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碑銘) 권근
유명조선국 승인 순성 신의왕후 제릉신도비명 병서 (有明朝鮮國承仁順聖神懿王后齊陵神道碑銘 幷序)
옛날부터 제왕이 천명을 받고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후비(后妃)의 현명함에 힘입어서 덕(德)을 같이하고 경사를 길러서 그 서업(緖業)을 길게 하였다. 하(夏) 나라의 우(禹) 임금은 도산(塗山)의 여자가 있어서 계(啓)가 능히 계승하게 되었고, 주(周) 나라에는 태사(太? 주문왕(周文王)의 비(妃) 무왕(武王)의 어머니)가 있어서 무왕(武王)이 큰 업을 받들 수 있었으니, 하우씨(夏禹氏)와 주 문왕(周文王)의 하늘과 짝할 만한 종사(宗祀)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 거룩하도다.
우리의 신의왕후(神懿王后)는 타고난 자질이 맑고 의젓하며 부덕(婦德)은 유순하고 정숙하였다. 일찍이 태조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 시집가서 태조를 도와 왕업을 이루게 하고, 착하고 어진 아들을 낳아 왕통(王統)을 무궁하게 드리우게 하였으니, 신성한 공과 떳떳한 법이 옛날의 착한 후비에 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다. 오직 한 가지 애석한 것은 큰 훈업이 금방 이루어지려 할 때에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태상왕이 나라를 창업하였으나 왕비로 높일 수 없었으며 두 착한 아드님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그 영화스러운 봉양을 할 수 없었다. 산릉(山陵)이 빛남을 가리워서 서리와 이슬이 슬픔을 더하게 한다. 아, 슬프다. 처음의 시호는 절비(節妃)이며 능호는 제릉(齊陵)이다. 신의왕후라는 시호를 더하고 인소전(仁昭殿)을 두어 진용(眞容)을 봉안하였으니, 추후(追後)하여 높이는 예전(禮典)은 이미 갖추어 거행되었다.
우리의 주상전하께서 어머니의 모습이 영원히 사라질 것을 아프게 생각하고 효도를 펼 길이 없어서, 이에 주무관(主務官)에게 명령하여 큰 비석을 새기게 하고, 신 근(近)에게 명령하여 비문을 지어 길이 뒷세상에 보이게 하도록 하였다. 신 근은 명령을 받고 놀라고 두려워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상고하여 보건대, 후(后)의 성은 한씨(韓氏)니, 안변(安邊)의 세가(世家)이다. 아버지의 휘는 경(卿)이니 충성공 근 적덕육경 보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영문하부사 안천부원군(忠誠恭謹積德毓慶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領門下府事安川府院君)을 추증하였고, 조고(祖考)의 휘는 규인(珪仁)이니, 적선육경 동덕찬화 익조공신 특진보국숭록대부 문하좌정승 판도평의사사 겸판이조사 안천부원군(積善毓慶同德贊化翊祚功臣特進輔國崇祿大夫門下左政丞判都評議使司兼判吏曹事安川府院君)을 추증하였고, 증조(曾祖)의 휘는 유(裕)이니 증 순성적덕좌 명보리공신 숭정대부 문하시랑 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 겸 판호조사 안원군(贈 純誠積德佐命輔理功臣崇政大夫門下侍郞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兼判戶曹事安原君)에 추증되었고, 어머니는 신씨(申氏)이니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을 추봉하였는데, 병의육덕보조 공신숭정대부 문하시랑 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 판형조사(秉義毓德輔祚功臣崇政大夫門下侍郞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判戶曹事) 원려(元麗)의 딸이다. 후(后)께서는 나면서부터 맑고 상냥하며 총명하고 지혜 있음이 비범하였는데 시집갈 나이가 되자 배필을 선택하여 우리 태상왕에게 시집왔다. 태상왕이 그때에 장군이 되고, 정승이 되어 수십 년 동안을 드나들면서 싸우느라고 편안한 해가 없었는데, 후는 능히 힘을 다하여 가사를 경영하여 남편의 성공을 권면(勸勉)하였다. 또 성품이 질투하지 아니하여 첩과 시녀들을 예로써 대우하였다. 많은 아들들을 두었는데, 올바른 도리로써 교육하였다. 지금의 우리 주상전하는 슬기롭고 어질고 영명하고 용기가 있었으며, 학문이 날로 진보하여 나이가 20세도 못 되어서 과거에 급제하여 예조에 벼슬하였다.
거짓 임금 신우(辛禑) 무진년에 시중 최영(崔瑩)이 중국을 치려고 꾀하여, 지금의 우리 태상왕이 위엄과 명망이 일찍부터 현저하였으므로, 그에게 절월(節鉞)을 주어 가서 요동을 치게 하였다. 태상왕이 의(義)를 지켜 군사를 되돌려서 최영을 잡아 물리치고, 이름난 선비 이색(李穡)으로 대신하게 하니, 나라의 안팎이 무사하여 우리 나라가 길이 그 공적을 힘입게 되었다. 이색이 태상왕에게 아뢰기를, “이번, 중국에 싸움을 도발하려 한 뒤를 당하여, 집정한 이가 친히 가서 황제의 조정에 조현(朝見)하지 아니하면 공의 충성이 천하에 밝혀질 수 없습니다.”하고, 날을 정하여 가려하니 태상왕이 이색에게 말하기를, “나와 공이 일시에 사자(使者)로 가면 나라일은 누구에게 맡기겠소. 내가 아들 한 사람을 골라서 공에게 수행하게 하면 내가 가는 것이나 같지 않겠소.” 하고, 곧 지금의 우리의 전하를 보내어 서장관(書狀官)으로 하였더니, 특별히 고황제(高皇帝)의 우대하는 예를 받고 돌아왔다. 기사년 가을에 황제가 또 칙서를 내려 타성(他姓)으로 왕씨(王氏)의 후사를 삼는 것을 문책하였다. 태상왕이 여러 장군과 재상들과 의논하여 왕씨의 후예인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권세 있는 간신들이 국정을 제멋대로 휘둘러서 남의 것을 강탈하고 훔치고 속여 빼앗곤 하였다. 태상왕이 그때에 좌상(左相)이 되매, 전지(田地)의 사유를 폐지하여 문란하여진 법을 바로 세우니, 폐단이 없어지고 이로움이 일어나서 온갖 법도가 함께 새로워졌다. 공이 높으면 상주지 아니하고, 덕이 크면 용납하기 어려운 것일까. 참소와 간사한 말이 번갈아 얽어서 모함하니, 점점 번지고 젖어듦을 헤아릴 수 없었다. 정창(定昌)이 자못 나약하고 혼암하여 사리를 판단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망설이기만 하였다. 후(后)가 드디어 근심하고 노심(勞心)하여 병이 났다. 신미년 가을 9월 12일에 훙(薨)하니, 향년 55세였다. 예를 갖추어 성남(城南)의 해풍군(海豊郡) 속촌(粟村)의 언덕에 장사하였다. 우리 전하가 분묘에 여막을 짓고 3년을 보내고자 하더니, 다음해 임신년의 봄에 태상왕이 서쪽에 나갔다가 병을 얻어 돌아왔다. 전하가 와서 시탕(侍湯)하니, 뭇 간사한 무리들이 이 틈을 타서 모함함이 더욱 급하여졌다. 우리 전하가 기틀에 대응하고 계책을 결단하여, 그 괴수를 쳐서 제거하니 흉악한 무리들이 와해되었다. 정창이 더욱 꺼리므로 가을 7월 16일에 전하는 2, 3명의 대신들과 앞장서서 대의를 외치니, 신료와 부로들이 모의하지 않았건만 뜻이 일치하여 입을 모아 추대하였다. 태상왕이 여러 사람들의 심정에 못이겨 이에 왕위에 나아가니 저자에서는 상인들이 가게를 바꾸는 일도 없이 나라 안은 하루 아침에 맑고 밝게 되었다. 즉시 사자를 보내어 황제의 조정에 들어가 아뢰고 잇달아 회보(回報)의 칙명을 받았다. 이미 왕작(王爵)을 허가하고 또 국호를 조선이라고 미칭(美稱)으로 고쳐 주었다. 3년이 지난 뒤, 갑술년 여름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와서, 임금의 친아들을 입조하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태상왕이 우리 전하가 경서에 통하고 예절에 밝아서 여러 아들 중에서 가장 어질다고 하여 중국에서 온 사신을 따라 가라고 명령하였다. 이미 도착하매, 황제가 더불어 말하여 보고 가상하게 여기어 넉넉한 상을 주고 돌려보내었다.
무인년 가을 8월에 태상왕이 병이 드니, 간신 정도전(鄭道傳) 등이 나라의 정권을 제멋대로 휘두를 것을 생각하여, 여러 적계(嫡系)의 왕자를 제거한 뒤에 어린 얼자를 세우려고 음모하여 여러 무리들과 붕당을 만들어서 화란의 발생이 박두하게 되었다. 전하가 그 낌새를 밝게 살피어 그것이 발생하기 전에 앞질러 베어서 제거하여 화란의 불을 꺼버리고, 태상왕에게 청하여 적출(嫡出)의 아들이며 연장(年長)인 상왕(上王)을 맞아들여 세자로 책봉하였다. 떳떳한 차례가 이미 바로잡히니, 종묘와 사직이 안정하게 되었다. 9월 정축일에 태상왕이 병이 낫지 아니하므로 상왕에게 전위(傳位)하였다. 경진년 정월에 역신(逆臣) 박포(朴苞) 등이 동기(同氣)가 서로 죽이도록 음모를 꾸미고, 회안군(懷安君)의 부자를 추켜 세워서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향하게 하니, 역적의 기세가 매우 치성하였다. 우리 전하가 장수와 사졸들을 거느리고 격려하여 곧 바로 평정하였다. 박포(朴苞)만을 죽이고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불문에 붙였으며 회안(懷安)은 안치에 처하여 지친(至親)의 의(誼)를 버리지 아니하였다. 상왕이 후사가 없고 또 나라를 세우고 사직을 안정하게 한 것은 다 우리 전하의 공적이라 하고, 세자로 책봉하여 나라의 근본을 안정시키었다. 가을 7월 기사일에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받들어 태상왕에게 계운신무(啓運神武)의 호(號)를 올리었다. 겨울 11월 계유일에 상왕도 또한 병으로 인하여 우리의 전하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사자(使者)를 명 나라에 보내어 황제에게 청명(請命)하니, 다음해인 신사년에 건문제(建文帝) 가 통정시 승(通政寺丞) 장근(章謹)과 문연각 대조(文淵閣待詔) 단목례(端木禮)를 보내어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갖고 와서 우리 전하를 왕으로 책봉하였다. 겨울에 홍려시 행인(鴻?寺行人) 번문규(藩文奎)를 보내 와서 면복(冕服)을 내리니 벼슬의 품질(品秩)이 친왕(親王)과 비등하였다. 지금의 황제가 즉위하여 널리 만방에 알리니, 전하가 즉시 좌정승 신 하륜(河崙)에게 명하여 들어가 등극을 축하하였다. 황제가 우리 전하의 충성으로 사대(事大)하는 것을 칭찬하고, 고명과 인장을 내리고, 도지휘(都指揮) 고득(高得)과 좌통정(左通政) 조거임(趙居任)을 보내어 금년 4월에 와서 전과 같이 봉작하여 왕으로 하였다. 9월에 또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과 행인(行人) 최영(崔榮)을 보내 와서 곤면(袞冕) 구장(九章 아홉벌)과 금단사라(錦段紗羅)와 서적(書籍)과, 왕비에게 갓과 도포와 금단사라와, 태상왕에게 금단사라를 내렸다. 이처럼 세상에 드문 은전이 전후로 계속하여 이르렀다. 대체로 우리 전하의 성대한 공덕은 실로 하늘이 계시한 바로서, 오로지 우리 나라에 붙이어서 큰 계획과 아름다운 천명을 연장하게 하였으니, 상제의 융숭한 권고를 받아 하늘이 주는 녹의 영구함을 누려야 마땅할 것이다.
기초를 창조한 자취는 비록 조종(祖宗)에서부터 시작되었으나 자손을 잘 낳은 경사(慶事)는 실로 신의왕후(神懿王后)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 성대하도다. 후(后)게서는 여섯 아들을 낳으셨으니, 상왕(上王)이 둘째이고, 우리의 주상전하가 다섯째이다. 맏은 방우(芳雨)이니 진안군(鎭安君)을 봉하였다가 먼저 졸하였고, 셋째는 방의(芳毅)이니 익안대군(益安大君)을 봉하였고, 넷째는 방간(芳幹)이니 회안대군(懷安大君)을 봉하였다. 여섯째는 방연(芳衍)이니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딸은 두 분이 있었으니, 맏은 경신궁주(慶愼宮主)로서 찬성사(贊成事) 이저(李佇)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경선궁주(慶善宮主)로서 청원군(淸原君) 심종(沈淙)에게 시집갔다. 상왕의 배필은 김씨(金氏)로서 지금 왕대비(王大妃)를 봉하였으니, 증좌시중(贈左侍中) 천서(天瑞)의 딸이다. 우리 전하의 배필은 정비(靜妃)니 여흥부원군 영예문춘추관사(驪興府院君領藝文春秋館事) 민제(閔霽)의 딸이다. 맏아들은 원자(元子) 제(?)이고, 차남(次男)과 삼남(三男)은 모두 어리다. 맏딸은 정순궁주(貞順宮主)이니 청평군(淸平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경정궁주(慶貞宮主)이니 평녕군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진안군(鎭安君)은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아들을 낳았으니 복근(福根)이라고 부르며 봉녕군(奉寧君)을 봉하였다. 딸은 소윤(少尹) 이숙묘(李叔畝)에게 시집갔다. 익안군은 증 찬성사 최인규(崔仁?)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석근(石根)이라고 부르며 원윤(元尹) 벼슬에 있다. 딸은 첨총제(僉摠制) 김한(金閑)에게 시집갔다. 회안(懷安)은 증 찬성사 민선(閔璿)이 딸에게 장가들었다. 아들을 낳았으니 맹종(孟宗)이며 의령군(義寧君)을 봉하였다. 딸은 종부령(宗簿令) 조신언(趙愼言)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신 근(近)이 일찍이 살펴보니, 삼대(三代) 성왕의 후비(后妃)의 덕(德)은 도산(塗山)과 태사(太?)보다 더 큰 이가 없다. 시(詩), 서(書)에 실려 있어서 천고에 밝게 빛난다. 신의왕후(神懿王后)의 덕(德)이 진실로 그들과 더불어 아름다움을 비견할 만하다. 다만 신 근은 학식이 얕고 문장이 졸렬하여 비록 성덕을 더할 수 없이 형용하더라도, 하늘과 땅을 그림 그리는 것과 같아서 어찌 능히 그것의 만분의 일이나마 비슷하게 할 수 있겠는가. 감히 《시경》에 나오는 주(周) 나라의 시편(詩篇)인 대아(大雅)의 〈대명(大明)〉과 〈사제(思齊)〉의 뜻을 상고하여 삼가 명(銘)의 사(詞)를 기술하고 손 들어 절하며 머리를 조아려 올리는 바이다. 그 사는 이러하다.
상제가 밝고 현저하여 / 上帝赫赫
덕 있는 이를 계도하여 돕나니 / 啓佑有德
사사로움을 위해서가 아니고 / 匪伊私之
백성을 위함이 지극하기 때문이다 / 爲民之極
그 계시는 어떠하던가 / 其啓維何
유순하고 아름다운 부덕을 낳아 / ?生柔嘉
와서 덕 높은 임금의 배필이 되었네 / 來配于德
실가지락 마땅하여 / 允宜室家
임신하고 생육하니 / 載震載育
그 정령이 밝고 밝아 / 厥靈是赫
성스럽고 밝은 이를 낳았으니 / 篤生聖哲
하늘과 사람이 기대하던 바라네 / 天人攸屬
성스러운 아버지를 붙들어 도우시고 / 扶翊聖父
위대하게 백성들의 군주가 되었네 / 誕作民主
몸소 황제의 조정에 가 조견하시어 / 躬朝帝庭
우리 국토를 보전하였네 / 保我邦土
서얼의 화란이 싹틀 때에 / 孼芽之萌
낌새를 밝게 살펴 / 炳幾維明
시원하게 씻어버리니 / 廓爾?掃
종묘와 사직이 편안하게 되었네 / 宗社載寧
공을 세우고도 능히 사양하여 / 功成克讓
적장을 높이시니 / 以尊嫡長
떳떳한 인륜이 이미 바로잡히어 / 彛倫旣正
나라의 기초 세력 더욱 장성하였네 / 基勢益壯
형제의 담안 싸움 만났으나 / ?遭墻?
차마 그에게 죄주지 못하여 / 不忍致?
그 생명을 보전하게 하시고 / ?獲保全
우애를 더욱 돈독히 하였네 / 友愛彌篤
덕은 높고 / 維德之隆
공은 크니 / 維功之崇
마땅히 상제의 돌봄이 서리어서 / 宜?帝眷
명 주심이 많고 무겁네 / 錫命稠重
밝고 밝은 황제의 고명 / 明明帝誥
빛나고 빛나는 황금의 인장을 / 煌煌金寶
우리의 임금님이 받으시니 / 我龍受之
만대에 이르도록 길이 보존하리라 / 萬世永保
왕업의 발자취는 / ?維王迹
조종이 쌓아 왔으나 / 祖宗攸積
우리의 신성하신 임금을 낳으심은 / 誕我聖神
후의 덕에 연유하였네 / ?繇后德
신이 절하고 머리 조아리며 / 臣拜稽首
올리는 말씀이 구차한 것 아니니 / 獻辭不苟
만세에 밝게 드리워 / 萬世昭垂
천지와 함께 영원하리라 / 天地永久
[주D-001]도산(塗山)의 여자 : 도산은 우임금이 장가를 든 곳으로, 곧 우임금의 비(妃)를 가리킨다. 비가 어진 아들 계(啓)를 낳아서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주D-002]건문제(建文帝) : 명 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장손으로, 후계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가 그의 숙부인 영락제(永樂帝)에게 쫓겨서 행방불명되었다.
[주D-003]〈대명(大明)〉장 : 무왕(武王)과 그 조상이 나라를 세운 사적을 노래한 것.
[주D-004]〈사제(思齊)〉장 : 문왕과 후비(后妃)들의 덕을 찬미한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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