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삼도 수군통제영
초대 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李舜臣)이 설립한 통제영은 한산도(閑山島)에 있었으나, 정유재란 이후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다가, 1604년(선조 37)에 현재의 통영시(統營市)에 설치되어 1895년(고종 32)에 폐영(廢營)될 때까지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의 수군(水軍)을 통제하였다. 6대 통제사 이경준(李慶濬) 때에 건립된 이후 세병관(洗兵館)은 제208대 통제사 홍남주(洪南周)까지 290여년간 일본의 재침입을 방어하는 수군(水군)의 총본부이었다.
당시에는 세병관, 운주당(運籌堂), 백화당(百和堂), 중영(中營), 병고(兵庫), 장원홍예문(牆垣虹霓門), 교방청(敎坊廳), 산성청(山城廳), 12공방(工房) 등 100여 동(棟)의 영문(營門) 관아(官衙)가 있었으나 현재 남은 건물은 국보제305호인 세병관(洗兵館) 뿐이다. 이곳 통제영에 대한 개관은 여지도서(與地圖書 .. 위 사진) 통제영 성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與地圖書)는 1757년 각 읍(邑)에서 편찬한 읍지(邑誌)를 모아 성책(成冊)한 전국의 읍지(邑誌)이다.
성(城)은 돌로 쌓았고, 둘레는 장(丈)으로 재면 1193장, 자(尺)으로 재면 무려 11,730자나 되고, 보(步)로 계산하면 2,346보(步)가 된다. 높이는 장(丈)으로는 1장 반, 자(尺)로는 15자이다. 성가퀴는 707첩(堞)이다. 남문은 2층의 누문(樓門)이고, 동,서문은 각 1층이며, 북문은 동서에 암문(暗門 .. 숨겨져 몰래 통하는 문)을 두었으나 누(樓)는 없다. 동,서,북쪽에 포루(砲樓) 세 곳이 있다. 원문(轅門)은 2층 누각이다. 원문으로부터 왼쪽과 오른쪽은 바다에 닿았는데, 돌을 쌓아 막은 성채의 왼쪽은 길이 151보(步), 높이 13척(尺), 오른쪽은 길이 202보(步), 높이 13척(尺)이며, 통제영으로부터 북쪽으로 10리 거리이다.
세병관(洗兵館)이라는 이름은 당나라 두보(杜甫)의 시(詩) ... 안득장사만천하 정세갑병영불용 ( 安得壯士挽天河 淨洗甲兵永不用) 에서 따온 것이다. 즉, 장사를 얻어서 하늘에 있는 은하수를 끌어와 갑옷과 병기를 깨끗이 씻어 영원히 전쟁에 쓰지 않도록 할까 ? 라는 의미이다. 왜란(倭亂)의 오랜 질곡에서 벗어나 평화를 바라는 염원을 담은 의미이다. 현판은 제136대 통제사 서유대(徐有大)가 쓴 글씨이다.
통제영(統制營)이란 충청(忠淸), 전라(全羅), 경상도(慶尙道)의 삼도수군(三道水軍)을 통할하는 통제사가 있는 본진(本陣)을 말하는 것으로,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을 줄여서 표현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李舜臣)의 한산(閑山) 진영이 최초의 통제영이다.
삼도수군통제사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수군(水軍)을 총지휘하는 조선시대의 관직으로 종2품이다. 지휘 관청과 해군기지로 삼도수군통제영을 두었다. 통제사(統制使)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한 다음 해인 1593년에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 당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이었던 이순신(李舜臣)이 임명되었다. 조선의 모든 수군(水軍)이 아니라 3도(道)의 수군만을 관장하였으나, 3도의 수군(水軍)이 당시 수군 전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오늘날의 해군총참모장에 상당하는 지위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오늘날의 차관급(次官級)에 해당하는 종2품 관직으로 법제화되었다. 제2대 통제사는 원균(元均)이었는데,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원균(元均)의 함대가 궤멸된 이후, 백의종군하던 이순신(李瞬臣)이 다시 제3대 통제사가 되었다. 이순신이 죽은 뒤 부임한 제4대 통제사는 이시언(李時言)이다. 이후부터는 거의 '경상우도 수군절도사'가 겸직하였다.
지금의 통영시 관내에 통제영을 짓기 시작한 것은 1603년(선조 36) 때의 일이다. 제6대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이곳에 터를 닦고 2년 뒤인 1605년에 세병관(洗兵館), 백화당, 정해정 등을 건립하였다. 이곳은 1895년(고종 32), 각 도(道)의 병영(兵營)과 수영(水營)이 없어질 때까지 292년간 그대로 유지하다가, 일제시대 민족정기(民族精氣) 말살정책에 의해 세병관(洗兵館)을 제외한 많은 건물들이 사라졌다. 당시 건물 중 남아 있는 것은 세병관 뿐이다.
국보 제305호
세병관의 규모는 정면 9칸 112자, 측면 6칸 56자이며 단층의 팔작지붕이다. 1603년,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의 전공(戰功)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되었으며, 완성된 이후에도 삼도수군통제사영(三道水軍統制使營)의 건물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목조 고건축물 중에서 경복궁 경화루와 여수 진남관(鎭南館) 등과 함께 평면 면적이 큰 건물의 하나이다.
4면이 모두 개방(開放)되고 내부도 막힌 벽(壁)이 없이 기둥만 정연하게 배열되었다. 전후 면에서 안쪽으로 제2주열(柱列)에 각각 고주(高柱)를 한 줄로 세워 그 위에 대량(大樑)을 걸쳤으며, 이 고주(高柱)와 변주(邊柱)는 퇴량(退樑)으로 서로 연결하였다. 건물 측면의 가운데 있는 기둥에서부터 대량을 걸쳐 충량(衝樑)이 배치되었다.
내부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바닥에는 마루를 깔고 중앙 후면은 한단 높은 단을 만들었다. 이 단 앞에도 기둥을 한 줄로 세워 그 위의 대량(大樑)을 중간에서 받치고 있다. 공포(共包)는 기둥 위에만 배치하였으며, 그 구성은 외목(外目)도리를 받친 이익공(二翼工)집의 형식과 비슷하나, 쇠서의 형태는 다포(多包)집의 형식과 같다. 기둥 사이의 창방(昌枋) 위에는 화반(花盤)을 받치고 있다.
이경철 통제사 선정비
이경철(李景喆) 통제사는 제118대 통제사로, 1755년 7월부터 1757년 11월까지 재임하였다. ' 통제사이공경철선정비매치처 (統制使李公景喆善政碑埋置處) ' 즉, 통제사 이경철의 선정비(善政碑)를 묻어둔 곳이라는 의미이다.
세병관터 출토 유물
여수, 진남관 麗水, 鎭南館
여수 진남관(鎭南館)은 1598년(선조 31),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의 객사(客舍)로 건립한 건물로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수군(水軍)의 중심기지로서의 역사성과 1718년(숙종 44), 전라좌수사 이제면(李濟冕)이 중창(重創)한 당시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으며, 건물의 규모가 정면 15칸, 측면 5칸이며, 건물면적이 240평으로 현존하는 지방 관아(官衙) 건물로서는 최대 규모이다.
성종 10년인 1479년, 전라좌수영이 창설됨에 따라 '전라좌수영성' 축조와 함께 관내 청사도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전라좌수영성(全羅左水營성)은 창설 당시에는 둘레가 1.7km나 되는 성터로서, 진남관(鎭南館) 외 78개 동(棟)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라좌수영 全羅左水營
전라좌도는 경상우도와 함께 적로요해처(敵路要害處)이기 때문에 '전라좌수영성'이 축조되었다. 전라좌수영성은 1479년 내례포(內禮浦)를 철폐하여 수군절도영을 설치하고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임명하면서 변화되었다. 1485년(성종 16) 3월, 모옥(茅屋) 대신 성보(城堡)를 축조하기 시작하여 1491년(성종 22)에 완성하였다. 1497년(광해군 3), 절도사 '이량'이 돌을 운반하여 장군도 왼쪽에 축대를 쌓았으며, 1591년(선조 24) 이순신(李舜臣)이 전라좌수영으로 부임해 서문 해자(垓字)를 축조하였다.
1593년(선조 26) 7월,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李舜臣)이 거제 한산도(閑山島)로 진(陣)을 옮겼으나, 1년 후 절도사 이시언(李詩言)이 본직(本職)으로 옮겨 삼도(三道)를 통제할 제영사(諸營舍)를 건설하였다. 1664년 절도사 이도빈(李道彬)이 진남관(鎭南館), 망해루(望海樓), 결승당(決勝堂)을 재건하였으나, 1716년 화재로 진남관이 소실(燒失)되었다. 1718년 절도사 이제면(李濟冕)이 잔남관을 다시 중건하였으나, 1895년(고종 32) 전라좌수영이 혁파되었다.
국보 제304호
진남관(鎭南館)이 있는 자리는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이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의 본영으로 사용하던 곳인데, 당시에는 진해루(鎭海樓)라는 누각(樓閣)이었다. 진해루(鎭海樓)가 정유재란 때 왜군(倭軍)에 의해 불에 타 소실되자 1599년(선조 32),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시언(李詩言)이 전라좌수영 건물로 75칸의 거대한 객사(客舍)를 지어 진남관(鎭南館)이라 이름 짓고 수군(水軍)의 중심기지로 사용하였다.
후에는 역대 임금의 궐패(闕牌)를 봉안하고, 군수(郡守)가 망궐례(望闕禮)를 올렸으며, 국경일에는 군민들이 모여 봉도식(봉도식)을 거행하였다. 궐패(闕牌)란 조선시대 대궐에 위패(位牌)와 같이 모셔 두었던 '궐궐)'자를 새긴 나무패이다. 중국 황제의 위(位)를 상징하는 것으로 궐자패(闕字牌)라고도 한다. 또한 지방 고을에서는 서울의 국왕을 상징하는 '전(殿)'자를 새긴 나무패가 있어 이를 '전패(殿牌)'라고 하였으며, 일명 궐패(闕牌)라 부르기도 하였다. 대궐의 정전(正殿)에는 중국 황제를 상징하는 궐패를 두고, 각 고을의 객사(客舍)에는 조선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 두었다. 설날, 동지, 황제나 임금의 탄생일 등에 황제에게는 임금이, 임금에게는 외관(外官 .. 지방관리)이 인사하는 뜻으로 이에 배례하였다.
학교로 이용된 진남관
1911년 이곳 진남관에는 여수 공립 보통학교(현, 여수 서 초등학교)와 여수 공립 심상소학교(현, 여수 동 초등학교)가 문을 열었다. 보통학교는 한국인 자녀들을 가르치는 곳이고, 심상초학교(尋常小學校)는 일본인 자녀들을 가르치는 학교이었다. 1922년 일제(日帝)는 '신교육령'를 반포하고 한일인(韓日人)에 교육조건을 균등하게 시행한다고 선전하였다. 1938년 이후에 건립된 학교는 한국인 자녀를 받아들이면서도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라고 했다.
객사 客舍
진남관을 객사(客舍)라고 한다. 객사(客舍)라는 표현 때문에 외부 관리(官吏)를 맞이하는 숙소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우선 온돌시설이 되어있지 않다. 그리고 손님이 온다면 몇 명이나 될거라고 230평이나 되는 집이 필요할 것인가. 객사(客舍)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이곳 진남관처럼 기둥만 세워진 건물이다. 다대포 객사, 창녕 객사, 통영의 세병관 등이다. 또 하나는 주관(主館)과 좌우 익헌(翼軒)으로 구성된 것인데 이러한 건물이 말 그대로의 객사이다. 안성 객사, 무장 객사, 경주의 동명관 등이다. 주관(主館)은 궐패(闕牌)를 모셔두고 대궐을 향해 배례하던 곳이고, 익헌(翼軒)은 파견된 관리들이 숙소로 주관(主館)보다 지붕을 낮게 한다. 같은 지붕 아래 익헌(翼軒)을 설치하였다면 관리가 임금과 동격이되는것이기 때문이다.
정면 15칸, 측면 5칸, 건평 240평의 단층 팔작지붕으로 된 거대하고 웅장한 건물로, 현존하는 지방 관아(官衙) 건물로는 제일 크다. 높은 언덕 위에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사괴석(四塊石)과 장대석(長大石)을 섞어 쌓은 기단 위에 막돌로 주춧돌을 놓고, 둘레 2.4m의 민흘림기둥을 세웠다. 평면 전체가 통칸(通間)으로 뚫려 있고, 벽체도 없으며, 창호(窓戶)도 달지 않았다. 처마는 부연(附椽)을 단 겹처마이며, 팔작지붕의 양측 합각은 널판지로 마무리하였고, 추녀 네 귀는 활주(活柱)로 떠받쳤다.
진남관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椽燈天障)이다. 가구(架構)는 간결하면서도 건실한 부재를 사용하여 건물이 웅장해 보인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배치하고 그 사이사이에는 화려한 화반(花盤)을 받쳤는데, 주심포(柱心包)와 다포식(多包式)을 절충한 양식이다. 평면은 68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었는데, 건물 내부 공간을 크게 하기 위하여 동,서쪽 각각 두 번째 협칸의 전면 내진주(內陳柱)를 옮겨서 내진주(內陳柱) 앞쪽에 고주(高柱)로 처리하여 공간의 효율성을 살렸다. 각 부재에는 당시의 단청 문양이 대부분 잘 남아있다. 당시의 역사적 의의와 함께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건물이다.
'여행이야기(전라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전남 여수]여수의 장어탕·뼈꼬시·쌈밥·게장 (0) | 2013.05.30 |
---|---|
[스크랩] 경주이씨들이 소요스님 모친 묘소 돌본다 (0) | 2013.05.16 |
[스크랩] 전주(全州.. 조선왕조의 발상지) ..경기전, 전주사고 조경묘 (0) | 2013.05.14 |
[스크랩] 문화재청에 등재된 황형장군家 문화재 (0) | 2013.05.12 |
[스크랩] [전남 광양시]항상 흰 구름을 이고 있는… 전남 광양 백운산 (0) | 2013.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