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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서(序) 약재유고서(若齋遺藁序) -정도전-

장안봉(微山) 2013. 5. 28. 23:11

서(序) 
 
 
약재유고서(若齋遺藁序)
 

내가 하루는 망우(亡友) 약재(若齋)의 유고(遺稿) 몇 책을 얻어서 눈물을 지으며 다 읽고 이내 붓에 먹을 적시어 그 책 머리에 쓰기를, “이는 동국 시인 김경지(金敬之)의 소작이라.” 하였다. 그 글씨가 끝나기도 전에 어떤 객이 힐책하기를, “김선생의 학술과 행실이 어찌 시인에 그칠 따름이랴. 선생은 세가(世家)의 집에 나서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학문의 길에 나아간 뒤로는 포은(圃隱) 정공(鄭公)ㆍ도은(陶隱) 이공 및 고(故) 정언(正言) 이순경(李順卿)과 더불어 우의가 더욱 돈독하여 조석으로 강론하며 연구하여 조금도 게으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 동방 의리(義理)의 학문은 이 두세 분으로 말미암아 제창된 것이다. 국가가 정학(正學)을 숭상하여 옛 제도를 신장하고 생원(生員)의 액수(額數)를 증광(增廣)하자, 재상 한산(韓山 목은) 이공이 사석(師席)의 맹주(盟主)가 되어 유명한 선비를 발원하여 학관(學官)으로 삼았는데, 선생이 다른 관직으로 직강(直講)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래서 제생들이 경서를 들고 자리 앞에 열지어 수업하였고 비록 휴가를 얻어 집에 있을 때에도 따라와서 질문하는 자가 서로 줄지어 유익된 바가 많았으니, 선생의 학술의 올바름이 어떻다 할 것이겠는가. 갑신ㆍ을묘의 해를 당해서 국가에 사고가 많았는데 당시 재상이 세력을 쓰고 있으므로 선생은 글월을 올려 잘 잘못을 심히 말하였는데, 보고가 되지 않은 채 죽주(竹州)로 귀양갔다가 예(例)에 의하여 외가의 고을 여흥(驪興)군으로 이사하여 여강어부(驪江漁父)라 스스로 호(號)를 짓고 그 거실(居室)을 육우당(六友堂)이라 하고, 강ㆍ산ㆍ춘ㆍ하ㆍ추ㆍ동의 경치를 즐기며 7년의 세월을 보냈다. 나라에서 의로운 풍모를 높이 보아 불러들여 간관(諫官)의 책임과 관직의 지킴이 둘 다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또 선생이 외교에 대한 재주가 있으므로 요동도사(遼東都司)에 예를 드리게 하였는데, 때마침 조정의 명령이 내려 사사로이 교제하는 것을 허하지 아니하고 선생을 운남(雲南)에 유치하게 되었는데 발길이 사천(四川)의 노주(瀘州)에 당도하여 병을 얻어 여관에서 작고하였다. 선생이 처음 길을 떠나 병들어 죽기까지에 만리의 길을 걸으면서 온갖 고초를 겪었느나 조금도 염려하고 애달파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죽음에 임박하여 말하기를, ‘내가 집에서 아녀자의 손에서 죽는다면 누가 알아주랴. 지금 만리 밖에서 왕사(王事)로 죽어서 중국 사람으로 하여금 나의 성명을 알게 하였으니, 죽을 곳을 얻었다 이를 수 있다.’ 하고, 가사(家事)에는 한 마디 말도 언급하지 아니하였으니, 선생의 행위의 높음이 또 어떻다 하겠는가.” 하였다.
나는 눈물을 흘리고 말하기를, “그대 말이 진실로 옳다. 경지(敬之)의 학술과 행실은 사첩(史牒)에 갖추어 있고 사람의 입에 전파하리니, 어찌 내 말을 기다릴 것이 있으랴. 시도(詩道)를 말하기 어려운 것이 오래였다. 아송(雅頌)이 폐기됨으로부터 시인의 원망하고 비방하는 작품이 흥기하였고 소명(昭明)의 《문선(文選)》이 행세하자 그 폐단이 나약에 치우쳤고, 당(唐) 나라에 이르러 성률(聲律)이 시작되어 시의 체가 드디어 크게 변하였으니, 이태백(李太白)과 두자미(杜子美)를 제일 탁월하다 이르는 바이다. 송(宋) 나라가 흥기하자 진유(眞儒)가 쏟아져 나오니, 경학과 도덕이 삼대 시대를 따라갈 만하였지만, 시에 있어서는 당률(唐律)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니, 근체(近體)라 해서 경솔히 여길 수 없다. 그러나 세상에서 시를 말하는 자는 간혹 그 소리는 얻었으나 그 맛이 없고 그 뜻은 있으나 그 문장이 부족하니, 과연 능히 성정에서 발표되어 물(物)로써 흥(興)하고 같은 유(類)로써 비(比)하여 시인의 본뜻에 위배되지 않은 자가 거의 드물다. 중국에 있어서도 그렇거든 하물며 변방에 있어서랴. 경지(敬之)의 외조(外祖) 급암(及庵) 민공(閔公)이 사학(詞學)을 잘하되 더욱 당률(唐律)에 능하여 익재(益齋), 우곡(愚谷)같은 분들과 서로 부르고 화답하곤 하였는데, 경지가 조석으로 곁에 모시고 돌보는 데서 느끼고 열리어 자득한 것이 더욱 많았다. 내가 일찍이 경지의 시를 보니, 그 생각하는 것은 아득하여 집착한 바 없고, 그 얻은 것은 충실하여 자득한 것 같으며 그 붓을 휘두른 것은 나풀거려 구름이 지나고 새가 나는 것 같으며, 그 시됨이 청신하고 유려하여 그 인품과 같으니, 경지는 시도에 있어 완성됐다 하겠다.” 하였다. 객이, “그렇다.” 하므로 마침내 써서 서문을 하였다.

출처 : ▒ 한 산 草 堂 ▒
글쓴이 : 천하한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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