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명(墓誌銘) 하륜
유명 조선국 특진보국숭록대부 한산백 목은 선생 이문정공 묘명 병서 (有明朝鮮國特進輔國崇祿大夫韓山伯牧隱先生李文靖公墓銘)幷序
하륜(河崙)
중국에서 진사에 오르고 이학(理學)으로써 동방을 처음 밝히고 벼슬이 왕국상상(王國上相)에 이른 사람은 한산(韓山) 목은 선생 이문정공(李文靖公)이 있을 뿐이다. 지정(至正) 을사년 가을에 공이 선산(星山) 초은 선생(樵隱先生) 이문충공(李文忠公)과 더불어 예위(禮圍)를 맡았을 때, 하륜이 부족한 재주로 다행히 시험에 합격하여 제자의 예를 잡은 지가 30여년이었다. 공이 졸했으나, 직무로 인하여 나아가 영전에 울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태까지 슬픔이 잊히지 않더니, 이제 그 막내아들 종선(種善)이 양촌 권근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서 묘명(墓銘)을 청하였다.
내가 실로 공의 덕과 아름다움을 충분히 형용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였으나, 정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색(穡)이요, 자는 영숙(穎叔)이요, 호는 목은(牧隱)이니, 대대로 충청도 한주(韓州)에 살았다. 증조 휘 창세(昌世)는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증직(贈職)을 하였고, 조부 자성(自成)은 원조(元朝)의 비서감승(秘書監丞)을 증직받았고, 본국에서는 도첨의찬성사(都僉議?成事)를 증직하였고, 아버지 휘 곡(穀)은 원조의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랑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이요, 본국에서는 도첨의찬성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都僉議?成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였고, 호는 가정(稼亭)이요, 시호는 문효공(文孝公)이었다. 원조(元朝) 원통(元統) 계유년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시문이 일시에 높아 문집이 세상에 전하고 있다. 어머니 김씨는 원조 요양현군(遼陽縣君)이요, 본국 함창군부인(咸昌郡夫人)이니, 천력(天曆) 무진년 5월 신미일에 공을 낳았다.
어릴 때부터 매우 영리하고 총명하여 글을 읽자마자 외웠다. 지정 신사년 본국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니 나이가 14세였고, 무자년에 가정 선생이 원조에서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가 되자, 공이 예에 따라 국자감생원(國子監生員)에 충원되니 학문이 더욱 진보되었다. 경인년에 가정이 본국으로 돌아와서 다음해 정월에 졸하자, 공이 분상하여 상복을 끝내었다. 계사년 여름에 본국 예부의 고시에 으뜸으로 합격하여 숙옹부승(肅雍府丞)이 되었다. 가을에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향시(鄕試)에 1등으로 합격하였고, 갑오년 봄에 경사(京師)에서 회시(會試)를 볼 때 대궐 뜰에 대책(對策)을 올려 크게 독권관(讀卷官)의 칭찬을 받아서 제2갑(甲) 제2명에 급제하자 응봉한림문자 동지제고 겸 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칙임(勅任)하였다. 본국으로 돌아오자, 왕이 특별한 예로 대우하여 전리정랑 예문응교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으로 취임하였다. 을미년 봄에 왕부필도치(王府必?赤)가 되었다가 내사사인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에 올랐다. 이로부터는 본국의 제수에 모두 관직(館職)을 겸하였고 여름에 원나라 서울에 가서는 예임본원(禮任本院)이었고, 겨울에는 권경력(權經歷)이었다.
공은 천하가 어지럽자 어머니가 늙었음을 칭탁하여 벼슬을 버리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병신년 가을에 본국이 관제(官制)를 고치자, 이부시랑 겸 병부낭중으로 문무(文武)의 선발에 참여하였다. 공이 일찍이 글을 올려 시정(時政) 여덟가지를 말하였는데, 그 중 하나로써 정방(政房)을 없애고 이부와 병부를 뽑는 제도를 되살리려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명(命)이 있었다. 정유년에 국자좨주가 되고 지합문(知閤門)으로 왕부지인(王府知印)이 되었다가,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에 옮겼다. 무술년에 동료들이 모두 국사에 대해 말하다가 권세가들에게 미움을 입어 좌천이 되었을 때 왕이 재상에게 이르기를, “이색은 뭇 사람들에게 비교할 수 없다.”하여, 추밀원 우부승선에 승진시켰다가, 여러번 옮겨서 좌승선(左承宣)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기밀(機密)에 참여한 지 무릇 7년동안 보좌함이 실로 많았다. 신축년 겨울에 홍건적이 서울을 함락시키자 왕이 남으로 거동을 할 때, 공이 왕을 따라 호위와 협찬하여 수복의 공을 이룩하여, 훈1등(勳一等)에 책정되고 철권(鐵卷)을 받았다. 계묘년 원조에서 정동행중서성 유학제거(征東行中書省儒學提擧)를 주었고, 본국에서는 밀직제학 동지춘추관사 단성보리공신(密直提學同知春秋館事端誠保理功臣)의 호를 주었다. 이로부터 국정에 참여하여, 을사년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수협역서(搜挾易書)의 법을 행할 것을 청하였고, 정미년 원조(元朝)에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이 되었고, 무신년에 판개성 겸 성균대사성(判開城 兼成均大司成)으로서 왕이 학교를 부흥시키고자 하여 성균관을 다시 창건하고, 일대에 경술(經術)을 익힌 자를 골라서 나누어 생도를 가르치게 하되 모두 다른 벼슬로 학관을 겸하게 하였다. 공이 날마다 여러 학관으로 더불어 나누어 가르친 뒤에 서로 토론하고 논변도 하면서 해가 저물도록 게으름이 없었으니 학자들이 옛 습속을 변하여 유풍(儒風)이 한결같이 새로웠다. 그 해 여름에 왕이 구재(九齋)의 생도에게 육경(六經)의 뜻을 시험하여 급제 7명을 뽑을 적에 공으로 하여금 시권을 읽게 하였다. 기유년 또 동지공거가 되어 삼장통고(三場通考)의 법을 실시할 것을 청하여 행하였다.
처음에 왕이 노국공주(魯國公主)의 영전(影殿)을 왕륜사(王輪寺) 동쪽 언덕에 세우자고 하였으나, 그 땅이 협소하다고 하여 다시 마암(馬巖) 서쪽 땅을 보았는데, 너무 드넓어 시중(侍中) 유탁(柳濯) 등이 글을 올려 중지할 것을 청했다. 왕이 노하여 유탁 등을 옥에 가두어 죽이려 하면서 공을 시켜 백성들에게 유시하는 글을 짓게 하자, 공이 그 죄명이 무엇인지를 물었더니, 왕이 네 가지의 죄목을 열거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모두 이미 지나간 일이요, 또 죽일 죄가 못됩니다. 근자에 유탁 등이 글을 올려 영전의 공사를 정지할 것을 청하였으니, 비록 이것으로 죄를 준다 하더라도 나라 사람들은 반드시 글을 올렸기 때문이라고 할 것입니다. 왕께서 생각하소서.”하였더니, 왕이 더욱 노하여 급하게 글을 짓게 하였다. 공이 엎드려 여쭙기를, “신이 어찌 감히 글을 고의로 만들어서 그 죄를 읽을 수 있겠습니까.”하자, 왕이 더욱 노하여 정비(定妃)의 궁(宮)에 옮겨 처하고는 조석을 거절하였다. 그 이튿날 총애하는 신하 신돈이 왕의 노여움을 풀고자 하여 왕에 청하여 공을 하옥할 것을 청하고 왕명을 따르지 않는 죄명을 주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신이 외람되이 주상의 알아주심을 입어 포의(布衣)에서 달관(達官)까지 이르렀으매, 일찍이 ‘임금의 덕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반드시 진달하여 숨김이 없어야 한다.’고 여겼다. 이제 왕이 유시중(柳侍中)을 죽이려 하시니, 내가 감히 극진히 말씀을 드리는 것은 왕의 이름이 천하 후세에 아름답지 못하올까 두려워함이었네.” 하였다. 옥관(獄官)이 그 말을 갖추어 왕에게 아뢰었더니, 왕이 드디어 깨닫고 유탁 등을 방출시키고 사람을 시켜 공에게 말하기를, “내일에 목욕하고 조회를 하면 내 장차 사과하련다.”하였다. 그 위에 왕이 더욱 공경하고 조심하였다.
신해년에 지공거로 그 가을에 정당문학에 오르고, 공신호를 더하여 문충보절찬화(文忠保節?化)라 하였다. 왕이 공을 불러들일 때마다 반드시 주위를 깨끗이 하고 향을 피우며, “이색의 학문은 중국에서도 역시 매우 드무니, 어찌 공경하지 않으리오.” 하였다. 9월에 요양현군(遼陽縣君)의 상을 당하였고, 이듬해 6월에 왕명으로 본직에 기복(起復)되니 공이 힘껏 사퇴하였고, 계축년 겨울에 한산군(韓山君)에 봉하고, 갑인년 가을에 왕이 훙(薨)하였다. 공은 요양현군이 졸한 뒤에 슬픔으로 병을 얻었더니 왕이 훙서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문을 닫고 나가지 않은 지가 7년이나 되었다. 정사년에 추충보절동덕찬화(推忠輔節同德?化)의 호를 내리고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가 되었고, 임술년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계해년에 다시 한산군에 봉하였고, 갑자년에 부원(府院)을 더하였으며, 을축년에는 검교문하시중에 옮겼다. 병인년에 또 지공거가 되었으니, 공이 무릇 다섯 차례나 고시를 맡아서 훌륭한 선비를 뽑은 바가 많았다. 무진년에 명 나라 조정에서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 하자 무신(武臣) 최영(崔塋)이 위주(僞主)를 끼고 군사를 출동하여 요동을 치려고 하여 군사가 압록강에 도착하였는데, 우리 태상왕(太上王)이 의리를 들어 회군하여 최영의 무리를 잡아 물리쳤다. 공을 기용하여 문하시중을 삼았더니, 공이 말하기를, “이제 국가에 혼란이 생기고 왕은 어려서 친히 조회할 수 없으니 집정(執政)한 자가 당연히 해야 될 것이므로, 노신이 감히 자청합니다.”하였더니, 왕과 나라 사람들이 모두 공이 늙고 또 병들었다 하여 굳이 만류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신이 국은을 지극히 후하게 받았기 때문에 늘 죽음으로써 갚고자 하였으니, 실로 나라의 명(命)을 천자(天子)에게 진달한다면 비록 죽어도 산 것과 같을 것입니다.”하고는 곧 명나라에 가서 상세히 주달하였더니, 고황제(高皇帝)가 특례로서 대우하여 은총을 받고 돌아왔다. 기사년 여름에 귀국하여 가을에 병으로 번잡한 정무를 풀어 줄 것을 청하여 판문하부사가 되고, 겨울에 공양군(恭讓君)이 즉위하자, 공이 자신에게 붙지 않음을 꺼리는 자가 탄핵해서 장단현에 안치되었다가, 경오년 4월에 함창(咸昌)으로 옮겼다. 5월에 유이(尹彛) ㆍ 이초(李初)의 옥사가 일어나자 공 등 몇 10명을 청주(淸州)에 가두어 장차 준절한 법을 쓰려고 죄목을 꾸며 사태가 헤아릴 수 없게 되었으나, 공은 정의와 천명으로 자처하여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침부터 낮까지 하늘에서 별안간 큰 비가 내려 산이 무너지고 물이 넘쳐 성문이 파괴되고 관사가 다 잠기게 되었는데, 문사관(問事官)이 나무를 잡아 겨우 화를 면하였다. 역마를 달려 이를 나라에 보고하였더니, 모두 놓아 보내기를 허락하였다. 청주의 부로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 고을이 생긴 이후 이런 극심한 수재가 없었는데, 이는 공 등의 일에 원한이 있기 때문이다.”하였다. 임금이 본래부터 공이 다른 뜻이 없음을 알고 여러 차례 소환하려 하였으나 공을 꺼리는 자들이 번번이 배척하였다. 신미년 겨울에 공이 함창(咸昌)으로부터 소환되어 다시 한산부원군이 되었다. 임신년 4월에 다시 금주로 귀양갔다가, 6월에 여흥(驪興)으로 옮겨졌고, 7월에 우리 태상왕이 즉위하자 공을 꺼리는 자가 공을 고하여 극형을 가하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평생에 망령되이 말을 하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무고를 거짓 자백할 수 있겠는가. 죽어서도 바른 귀신이 될 것이니, 또한 혐의도 없어질 것이다.”하였다. 그 말이 조정까지 들려 왕이 용서하여 장흥부(長興府)에 옮겼다. 그와 동시에 귀양간 자는 공의 힘을 입어 많이 보전되었다.
겨울에 석방되어 한주(韓州)로 돌아왔고, 을해년 가을에 관동을 유람하다가 오대산에 들어가 이어 머물렀다. 임금이 사자를 보내어 맞이하여 한산백(韓山伯)을 봉하고 옛 친구의 예로써 대우하였으며, 공이 뵙고 물러갈 때는 반드시 중문까지 나와서 전송하였다. 병자년 여름 5월에 공이 여강(驪江)에 가서 피서하기를 청하였고, 5월 7일에 병이 위급하자 어떤 중이 와서 그 방법을 이야기하니 공이 사절하여 말하기를, “생사의 이치는 내 이미 의혹이 없노라.”하고 말이 끝나자마자 졸하니, 나이 69세였다. 부고가 이르자 왕이 반찬의 숫자를 감하고 사흘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사신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여 부의와 장사를 예(禮)로써 행하고 시호를 문정공(文靖公)이라 하였다. 10월에 아들 종선(種善) 등이 관을 모시고 한주로 돌아와 11월 갑인일에 가지원(加智原)에 장사하였다.
공은 성품이 맑고 학문이 정밀하며, 일찍이 가훈(家訓)을 받들어 벽옹(?雍)에 들어갔으며, 문학에 넓고 행실이 돈독하였으며 성리학에 힘썼다. 본국에 돌아온 뒤에는 후생을 길러 사문(斯文)을 흥기함으로써 자기의 책임을 삼으니, 학자들이 태산 북두와 같이 우러러 존경하였다. 나라의 사명(辭命)을 맡은 지 수 10년이 되었지만 늘 조정의 칭찬을 받았으며, 시문(詩文)을 지을 때 붓을 잡으면 곧바로 쓰되 글과 이치가 극히 정밀하여 당시에 절묘하였고, 문집 55권을 남겼다. 초은(樵隱)이 박학하고 감식안이 있어 선배를 논함에 칭찬이 적었으나, 다만 공에게는 감탄을 마지 않으며 말하기를, “목은은 참으로 천재이다.” 하였다. 평상시에 사람을 맞이하고 일을 접함에 혼연하여 둥근 화기(和氣)가 감돌았다. 벼슬을 하여 처사할 때는 의논이 절실하고 명확하게 흔들리지 않더니, 정승이 되어서는 대체(大體)에 힘쓰고, 조금도 명예를 가깝게 하는 누가 없었다. 평생에 살림살이를 하지 않아 비록 여러 차례 부족하였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한가롭게, 때때로 산수(山水)에 놀면서 스스로 소일을 하였으며, 방외(方外)의 사람이라도 종유하고자 하는 자는 거절하지 않았고, 시문을 구사하는 자가 있으면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것으로 이단(異端)을 물리치지 않았다고 기롱을 하였으니, 공과 같은 이치를 통달한 밝은 식견으로 어찌 환망(幻妄)의 설을 믿었겠는가. 공이 서거할 때의 한 마디 말을 보아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부인 영가(永嘉) 권씨(權氏)는 원 나라 명위장군(明威將軍)이며, 우리나라 화원군(花原君) 중달(仲達)의 딸이요, 원 나라 태자좌찬선(太子左?善)이며, 우리나라 도첨의우정승(都僉議右政丞) 한공(漢功)의 손녀인데, 어진 행실이 있어 부도(婦道)를 지켜 살림살이로써 공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 않았다. 아들 셋을 낳았는데, 맏아들 종덕(種德)은 추성익위공신 지밀직사사였고, 다음 종학(種學)은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였으며, 병진년 과거에 올라 기사년에 동지거거(同知貢擧)였는데, 모두 공보다 먼저 죽었고, 다음 종선(種善)은 사헌부 집의로서 임술년 과거에 올랐었다. 지밀직(知密直)의 아들은 넷인데, 맏아들 맹유(孟?)는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요, 다음 맹균(孟畇)은 예문관직제학으로 을축년 과거에 올랐고, 다음 맹준(孟畯)은 임신년 과거에 올랐고, 다음 맹진(孟畛)은 사복시직장이었다. 딸은 들인데 맏딸은 서령군(瑞寧君) 유기(柳沂)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첨총제(僉摠制) 하구(河久)에게 시집가고, 첨서(僉書)는 아들이 여섯인데 맏아들 숙야(叔野)는 사재고감(司宰小監)이요, 다음 숙규(叔畦)는 사수주부(司水注簿)요, 다음 숙당(叔當)은 부사직이요, 다음 숙묘(叔畝)는 공조의랑(工曹義郞)이요, 다음은 숙복(叔福)이요, 다음은 숙치(叔?)이다. 딸은 정윤(正尹) 이점(李漸)에게 시집갔고, 집의는 아들이 셋인데 맏아들은 계주(季疇)요, 둘은 어리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한국의 영재로세 / 維韓之英
가정이여 / 有翼稼亭
패옥같은 문장으로 / 瓊?厥辭
황제의 뜰에서 급제했네 / 射策帝廷
아, 빛나는 문정공이 / 於赫文靖
실로 경을 전하였소 / 實維傳經
일찍이 벽옹에 들어가 / 蚤入?雍
그 향기를 크게 풍겼고 / 大播其馨
계속 을과에 합격하여 / ?中乙科
옥당 벼슬에 올랐네 / 繼踵玉堂
그 울림이 더욱 커서 / 厥鳴益大
국가의 빛이었고 / 家國之光
동으로 돌아와서 / ?而東歸
일방에 스승이 되었네 / 師範一方
의리에 정미하여 / 義理精微
위로 정자와 장자를 이었고 / 上接程張
문장이 고고하여 / 文辭高古
소식과 황정견을 내려 보았었네 / 下視蘇黃
도가 그 몸에 쌓여 / 道積厥躬
처사가 편안하였고 / 處事安詳
덕은 나이와 함께 높고 / 德與齒尊
지위는 조정에 으뜸이었네 / 位冠巖廊
사명을 받들어 전대하여 / 奉使專對
천자에게 존경받고 / 見禮天王
돌아오자 한가함을 요청하였으니 / 來歸乞閑
진퇴가 다 옳았소 / 進退其臧
시세가 어려움이 많아 / 維時多難
하늘의 뜻은 아득하여 / 天意杳茫
진퇴양난의 시기 / 狼尾之?
나라 사람이 슬퍼하였고 / 國人心傷
태산이 무너지니 / 泰山之?
길 가던 사람도 눈물 뿌리었다오 / 行路涕滂
아, 선생이시여 / 嗚呼先生
그 덕음이 잊혀지지 않네 / 德音不忘
자손이 뒤를 이어 / 子孫其承
복록이 다하지 않으리 / 福祿未央
나의 명에 아첨이 없으니 / 我銘不諛
먼 앞날에도 보리라 / 用示攸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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