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碑銘)
유명 시 강헌 조선국태조 지인계운 성문신무대왕 건원릉 신도비명 병서 (有明諡康獻朝鮮國太祖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建元陵神道碑銘 幷序)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돌봐 다스리는 운수를 열어 주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특이한 징조를 나타내어 그 임금이 될 징조를 보이는 것이니, 하(夏) 나라에서는 현규(玄圭) 를 준 일이 있었고, 주(周) 나라에는 협복지몽(協卜之夢)이 있었다. 한(漢) 나라를 거쳐서 그 이후로 어느 왕조에서나 각각 다 이러한 징조가 있었으니, 다 하늘이 준 것이고 사람의 모책에서 이루어 진 것은 아니다. 우리의 태조대왕(太祖大王)께서 아직 즉위하지 않았을 때, 공훈과 덕이 이미 높았으며 부명(符命) 또한 현저하였다. 꿈에 신인(神人)이 금척(金尺 금으로 만든 자)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와 주며 말하기를, “공은 마땅히 이것을 가지고 나라를 바로잡으리라.”고 한 일이 있다. 하 나라의 현규(玄圭)와 주 나라의 꿈과 더불어 같은 부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이인(異人)이 문에 와서 편지를 올리며 말하기를, “지리산의 바윗사이에서 얻은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글에는 ‘나무 아들이 삼한(三韓)을 고쳐 바로잡는다.[木子更正三韓]’라고 써 있었다. 사람을 시켜 나가 맞으려하니, 이미 가벼렸다. 그리고 서운관(書雲觀)에 예전부터 비장하여 오는 비기(秘記)의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에, ‘나무를 세워 아들을 얻는다.[建木得子]’라는 말이 있다. 조선을 진단(震檀)이라고 하는 설이 수천 년 동안 떠돌았는데 이제야 특별히 증험되었으니,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돌보아 돕는다는 것이 진실로 징험이 있는 것이다.
신이 삼가 선원계보(璿源系譜)를 상고하여 보니, 이씨는 전주(全州)의 망족(望族)이다. 사공(司空)은 휘가 한(翰)인데 신라에 벼슬하였고, 신라 종성(宗姓)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6대 손 긍휴(兢休)에 이르러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하였고, 13대에 이르러 태조 임금의 고조(高祖)인 목왕(穆王)은 원(元) 나라 조정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장(千夫長)이 되었다. 4대(四代)에 걸쳐 습작하여 모두 다 능히 잘하였다. 원 나라의 정치가 쇠퇴하게 되니, 황고(皇考) 환왕(桓王)은 돌아와 고려 공민왕을 섬기었다. 지정(至正) 신축년에 홍건적(紅巾賊)이 침략하여 왕경(王京)을 함락시키니, 공민왕이 남쪽으로 옮겨 가 군사를 보내어 싸워 이겨서 수복하였는데, 우리 태조께서 맨 먼저 승첩의 보고를 올리었다. 다음해 임인년에는 오랑캐 납합출(納合出)을 쳐서 달아나게 하였고, 또 그 다음해인 계묘년에는 위왕(僞王) 탑첩목(塔帖木)을 물리쳐 쫓으니, 공민왕이 믿고 의지함이 더욱 두터워졌다. 여러 번 벼슬이 승진되어 장(將)ㆍ상(相)에 이르게 되어 안팎을 드나들었다. 《경서》와 《사기(史記)》를 보고 힘써 노력함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세상을 구제할 도량과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은 지성(至性)에서 나온 것이었다. 공민왕이 훙(薨)하고 다른 성(姓)이 왕위를 절취하니, 권력 있는 간신들이 국정을 제멋대로 휘둘러 나라의 정치를 탁란하게 하고, 바다의 도적이 나라 안에 깊이 들어와 군(郡)ㆍ현(縣)에 불지르고 약탈하곤 하였다. 홍무(洪武) 경신년에 우리 태조가 운봉(雲峰)에서 싸워 이기니, 동남쪽이 편안하게 되었다.
무진년에 시중 최영(崔瑩)이 권간들을 베고 무찌를 때, 지나치게 참혹하게 하였는데, 우리 태조에게 의뢰하여 삶을 보전한 자가 자못 많았다. 최영이 태조를 시중으로 삼고, 이어 우군도통(右軍都統)의 절월(節鉞)을 주어서, 억지로 요동(遼東)을 치게 하였다. 군사가 위화도(威化島)에 머무를 때, 앞장서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바른 도리를 지켜 깃발을 되돌리었다. 군사들이 이미 언덕에 올라갔을 때, 큰 물이 섬을 삼켜 버리니 모두 신기하게 여기었다. 최영을 잡아 조정에서 물러나게 하고, 그 대신 이름난 유학자(儒學者) 이색(李穡)을 좌시중으로 삼았다. 바로 이때 권간들은 국정을 탁란하게 하고, 미치고 패려한 자들이 서로 모함하여서 위망(危亡)의 형세가 급급하니, 화란을 예측할 수 없었다. 우리 태조의 전이(轉移)하는 힘이 아니었다면, 온 나라가 위태하게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색이 말하기를, “이제 공이 의로운 일을 거사하여 중국을 높였으니, 집정대신(執政大臣)이 친히 입조(入朝)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고, 날을 정하여 명 나라 서울에 가게 하였다. 태조는 여러 아들 중에서 지금의 우리 주상전하를 골라서 색(穡)과 함께 가서 조현(朝見)하게 하니, 고황제(高皇帝)가 칭찬하고 돌려보냈다.
기사년 가을에 황제가 우리 나라에서 다른 성(姓)의 사람을 임금으로 삼은 것을 문책하여 왔으므로, 태조가 여러 장군과 재상들과 함께 왕씨(王氏)의 종친인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세우고 정성을 다하여 정사를 보필하였다. 사전(私田)의 제도를 폐지하고 쓸데없는 관원을 도태하니, 민중의 마음이 서로 즐거워하였다. 공이 높아지니 시기하는 자가 생겨서 참소와 간악한 모함이 번갈아 모함하게 되어, 정창이 자못 이에 의혹되었다. 태조는 벼슬이 성대하므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사퇴함을 얻지 못하였다. 그때 마침 서행(西行)으로 인하여 병을 얻어 돌아오니, 모함하는 자들의 음모가 더욱 급격하게 되었다. 전하(태종을 가리킴)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변고를 억제하니, 여러 가지 모함이 와해되었다.
홍무(洪武) 임신년 가을 7월 16일에, 전하가 대신(大臣) 배극렴(裵克廉)ㆍ조준(趙浚) 등 52명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태조를 추대하니, 신료와 부로들도 모의함이 없이 모두 뜻을 같이하게 되었다. 태조가 정변(政變)을 듣고 놀라 일어나 두 번 세 번 굳이 사양하다가 어쩔 수 없이 왕위에 올랐다. 마루의 섬돌을 내려 오지 않은 채 한 국가가 저절로 이루어졌으니, 하늘이 덕 있는 이를 계도하여 도움이 아니고서야 누가 능히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즉시 지중추원사 신 조반(趙?)을 보내어 알리니, 중국 황제가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삼한의 백성들이 이미 이씨를 높였으며, 백성들에게는 병화가 없고 사람마다 제각기 하늘이 주는 즐거움을 즐기고 있으니, 바로 상제의 명이라고 하겠다.” 하였다. 이어서 또 칙명이 있어 이르기를, “나라 이름은 무엇이라고 고치려 하는가.” 하였다. 즉시 예문관 학사 신 한상질(韓尙質)을 보내서 주청하니, 황제가 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조선(朝鮮)이라는 명칭이 아름다우니, 그 이름에 근본하여 이름 지음이 좋겠다. 하늘에 본받아 백성을 길러서 길이 후세 자손에 이르도록 창성하게 하라.” 하였다. 우리 태조의 위엄이 명성과 의로움과 열렬함이 위에 들려 황제의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청명(請命)하면 문득 윤허를 얻게 된 것이니,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3년이 지난 갑술년 여름에, 우리 나라를 황제에게 무함한 자가 있어서, 황제가 임금의 친 아들을 입조(入朝)시키라는 명령이 있었다. 태조는 지금의 우리 전하가 경서에 능통하고 사리에 통달하여 여러 아들들 중에서 제일 현명하다고 하여 즉시 보내어 명령에 응하였다. 도착하여서 진술하는 의견이 황제의 뜻에 맞으니, 예로써 우대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그 해 겨울 11월 한양에 수도를 정하였다. 궁궐을 짓고 종묘를 세웠으며, 일찍이 사대(四代)를 추존하여, 황고조(皇高祖)를 목왕(穆王), 배위(配位) 이씨(李氏)를 효비(孝妃)라 하고 황증조(皇曾祖)를 익왕(翼王), 배위 최씨를 정비(貞妃)라고 하였으며, 황조를 도왕(度王), 배위 박씨를 경비(敬妃)라 하고, 황고(皇考)를 환왕(桓王), 배위 최씨를 의비(懿妃)라고 하였다. 예악을 닦고 제사를 삼가며, 관복의 제도를 정하여 위의(威儀)의 등차를 구분하고, 학교를 일으켜서 재주 있는 자를 육성하며, 봉록을 후하게 하여 선비들을 권장하였다. 소송을 밝게 분별하여 바르게 판결하며 수령들을 뽑는 데 신중하게 하였다. 좋지 못한 정치는 모두 고치니, 여러 가지 공적은 밝게 빛났다. 바다의 왜구들이 와서 복종하고, 온 나라 안은 편안하게 되었다. 우리 태조의 높고 큰 성덕(盛德)은 정말 하늘이 주신 용기와 지혜이니, 총명하고 신무(神武)하고 영웅스럽고 위대한 임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간신(奸臣) 정도전(鄭道傳)이 표전(表箋) 때문에 황제의 조정에 견책을 받게 되자,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려고 음모하여 무인년 가을 8월에, 우리 태조가 병중인 틈을 타서 어린 얼자(?子)를 끼고 제 뜻을 제멋대로 펴보려고 하였다. 전하가 그 기미를 밝게 살피어 남김없이 제거하고, 적장자(嫡長子)인 지금의 상왕(上王)을 세자로 세울 것을 청하였다. 9월 정축일에 태조가 병이 낫지 아니하므로 지금의 상왕(정종〈定宗〉)에게 선위(禪位)하였다. 상왕은 후사가 없고, 또 나라를 열고 사직을 정한 것은 다 우리 전하의 공적이므로 전하를 세자로 책립하였다. 경진년 7월 기사일에, 태조에게 계운신무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겨울 11월 계유일에는 상왕 또한 병 때문에 우리 전하에게 선위하였다. 사신을 명 나라에 보내어 명을 청하니, 영락(永樂) 원년 여름 4월에 황제가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어, 황제의 인이 찍힌 조서를 받들고 와서 우리 전하를 국왕으로 책봉하고, 이어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 등을 보내어 와서 전하에게 곤룡포와 면류관 아홉 벌을 하사하니, 품수가 친왕(親王)과 비등하였다. 우리 전하가 양궁(兩宮)을 봉양함에 정성과 공경함을 지극하게 갖추었다.
영락(永樂) 무자년 5월 24일 임신년에 태조가 승하하시니, 춘추가 74세이며 재위 7년이고, 늙어서 정사를 보지 아니한 것이 11년이었다. 활과 칼을 갑자기 버리니, 슬프도다. 우리 전하께서는 애모함이 망극하였으며, 거상의 예를 극진히 하였다.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받들어 태조에게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라는 존호를 올리고, 이 해 9월 9일 갑인일에, 도성의 동쪽 양주(楊州)의 치소소재지(治所所在地)의 검암산(儉巖山)에 장사하였다. 능(陵)을 건원릉(健元陵)이라고 하였다. 부고를 듣고 명 나라의 황제는 매우 슬퍼하여 정무를 보지 아니하였다. 즉시 예부 낭중(禮部郎中) 임관(林觀) 등을 파견하여 태뢰(太牢 나라의 제사에 소를 통째로 바치는 제물)를 써서 사제(賜祭)하니, 그 제문은 대략 이러하였다.
“왕은 밝고 통달하며 선을 좋아하는 것이 천성에서 나왔으며, 공경히 천도에 순종하고, 근신한 마음으로 사대(事大)하였으며 한 나라의 백성들을 보휼하니, 우리 황고(皇考)께서 깊이 충성을 가상하게 여겨 다시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내렸다. 왕의 공덕이 드러남은 비록 고대 조선의 어진 임금일지라도 이보다 더 나을 수 없다.” 하였다. 또 고명(誥命)을 내려 시호를 강헌(康獻)이라 하였다. 또 전하에게 조칙을 내려 부의(賻儀)를 내림을 특별히 후하게 하였다. 남달리 총애하는 은전이 더할 수 없이 갖추어져서 유감됨이 없었다. 대체로 우리 태조가 하늘을 두려워하는 정성과 전하의 그 뜻을 잇는 효도가 전후에 서로 이어져서, 하늘의 마음을 잘 누리었으므로, 국말 국초(國末國初)의 즈음에 크게 하늘과 사람이 위와 아래에서 돕는 일이 이처럼 지극함을 얻은 것이니, 아, 위대하도다. 운운.
신은 역대의 천명(天命)을 받아 창업한 임금을 보니, 덕과 사업의 성대함과 부명(符命)의 신기함이 사기(史記)에 빛이 나서 광채를 흘려 보냄이 끝이 없다. 이제 우리 조선이 탄생하여 일어나니, 성대한 덕과 큰 부명이 옛보다도 광채가 난다. 이는 마땅히 이미 그 왕위를 얻고 또 그 장수를 얻을 것이며, 넓은 터전을 높게 하여 큰 복조를 흘려 보내니, 하늘과 땅과 더불어 장구하리라. 신 근(近)이 외람되게 비명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감히 정성을 다하여 성대한 덕을 펴서 기술하여 밝은 빛을 후세에 드리우게 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러나 신의 글재주가 비졸하여서 크고 아름다움을 드러내 선양하여서 밝은 뜻을 만족하게 칭송하기에 부족하므로, 다만 삼가 사람들의 귀와 눈에 남아 있는 공훈과 덕택만을 찬술하고, 감히 손으로 절하며 머리를 조아려 명을 드린다. 그 글은 이러하다.
하늘이 이 백성 낳으시고 / 天生斯民
사목(임금)을 세워 / 立以司牧
길러서 키우며 다스리게 하실 제 / ?長?冶
덕 있는 이는 사랑하시고 돌보시네 / ?眷有德
하늘이 또박 또박 말하지는 않건마는 / 非天諄諄
명령은 혁혁하게 나타나 있나니 / 有命赫赫
우 임금은 현규를 주고 / 禹錫玄圭
주 나라 꿈은 협복일세 / 周夢?卜
우리 조선은 / 惟我朝鮮
왕업 터전 닦으실 제 / 肇基王迹
신인이 꿈속에서 / 夢有神人
금척을 주셨다 / 授以金尺
부록이 먼저 정하니 / 符?前定
하늘 뜻 분명하네 / 天心昭?
고려의 운수 이미 종말이라 / 麗運旣終
임금은 혼암하고 정승은 포학하여 / 君昏相酷
농사철에 출병하여 / 農月興師
큰 나라에 싸움 걸었도다 / 大邦構隙
우리 태조 의를 지켜 가던 깃발 되돌리니 / 我?義旋
죄인들 복죄하였네 / 罪人斯得
충성이 위로 들려 / 忠誠上聞
황제가 기뻐하였네 / 帝心載?
천운은 돌아오고 / 歷數有歸
민정은 절박하여 / 輿情斯迫
위대한 왕업 이미 이룩하였으나 / 大業旣成
저자의 상인들도 동요하지 않았도다 / 市肆不易
명 나라 고황제가 찬탄하여 이르기를 / 高皇曰咨
그대가 나라를 이룩하였으되 / 惟爾有國
백성들은 병화가 없고 / 民無兵禍
하늘이 주는 기쁨 즐기네 하시고 / 樂天之樂
이어서 조선이란 / 繼賜國號
옛 국호를 다시 내렸도다 / 朝鮮是復
지리를 살펴 도읍을 정하니 / 相地定都
한강의 북쪽이라 / 于漢之北
범이 웅크린 듯 용이 도사린 듯 / 虎踞龍蟠
왕기가 쌓였도다 / 王氣攸積
궁궐은 높고 높으며 / 宮室崇崇
종묘는 우뚝하네 / 宗廟翼翼
어진 마음 매우 깊어 살리기를 좋아하며 / 仁深好生
정치는 아름답고 생각은 화순하여 / 冶蔚思輯
백 가지 제도가 갖추어 닦아지고 / 百度具修
만 가지 왕화는 흡족하게 되었네 / 萬化斯洽
근정하시기에 지치셔서 / ?倦于勤
맏아들에 전하시니 / 傳付聖嫡
맏아들은 이어 공적이 있는 이에게 사양하여 / ?讓于功
부자와 형제간에 계승하였네 / 惟世惟及
밝고 밝은 우리 임금 / 明明我后
조그마한 조짐도 반드시 살피시어 / 有幾必燭
두 번 화란을 평정하니 / 禍亂再平
그 경사 지극히 돈독하네 / 其慶克篤
개국하고 정사한 것 / 開國定社
모두 우리 전하의 공적이니 / 咸我之績
대명은 사양하기 어렵고 / 大命難辭
신성한 큰 그릇 제대로 의탁되었도다 / 神器有托
두 임금 정성껏 봉양하니 / 祇奉兩宮
공손하고 더욱 정성스러웠도다 / 虔恭愈恪
효도와 우애가 신에게 통하여 / 孝弟通神
상제의 돌보심이 더욱 두터웠네 / 帝眷尤渥
태상왕의 상을 만나 근심에 잠긴 마음 / 遭喪??
슬퍼하고 사모하여 몸부림쳐 울부짖었네 / 哀慕踊?
황제가 부고 듣고 매우 슬퍼하시며 / 帝聞震悼
사자를 보내 조곡하고 / 遣使弔哭
태뢰를 써서 제사하며 / 太牢有祀
부의를 후하게 하라 칙명내리고 / 厚賻有?
시호를 주어 칭찬하니 / 美諡褒嘉
조상하는 예법이 완전하게 갖추었네 / 恤典備飾
하늘의 도우심이 / 自天佑之
시종일관 변함없어 / 終始不?
큰 복조 길이 이어지고 / 景祚??
자손은 천억으로 번창하며 / 子孫千億
종사가 유구하여 / 宗祀悠長
하늘과 더불어 다함이 없으리라 / 與天罔極
[주D-001]현규(玄圭) : 현(玄)은 하늘 빛이요 규(圭)는 큰 홀(笏)이다. 예전 우임금에게 요임금이 이 현규를 하사하였는데, 그것이 하늘 아래의 모든 것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주D-002]협복지몽(協卜之夢) : 문왕(文王)이 사냥 나갈 때에 꿈꾼 것을 점쳐서 강태공(姜太公)을 얻어 그의 힘으로 천하를 통일하였는데, 이 꿈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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