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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비명(碑銘)묘엄존자 탑명(妙嚴尊者塔銘) -변계량-

장안봉(微山) 2013. 5. 28. 23:08

비명(碑銘) 
 
 
묘엄존자 탑명(妙嚴尊者塔銘)
 

우리 태조(太祖) 원년 겨울 10월에, 사(師)는 임금의 부름을 받고 송경(松京)에 왔다. 태조가 이달 11일 탄신날로써 법복(法服)과 기구(器具)를 갖추어, 사(師)를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변지부무애종 수교홍리보제도대선사 묘엄존자(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傳佛心印辯智扶無?宗樹敎弘利普濟都大禪師妙嚴尊者)에 봉하였다. 그 자리에는 양종(兩宗 조계종(曹溪宗)과 천태종(天台宗)ㆍ교종(敎宗)과 선종(禪宗)) 오교(五敎 대승불교(大乘佛敎)의 계율종(戒律宗)ㆍ열반종(涅槃宗)ㆍ법성종(法性宗)ㆍ화엄종(華嚴宗)ㆍ법상종(法相宗))의 여러 절의 승려들이 다 있었다. 사가 왕사(王師)의 좌석에 올라 소향(燒香)하고 축복을 마친 뒤에 불자(拂子 먼지털이)를 일으켜 세워 대중(大衆)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이것은 삼세(三世)의 모든 불설(佛說)이 이르지 못하였으며, 역대의 조사(祖師)들이 전도하지 못하였다. 너 대중들이 도리어 알 수 있을까. 만약 심사(心思)와 구설(口舌)로써 계산하고 비교하여 이야기하는 자는 우리 선종(禪宗)에게 무엇이 있겠는가.” 하고, 임금에게 고하기를, “유교에서는 인(仁)이라고 말하고, 불교에서는 자비라고 말하지만, 그 용(用)은 한가지입니다. 백성을 보호하기를 갓난애기를 보호함과 같이 한다면, 곧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이요, 지극히 어진 마음과 크게 자비한 마음으로 나라에 임한다면 자연히 성수(聖壽)는 끝이 없고 자손들은 길이 장성하여, 사직이 편안할 것입니다. 지금 개국한 처음을 당하여 형법(刑法)에 빠진 자가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 모두를 동일하게 사랑하시어 모두 용서하셔서 모든 신하와 백성들로 하여금 함께 인수(仁壽)의 지경에 이르게 한다면. 이것은 우리 국가의 무궁한 복인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듣고 좋게 여겨 즉시 중앙과 지방의 죄수들을 놓아 주었다. 그때에 한산(韓山) 목은(牧隱) 이 문정공(李文靖公)이 시(詩)를 지어 사(師)에게 보내 왔는데,

착하신 임금은 용이 하늘에 날고 / 聖主龍飛天
왕사께서는 부처가 세상에 나오심일세 / 王師佛出世

라고 하였다.
임금이 회암사(檜?寺)의 나옹(懶翁) 스님이 있던 대도량(大道場)에 사(師)를 들어가라고 명령하였다. 정축년 가을에 북쪽 벼랑에 수탑(壽塔)을 지으라고 명령하였다. 사의 스승 지공(指空)의 부도(浮圖)가 있는 곳이었다. 무인년 가을에 사가 늙었다고 하여 사임하고 돌아가 용문(龍門)에 살고 있었다. 임오년 5월에 지금의 우리 주상 전하께서 또 회암사에 들어가라고 명령하였다. 다음해 정월에 또 사임하고 금강산에 들어가더니, 을유년 9월 11일에 입적하였다. 3년 만인 정해년 겨울 12월에 임금이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에게 명하여 사(師)의 유골을 회암(檜?)의 탑에 두게 하였다. 또 4년 뒤의 가을 7월에 시호(諡號)를 무엇무엇이라 했다. 상왕(上王)이 태조의 뜻을 임금에게 말하니, 임금이 신 계량에게 명하여 그 탑을 이름짓고 또 명(銘)을 쓰라고 하였다.
신 계량이 삼가 그의 제자 조림(祖琳)이 지은 행장(行狀)을 상고하여 보니, 사(師)의 휘는 자초(自超)이며, 호(號)는 무학(無學)이고, 살던 곳은 계월헌(溪月軒)이라고 하였다. 세수는 79세이며, 법랍(法臘)은 61세이다. 속성(俗姓)은 박씨니 삼기군(三岐郡) 사람이다. 아버지의 휘는 인일(仁一)이며 증 숭정문하시랑(贈崇政門下侍郞)이고, 모(母)는 고성(固城) 채씨(蔡氏)이다. 채씨가 꿈에 아침해가 품속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임신하여 태정(泰定) 정묘년 9월 20일에 사를 낳았다. 겨우 강보(襁褓)를 면하게 되자 문득 소제(掃除)를 하였으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서는 남이 감히 앞서지 못하였다. 나이 18세가 되어서 벗어 버리듯 티끌세상 밖에 나가고자 하는 뜻이 있어서 혜감국사(慧鑑國師)의 상족제자(上足弟子 수제자)인 소지선사(小止禪師)에게 머리를 깎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용문산(龍門山)에 이르러 혜명국사(慧明國師)와 법장국사(法藏國師)에게 법을 물으니, 법의 교시(敎示)를 마치고 곧 말하기를, “바른 길을 얻은 자가 너 아니고 누구겠느냐.” 하고, 드디어 부도암(浮圖菴)에 살게 하였다. 하루는 암자 안에서 화재가 일어났는데 사(師)가 홀로 나무 허수아비처럼 고요히 앉아 있으니, 여러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었다. 병술년 가을에 《능엄경(楞嚴經)》을 보다가 깨달은 것이 있어 돌아가 그의 스승에게 고하니, 스승이 칭탄하였다. 이로부터 잠을 자지 않고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참선에만 전심하였다. 기축년 가을에 진주(鎭州)의 길상사(吉祥寺)에 이르러 살았으며, 임진년 여름에는 묘향산 금강굴(妙香山金剛窟)에 머무렀는데, 공부가 더욱 진보하였다. 간혹 잠을 자게 되면 마치 종이나 경쇠를 쳐서 깨우는 자가 있는 것 같았는데, 이때에 석연(釋然)히 깨닫는 바 있어서 스승을 찾아 질의하고 싶은 마음이 급급하였다. 계사년 가을에 몸을 빼쳐 연경(燕京)으로 달려가 서천지공(西天指空)에게 참례하여 절하고 일어나 말하기를, “3천 8백 리에 친히 화상(和尙)의 면목을 뵈었습니다.” 하니, 지공이 말하기를, “고려(高麗) 사람을 모두 죽이겠구나.” 하였으니, 이는 허락한다는 뜻이다. 여러 사람들이 매우 놀랐다.
다음해인 갑오년 정월에 법천사(法泉寺)에 이르러서 나옹(懶翁)에게 참례하니 나옹이 한 번 보고 깊고 큰 그릇이라고 생각하였다. 무령(霧嶺)을 유람하고 오대산(五臺山)을 지나서 두 번째로 나옹을 서산영암사(西山靈?寺)에서 뵙고 두어 해를 머물렀다. 그가 선정(禪定)하고 있을 때에는 밥 먹을 때를 당하여도 알지 못하는 때가 있었으니, 옹이 보고 말하기를, “네가 죽었느냐.” 하니, 사(師)가 웃으며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옹(翁)이 하루는 사와 더불어 섬돌 위에 앉았다가 묻기를, “옛날 조주(趙州)가 수좌(首座)와 더불어 앉아서 돌다리를 보고 묻기를, ‘이것은 어떤 사람이 만들었느냐.’ 하니, 수좌가 답하기를, ‘이응(李膺)이 만들었습니다.’ 하였다. 조주가 말하기를, ‘어느 곳을 향하여 먼저 손을 대었느냐.’ 하니, 수좌가 대답이 없었다. 이제 누가 너에게 묻는다면 어떻게 적당히 대답하겠느냐.” 하였다. 사가 곧 두 손으로 섬돌을 잡아 보이니, 옹이 문득 그치고 갔다. 그날 밤에 사가 옹의 방에 가니, 옹이 말하기를, “오늘에야 비로소 내가 너에게 속이지 않은 것을 알았다.” 하였다. 뒤에 사에게 말하기를, “서로 아는 사람이 천하에 가득하나 마음을 아는 사람이 능히 몇 사람이나 되겠느냐. 너와 나는 일가(一家)를 이루었구나.” 하였다. 또, “도(道)가 사람에게 있으면 코끼리에게 상아가 있는 것과 같아서, 비록 감추고자 하나 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날 네가 어찌 남의 앞에 나서는 인물이 되지 않겠느냐.” 하였다. 사가 그 얻은 바를 이루었음은 거의 의심할 바가 없다. 그렇건만 산천을 두루 유람하고 스승과 벗을 참방(參訪)할 뜻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강소(江蘇), 절강(浙江) 지방에 유람하려 하였으나, 그때 남쪽 지방에 변란이 있어서 길이 막혔으므로 중지하였다.
병신년 여름에 우리 나라에 돌아오고자 작별을 고하니, 옹이 손수 한 종이에 글을 써서 전송하여 말하기를, “그 일상생활을 보니 모든 기틀이 세상과 더불어 다른 데가 있다. 선악과 성사(聖邪)를 생각지 않고 인정과 의리에 순종하지 않는다. 말을 내고 기운을 토할 때에는 화살과 칼날이 서로 버티는 것 같고, 글귀의 뜻이 기틀에 맞음은 물이 물에 돌아가는 것 같다. 한 입으로 손[客]과 주인의 글귀를 머금기도 하며, 몸이 불조(佛祖)의 관문을 통과하였다. 갑자기 떠난다고 하기에 내가 게(偈)를 지어 송별한다.” 하였다. 그 게송(偈頌)에 말하기를,

이미 주머니 속에 따로 세계가 있음을 믿어서 / 已信囊中別有天
동쪽 서쪽에서 삼현 쓰는 것을 일임하여 둔다 / 東西一任用三玄
누가 너에게 참방한 뜻을 묻는 이가 있거든 / 有人問?參訪意
앞문을 타도하고 다시 말하지 말라 / 打倒面門更莫言

하였다. 사(師)가 이미 돌아오니 나옹(懶翁) 또한 지공(指空)의 삼산양수수기(三山兩水授記)를 갖고 돌아와 천성산(天聖山) 원효암(元曉菴)에 머무르고 있었다.
기해년 여름에, 사가 가서 나옹을 뵈오니 불자(拂子)를 그에게 주었다. 옹이 신광사(神光寺)에 있으므로 사 또한 거기에 머물렀더니, 옹의 무리 중에 사를 꺼리는 자가 있었다. 사가 알고 떠나가니, 옹이 사에게 말하기를, “법통을 전하는 데 있어서 옷과 바리때[衣鉢]는 말과 글귀보다 못하다.” 하고, 시를 지어 사에게 주며 말하기를, “한가한 중들이 남이니 나니 교계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망령되게 옳으니 그르니 하고 말들을 하니, 매우 옳지 않다. 산승(山僧)이 이 네 귀[四句]의 송(頌)으로써 길이 뒷날의 의심을 끊는다.” 하였다. 그 글귀에 말하기를,

옷깃을 나누매 특별히 상량할 것이 있으니 / 分衿別有商量處
누가 속의 뜻이 다시 현묘함을 알리요 / 誰識其中意更玄
너희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더라도 / 任?諸人皆不可
내 말은 겁공을 꿰뚫고 통하리라 / 我言透過劫空前

하였다.
사(師)가 고달산(高達山) 탁암(卓菴)에 들어가 도를 닦고 있었는데, 신해년 겨울에 전조(前朝)의 공민왕이 나옹을 봉하여 왕사(王師)로 하고, 옹이 송광사(松廣寺)에 머무르면서 의발을 사에게 전하니 사가 게(偈)를 지어 사례하였다. 병진년 여름에 나옹이 회암사(檜巖寺)에 옮겨 가서 크게 낙성회를 개설하게 되었다. 급히 편지를 보내어 사를 불러다가 수좌(首坐)를 삼으니, 사가 극력 사양하였다. 옹이 말하기를, “많이 주관하는 것이 많이 사퇴하는 것만 같지 못한 것이지.” 하고, 제덕산(濟德山)에서는 수좌를 삼지 않고 와서 편실(便室)에 있게 하였다. 옹이 세상을 떠나니, 사가 여러 산으로 노닐면서 뜻을 감추고 남에게 알리고자 하지 않았다. 전조(前朝)의 말기에 명리로써 사를 불러 봉하여 왕사를 삼고자 하였으나, 사가 번번이 가지 않더니 마침내 조선 태조 원년인 임신년에, 태조의 지우(知遇)가 있었으니, 사(師)의 거취(去就)가 어찌 우연한 일이라고 하겠는가.
계유년에 태조가 풍수를 살펴 수도를 세우고자 하여 사(師)에게 수가(隨駕)를 명하였다. 사가 사양하니 태조가 사에게 이르기를, “지금이나 예전이나 서로 만난다는 것은 인연이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의 터잡는 것이 어찌 도사(道師)의 눈만하겠는가.” 하였다. 계룡산과 지금의 신도(新都)를 순행(巡幸)할 때, 사가 항상 호종(扈從)하였다. 그 해 9월에 사가 선사(先師) 지공(指空)ㆍ나옹(懶翁)의 두 탑(塔)의 명칭과 나옹의 진영(眞影)을 거는 일로써 왕지(王旨)를 받들어 회암사(檜巖寺)에 탑명(塔名)을 새기고, 광명사(廣明寺)에 괘진불사(掛眞佛事)를 크게 개설하였다. 스스로 나옹선사(懶翁先師)의 진영(眞影) 찬(讚)을 지어 말하기를,

지공의 1천 칼과 평산 절의 처림대사의 꾸짖음에 / 指空千劍平山喝
공부로 선택되어 어전에 설법했네 / 選擇功夫對御前
최후의 신령한 빛 사리를 남기시어 / 最後神光遺舍利
삼한의 조실에서 천만년을 전하리라 / 三韓祖室萬年傳

하였다.
10월에 나라에서 대장경 전독(轉讀)의 불사(佛事)를 연복사(演福寺)에 개설하고 사(師)에게 주석(主席)을 명하였으나, 사가 무인년에 사퇴한 뒤로부터는 여러 사람을 대하는 데 게을러져서 비록 임금의 명령일지라도 사양하고 다시 회암사(檜巖寺)로 갔다가, 곧 다시 금강산에 들어가서 진불암(眞佛菴)에 머물렀다. 을유년 봄에 약간 병이 났으므로 모시는 자가 의약을 드리고자 하니, 사가 거절하며 말하기를, “80세에 병들었는데 약은 써서 무엇한단 말이냐.” 하였다. 여름 4월에 금장암(金藏菴)에 옮겨갔으니, 바로 그가 입적(入寂)한 곳이다. 8월에 의안대군(義安大君)이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내왔었는데, 사(師)의 회답 편지에, “멀리 산중에 살고 있어서 만나 뵈올 기회가 없습니다. 어느 때 불회(佛會)에서 뵙고자 합니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멀지 않아 나는 갈 것이다.” 하였다. 얼마 뒤에 과연 사(師)의 병이 위독하였다. 중이 묻기를, “ 사대(四大) 가 제각기 떠나서 어느 곳으로 갑니까.” 하니, 사(師)는 “모르겠다.” 하였다. 또 물으니, 사가 성난 목소리로, “모른다.” 하였다. 또 중이 묻기를, “화상(和尙)은 병든 가운데 도리어 병들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까.” 하니, 사가 손으로 곁에 있는 중을 가리켰다. 또 묻기를, “육신이라는 것은 지ㆍ수ㆍ화ㆍ풍일 뿐이니, 어느 것이 진정한 법신(法身)입니까.” 하니, 사가 두 팔을 서로 버티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곧 하나이다.” 하였다. 대답을 마치고 고요히 세상을 떠나니, 한밤중이었다.
이 때 화엄종의 중 찬기(贊奇)가 송경의 법왕사(法王寺)에 있었는데, 꿈에 사가 공중(空中)의 불정(佛頂 석가모니 부처의 정수리[頂])의 연화(蓮華) 위에 있는데, 부처와 연화의 크기가 하늘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 꿈을 깨어서 마음으로 이상하게 여기어 절의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꿈 이야기를 하니, 듣는 자들이 그것은 심상한 꿈이 아니라고 의심하였다. 얼마 안 되어서 부고가 왔는데, 사가 입적한 시간이 바로 그 꿈을 꾼 때였다. 사가 지은 인공음(印空?)은 문정공(文靖公)이 그 첫머리에 서문(序文)을 썼으며, 인간(印刊)하여 이룩한 대장경(大藏經)을 용문사(龍文寺)에 봉안하였는데, 문정공이 그 말미에 발문을 썼다.
사는 성질이 문채나게 꾸미는 것을 즐겨하지 아니하며, 스스로 봉양(奉養)하는 것을 매우 박하게 하고, 남은 것은 곧 남에게 베풀어 희사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8만 가지의 행 중에서 젖먹이의 행이 제일이 된다.” 하면서, 모든 행위를 그 젖먹이처럼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또 그가 사람을 접대하는데 공손하며, 남을 사랑함이 정성스러움은 지극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힘써서 억지로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대체로 그의 천성이 그러하였던 것이다. 신 계량은 삼가 손을 들어 읍하고 머리를 조아려 그 탑을 자지 홍융(慈智洪融)이라고 명명(命名)하고, 또 이어 명(銘)을 쓴다. 명에 이르기를,

사의 도가 우뚝히 높으심이여 / 師道之卓
보통 생각할 바가 아니다 / 匪夷所思
선각의 적통이요 / 禪覺之嫡
태조의 스승이었다 / 祖聖之師
사께서 평상시엔 / 師在平居
아이와 같다가 / ?兒之如
구안한 이를 만나면 / 具眼之遇
화살과 칼날이 부딪치듯 버티었다 / 箭鋒相?
옷 한 벌 바리때 한 개로 / 一鉢一衣
겸손하고 겸손하여 스스로 낮추었다 / 謙謙自卑
나라에서 존숭함이 상대가 없었으나 / 尊崇無對
누구가 있는 듯이 삼가하시고 / 若或有之
세상에 나가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했는데 / 或去或就
그 행동이 구차하지 않았다 / 先不見苟
하늘이 주신 수명은 / 天錫佛壽
79세였으니 / 七旬有九
어디에서 오셨던가 / 來也何從
돋는 해 품에 품고 / 日射懷中
어디로 가셨는가 / 去也何向
연화 위의 하늘이로다 / 蓮華之上
경건한 그의 무리 / 虔虔其徒
행적을 표창할 것을 기획하니 / 圖表厥跡
천지 사이 견고한 것은 / 兩閒之堅
돌보다 오랜 것이 없도다 / 無久惟石
비석에 명을 새겨 / 刻此銘章
무궁한 후세에 보이노라 / 垂示罔極

하였다.


[주D-001]사대(四大) : 불가에서 말하는 인체를 구성하는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의 4대 원소.

출처 : ▒ 한 산 草 堂 ▒
글쓴이 : 천하한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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