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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유항 선생(柳巷先生) 한 문경공 수(韓文敬公脩)의 문집의 서 -권근(權近)-

장안봉(微山) 2013. 5. 27. 16:56

유항 선생(柳巷先生) 한 문경공 수(韓文敬公脩)의 문집의 서
 

근세의 명경(名卿)으로는, 유항(柳巷) 한 문경공이 지행(志行)이 높고 견식(見識)이 밝아 한 시대 사림(士林)의 모범이 되고, 필법(筆法)이 뛰어나 온 세상이 중시하는 바 되었었다.
현릉(玄陵 공민왕)에게 신임을 받아 오래 후설(喉舌)의 자리에 있으며 아름다운 계책으로 계옥(啓沃 충성된 마음으로 기탄없이 충고하는 것)하여, 비익(裨益)됨이 크고도 많았다. 사람을 대하고 사물에 접할 때에도 반드시 성의로써 하여 망령되이 헐뜯거나 칭찬하지 않았으며, 같이 종유(從遊)하던 목은(牧隱)ㆍ평재(平齋)등 제공(諸公)은 모두 진신(縉紳) 중에서도 선량(選良)인데, 점차로 그들과 학문을 연마(硏磨)하고 서로 바루면서 친숙하게 지냈으니 또한 지극하다 할 만하다.
공이 전선(銓選 전형)을 맡았을 적에 내가 후배로 요좌(寮佐 보좌)가 되어, 언젠가 하루는 같이 대궐에서 숙직하는데, 내가 밥을 먹으며 책을 보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그대가 공경을 주력하지 아니함을 알겠다. 입에는 밥이 들어 있고 눈으로는 보는 것이 있으니, 마음이 전일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송구하였으나, 그 후로도 그렇게 힘쓰지는 못하였지만, 감히 공의 한마디 말을 잊지 못하여 종신토록 도움이 되었다. 무릇 공이 남을 규계(規戒)하여 바로잡아 준 것이 모두 이런 종류이었다.
공은 일찍부터 시로 이름이 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와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칭찬을 받았었다. 만년에는 더욱 향상되었으나 신중하게 법을 지키어, 어린이가 묻더라도 반드시 이 가닥 저 가닥을 다 들어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도은(陶隱) 같은 이들이 훌륭하다는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으나, 무릇 저술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공에게 가서 질정을 받아서 버리고 취하고 하였는데, 흔연히 복종하며 만족하게 여기고 돌아가지 않을 때가 없었다. 불민(不敏)한 나도 더러는 다행히 비루하게 여기지 않고 수긍하여 줌을 받았었다.
공은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다 어질어 서로 잇달아 높은 과거에 오른 사람이 셋이며, 재상(宰相)을 계승하여 복록(福祿)이 한량없으니, 이는 다 공이 교회(敎誨)를 잘한 힘으로 된 것이다. 일찍이 공거(貢擧)를 맡아 뽑은 사람 중에 현달한 관원과 명성 있는 사람이 많으므로, 세상에서는 모두 그의 감식(鑑識)과 재단(裁斷)이 정밀하였음을 탄복하였다.
아아, 공은 언행(言行)과 재식(才識)이 모두 사군자(士君子)의 사범(師範)이 될 만하거니와, 시(詩)는 다만 그의 여사(餘事)에 불과하였다. 만년에 한가로이 지낼 때 또한 목은(牧隱)과 같은 마을에 살게 되어, 발길이 서로 왔다갔다하며 시를 지어 주고받고 하였는데, 두 사람의 풍류(風流)와 고상한 운치는, 그 시를 읽어 보면 상상할 수 있다.
유항(柳巷)은 그의 마을 이름인데 이를 따서 호를 삼은 것이다. 평소에 저술한 것을 스스로 만족스럽게 여기지 아니하여 수집하지 않았었는데, 돌아간 뒤에 여러 아들이 산일(散逸)된 원고를 모아 겨우 몇 수(首)가 되었으니, 참으로 태산의 털끝[泰山之毫芒]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 시를 보면 간결(簡潔)하고 충담(沖澹)한 맛이 의사 밖에 높이 솟아나, 마치 청아(淸雅)한 옥소리의 긴 여운을 듣는 듯하니, 많아야 하느냐? 많을 것이 없는 것이다.
둘째 아들 정당(政堂) 상질(尙質)이 형제들과 상의하여 장차 간행(刊行)해서 오래 전하게 하려 하면서, 내가 오랫동안 공을 섬겼기 때문에 서문을 부탁하는데, 사양할 수 없어 대략 공의 언행의 줄거리를 서술해서 책머리에 붙임으로써 뒷날 공의 시집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법받아야 할 것이 단지 시뿐이 아님을 알게 한 것이다.

출처 : ▒ 한 산 草 堂 ▒
글쓴이 : 천하한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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