어났다. 1721년 경종이 즉위하나 경종의 건강과 아들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노론 측은 연잉군(延잉君) 즉 영조의 왕세자 책봉을 주장하고 소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1721년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724년 경종의 승하로 즉위하였다.
영조는 각 붕당간의 탕평 정국을 이루는데 온 힘을 쏟았고 서원의 개인적인 건립 금지와 동색(同色) 금혼패(禁婚牌)를 걸게 함으로써 당색 결집에 대한 우려를 환기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구황 식량의 수급과 서자의 관리 등용 그리고 외성의 축조 등으로 군비 확장과 실학을 진작시켰다.
『속오례의(續五禮儀)』와 『속대전(續大典)』 등의 많은 서적을 간행, 반포하였다. 재임 동안 이인좌의 난과 나주의 괘서 사건 그리고 아들인 사도 세자의 죽음까지의 많은 정세 흐름을 겪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의 정치적, 사회적으로 많은 변화를 이끈 영조는 1776년 승하하였다. 계비인 정순 왕후는 1745년 태어나 영조의 정비 정성(貞聖) 왕후가 승하하자 열다섯살의 나이로 1759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
동구릉 3편에서 계속... |
동구릉 찾아가는 길 |
소재지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산2-1 버스 - 서울 → 동서울 → 구리시 → 동구릉 - 서울 → 의정부 → 퇴계원 → 동구릉 - 서울 → 화랑대사거리 → 구리시 → 동구릉 ※ 구리시내에서 퇴계원 방향(43번국도)으로 약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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