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권112 열전(列傳)25에 실려 있다. 박상충(1332 ~ 1375)은 이곡(李穀)의 문인이요 사위였으며, 신진 성리학자이자 친명파(親明派)로 활약하다가 반대파에게 암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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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갈명(墓碣銘)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지낸 박공(朴公)의 묘갈명
예로부터 현인 군자가 시대를 만나지 못하여 원통함을 품고 죽을 경우, 그 후손이 반드시 이 세상에 크게 드러나는 것은 이치에 있어 정상적인 것이다. 옛 사람이 이른바 ‘하늘은 기필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참으로 속이는 말이 아니니, 박씨(朴氏)의 가문을 보면 그 말을 더욱더 믿을 수가 있다.
옛날 고려 말기에 판전교사 겸 우문관직제학(判典校事兼右文館直提學)을 지낸 박상충(朴尙衷)은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사위이다. 종계(宗系)가 신라에서 나와 반남(潘南)에 입적(入籍)하였으며, 문장과 절의로 한세상을 뒤덮었다. 당시에 조정의 의논이 북원(北元)을 섬기고자 하여, 김의(金義)가 대명(大明)의 사신을 살해하였다. 그러자 공이 두 차례 상소를 올려 곧바로 배척하였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러서 형벌을 받아 멀리 유배가게 되었다. 그런데 겨우 도성 문을 나서자마자 죽었으므로, 그 자리에 장사지냈다. 내가 일찍이 개성(開城)의 연자동(燕子洞)에 갔다가 그 안에 전교총(典校?)이란 것이 있기에, 공경히 조문하면서 마음 아파하였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전교공의 아들 박은(朴?)이 있는데, 태종(太宗)을 도와 수고를 한 공훈이 있어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에 봉해졌다. 금천부원군 이후로 몇 대를 내려와서 첨지를 지낸 박임종(朴林宗)이 있는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이조 정랑을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된 박조년(朴兆年)을 낳았다. 정랑공이 사간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박소(朴紹)를 낳았는데, 과거 시험에 장원 급제하여 명망이 중하였으며, 사림(士林)의 영수(領袖)가 되었고, 분노를 발하는 것이 공정하였다. 그러다가 권흉(權兇)의 모함을 받아 한번 배척을 받은 다음에 다시는 등용되지 못하고서 마침내 영외(嶺外)에서 졸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공은 사간공의 막내아들로, 휘가 응인(應寅)이며, 자가 원중(元仲)이다. 위로 네 명의 형이 있는데, 맏형은 박응천(朴應川)으로 목사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둘째 형은 박응순(朴應順)으로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에 봉해졌고, 셋째 형은 박응남(朴應南)으로 대사헌이고, 넷째 형은 박응복(朴應福)으로 병조 참판이다. 반성부원군이 의인 왕후(懿仁王后)를 탄생시켜 3대가 추증받았다.
목사의 네 아들과 두 손자, 대사헌의 손자, 참판의 세 아들과 두 손자가 모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대부분 명신(名臣)이 되었다. 이에 한때에 명문 대족(名門大族)을 손꼽는 자들이 반남 박씨(潘南朴氏)를 가장 먼저 손꼽았으니, 이른바 시대를 만나지 못해 원통함을 품고 죽을 경우, 후세에 크게 드러난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은 장중하고 과묵하였으며, 기도(器度)가 우뚝하였다. 안으로는 여러 형들의 가르침을 받고 밖으로는 어진 스승의 훈계를 받아 무오년(1558, 명종 13)의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금오랑(金吾郞)에 보임되었다가 자급에 따라 천전(遷轉)하여 내외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모두 치적이 뛰어나다는 명성이 있었다. 내직으로는 형조의 낭관, 풍저창(?儲倉)의 수(守), 태복시(太僕寺)와 사재감(司宰監)의 첨정(僉正), 한성부(漢城府)의 서윤(庶尹), 상의원(尙衣院)의 정(正)을 역임하고, 통례원 상례를 거쳐 첨지와 도정으로 승진하였다. 외직으로는 개성 도사(開城都事)가 되었으며, 한 현(縣)과 두 군(郡), 세 부(府)의 수령을 지냈는데, 호서의 홍산(鴻山)과 온양(溫陽), 영남의 금산(金山), 해서의 연안(延安), 경기의 장단(長湍)과 남양(南陽)이다.
공은 자신을 단속하는 데 엄하였고 아랫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밝았으며, 옥송(獄訟)을 처리함에 있어 강한 자라고 해서 겁내지 않았고, 관절(關節)이 통하지 않았으며, 진휼(賑恤)함에 있어 법도가 있었다. 이로 인해 정사가 맑고 일이 단출하여 그 동안에 폐기되었던 온갖 것들이 모두 부흥되었다. 구봉령(具鳳齡)이 호서를 안찰하면서 공이 하는 것을 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사군(使君)과 같은 사람 몇 명을 얻어서 다스리기 어려운 지역에 두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하였으며, 어사 김성일(金誠一)이 경기를 순시하면서 안찰할 적에는 술잔을 들어 칭하하기를, “그대는 진실되고 꾸밈이 없으며 명예를 구하지 않으니, 옛날의 순리(循吏)들에 비해 부끄러울 것이 없다.” 하였다. 위의 두 분과 같은 사람들은 모두 공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하겠다.
처음에 사간공(司諫公)이 두 동생인 박관(朴?), 박즙(朴緝)과 함께 송당(松堂) 박영(朴英)에게서 수학하였는데, 송당이 ‘한 집안의 삼걸(三傑)’이라고 칭하였다. 박즙은 학문을 좋아하고 행실이 독실하였으나 일찍 요절하여 자식이 없었는데, 송당이 그 말을 묘 앞의 돌에 새겨 애통해하는 뜻을 부쳤다. 사간공이 임종을 하면서 여러 아들들에게 말하기를, “나에게 자식이 있으면서 내 동생의 후사를 이어 주지 못한다면 내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목사공(牧使公)이 선친의 뜻을 대부인에게 말하고서 공을 그의 후사로 삼았다. 그 뒤에 공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의 훈에 참여됨으로써 호조 참판의 관직에 추증되었다.
대부인(大夫人)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시(寺)의 정(正) 홍사부(洪士俯)의 딸이며, 대사헌 아무개의 증손녀인데, 영예와 봉양을 극도로 갖추어서 85세의 수를 누리고 세상을 마쳤다. 그러자 목사공은 나이가 60여 세였는데도 여러 동생들을 거느리고 양주(楊州) 금촌(金村)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공은 여러 형들이 모두 늙었기 때문에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공이 다 처리하였는데, 제기(祭器)를 반드시 자신이 직접 씻고 채소와 과일을 모두 자신이 직접 담았으며, 상제(祥祭)가 지나서 최복(衰服)을 벗은 다음에는 심상(心喪)으로 삼년상을 마치었다. 효제(孝悌)의 독실함은 천성에 뿌리박은 것이고, 돈독한 의리는 구족(九族)에까지 두루 미쳤다. 임진년과 정유년의 난리 때에는 중궁(中宮)을 호위하면서 종시토록 수고하여, 이로 인해 당상관에 승진하였다. 병오년(1606, 선조 39) 9월에 돈녕부 도정으로 있다가 성 남쪽에 있는 집에서 졸하니, 춘추가 75세였다. 그 해 12월에 금촌(金村)에 장사지냈다. 계해년(1623, 인조 1)에 부인 변씨(卞氏)가 졸하자 파산(坡山)에 새로 묏자리를 잡아 함께 장사지냈다가, 무자년(1648, 인조 26)에 양주(楊州) 나성(羅城)의 임좌(壬坐) 언덕으로 함께 이장하였다.
부인은 찰방(察訪) 변희눌(卞希訥)의 딸이다. 3남 5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박동기(朴東紀)로 생원이고, 차남은 박동적(朴東績)이고, 삼남은 박동위(朴東緯)로 장악원 첨정이다. 장녀는 사의(司議) 조정(趙玎)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권익경(權益慶)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이영백(李英白)에게 시집갔고, 사녀는 좌랑 유속(柳?)에게 시집갔고, 오녀는 최영원(崔永源)에게 시집갔다.
박동기는 부사 이공좌(李公佐)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박동적은 감사 홍인헌(洪仁憲)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모두 후사가 없다. 박동위는 찰방 최효원(崔孝源)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4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박려(朴?)로 연천 현감(漣川縣監)이고, 차남은 박빈(朴彬)으로 박동기의 후사가 되었고, 삼남은 박진(朴?)이다. 장녀는 한준발(韓駿發)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조경위(曺敬瑋)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유현(柳俔)에게 시집갔고, 사녀는 진사 정만세(鄭晩世)에게 시집갔는데, 일찍 죽어서 후사가 없다.
사의 조정(趙玎)은 1녀를 두었는데, 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 구굉(具宏)에게 시집가서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구인기(具仁?)로 능풍군(綾?君)에 봉해져서 지금은 경기 수사로 있고, 장녀는 이입신(李立身)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진천군(晉川君) 유후(柳?)에게 시집갔다. 권익경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권섬(權暹)이다.
연천 현감 박려는 4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박세섭(朴世燮), 박세혁(朴世爀), 박세욱(朴世煜), 박세준(朴世)이고, 장녀는 김석명(金碩明)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생원 김유(金?)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박빈은 5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박세희(朴世熙), 박세황(朴世煌), 박세연(朴世?), 박세전(朴世?), 박세겸(朴世兼)이고, 딸들은 모두 어리다. 박진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박세영(朴世榮), 박세형(朴世瑩)이고, 딸들은 모두 어리다. 한준발은 3남을 두었고, 조경위는 2남 2녀를 두었고, 유현은 1남을 두었다.
공은 형제들 가운데에서 그 덕에 걸맞은 직위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자손들이 이처럼 많으니, 반드시 덕을 쌓고서도 발하지 못한 것인바, 박씨 가문의 복이 대개 다 없어지지 않은 것이다.
나의 장인의 외조모가 바로 공의 여동생이다. 나는 이 때문에 박씨 가문의 일에 대하여 아주 자세하게 알고 있으며, 공의 집으로 가서 절을 한 적이 있었다. 첨정 박동위가, 당형(堂兄)인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이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 나에게 묘갈명을 지어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내가 사양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행장에 있는 말을 엮어서 차례대로 서술하였다. 그 명은 다음과 같다.
천도가 착한 사람 보살펴 주지 않아 / 天道無親與善人
앞에서는 굴했으나 뒤에 와서 펴졌다네 / 雖前之屈必後伸
문호가 번성한 건 까닭이 있는 거고 / 高大其門蓋有因
공께서 장수함도 어질었기 때문이네 / 惟公壽考亦以仁
큰 고을 자주 맡아 은택 많이 내렸으니 / 屢典名府澤斯民
뛰어난 후손들 의당 많이 나올 거네 / 瑤環蘭茁宜振振
공후 되어 반드시 띠에 홀 꽂으리니 / 公侯必復搢而紳
명을 지어 빗돌에 새기어서 밝히노라 / 銘以明之勒貞珉
[주D-001]김의(金義)가 …… 살해하였다 : 김의는 본디 호인(胡人)으로, 이름이 야열가(也列哥)이다. 공민왕(恭愍王) 23년(1374)에 명나라 사신 임밀(林密)과 채빈(蔡斌) 등이 말을 바치라고 요구하고 돌아갈 때 호송하는 책임을 맡았다. 이때 공민왕이 시해(弑害)되었는데, 당시 재상으로 있던 이인임(李仁任)이 명나라에서 문책할 것을 두려워하여 김의로 하여금 명나라 사신을 살해하게 하였다. 이에 김의는 채빈을 살해하고 임밀을 잡아서 원나라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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