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 간본 아정유고 제3권
기(記)
계사년 봄 유람기(遊覽記)
계사년(영조 49, 1773) 윤삼월(閏三月)에, 나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호)ㆍ영재(?齋 유득공(柳得恭)의 호)와 함께 평양(平壤)을 유람하기 위해 25일 파주(坡州)에서 잤다.
홍제원(弘濟院)으로부터 녹반현(綠礬峴)에 이르니 길이 훤히 트여 넓고 평평하며 곧아서 말이 잘 걷는다. 파주로 가는 길 북쪽으로 숲이 우거진 언덕 위에 돌로 만든 사람 두 개가 우뚝 서 있는데,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으며 낯빛이 회청색(灰靑色)이어서 무섭게 생겼다. 이것은 대개 동쪽 산의 우묵한 곳에 삼각산(三角山)이 뾰족이 엿보고 있으므로 여기에 수망(守望)을 설치하여 삼각산 기운을 누르는 것이다.
26일 아침 화석정(花石亭)에 오르니, 이곳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호) 선생의 별장이다. 벽에는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호)ㆍ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의 호) 등 여러 명현들의 시(詩)가 있으며, 또 명(明) 나라 사신 황홍헌(黃洪憲) 등 여러 사람들의 시가 있다. 잡목이 우거져 푸르며 새들이 지저귀고 앞에는 구회강(九檜江)이 반달처럼 흐르고 있다. 이리저리 거닐며 상상해 보니 감회를 견딜 수 없어 경서를 끼고 선생을 뵈는 열(列)에 있는 듯하다. 한낮이 되어 개경(開京)의 선비 양정맹(梁廷孟)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진사(進士) 임창택(林昌澤)의 호는 숭악(崧岳)인데, 성품이 대단히 효성스럽고 시문(詩文)에 능하였으며 일찍이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호)을 따라 놀았다. 저서로는 《숭악집(崧岳集)》 몇 권이 있으며 《황고집전(黃固執傳)》과 《임장군전(林將軍傳)》이 있다.
고려(高麗) 말엽의 개성윤(開城尹) 조인(曹仁)의 아들이 의생(義生)과 임선미(林先味) 등 70여 명이 문을 닫고 절의(節義)를 지켜, 칼날이 눈앞에 이르는데도 앞을 다투어 죽으려 하니, 그들의 자손을 모두 폐하여 등용하지 않았다. 이양중(李養中)은 고려가 멸망하자 은둔하여 살았으며 원통하게 죽은 차원부(車原?)의 죽음을 분하게 여겨, 타어회(打魚會)에서 막걸리를 담아 놓은 술병을 깨부수었으니 사람들이 파료옹(破?翁 막걸리 병을 깬 노인이란 뜻)이라 불렀다. 길재(吉再)가 등잔을 던진 것과 조 운흘(趙云?)이 책상을 친 사실들이 《숭악집》에 나와 있다.
두문동(杜門洞)은 지금의 동현(銅峴)이며, 또한 부조령(不朝嶺)과 괘관리(掛冠里)가 있다. 진사 한명상(韓命相)은 지식이 많고 고사를 알아 개성지(開城誌)를 저술하였는데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나는 일찍이 이분의 이름을 조경암(趙敬菴)에게 들었는데, 이번 길에 방문하려 하였으나 길이 총총하여 찾아보지 못하였다.
영재와 함께 남문(南門)에 올랐다. 이것은 국초(國初)에 만든 것으로 동쪽 가에는 성(城)이 없고 서쪽 가에만 성이 있으며, 치문(雉門 왕성(王城)의 남문)과 쇠문이 없다. 동쪽 가에는 연하여 종각(鐘閣)을 건립하였는데, 고려 충목왕(忠穆王) 때에 원(元) 나라에서 대장고부사(大藏庫副使)인 신예(辛裔)를 보내어 금강산(金剛山)에서 종을 만들도록 하였다. 일을 끝내고 돌아갈 무렵 왕이 예에게,
"대종(大鐘)이 못쓰게 된 지 오래니, 종을 만드는 훌륭한 기술자가 우리나라에 온 것을 기회로 하나 더 만들어 주기를 원한다."
하니, 예는 승낙하고 만들었다. 이것을 연복사(演福寺)에다 매달아 두었었는데 국초에 이곳으로 옮겨 달았다.
이가정(李稼亭 가정은 이곡(李穀)의 호)이 기문(記文)을 지었으며, 글씨는 꿈틀거리는 용의 비늘과 같고 두께는 주척(周尺)으로 거의 2척쯤 되었다.
저녁에 청석동(靑石洞)에서 잠을 잤다. 깊숙한 골짜기는 고요한데 암석에 부딪치는 물소리만이 구슬피 울릴 뿐이다. 황혼이 되자 다리에 반점(斑點)이 있는 모기떼가 앵앵거린다. 연암과 영재 두 분과 함께 길거리로 놀러나오니, 어떤 노인이 가야금을 타고 또 해금(奚琴)을 뜯으면서 노래를 잘 부른다. 다시 입을 오므려 잎피리를 불자 소리가 웅장하고 구슬퍼 바위와 숲을 메아리친다.
27일, 아침 청석동을 출발하여 마당점(麻唐店)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店)은 곧 평산(平山)의 땅인데 화석(火石)이 나온다. 평산은 흙빛이 빨갛고 길옆에 간간이 조약돌이 보이는데, 대추 같기도 하고 콩 같기도 한 것이 흙과 섞여 엉기어서 단단한 덩어리가 되어 울퉁불퉁하다. 이것은 먼 옛날에는 물이 괸 곳이었는데, 어느 해엔가 물이 빠지고 육지가 된 것이다. 총수점(蔥秀店)에서 자려고 사양(斜陽)에 말을 몰아 가니, 물빛이 반짝거리고 고목이 띄엄띄엄 있어 사람에게 전원(田園)의 기분을 느끼게 한다. 점(店)의 지붕을 푸른 돌로 덮기도 하였으며, 산 하나가 점의 남쪽에 깎아지른 절벽으로 솟아 있는데 기괴(奇怪)하고 수려(秀麗)하며 잡목들의 잎이 우거져 있다. 기다란 내가 빙 둘러 산봉우리의 그림자가 물속에 거꾸로 잠겨 있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는데 무늬 있는 고기들이 사람의 발소리를 듣고는 수면에서 뛰며, 얼룩오리는 옷 그림자를 보고는 놀라 모래 위로 걸어간다.
이에 연암ㆍ영재 두 분과 함께 미친 듯 기뻐 춤을 추려고 하였다. 석탑(石榻)에 걸터앉으니 석탑의 동쪽 벽은 깊숙이 배꼽처럼 생겼는데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그 언저리는 모두 꽃무늬가 되어 도장을 새길 만하다. 주난우(朱蘭? 난우는 주지번(朱之蕃)의 호)가 옥류천(玉溜川)이라고 가로 써 놓았는데 글자 크기가 손바닥만큼씩 하고 옆에는 도장을 찍었으며, 또 옥유영천(玉乳靈泉)이라는 4글자가 있고 옆에 장백 유홍훈(長白劉鴻訓)이라고 새겨 놓았다. 연암은 본래 돌에 그림을 잘 그렸는데 이것을 보고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그어 그림 그리는 모습을 하면서 이르기를,
"준법(?法)이 귀신의 가죽도 아니고 말의 어금니도 아니다."
하고는 기뻐하여 무엇을 알아낸 듯하였다. 영재는 칼을 꺼내어 갈고 다듬어서 금성(金星)ㆍ구안(?眼)을 만들려고 하였는데 색깔이 쑥처럼 푸르고 메밀처럼 희었다. 석탑의 서쪽에 또 청천선탑(聽泉仙榻)이라고 쓴 4글자가 있고, 위에는 가느다란 돌층계가 있는데 물방울이 비처럼 쏟아진다. 이 산 이름인 총수(蔥秀)의 총(蔥)은 푸름을 말한 것이니 푸르고 또 빼어난 것은 우리나라 산중에서 이 산보다 더한 데는 없을 것이다. 요동(遼東)에 총수산이 있는데 이 산과 똑같았으므로 이 산을 총수산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절벽의 중간에 가부좌하고 앉아 있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상을 조각해 놓았는데 어깨와 발이 매우 단정하고 예쁘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주난우의 상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28일, 서흥(瑞興)에서 점심을 먹고 영파루(映波樓)에 올랐는데, 이 누는 용천관(龍泉館)의 문루(門樓)이다. 앞에는 긴 내가 흐르는데 깨끗하고 맑았다.
이장(李樟)의 집에서 술을 마셨다. 논 머리에 물을 푸는 기구가 있는데 두레라고 한다. 나무 3개를 세우고 끝을 동여매고는 장두(長斗)를 아래에 매달아 놓았다. 장두에는 자루가 있는데 이 자루를 잡고 올렸다내렸다 하면 물이 콸콸 논으로 들어간다. 모습은 마치 호하두(戶下斗 나무를 길게 파서 만든 오줌통)와 흡사한데 용골(龍骨)이라 부르기도 하며 세속에서는 용두(龍斗)라고도 한다. 우물의 난간은 나무로 만들기도 하고 푸른 돌로 만들기도 하는데, 양쪽 머리를 에워 깎아 서로 맞추어 놓은 것이 정(井)자 모양과 흡사하니, 대개 정자의 자형(字形)은 복판에 우묵하게 들어간 것을 형상한 것이 아니라 우물에 있는 난간의 모습을 취한 것이다. 이것으로 민생(民生)의 일상 생활에 쓰는 물건을 자세히 상형해 보면 자의(字義) 아닌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가면서 보니 길옆 암석이 간혹 절구통처럼 패었으며, 밭둑이 사방은 높고 한 가운데는 낮으며 땅밑으로 굴이 뚫리기도 하였다. 서쪽 사람들 말에 '해서(海西) 지방에는 봉사가 많으니 그것은 지형이 그렇게 생겼기 때문이다.' 한다. 그러나 일찍이 들으니 '해서 지방에는 공중에 실[絲]이 날아다니다가 눈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봉사가 많을 뿐만 아니라 눈먼 말[馬]도 많다.' 한다. 저녁에 검수점(劍水店)에 머물렀는데, 돌은 험상 궂게 서 있고 시냇물은 성난 소리를 내며 흘렀다.
[주D-001]타어회(打魚會) : 타어(打魚)는 그물로 고기를 잡는 것인데 이것을 구경하는 모임을 말한다.《高麗史 列傳 卷四十八 辛禑條》
[주D-002]준법(?法) : 그림 그리는 법의 하나로 물체의 음양(陰陽)·향배(向背)를 나타내는 것인데, 조그마한 붓으로 여러 번 그어서 산석(山石)의 맥이나 결을 표현하는 데 쓴다.
[주D-003]금성(金星)·구안(?眼) : 모두 좋은 벼루 이름이다. 금성은 금성석(金星石)으로 만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구안은 단계석(端溪石)으로 만든 것인데 벼룻돌 위의 원형(圓形)으로 된 반점이 흰색·붉은색·노란색 등 여러 가지 무늬가 있어서 마치 구욕(??)의 눈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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