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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왕릉 여행 [09] 지역별 왕릉군(15) - 금곡지구 관리소

장안봉(微山) 2012. 12. 26. 18:17

왕릉 여행(9) - 지역별 왕릉군(15)

15. 금곡지구 관리소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홍유릉(洪裕陵)
(洪陵)은 조선 제26대 고종(高宗)과 황후인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으로 합장릉이며, 유릉(裕陵)은 조선조 마지막 황제인 제27대 순종(純宗)과 황후인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계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합장릉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 홍릉의 능역

▲ 유릉의 능역

홍릉은...

고종은...
고종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1863년 철종(哲宗)이 자손이 없이 승하하자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며, 즉위 후 처음
10년간은 흥선대원군이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렸고, 1873년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직접 나라를 다스렸으나 정치적 실권은 명성황후의 친인척인 민씨 일족이 장악하였습니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연호를 광무(광무)라 하여 자주 독립 국가로서의 면목을 세계에 알리고자 하였으며, 1907년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보호하고자 세계만국평화회담이 열리고 있는 네덜란드 헤이그로 밀사를 파견하였으나, 일본은 이 일을 이유로 삼아 황제위를 순종에게 넘기도록 강요하였습니다.

 

고종이 재위하던 44년간은 외세의 침입이 잇달았던 격동기였으며, 고종은 이를 막아내려고 노력하였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1919년 1월 21일 67세로 승하 하셨습니다. 고종의 인산(因山)일인 3월 3일을 전후해서 전국에서 3.1 독립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 좌로부터 홍릉의 영천/비각/침전

▲ 홍릉의 능역 후경

명성황후는...
명성황후는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로 고종 3년(1866) 16세에 왕비가 되었고, 고종 11년 왕자인 순종을 낳았으며, 고종의 친정 이후 황후와 친인척인 민씨 일족이 실권을 장악하였으나 정치 활동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임오군란(1882) 때에는 충주로 피신하여 겨우 목숨을 건진 일도 있었으며, 명성황후는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와 러시아의 세력을 끌어 들여 정치적 기반을 다지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 정책은 일본을 자극하였고 결국 일본 공사가 보낸 자객에게 1895년 10월 8일 경복궁 건청궁(乾淸宮)에서 암살당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발생하였습니다.

▲ 홍릉 길목의 숲

▲ 홍릉의 방지원도

▲ 홍릉의 수라간

▲ 홍릉의 재실

홍릉은...
홍릉(洪陵)은 명성황후가 1895년에 시해된 뒤 우여곡절을 겪고 동구릉 내에 숙릉(肅陵)으로 조성했다가, 대한제국 수립과 함께 서울 청량리로 옮겨 홍릉으로 조성하였으며, 그 후 1919년에 고종이 승하하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천장하여 합장릉의 형식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홍릉은 정문에서 왼쪽으로 꺽어지면 바로 금천교를 만나며, 홍살문 전까지 3개의 금천교가 있습니다. 능역으로 가는 길은 숲이 울창하며, 오른쪽에는 방지원도가 있습니다. 우거진 숲 속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들이 나온 가족들로 가득했으며, 조선조 왕릉은 역사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시민들이 가족들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로도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금천교를 지나면 넓은 공간이 보이고 왼쪽에는 수라간과 재실이 있으며, 오른쪽에는 수복방이 있습니다. 수복방 앞으로는 홍살문이 있고, 홍살문 안의 참도 양 옆으로는 중국 황제의 능에서나 볼 수 있는 큰 석물들이 도열되어 있습니다. 석수(石獸)는 양 옆에 7쌍이 있으며, 석마 2쌍을 제외한 해태, 기린, 낙타, 호랑이, 코끼리는 그 동안 보아 온 석호, 석양과는 상이해서 아주 이질적입니다. 앞에 있는 문·무인석도 삐쭉하면서 얼굴 생김새나 모양에 기품이 없어 보입니다.

▲ 홍릉의 수복방

▲ 홍릉의 홍살문과 침전

▲ 홍릉의 무인석과 석수

유릉은...

순종은...
순종은
고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광무 원년(1897)에 황태자가 되었고 광무 11년(1907) 7월에 고종의 뒤를 이어 황제위에 올랐으며, 황제위에 오른 후 연호를 융희(융희)라 정하고 기울어 가는 국운을 바로잡으려 하 였으나 재위 4년만인 1910년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후 순종은 단지 이왕(李王)으로 불렸고 1926년 4월 25일 53세로 승하 하셨습니다. 순종의 인산일인 6월 10일을 기해 전국에서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 유릉의 침전 뒤편 전경

▲ 유릉의 능역 후경

순명효황후는...
순명효황후는 여은부원군 민태호의 딸로 고종 19년(1882)에 세자빈이 되었고 광무원년(1897) 황태자비로 되었으나 순종이 즉위하기 전인 광무 8년(1904)에 33세로 승하하셨습니다.

 

순정효황후는...
순정효황후는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로 광무 10년(1906) 12세의 나이로 황태자비에 책봉되었으며, 그 다음해 순종이 황제위에 오르자 황후가 되었습니다. 1910년 일제가 국권을 빼앗으려 조약 체결을 서두르자 황후가 옥새를 치마 속에 감췄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고 하며, 1966년, 72세로 창덕궁 낙선재에서 승하하셨습니다.

▲ 유릉 입구(오른쪽 건물이 재실)

▲ 홍살문 앞에서 본 유릉 전경

유릉은...
유릉(裕陵)은 조선 시대 마지막 왕릉으로 1904년 처음 조성된 순명효황후의 유강원(裕康園)을 순종 즉위 후인 1907년 황후의 능으로 추봉하여 능호도 유릉으로 바꾸었으며, 1926 순종이 승하하자 지금의 홍유릉으로 옮겨서 순종과 합장하였습니다. 그 뒤에 계후인 순정효황후가 1966년에 승하하여 유릉에 합장하였습니다.

 

유릉은 홍릉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능묘 제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홍릉을 먼저 보고 정문으로 다시 돌아 나와서 정문을 지나 금천교를 지나면 정면에 재실이 있으면 왼쪽으로 유릉의 전경이 보입니다. 재실이 끝나는 지점에 금천교가 하나 더 있으며, 금천교 바로 앞에는 어정이 있습니다.

 

약간 오른쪽으로는 홍살문이, 정면에는 침전이 있으며, 홍살문과 침전 사이에는 홍릉에서와 같은 석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릉의 석물들 중에서 문, 무인석은 홍릉에서 보다는 얼굴의 생김새나 모양새가 다소 친근한 느낌이 들며, 문·무인석은 굉장히 큽니다. 홍릉과 유릉의 석물들을 사진으로나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 홍릉의 문인석

▲ 홍릉의 무인석

▲ 홍릉의 석수(해태)

▲ 홍릉의 석수(코끼리)

▼ 유릉의 문인석

▼ 유릉의 무인석

▼ 유릉의 석수(해태)

▼ 유릉의 석수(코끼리)

침전은...
홍유릉이 조선조 왕릉과 큰 차이점 중의 또 한 가지는 정자각 대신침전(寢殿)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중국을 섬기는 제후 국가의 예에 따라 만들어진 조선 역대의 건물과는 건물 형식과 규모가 다르며, 종래의'丁' 자 모양의 정자각 대신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건물을 지었습니다.

 

참도는 중앙에 신도, 양 옆으로 어도가 있으며, 침전 정면으로 오르는 계단은 중앙에 신계와 양 옆으로 계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정자각에서와 같이 신계, 동계가 있으며, 서쪽에는 정자각과는 달리 서계만 있는 것이 아니고 신계도 있습니다. 동계 앞에는 비각이 있는데 기존 왕릉의 비각보다는 크며, 안은 들여다 볼 수 없었습니다.

▲ 유릉의 침전

▲ 유릉의 서편에는 신계도 있음.

▲ 유릉의 비각

유릉의 능역은...
유릉의 능역은 볼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으며, 홍살문 앞에서나 멀리 봉분의 윗 부분만 조금 보입니다. 침전의 뒤로 가 보아도 언덕이 져서 아예 보이지도 않습니다.

 

조선조 왕릉 중에 한 봉분에 3개의 방을 만든 동봉삼실릉은 유릉 뿐입니다. 유릉은 중앙에 봉분이 위치하고, 그 주위로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둘러져 있으며, 봉분의 정면에는 상석과 장명등이, 양 옆으로는 망주석이 놓여 있습니다. 또한 능 전체는 낮은 곡장이 둘러져 있습니다.

▲ 석수 앞의 관람객이 자그마함.

▲ 침전 뒤편에서는 사초지만 보임.

▲ 유릉의 능역 전경

홍유릉 권역내에 있는 왕가의 묘들은...

홍유릉내에는 왕가의 묘들도...
홍유릉 주자창 입구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 들어서 100여미터 정도 가면 갈림길이 나옵니다. 왼쪽 숲길로 따라 들어가면 의민황태자가 묻혀있는 영원덕혜옹주묘 그리고 더 안쪽으로는 의친왕묘가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 몰랐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홍유릉 권역에 있는 왕가의 묘에 대해서는 잘 모르실 겁니다. 이 곳까지 금곡지구 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영원은...

의민황태자는...
조선 왕조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는 조선 제26대 고종황제의 셋째 아들이며 순종의 이복 동생으로 순헌황귀비 엄씨 소생입니다. 고종 광무 4년(1900) 영친왕에 책봉되고, 순종 융희 원년(1907) 황태자가 되었으며, 11세에 강제로 일본에 끌려가 교육을 받았고, 일본 왕족 방자 여사와 혼인하였습니다.

 

1910년 일본에 국권을 빼앗겨 순종 황제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영친왕도 황태자에서 왕세제(王世弟)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1926년 순종이 돌아가시자 다시 이왕(李王)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영친왕은 일본의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육군중장을 지냈습니다.

 

1963년 11월 우리나라로 돌아와 1970년 별세 하였으며, 의민황태자비인 방자 여사는 창덕궁 낙선재에서 거처하다가 1989년 별세하여 의민황태자 옆에 함께 묻혔습니다.

▲ 영원의 재실

▲ 홍살문 앞에서 본 영원 전경

▲ 정자각 위에서 바라본 영원 능역

영원은...
영원(英園)은 의민황태자 이은(1897-1970)과 의민황태자비(1901-1989)의 묘소입니다.
영원 입구 좌측에는 재실이 있으며, 다른 원(園)들과 같이 홍살문, 참도, 정자각, 비각이 있습니다. 능역은 정자각 바로 뒤에 있는데, 높이 있어서 봉분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능역은 비가 우측편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 영원의 능역 전경

▲ 영원의 석물들

▲ 영원의 후경

이구 황세손은 영원 바로 옆에 안장되어...

이구 황세손은...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왕자 영친왕의 아들이다. 1931년 영친왕과 일본 왕실의 이방자(나시모토 마사코) 여사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첫째 아들 진(晋)이 생후 8개월만에 비명 횡사하여 사실상 마지막 황세손이 되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 왕실 학교인 가쿠슈인(學習院)에서 교육을 받고 1959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 매사추세츠공대(MIT) 건축과를 나와 미국에서 건축사일을 하기도 했다. 1958년 뉴욕의 한 교회에서 독일계 미국인의 딸 줄리아와 결혼했으며 슬하에 자녀는 없다.

 

구황실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기피로 고국땅을 밟지 못하다가 1963년 병석의 부모, 줄리아와 함께 귀국하여 낙선재에서 부모들과 함께 기거했다. 그러나 1977년부터 황세손 부부는 별거에들 어가 부인은 낙선재에 기거하기 시작했고, 1979년에 운영하던 회사가 부도가 난 뒤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종친들의 종용으로 대를 잇지 못한 줄리아와 1982년 강제 이혼하는 등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혼 후 줄리아씨는 낙선재를 떠났다.

▲ 영원(좌)과 이구 황세손 묘(우)

▲ 이구 황세손 묘

▲ 영원 정자각 후경

이구 황세손의 갑작스런 죽음...
2005년 7월 19일자 대한미국 모든 신문에 일제히 보도된 '마지막 황세손 이구씨 별세'란 제하의 기사...

 

"대한제국 마지막 황세손인 이구(李玖·전주이씨 대동종약원 명예 총재)씨가 지난 16일 오후 일본 도쿄(東京)의 한 병원에서 심장 마비(추정)로 별세했다고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측이 19일 발표했다. 향년 74세. 이로써 대한제국의 마지막 적통이 끊어진 셈이다.

 

장례는 황세손장례위원회장으로 열리며 이환의 전주이씨 대동종 약원 이사장과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공동위원장을 맡는다. 장례 위원회는 일본에서 유해가 운구되는 대로 고인이 기거하던 창덕 궁 낙선재에 빈청을 마련할 계획이며 24일, 9일장으로 치르게 된 다. 장지는 남양주시 홍릉 뒤편 영친왕 묘역(영원 구역)에 모실 계획이다."

이구 황세손의 묘역은 그의 부친 영친왕의 능역 바로 우측 능선(정자각에서 바라 본 방향)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곳에 안장된지가 만 1년이 지났는데도 묘비를 비롯하여 석물이 아직 설치하지 않았으며 봉분은 근래에 조성된 것 처럼 풀도 채 자라지 않았습니다.

덕혜옹주 묘는...

덕혜옹주는...
덕혜옹주(德慧翁主)는 고종과 양귀인 사이에 1912년에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고종의 사랑을 듬뿍 받는 귀여운 옹주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제의 무자비한 계략에 의해 덕혜옹주는 11살의 어린나이에 유학이란 명목으로 고종과 생모 양귀인의 품을 떠나 일본으 끌려갔으며, 1930년에 일본의 벽촌인 대마도 번주의 아들 인 종무지(宗武志)에게 시집을 갔으나, 정신이 이상하다 하여 이혼을 당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슬하에 딸 하나(마사에)를 두었으나, 그녀 역시 삶을 비관하여 투신 자살, 혹은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로 인해 덕혜옹주는 더욱 더 깊은 심신의 상처를 입었다고 합니다. 덕혜옹주는 천신만고 끝에 해방 이후 귀국하여 고국의 땅을 밟았으며, 1989년 낙선재에서 쓸쓸히 작고하셨습니다.

▲ 덕혜옹주 묘역 전경

▲ 덕혜옹주 묘역

▲ 덕혜옹주 묘

덕혜옹주 묘는...
영원에서 조금 더 가면 철조망 안으로 덕혜옹주 묘가 보입니다. 20여 미터를 더 가면 철문이 있으나 자물쇠로 잠겨 있어서 들어 갈 수는 없습니다만, 들어 간다면 좌측으로 조금 돌아 올라가면 묘역이 보입니다. 묘역주변에는 잔디가 넓게 깔려 있으며, 봉분 양쪽에는 망주석이, 봉분 앞에는 상석과 장명등이, 봉분 바로 우측에 있는 묘비에는 '대한 덕혜옹주지묘'라고 쓰여 있습니다.

의친왕 묘는...

의친왕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로 귀인 장씨 소생이며 순종의 이복 동생이고 영친왕 이은의 이복 형입니다. 1877년에 태어 났으며, 15 세가 되던 1891년에 의화군(義和君)에 봉해지고 1893년 9월 김사준의 딸을 맞아 가례를 올렸습니다. 1894년 청. 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전승을 축하하는 보빙대사(報聘大使)로 임명되어 일본에 갔었으며, 이듬 해에는 특파대사에 임명되어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하였습니다. 1900년에는 미국으로 유학하였고 같은 해 8월에 의친왕에 봉해졌으며, 1905년 미국 유학을 마친 뒤, 귀국하여 적십자총재가 되었습니다.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에는 항일 독립투사들과 접촉하여 1919년 대동단(大同團)의 전협, 최익환 등과 상해 임시정부로의 탈출을 모의하여 계획을 실행에 옮기던 중, 만주 안동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강제로 본국에 송환 되었습니다. 그 뒤 여러 차례 일본으로부터 도일을 강요 받았으나 거부하여 항일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고 해방과 6.25가 지난 뒤, 서울 사가에서 1955년 79세를 일기로 영면하셨습니다. 의친왕 묘는 서삼릉에 조성되었다가 1996년, 현재의 홍유릉 능역내로 천묘(遷墓)었습니다.

▲ 의친왕 묘역 전경

▲ 의친왕 묘역

▲ 의친왕 묘

의친왕 묘는...
덕혜옹주 묘에서 아랫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면 의친왕의 묘역이 나옵니다. 봉분 양 옆에는 망주석이, 봉분 앞에는 상석과 장명등이 있습니다. 묘역 주변은 넓고, 사방에는 큰 나무들이 묘역을 감싸고 있으며, 햇볕도 잘 들고 묘역이 잘 관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묘비가 없어서 모르는 사람은 누구의 묘인지 모를 것으로 생각됩니다.

의친왕 서거 51주기 제향에 참석하다.

▲ 의친왕 전하 서거 51주기 제향을 마치고 기념촬영

의친왕 전하 서거 51주기 제향은...
2006년 8월 15일 의친왕 전하의 서거 51주기 제향이 홍유릉 권역내 의친왕 전하 묘소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이번 제향은 가족들이 아닌 우리황실사랑회의 주관으로 처음으로 진행된 추모 행사였으며, 나홀로의 왕릉 답사팀도 자리를 함께 하였습니다. 주관자나 참가자 모두에게 의미있는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 의친왕 전하 묘소에서 봉행된 의친왕 전하 51주기 추모 제향 광경

대중 교통편은...
 
   홍유릉은 여러 곳에서 버스 노선이 많아서 가기가 수월합니다.

    버   스 : 청량리(30, 165, 165-2, 165-3, 765, 765-1, 330)
                강변역(9-1, 9-3, 1115-2), 잠실역(901, 1115), 길동(1-3)
    기   차 : 경춘선 금곡역
    자가용 : 46번 국도 춘천방향 금곡역

홍유릉 위치도

소재지 : 경기 남양주시 금곡동 141-1

 

좌측빨간 깃발이 유릉이고,

 

우측빨간 깃발이 홍릉입니다.

 

영원과 덕혜옹주묘 그리고 의친왕묘는 홍유릉 주자창 입구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 들어서 100여미터 정도 가면 갈림길이 나옵니다.

 

왼쪽 숲길로 따라 들어가면 됩니다.

출처 : 한국의 능원묘
글쓴이 : 광나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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