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가정 이곡.목은 이색

[스크랩]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문집의 서 -권근(權近)-

장안봉(微山) 2013. 5. 27. 16:56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문집의 서
 

문자가 천지간에 존재(存在)하여 도(道)와 성쇠를 같이하는 것이니, 도가 위에서 행해지면 글이 예악(禮樂)과 정교(政敎) 사이에 나타나고, 도가 아래에서 밝아지면 글은 간편(簡編)의 필삭(筆削) 가운데 의존하게 된다. 그러므로 전ㆍ모ㆍ서ㆍ명(典謨誓命)의 글이나 산ㆍ정ㆍ찬ㆍ수(刪定贊修)한 서책이 도를 담고 있음은 마찬가지다.
주(周) 나라가 쇠퇴하여 도가 어두워지자, 백가(百家)가 서로 일어나 각각 자기의 학술을 창도함으로써 글은 병들기 시작하였다. 한(漢) 나라 사마천(司馬遷)과 양웅(揚雄)의 무리도 그 말이 오히려 순아(醇雅)하지 못했던 것인데, 불씨(佛氏)가 중국에 들어오자 이 글은 더욱 병들어, 위ㆍ진(魏晉) 이후는 아주 묵어 버린 채로 볼 것이 없었다.
당(唐) 나라 때에 와서 한자(韓子)가 인의(仁義)를 숭상하고 이단(異端)을 물리쳐 팔대(八代)의 쇠퇴를 일으켰고, 송(宋) 나라가 일어나서는 정자(程子)ㆍ주자(朱子)의 글이 나오게 된 뒤에 도학(道學)이 다시 밝아져, 사람들이 우리 도의 큼과 이단의 그름을 알게 되었으니, 후학을 개도(開導)하고 만세에 밝혀 놓은 것이 참으로 훌륭한 일이었다.
우리 동방(東方)이 비록 바다 밖에 있으나, 기자(箕子)가 팔조(八條)를 가르침으로부터 풍속이 염치를 숭상하게 되어, 문물(文物)의 아름다움과 인재(人材)의 배출(輩出)이 중국과 견주게 되었었다. 이로부터 대대로 문치(文治)를 숭상하고 과거(科擧)를 보여 선비를 뽑되, 한결같이 중국 제도대로 수백년 동안 훈도(薰陶)하여 육성(育成)하니, 경ㆍ사대부(卿士大夫)가 모두 빈빈(彬彬 겉모양과 바탕이 갖추어진 모양)한 문학도(文學徒)였다.
우리 집안 문정공(文正公 권보(權溥))이 처음으로 주자(朱子)가 집주(集註)한 사서(四書)를 간행하여 후학(後學) 권장하기를 건백(建白)하였었는데, 그의 사위 익재(益齋) 이 문충공(李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이 스승으로 섬기며 친히 배워, 의리의 학문을 주창함으로 세상의 유종(儒宗)이 되었었고, 가정(稼亭 이곡(李穀))ㆍ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 등 제공(諸公)이 이어서 일어났으며, 담암(澹庵) 백공(白公 이름은 문보(文寶))은 이단(異端) 물리치기를 더욱 힘썼었다.
우리 좌주(座主) 목은 선생(牧隱先生 이색(李穡))이 일찍부터, 가정의 훈육을 받아, 벽옹(?雍 중국의 태학을 말함)에 입학하여 정대 정미(正大精微)한 학문을 전공(專攻)하였었는데, 돌아오자 유사(儒士)들이 모두 종주(宗主)로 삼았으니, 포은(圃隱) 정공(鄭公 정몽주(鄭夢周))ㆍ도은(陶隱) 이공(李公 이숭인(李崇仁))ㆍ삼봉(三峯) 정공(鄭公 정도전(鄭道傳))ㆍ반양(潘陽) 박공(朴公 박상충(朴尙衷))ㆍ무송(茂松) 윤공(尹公 윤소종(尹紹宗)) 같은 이는 모두 그 승당(升堂)한 분들이었다
삼봉은 그 중에서도 포은ㆍ도은과 제일 서로 친절하게 강론하고 연마하여 더욱 얻은 바가 있었는데, 항상 후진들을 훈도(訓導)하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았었다.《시경》ㆍ《서경 》을 강론할 적에는 능히 알기 쉬운 말로 지극한 이치를 형용하여 설명하니, 배우는 사람들이 한 번 들으면 바로 그 뜻을 깨달았으며, 이단을 물리칠 적에는 능히 그 글에 정통하여 먼저 그 자상한 내용을 설명하고서 그 그른 점을 지적하므로, 듣는 사람들이 모두 복종하였다.
이러므로 경(經)을 들고 종유(從遊)하는 사람이 골목을 메웠으며, 일찍이 그에게서 배워 높은 벼슬에 오른 사람이 어깨를 비비며 서게 되었고, 무부(武夫)나 속사(俗士)들일지라도 그의 강설(講說)을 들으면 재미를 붙여 싫증내지 않았고, 부도(浮屠 중을 가리킨다)들까지도 또한 상종(相從)하여 변화되는 자가 있었다.
예악(禮樂)ㆍ제도(制度)ㆍ음양(陰陽)ㆍ병법(兵法)ㆍ역법(曆法)에 이르기까지 정밀하게 알지 않은 것이 없어, 팔진(八陣)에 의거하여 삼십육변도보(三十六變圖譜)를 만들고, 태일(太一)을 요약하여 칠십이국도(七十二局圖)를 만들되, 간단하면서도 곡진하게 해놓으니 세상의 명장(名將)이나 술사(術士)들이 모두 잘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선생의 여사(餘事)이다.
선생은 절의(節義)가 매우 높고 학술이 가장 정밀하여, 일찍이 바른 말 때문에 재상과 거슬리어 남방으로 유배(流配)된 지 10년이 되었으나 그 지조를 변하지 않았으며, 공리(功利)를 좇고 이단(異端)을 말하는 무리들이 떼지어 기만하고 무리지어 헐뜯었으나 지킴이 더욱 견고하였으니, 선생은 과연 도를 신봉(信奉)함이 독실하여 현혹되지 않는 분이라 하겠다.
선생의 저술 가운데《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 몇 편은, 의리의 정밀한 설명이 일목 요연하여 전현(前賢)들이 천명하지 못한 점을 다 말하였고,《잡제(雜題)》 몇 권은 신심(身心)ㆍ성명(性命)의 덕에 근본하여 부자(父子)ㆍ군신(君臣)의 윤리를 밝혔는데, 크게는 천지ㆍ일월, 작게는 조수(鳥獸)ㆍ초목에 이르기까지도, 이치가 도달되지 않은 것이 없고 말이 정밀하지 않은 것이 없게 하였다.
상국(上國)의 사명(辭命 외교 문서)에 관한 글은 전아(典雅)하여 체에 맞았고, 고율(古律)의 작품(作品)들은 위ㆍ진(魏晉)을 그대로 본따고 성당(盛唐)에 소급했으나, 원리와 취지는 아ㆍ송(雅頌)에서 나와 질박하면서도 다듬어지고 온화하고도 담담하여, 진실로 옛사람들에게 손색이 없었다. 또《악부소서(樂部小序)》는 번다하고 난잡한 것과 음란하고 괴벽한 것들을 산삭(刪削)하고, 오직 바른 성
정(性情)에서 감발(感發)될 것만을 기록하였다.
아아! 선생의 글은 모두 명교(名敎)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서 공언(空言)에 비할 바가 아니니, 이 글은 도(道)와 더불어 후세에 전해지고 썩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비록 소국(小國)에 나서 그 글이 중국 성대(盛代)의 전장(典章)에는 씌어지지 못했으나, 일찍이 사신으로 경사(京師)에 조회 갈 적에 요해(遼海)를 건너고 제ㆍ노(齊魯)를 지나면서 지은 시문(詩文)이 모두 중국 문사(文士)들에게 칭찬 받았었다. 이는 능히 글로써 한 지방을 울리면서 동점(東漸)의 교화(敎化)를 찬양하여, 동방(東方) 사람들로 하여금 만세토록 노래하게 한 것이니, 성대(聖代)의 훌륭한 치도(治道)와 함께 한없이 전해질 것도 역시 틀림없는 일이다.
근(近)이 변변치 못하지만, 다행히 따라가는 대열에 참여하여 여담을 듣게 되었는데, 또한 다행히도 비루하게 여기지 않고 서를 짓도록 명하였기에, 감히 책 머리에 쓰는 바이다.


[주D-001]전·모·서·명(典謨誓命) : 전은 《서경》의 요전(堯典)·순전(舜典), 모는 대우모(大禹謨)·고요모(皐陶謨), 서는 감서(甘誓)·탕서(湯誓)·태서(泰誓)·목서(牧誓), 명은 열명(說命)·미자지명(微子之命) 등을 말한 것이다.
[주D-002]산·정·찬·수(刪定贊修) : 공자가 《시경》·《서경》을 산하고, 예(禮)·악(樂)을 정하고, 《역경》을 찬수하고, 《춘추》를 편수한 것을 말한다.
[주D-003]팔대(八代) : 후한(後漢)·위(魏)·진(晉)·송(宋)·제(齊)·양(梁)·진(陳)·수(隋)이다.

출처 : ▒ 한 산 草 堂 ▒
글쓴이 : 천하한량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