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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경주이씨들이 소요스님 모친 묘소 돌본다

장안봉(微山) 2013. 5. 16. 17:34

경주이씨들이 소요스님 모친 묘소 돌본다

'유택점지'인연으로 373년째 시제…대이어 '보은'

 

 

 

 

        소요대사 모친 묘소

 

또다시 어버이날을 맞이한다.

부처님은 <부모은중경>을 통해 부모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깊은가를 설하고 계신다. 이 경전은 어머니의 은혜를 10가지로 나눠 생리학적 측면에서 매우 과학적으로 서술해 놓고 있다.

 

그래서인지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고자 삭발염의(削髮染衣)한 수행자이건만 출가자들에게도 어머니는 애틋하다.

 

얼마 전, 전남 담양 월산면 월계리 농암부락 뒷동산인 황산에 자리한 묘(墓) 하나가 곱게 단장을 했다.

 

주위의 여느 산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작은 묘이다. 그러나 이 지역 월산에 뿌리를 둔 경주이씨 후손들에게는 특별함이 있는 묘소이다.

 

집안의 어른이 아닌 어느 스님의 어머니 묘로 각별하게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주이씨 후손들이 소요대사 어머니묘에서

예를 올리고 있다. 모자 쓴 이가 일진 스님이고

오른쪽 옆이 고경 스님.

  

묘소의 주인은 조선중기 서산대사의 법을 이은 소요 태능(逍遙 太能.1562-1649)스님의 어머니이다. 친부모 묘마저 외면당하는 각박한 현실에서 소요 스님의 어머니 묘가 지역주민들에 의해 무려 400년 가까이 각별하게 모셔지고 있는 것이다.

 

“이곳이 바로 천하의 명당 ‘무자손천년향화지지(無子孫千年香火之地)’터입니다. 예로부터 이 묘를 잘 받들면 복을 받는다고 전해져오고 있어 너나없이 벌초하고 예를 올리고 있습니다”

 

 

경주이씨 월산문중 도유사 이복우씨

 

 

경주이씨 월산문중 소임을 맡고 있는 도유사(都有司) 이복우 씨(69)는 “어려서 어른들로부터 소요대사 어머니 묘를 잘 돌보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며 소요대사 어머니 묘소에 얽힌 사연을 들려준다.

 

이야기는 37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대의 고승 소요대사가 장성 백양사 주지로 있으면서 담양 용흥사 불사를 벌였다.

 

당시 용흥사 인근에 거주하던 이복우 씨의 10대조 이시망, 시우 형제가 불사에 동참하였고 이를 계기로 스님과 교류하게 되었다.

 

어느날 시망, 시우 형제는 소요 스님에게 부친의 유택 점지를 요청했다. 사찰불사에 큰 도움을 받았던 터에 감사의 뜻으로 음택 두 곳을 소개하며 하나를 선택토록 했다.

 

하나는 후대에 큰 벼슬이 나오고 명예가 높은 자리이고, 다른 하나는 큰 부자는 아니지만 부자로 자손이 번창한다는 터였다.

 

시망, 시우 형제는 집안이 번창한다는 ‘옥녀탄금(玉女彈琴)’형국의 자리를 택하고 부친 일민(逸民)의 묘를 썼다.

 

화려한 명예보다 소박한 화목을 선택한것은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때 소요 스님은 속가의 어머니 묘를 이곳 월산으로 옮기며 한마디 덧붙였다.

 

 

소요 대사 어머니의 묘임을 알리는 비석문.

<소요대사 태능모친지묘>라고 쓰여 있다.

 

“경주이씨 묘와 나의 어머니 묘에 제를 지내면 집안이 부유하고 자손이 번창하기를 천년간 이어진다”

 

이후 경주이씨 월산문중은 매년 음력 10월 보름 시제(금년부터 음,10월 11일)에 소요대사의 어머니 묘에서도 제를 올리고 있다. 그러기를 지난해까지 373년을 이어온 것이다.

 

지난달 어느 화창한 봄날, 이러한 소식을 듣고 순천 송광사 박물관장 고경 스님과 일진 스님이 담양 월산을 찾았다.

 

월산문중 도유사 이복우 씨를 비롯해 경주이씨 집안에서 스님들을 맞이했다. 소요대사 어머니 묘소에 단촐하지만 음식을 올리고 스님들이 향을 살랐다.

 

일진 스님은 “‘무자손천년향화지’는 후손이 끊긴 스님들의 부모를 위해 제사는 물론 때마다 공양이 끊이지 않도록 하는 효(孝)사상이 담겨있다”며 “이곳 소요대사 모친 묘는 김제 불거촌 진묵대사 모친 묘, 부안 동진 벽송선사 모친 묘와 더불어 한국 3대 무자손천년향화지로 보인다”고 말했다.

 

일진 스님은 또한 “불교가 억압받던 조선시대에는 스님들이 방편으로 음택풍수를 썼는데 이는 한가족이 아닌 문중을 불자화하는 최고의 포교였다”고 강조한다.

 

송광사 박물관장 고경 스님도 “소요 스님은 담양출신으로 백양사, 용추사, 연곡사 등 호남지역에서 선풍을 크게 일으킨 선승으로 문하에 침굉, 해운 스님 등 수백명이 일파를 이뤄 ‘소요파’라고 불리며 오늘에 까지 법맥을 이어오고 있다”며

 

“후손이 끊긴 소요 스님의 어머니 묘를 400년 가까이 경주이씨 문중에서 관리해 오고 있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승속을 떠나 본받을만한 일이다”고 감사의 뜻을 표했다.

 

스님들은 “‘무자손천년향화지’는 포교는 물론 효사상을 담고 있는 효행관으로, ‘자손이 번창하고 부귀영화한다’는 신념이 가족간에 서로를 돕고 우애를 살려 스스로 잘살게 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소요대사가 터를 잡았다는 경주이씨 월산문중 중시조 자리는 소요대사 어머니 묘에서 가까이 능선 너머에 있다. 누가 보아도 천하가 한눈에 펼쳐 보이는 명당자리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스님의 예언처럼 담양일대의 경주이씨는 번창했다. 현재 월산문중만 6500여명에 이르고, 큰 부자는 아니지만 천석 이상 집안이 즐비하다.

  

산을 내려오는 길에 동행했던 월산문중 이경우 씨(75)가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곁들인다.

 

“우리가 부모없이 어찌 생겼겠습니까. 아무리 시대가 변한다 해도 조상과 어른을 섬기는 풍습을 잃어서는 안돼요.

 

집안의 연고는 없어도 저희가 소요 스님의 모친 묘를 섬기는 뜻이 불교인뿐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거울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소요대사 태능(逍遙大師 太能·1563~1649)

 

성은 오씨, 전남 담양 출생. 13세에 백양사에서 출가. 부휴, 서산대사 밑에서 공부하고 20세에 은사의 명으로 개당해 교화를 폈다.

 

임진왜란이 나자 폐허가 된 절을 지키며 전각을 수리하고 전쟁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이후 지리산, 금강산, 오대산, 구월산 등에 머물며 교화를 폈다.

 

만년에 지리산 연곡사에 머물며 교화하다가 1649년 88세(법납 75)로 입적.

 

유정의 제자 가운데 편양언기와 함께 선의 양대 고승으로 추앙되며 백양사 연곡사 용추사에 부도가 있다. 저술로 <소요당집>1권이 있으며 시와 게송 200여편이 수록되어있다.

 

2005-05-09 오후 5:30:00 글ㆍ사진=담양 이준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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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소요대사부도(白羊寺逍遙大師浮屠)

 

보물  제1346호

전남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20

 

 

 

이 부도는 백양사 입구에 자리한 부도전 내에 있으며, 백양사 주지를 역임한 소요대사(1562∼1649)의 묘탑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156cm 규모의 부도로, 기단부·탑신부·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는 8각형으로, 각 면에는 초화무늬가 조각되었는데, 1면에만 거북 동물이 양각되어 있다. 상면에는 아래로 향한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그 위에는 각형 1단이 탑신부를 받고 있다.

탑신부는 종모양으로 전체적으로는 전통적인 범종의 모습과 같이 하대·유곽·상대·용뉴를 표현하고 있다. 하대에는 2줄의 돌출된 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그 안에는 게를 비롯한 8마리의 동물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유곽은 4면에 배치되었는데, 그 안에는 9개의 유두가 돌출되었다.

 

상대에는 2줄의 돌출된 선이 있고, 문양이 양각되어 있다. 상면에는 아래를 향한 연꽃무늬가 조각되었고, 하대와 유곽 사이에는 모두 4마리의 용을 조각하였다. 전면에는 액자 모양을 조각하고 그 안에 ‘소요당(逍遙堂)’이라 새겨서 소요대사의 부도임을 밝히고 있다.

상륜부는 4마리의 용두(龍頭)가 석종을 움켜 물은 상태인데, 그 사이에는 구름무늬를 새기고 그 위에 보주를 올려놓았다.

소요대사의 부도는 백양사 이외에도 담양 용추사와 지리산 연곡사에도 있다. 이 중 연곡사서부도(보물 제154호)는 탑신부에 새겨진 글에 의해서, 조선 효종 원년(1650)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백양사 소요대사 부도 역시 소요대사가 입적한 시기와 연곡사서부도의 건립연대 등으로 보아 1650년을 건립의 하한으로 볼 수 있다.

소요대사는 13세에 백양사에서 불도에 입문하였고 부림(浮林)에게 대장(大藏)을 배운 후 서산대사에게 신지(神旨)를 깨우쳤으며 백양사 조실(祖室)로 있었다.

백양사 소요대사 부도는 범종의 세부양식이 부도에 표현된 드문 사례이며 주인공이 확실하고 건립연대를 알 수 있어 부도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소요대사 태능(逍遙大師 太能) (1562∼1649)

 

조선 중기의 고승. 성은 오씨. 호는 소요(逍遙). 전라남도 담양출신. 어머니가 신승(神僧)으로부터 대승경(大乘經)을 받는 태몽을 꾸었으며, 태어나면서부터 살갗이 선명하고 골격이 씩씩하였다.

 

어려서부터 탐욕을 싫어하고 도훈(道訓) 을 듣기를 즐겨하였으며, 베풀기를 좋아하고 자비심이 많아 마을사람들이 성 동(聖童)이라고 불렀다.

 

13세에 백양산(白羊山)에 놀러갔다가 뛰어난 경치를 보고 곧 세속을 떠나기로 결심하여 진대사(眞大師)로부터 계()를 받았다. 그때 부휴대사(浮休大師)가 속리산과 해인사로 다니면서 교화를 폈는데, 그 밑에서 경률(經律)의 깊은 뜻을 익혔다.

 

부휴의 문하에 수백의 제자들이 있었으나, 오직 소요와 충휘(沖徽응상(應祥)만이 법문(法門)의 삼걸(三傑)이라 불렸다.서산대사(西山大師)가 묘향산에서 교화를 편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 달마대사가 천축국에서 중국으로 온 뜻이 무엇인가 를 묻는 話頭)를 물었다.

 

서산대사는 한번 보고 곧 건당(建幢)을 시켜 의발 (衣鉢)을 전한 뒤 3년 동안 지도하였다. 그뒤 얼마안되어 서산대사는 그에게, "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와서, 물 위의 거품에 모두 살라버린다.

 

우스워라, 저 소를 탄 사람. 소를 타고서 다시 소를 찾는구나"라는 법게(法偈)를 주었 다. 30세 되던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산과 유정(惟政)이 의병을 일으켜 전 장으로 나가자, 그는 폐허가 된 빈 절을 지키며 불전(佛殿)을 수리하고 전쟁 의 희생자들을 위하여 기도를 올렸다.

 

1624(인조 2) 조정에서 남한산성(南 漢山城)을 축조하려 할 때 그에게 서성(西城)을 보완하게 하여 이를 완수하 였다.

 

그뒤 지리산의 신흥사(神興寺)와 연곡사(燕谷寺)를 중건하였는데, 태능 의 도력에 감화된 사람들의 도움으로 며칠만에 공사를 끝마쳤으며, 그가 법 ()을 설하면 짐승들과 이류(異類)들까지도 감복하였다고 한다. 그는 선() 과 교()를 일원이류(一源異流)로 보는 전통적 견해를 취하였다.

 

이러한 사 상과 경향은 서산대사와 일맥상통하는 흐름이다. 그의 선사상을 요약하면,

 

(1)본래청정(本來淸淨)하고 자재하며 완전한 일물(一物)이 있다는 것,

 

(2)이 일물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밖으로부터 얻어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닌 우 리의 자성(自性)이라는 것,

 

(3)이 자성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 속에서 모든 사물에 작용하면서도 그 스스로는 초월적이라는 것,

 

(4)이 자성이 나의 참된 주인공인 동시에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것,

 

(5)이 참 주인공을 철두철미하게 자각(自覺)한 사람은 무위진인(無位眞人)으로서 아무 것에도 의존하거나 결점이 없는 온전한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등이다.

 

, 상징적인 비유를 통하여 개념적인 지식을 초월하여 바로 그 실상 (實相)을 실감하도록 하는 선종의 방법으로 제자들을 깨우치려 하였으며, 철 두철미하게 불교를 주체적으로 깨닫도록 하고자 노력하였다.

 

1649 11 21 일 열반이 가까웠음을 알고 제자들에게 설법하다가, 임종 때에는 붓을 찾아 "해탈이 해탈아니거늘 열반이 어찌 고향이겠는가!

 

취모검(吹毛劒)의 빛이 빛 나고 빛나니 입으로 말하면 그 칼날 맞으리(解脫非解脫涅槃豈故鄕吹毛光樂 樂口舌犯鋒鎚)." 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나이 87, 법랍 75세로 입적하였다.

 

평소 태능의 도()를 흠모한 효종은 1652(효종 3) 혜감선사(慧鑑禪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저서로는 <소요당집(逍遙堂集)> 1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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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대사부도는 문헌에 의하면 금산사, 연곡사, 심원사, 대둔사 등 네곳에 건립되었다. 그런데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용추사와 백양사에도 부도가 건립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부도는 연곡사, 용추사, 백양사, 심원사지 등 네군데 밖에 없다. 이들 4기의 부도중 연곡사, 용추사, 심원사지부도는 팔각원당형이며 백양사부도는 석종형이다.


 고려말부터 고승이 열반하면 그 열반처에 팔각원당형 사리탑을 건립하고 나머지 사찰에는 석종형이나 기타 석탑형사리탑을 건립하였다.

 

소요대사의 열반처로 추정되는 연곡사에 조선시대에서는 우수작에 속한 팔각원당형의 부도가 건립된 것을 보면 이러한 전통이 조선시대 후기까지 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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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곡사 서부도(소요대사 부도)

보물 제154호/1963.01.21

전남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산54-1 연곡사

 

북부도에서 약 100m 내려온 경내의 서쪽에 있다. 주인을 모르는 동부도, 북부도처럼 경내에 놓인 위치로 따져 서부도라 불리고 있지만, 서부도의 경우는 주인이 명확한, 소요대사 부도이다.

 

몸돌 한 면에 소요대사집탐 순치육년 경인이라는 글씨가 2줄로 뚜렷이 남아 있어 소요대사가 입적한 순치 5(1648) 다음해인 순치 6(1649)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부도비를 별도로 세우지 않고 부도의 몸돌이나 다른 부분에 글자를 새기는 예는 조선 시대에 이르러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양상으로, 서부도가 그런 예의 하나이다.

 

소요대사 태능은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로 그 문하의 4대파 가운데 한 파를 이룰 만큼 유명했다. 그리고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연곡사를 크게 중창한 스님이다.

 

부도는 팔각원당형으로 아름다운 균형을 이루고 있으나 조각수법은 날렵한 동부도나 북부도에 비해 둔중한 편이다. 키도 조금 더 커서 3.6m이고, 보물 제154호로 지정되어 있다.

 

팔각지대석에홈이 패어 있고 그 위에 하단석을 놓고 있다. 팔각하대석 측면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으나, 윗면에 곡선을 그린 흔적이 있다.

 

그 위에 얹은 중대석은 가운데 부위가 각진 타원형이며, 아래위 대칭으로 앙련과 복련이 조각된 독특한 모습이다. 상대석은 팔각 앙련석인데, 아래에 각형의 2단 받침이 있고, 윗면에 호형의 높은 굄이 있다.

 

몸돌도 팔각이며, 한 면에 문비를 모각하였고, 다른 한 면에 글씨, 나머지 여섯 면에는 따로 돌을 붙여 만든 것처럼 불룩하게 여섯 구의 신장상을 조각해놓았다. 4구는 사천왕, 2구는 신장상으로 보이나 확실하지 않다.

 

지붕돌 역시 팔각인데, 추녀 끝이 얇고 넓다. 낙수면은 급경사를 이루었고, 귀퉁이에는 귀꽃이 큼직하게 솟아 있다.

 

상륜부는 온전한 편으로 앙화, 두 줄의 횡대에 꽃무늬가 수놓은 복발, 다시 그 위에 높직한 보개와 보주가 차례로 놓여 있다. 북부도가 동부도를 충실히 모방한 것이라면, 서부도는 동부도를 변형 모방한 셈인데, 조선사람의 검소한 멋이 풍겨진다.

 

그밖에 조선시대의 작품으로 보이는 자그마한 부도 세 기가 주변에 흩어져 있다.

출처 : 안 산 김 씨
글쓴이 : 희망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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