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전라도)

[스크랩] 문화재청에 등재된 황형장군家 문화재

장안봉(微山) 2013. 5. 12. 06:00

 

문화재청에 등재된  황형장군 가문 문화재

1.회암선생 회산부원군 황석기

 

문화재정보 (검색어 "황석기"에 대한 검색 결과 : 1)

함안죽산사 , 진주세덕사, "칠원 회원사"에 대한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문화재자료 제14호 동산재 ( 東山齋 ) ;지정일 : 1983-07-20경남 진주시

 

종목 : 문화재자료 제14호 분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주거건축 / 가옥
시대 : 조선시대 소재지 : 경남 진주시

 

2.회성부원군 황상; 문화재청 공식자료 없음

3.평주공 황창; 없음

4.대흥공 황선경;없음

 

5.안악공 황의헌 ;공식자료 없으나 보너스자료

문화재블로그 | 한문화재 한지킴이 ---

강화 교동사랑

http://cafe.cha.go.kr/lovegyodong

임충식;교동도의 흔적들

안평대군 부자가 교동에 유배됨

교동출신 인명록(人名錄) 근세편

 

 

1. 황의헌(黃義軒 : ? ~ 1454)

 

본관은 창원(昌原) 호는 백현(白峴). 창원활씨 시조인 석기(石奇)의 증손이다.
음보로 돈령부 녹사가 되었다가 1442년 친시 을과로 급제, 1450년 종부사 판관을 지냈다.
1453년 안악군사에 올랐다가 안악에서 단종복위를 위해 안악포수 170여명을 비밀리에 조련시키다 이포란 자의 밀고로

안평대군 일파로 몰려 김종서 등과 같이 순절하였으며 뒤에 강원도 영월 창절사에 추배되였고

교동에는 후손들이 단을 설치하고 10월14일에 제사지내고 있다.

4. 황경례 (黃景禮 : / ~ 1642);장수

 

무관으로 선전관을 겸임. 1624년 인조반정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운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게되자 선지를 받들고 경기감사 이서의 결연처인 김천 저탄에 갔으나 이미 관군은 패산하고 적은 승승 장구기세였다 공이 청석령에서 적에게 붙잡혀 항복할 것을 요구했으나 끝내 굴하지 않으니 적이 대노하여 두팔을 잘라 성시에 회시하자 의연히 동쪽을 향하여 하늘에 빌고 적을 꾸짖으면서 순절하였다.
후에 공의 증손되는 양신이 당시의 사실을 임금에게 진언하여 정문을 받고 표창을 받게 되었다.
지금도 양갑리에서 후손들이 보존하고 있다.

8. 황경기(黃景祺)
창원 황씨. 인조때 사람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강진현감에 올라 1623년 인조반정때 군공이 있어 원종훈으로 정사공신에 훈록되였다.

 

 

9. 황이영(黃爾英)

 

창원황씨. 1602년 무과에 급제. 1624년 이괄의 난을 당하여 군공을 세우고 원종훈으로 진무공신에 훈록되였다.

 

 

10. 황후헌(黃後憲)

 

창언인으로 무과에 급제 칠원현감에 올랏다가 이괄의 난때 군공이 있어 원종훈으로 진무공신에 훈록되였다.

 

6.장무공 황형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 연미정 (燕尾亭)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
명 칭 연미정 (燕尾亭)
분 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조경건축/ 누정
수량/면적 1동
지정(등록)일 1995.03.02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 242
시 대 고려시대
소유자(소유단체) 회산남용
관리자(관리단체) 회산남용
상 세 문 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문화예술과 032-930-3627
자연경관을 보며 풍류를 즐기거나 학문을 공부하던 정자이다. 한강과 임진강의 합해진 물줄기가 하나는 서해로, 또 하나는 강화해협으로 흐르는데, 이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고 해서 정자 이름을 연미정이라 지었다고 한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나 고려 고종(재위 1213∼1259)이 사립교육기관인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공부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 중종 5년(1510) 삼포왜란 때 큰 공을 세운 황형에게 이 정자를 주었다고 한다.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곳이기도 하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연미정은 강화십경의 하나로서 뛰어난 경치를 이루고 있으나, 현재 민간인통제구역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6-1. 민익공 황대수 ; 상주 역관에서 졸

[중앙일보] 입력 2011.01.06 00:58 / 수정 2011.01.06 01:00
상주의 객사인 상산관(商山館)의 모습.

객사는 임금의 상징인 전패를 봉안하는 신성한 곳으로 조선시대 각 고을 동헌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었다.

경북 상주시 만산동에 있다. [사진=문화재청 홈페이지]

 전패는 ‘전(殿)’자가 쓰여진 목패(木牌)로서 임금의 상징물이다.

전국 각 고을의 수령들은 정월 초하루나 임금의 생일·기일 등에 객사에 모셔진 전패를 향해 네 번 절한다.

 전패를 건드리거나 훼손한 사람은 대역부도죄로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전패를 분실하거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수령들 또한 엄한 처벌을 받았다.
조선시대에는 전패를 훔치거나 훼손했던 사건, 이른바 전패 작변(作變)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그 주체는 대개 고을 수령에게 유감이나 원한을 품고 있는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전패를 건드려 수령이 파직되거나 처벌받게 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복수하려 했다.


7.문민공 황신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42호
명 칭 추포황신선생종가유물 (秋浦黃愼先生宗家遺物)
분 류
수량/면적 7점
지정(등록)일 1992.12.08
해 제 일 1998.12.29 ; 경복궁 국립 민속박물관에 기증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용정리 산10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 황용주
관리자(관리단체)
상 세 문 의 충청남도 부여군 문화관광과 041-830-2241

 

 

문화재자료 제 107호 (1984.05.17 지정) 

창강서원 문화재 사진

추포 황신(1560∼1617)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황신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성혼과 이이의 가르침을 받았다.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여러 벼슬자리를 거쳤는데, 임진왜란 때에는 절충장군 자리에 오르기도 하였으며

 죽은 뒤에 우의정의 직함을 받기도 했다.

인조 7년(1629)에 세운 이 서원은 숙종 8년(1682) 임금으로부터 ‘창강’이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1866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37년 재건되었고, 1966년 후손과 지방 유림들이 현 위치에 복원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제사 지내는 사당과 배움의 공간인 강당,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사당∙내삼문∙동재∙서재로 구성되며, 강당 겸 서재를 전면에, 사당을 뒤에 배치하였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가구(架構)는 5량가이며, 공포는 정면 각간에 포를 1개씩 둔 다포집 형식이다. 내부는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정면 3칸의 창호(窓戶)는 모두 4분합띠살문을 달았다.

동재와 서재는 사당 전면에 배치되어 있다.
동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에 팔작지붕이며 가구는 5량가이다. 앞면은 툇마루이고 뒷면은 내부를 터서 방으로 꾸몄다.
서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앞면과 동쪽에 툇간을 가설하였다. 동쪽 2칸은 대청마루를, 서쪽 1칸에는 온돌방을 두었다. 처마는 홑처마, 지붕은 팔작지붕, 가구는 5량가이다.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 천장은 연등천장이고, 대청 뒷면에 쌍여닫이문을 달았다.
해마다 음력 3월과 9월 보름에 제향한다.

 

 

지정번호 : 충남 문화재자료 107호 (지정일 : 1984.05.17)
시대 : 조선시대
분류/유형 : 서원(부동산)
수량/재질 : 1동 / 목조 기와
규모/크기 : 사당 - 정면 3칸, 측면 2칸, 서재 - 정면 3칸, 측면 2칸, 동재 - 정면 3칸, 측면 2칸
문의처 :
소유/관리 : 창원황씨종중 / 창원황씨종중
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저석리 73-2

[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대마도 정벌을 주장했던 황신 (Ⅰ)

[중앙일보] 입력 2011.01.11 20:52 / 수정 2011.01.12 00:46
대마도에 세워진 박제상 순국비의 모습.

 

1596년 황신은 모든 신하들이 회피하려 했던 통신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제2의 박제상’이 되겠다는 결연한 마음을 품고 명나라 책봉사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1596년(선조 29) 명과 일본은 임진전쟁을 끝내려고 4년째 강화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조건이 너무 달라 진전이 없었다.

명은 일본군이 조선에서 철수해야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겠다고 했다.

일본은 ‘명의 황녀를 천황의 후궁으로 주고, 조선 8도 가운데 4도를 떼어주며,

조선의 왕자와 신료를 인질로 보내라’며 훨씬 까다로운 조건을 내밀었다.

협상에서 배제된 채 명군만 바라봐야 했던 조선의 속앓이는 날로 깊어가고 있었다.

 초조해진 명군 지휘부는 결국 무리수를 둔다.

일본군이 경상도에서 완전히 철수하지 않았음에도 양방형(楊方亨)과 심유경(沈惟敬)이 이끄는 책봉 사절단을 일본에 보내기로 결정한다.

그러면서 조선도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라고 강요했다.

일본이 줄곧 조선 신료를 보내라고 했으니 성의를 보여 동참하라는 요구였다.

일본을 달래는 데 급급하여 조선의 민족 감정이나 체면은 안중에도 없는 횡포였다.

 조선 신료 가운데서도 선뜻 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미 협상에서 소외된 조선의 처지에서 가봤자 들러리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오사카까지 가는 동안 험한 뱃길 때문에 죽을 수도 있었고, 자신의 요구 조건이 충족되지 못한 것에 격분한

 도요토미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몰랐다. 실제 ‘조선 사신이 일본에 가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고 있는 판이었다.

 이때 일본에 통신사로 갔던 인물이 바로 황신(黃愼·1560∼1617)이다.

그는 1594년 여름부터 심유경의 접반사로 부산의 일본군 진영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미 2년 동안이나 적진을 드나드는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황신은 조정의 명령을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주변의 친지와 동료들이 그의 앞길을 걱정하면서 위로했지만 황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1596년 8월 4일, 대마도로 가는 배에 오르기 직전

그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는 시를 남긴다.

 

 “장부는 죽음을 겁내지 않는 법/ 죽음이 두려우면 장부가 아니리/

 칼날도 오히려 밟을 수 있고/ 끓는 물속에도 뛰어들 수 있는데/

원하는 바는 절개를 온전히 하는 것이니/ 어찌 몸이 온전하기를 바랄 것인가/

 어질도다 치술랑(<9D44>述郞)이여/ 죽음에 이르러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네.”

 치술랑은 왕자를 구하러 일본에 갔다가 순국했던 신라의 박제상(朴堤上·363∼419)을 가리킨다.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뒤 붙잡혔던 박제상은 회유하는 왜왕에 맞서 ‘계림(신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될 수 없고,

 계림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벼슬과 상은 받지 않겠다’며 죽음을 맞았던 인물이다.

황신은 바로 그 박제상을 떠올리며 일본으로 향했던 것이다. (계속)

[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대마도 정벌을 주장했던 황신(Ⅱ)

[중앙일보] 입력 2011.01.13 00:25 / 수정 2011.01.13 00:25
황신을 모신 창강서원(滄江書院).

적국 일본에 건너가 갖은 수모를 겪었던 황신은 대마도를 정벌하여 일본에 복수하려 시도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충남 부여군 부여읍 저석리 소재. [사진=문화재청 홈페이지]

 

일본의 상황은 황신이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 황제의 책봉을 받는 의식은 거행했지만

황신 일행은 만나주지도 않았다. 명나라 사신들 또한 황신이 본국으로 장계를 보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일본이 명에 조공하려 했는데 조선이 방해했기 때문에 자신이 출병하게 되었다’며 전쟁 발생의 책임을 모두 조선 탓으로 돌렸다.

 히데요시는 또 자신의 요구 조건이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에 격분하여 조선을 다시 침략하겠다고 공언했다.

심지어 오사카 주변에서는 ‘히데요시가 조선 사절 일행을 전부 죽일 것’이라는 소문이 흘러나왔다.

황신을 따라간 수행원들은 모두 사색이 되었다. 황신은 수행원들에게 일갈한다.

 “진짜 죽인다면 우리에게는 불행이지만 나라에는 다행이다. 히데요시의 무모한 소행을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다행이지만 나라에는 근심거리가 될 것이다. 그의 의도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모두 이런 뜻을 알아야 한다.”

사신으로 온 이상 일본의 재침 계획을 본국에 알리고

그에 대비할 수 있도록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 황신의 생각이었다.

 통신사 일행을 해치지는 않았지만 히데요시의 부하들은 황신에게 새로운 제안을 내놓는다.

선조를 설득하여 왕자를 일본에 보내거나 정기적으로 사신과 예물을 보내라는 요구였다.

황신은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1596년 9월 9일 귀국길에 오른다.

 이윽고 1598년 히데요시가 죽고 임진전쟁은 끝났다.

일본을 제대로 응징하지 못한 것이 분했던 황신은 대마도를 정벌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선조에게 “조선이 주는 쌀과 면포로 먹고 살던 대마도가 배은망덕하게 히데요시를 부추겨 전쟁을 일으켰다”며

 “그들이라도 정벌하여 씨를 말림으로써 원한을 풀자”고 건의했다.

선조도 “대마도는 본래 조선 땅”이라며 호응하는 자세를 보였다. 하지만 병력을 동원하는 것이 문제였다.

황신은 수군을 동원하되 명군 화기수 7000∼8000명을 빌리자고 제안했다.

명군 지휘부는 강하게 반대했다. 혹시라도 일본을 자극하여 그들이 다시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일본을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원수’로 여겨 복수하고자 했던 황신은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 갖은 수모를 겪으며 소외된 조선 사신의 비애를 절감했던 황신이지만 미약한 국가적 역량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던 셈이다.
 한·일 국방장관 회담이 열려 양국 사이의 군사협력을 논의했다고 한다.

일본과의 군사적 밀착은 분명 중국을 자극할 것이다.

명군을 이용하여 일본에 복수하려 했던 황신이 다시 살아난다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진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한국사

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모반을 꿈꾼 일곱 명의 서자들[중앙일보] 입력 2011.01.27 00:14 / 수정 2011.01.27 00:16

문경 새재 주흘관(主屹關)의 모습 : 문경 새재는 예로부터 영남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관문이자 요새였다. 박응서 일행은 이곳을 통해 왜관을 왕래하던 은상(銀商)을 살해해 모반을 위한 거사 자금을 마련하려고 했다.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자료:문화재청 홈페이지]
1613년(광해군 5) 3월 박응서(朴應犀) 등이 이끄는 한 무리의 서자(庶子)들이 문경 새재에서 살인을 저지른다. 그들이 노린 대상은 서울과 부산의 왜관(倭館)을 왕래하면서 장사하던 상인이었다. 박응서 등은 상인을 죽이고 그가 갖고 있던 은화 수백 냥을 빼앗았다. 박응서 등은 빼앗은 은을 밑천으로 무사들을 끌어 모아 대궐을 공격하는 역모를 구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박응서 일행은 포도청에 체포되고 만다. 신문 과정에서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박응서·박치의(朴致毅)·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이경준(李耕俊)·허홍인(許弘仁)·김경손(金慶孫) 등 일곱 명은 모두 양반가의 서자들이었다. 칠서(七庶)라 불렸던 이들은 서자라는 굴레 때문에 벼슬길이 막힌 것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들은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자처하며 여강(驪江) 등지에 함께 모여 살며 거사를 준비해 왔던 것이다.

 충격을 받은 광해군과 조정은 연루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칠서들과 조금이라도 인연이 닿는 자들은 모두 잡아들여 닦달했다. 가혹한 고문이 가해지고 죽어나가는 관련자들이 속출했다. 그 과정에서 밝혀진 칠서들의 원한 또한 상상을 초월했다. 열네 살이던 심우영의 아들 섭(燮)은 “아비가 늘 ‘이 나라에서는 쉬운 일이 없으니 네가 크면 누르하치를 불러와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만주족 군대를 끌어들여서라도 서얼 차별의 원한을 갚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조선 초 시작된 서얼 차별은 가혹했다. 서얼들은 문과와 무과는 물론 생원과 진사시조차 응시하는 것이 제한되었다. 부친이 적자(嫡子) 형제를 남기지 않고 죽었을 때에도 서자들은 자식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제사와 상속에서 부친의 조카들에게도 밀리는 경우가 많았다. 원한이 깊어갈 수밖에 없었다

 서얼들을 금고(禁錮)시키는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핏줄이 미천해도 재주만 보고 등용하던 중국의 현실을 목도했던 조헌(趙憲)은 ‘우리나라의 고위 관리들이 단지 자기 자손만을 염려할 뿐, 서얼 차별을 통해 인재를 잃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통탄한 바 있다. 또 임진전쟁 등을 계기로 서자들이 무관직으로 대거 진출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지만 문관직에서의 차별은 좀처럼 시정되지 않았다.
 칠서지옥(七庶之獄)으로 불렸던 박응서 등의 모반 시도는 그 같은 현실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영창대군(광해군의 이복동생)이 죽고 인목대비(광해군의 계모)가 유폐되는 비극이 일어났다. 훗날 광해군 또한 그 후유증에 휘말려 왕위에서 밀려난다. 칠서들이 품었던 원한의 파장은 깊고도 길었던 셈이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 · 한국사

[황인찬 주; 추포 황신은 김제남과 친교가 있다하여  이이첨등이 옹진유배시켜 적소에서 졸;  문경새재 7서가..인목대비 아버지 김제남을 도와 영창대군을 옹립 계획으로 군자금조달 위하여 산적질 했으며 ,대북파들이 사주하여 김제남을 도우려는 군자금으로 둔갑시켜 반대파 숙청]


8.충렬공 황일호

 

종 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1호
명 칭 황일호의묘 (黃一晧의墓)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무덤/ 봉토묘
수량/면적 1기/69.4㎡
지정(등록)일 1984.05.17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가증리 산3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창원황씨종중
관리자(관리단체) 황인식
상 세 문 의 충청남도 부여군 문화관광과 041-830-2241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충절인 지소(芝所) 황일호(1588∼1641) 선생의 묘소이다.

조수륜의 가르침을 받았고, 인조 13년(1635)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안전하게 모신 공으로 진주 목사에 올랐다. 인조 16년(1638) 의주 부윤으로 있을 때 청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를 돕자는 모의를 하다가 청나라 병사에게 피살되었다.

묘역 아래에는 정조 21년(1797)에 세운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던 비)가 있는데, 송시열이 글을 짓고 황운조가 글씨를 쓴 것이다.

9.황사영

 

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118호
명 칭 배론성지 (배론聖地)
분 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천주교/ 성당
수량/면적 1廓
지정(등록)일 2001.03.02
소 재 지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623번지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재단법인천주교원주교구
관리자(관리단체) 재단법인천주교원주교구
상 세 문 의 충청북도 제천시 문화관광과 043-641-5133~4
조선 순조 1년(1801)에 있었던 천주교 박해 때부터 지금까지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찾는 천주교의 성지이다. ‘배론’이라는 이름은 이곳의 지형이 마치 배 밑바닥과 같은 모양이라해서 붙여진 것이다. 유적으로는 조선 후기 천주교도 황사영이 머무르며 ‘백서’를 썼던 토굴성 요셉 신학교, 최양업 신부의 묘가 있다.

1801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은 이 토굴에서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중국 베이징에 있는 주교에게 보낼 글을 썼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성 요셉 신학교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신학교로 성직자를 양성하는 곳이었다. 조선 천주교사상 두번째로 신부가 된 최양업 신부는 천주교의 교리 번역 등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파되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 배론성지는 우리나라 천주교의 성립과정에 있어 중요한 성지이다.

 

 


황진이는 제안군이 분파한 제안황씨라 합니다.. 한국10대미인에 ,,,.

제안군 황귀[玉+貴;초명 乙考]는 회상부원군 황상子 황윤서의 4子로 조선초에 제안군에 봉해진 후 分관향하게 된것이며,

제안군묘는 황해도 황주군 제안면 실전 광무2년 지석발견 찾았다고 합니다.

 

10.황진이 ;. 國家報勳廳 記者 및 文化財廳 文化財지킴이 宋 哲 孝(珍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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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박연포포

개성 명기(名妓) 황진이가 당시 개성의 명사인 고승(高僧) 지족선사(知足禪師)와 명유(名儒) 서경덕을 유혹하였는데, 지족선사는 그녀의 유혹에 빠져 파계를 하였으나, 서경덕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으므로 후대인이 서경덕, 황진이와 박연폭포의 절경을 한데 묶어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하였다. 높이37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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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황진이가 머리카락으로 썼다고하는데 글 내용은 일필휘지(一筆揮之)라 도저히 알수가 없어요
 
 ⑼. 우리나라 미인 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인이 바로 ⑨황진이로 사서삼경은 물론이요 시 서 음률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졌고 그녀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한음 이덕형이 황진이가 머문 곳에는 사흘 동안 향기가 있었다 하며 동네 총각은 황진이를 연모하다 相思病을 앓다 죽었으며 살아있는 생불이라 추앙받던 지족선사를 파계시켰고 도도한 품성의 종실 청년 碧溪水를 조롱하였으며 중국 사신 蘇世讓이 넋을 잃었다 하고 당대 최고의 지성 화담 徐敬德을 흠모하여 그를 유혹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사제지간을 맺은 후 자신 黃眞伊와 朴淵瀑布 그리고 화담선생을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칭했다는 일화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말해줍니다.

* 우리나라 역사 속의 美人과 10代 美人!

1. 개 요 : ⑴, ⑵.

⑴. 2011년 05월 09일 오늘은 우리나라의 歷史 속에 기록되어 전해오는 絶世佳人들을 살펴보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歷史 속에 살아 숨 쉬는 미인들을 열거해 보면 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건국했고 비류와 온조 두 아들과 함께 백제를 건국한 실질적 여왕 소서노가 그 첫째 이며 물론 미인이라기보다는 두 나라를 이룩한 세계사에 전무후무한 여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어울리며 드라마 속에서 소서노역을 맡았던 Talent 한 혜진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⑵.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고구려의 2대왕 유리왕은 소서노에게 남편을 빼앗긴 주몽의 첫째부인 예씨를 어머니로 두고 기구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고구려의 2대왕에 올라 결혼 후 일년 만에 왕비 송씨가 죽자 계비로 하희와 치희를 들이는데 두
여자가 날마다 시기하며 싸움을 하다가 치희가 집을 나가자 유리왕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 '黃鳥歌'를 남겼습니다.

翩翩黃鳥(편편황조) 훨훨 나는 꾀꼬리들이어,
雌雄相依(자웅상의) 너희들은 암수 서로 화합하는데,
念我之獨(염아지독) 나 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誰其與歸(수기여귀) 그 누구와 같이 노닐거나.

或者는 먼저 세상을 떠난 왕비 宋氏를 그리워하며 지은 詩라 하고 중국인이었던 치희와 고구려 명문가의 딸인 하희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신세를 恨歎한 詩라 하기도합니다. 이 기록속의 하희를 역사속의 미인으로 이름을 올리는 이도 있습니다.

2. 내 용 : ⑴, ⑵, ⑶, ⑷, ⑸, ⑹, ⑺, ⑻, ⑼.

⑴. 〈삼국사기(三國史記)>의〈高句麗 본기〉중천왕(中川王) 조(條)에는 중천왕의 소비(小妃)인 ①관나부인이 얼굴이 아름답고 두발(頭髮)이 길어 왕의 총애를 받게 되자 왕후 연씨(椽氏)는 왕에게 “지금 위(魏)나라에서 천금을 주고 장발을 구한다 하니 장발미인을 위나라에 보내면 다시는 우리나라를 침범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여 관나부인을 왕의 곁에서 멀리 떠나보내려 하였으나 이것을 들은 관나부인은 왕이 사냥에서 돌아올 때 가죽 주머니를 들고 나와 맞으며 “왕후가 나를 여기에 넣어 바다에 버리려고 하니 집에 돌아가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하여 왕후를 모함하였으며 왕은 거짓임을 알고 노하여 貫那夫人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 서해(西海)에 던지게 하였습니다. 고국천왕 왕비 우씨는 남편이 죽자 권력을 미끼로 첫째아우인 발기를 제치고 과감히 남편의 둘째동생인 연우(山上王)와 결탁해 결혼과 함께 권력과 부를 누렸으며 미인이며 담대한 성격 이였습니다. 山上王이 皇后 우씨의 눈을 피해 궁 밖에서 만난 후 녀 인 山上王의 다음왕인 東川王의 어머니를 더 미인이라고 합니다.

⑵.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48 열전 제 8 '도미(都彌)'편에 ②도미(都彌)의 처(妻)의 아름다움과 굳은 절개를 말하고 도미는 가난한 평민이었으나 의리를 아는 사람이었으며 그 아내는 아름답고 행실이 곧아서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으며 蓋婁王이 이를 듣고 도미의 아내를 탐내 도미를 불러다가 "부인의 덕은 정절이 제일이지만 어둡고 사람이 없는 곳에서 좋은 말로 꾀면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사람이 드물 것이다"라고 말하자 도미는 "사람의 정은 헤아릴 수 없지만 신의 아내 같은 사람은 죽더라도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아내에 대해 확신을 보였으나 이를 시험하기 위해 蓋婁王은 都彌를 잡아두고 가까운 신하를 왕으로 꾸민 후 도미의 아내에게 보내 "都彌와의 내기에서 이겨 너를 궁녀로 삼게 되었으니 너는 내 것이다"라고 속였으나 도미의 아내는 몸종을 자기처럼 단장시켜 들여보내 왕의 일방적인 횡포에 맞섰으나 자신이 속았음을 금륜태자(진지왕) 3부자와 모두 연을 맺었고 그 다음 임금인 眞平王과도 관계를 가졌다고 하고 김별아 장편소설 ③미실과 드라마 선덕여왕 속 미실에서 4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신라 최전성기의 진흥왕이며 이외에도 국경과 신분을 초월하여 사랑을 나눈 서동요 속의 ④선화공주 신도 흠모해 범하지 않을 수 없었던 처용가 속의 처용의 아내 신라 사륜왕조차 탐내던 유부녀인 도화녀 한국의 최고의 고승 원효(元曉)대사를 파계시킨 과부 요석공주 김유신의 사랑과 배신을 함께 맛보아야 했던 천관녀 등이 신라를 대표하는 미인들이지만 신라의 대표적 미인은 선덕여왕이며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뛰어난 정치력으로 신라 귀족사회의 존경을 받으며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군주입니다.

⑹. 高麗時代에 고려를 건국한 태조 王建의 손녀로 고려 제5대 왕 경종의 왕비였으며 제7대 穆宗의 모후인 천추태후는 12년간의 섭정으로 고려의 운명을 짊어졌던 자유롭고 당당했던 정치가였지만 유학자들은 그녀를 불륜한 여자로 보고 있으나 현대의 사가들은 고려 전통을 되살려 고려의 自主精神을 되살리고 유연한 외교 전략으로 외세의 침입으로 부터 고려를 지켜낸 여성 정치가로 평가하며 고려 오백년을 통해 가장 강력한 政治權力을 행사한 고려 최고의 여걸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원나라에 공녀(貢女)로 끌려갔다가 원나라의 황제 순제의 황후까지 오른 ⑥기황후도 고려의 대표미인으로 들 수 있으며 〈원사(元史)>의 후비열전에는 기황후의 모습을 그는 영특한 성품과 살구 같은 얼굴 복숭아 같은 뺨 버들 같은 허리를 가지고 있었다. 라고 소개한 원나라 여인이었으며 원의 쿤란 태자의 청혼을 받았으나 기황후의 반대에 반원주의자인 恭愍王과 정략결혼을 하였지만 恭愍王을 도와 도탄에 빠진 고려를 위해 정성을 다한 노국공주도 고려의 미인 반열에 올랐습니다.

⑺. 朝鮮時代 스캔들의 히로인인 ⑦어우동은 천하의 색녀(色女)로 유부녀였지만 수 많은 유생들이나 조관들과 정분을 나누었으나 儒敎社會였던 조선에서 용납될 리 없어 그녀는 결국 사형되었으며 ⑧장록수는 제안대군의 여종이었으나 용모가 뛰어나고 가무에 능해 燕山君의 총애를 받았고 왕의 총애를 이용하여 국사에 관여하여 연산군의 실정을 부추기다 결국 중종반정에 의해 참형을 받았으며 숙종의 총애를 받던 ⑩장희빈은 仁顯王后를 폐출하고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가 다시 희빈 으로 강등되었다가 결국에는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미인박명(美人薄命), 미인박복(美人薄福).

⑻. 〈어우야담>에 실려 있는 기생 성산월은 너무 아름다워 요괴로 오인 받을 정도로 성산월의 미모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고 하며 계월향은
선조 때 조선팔도에 명성을 떨첬던 평양의 명기로 1592년 壬辰倭亂으로 평양성이 함락되자 적장 고니시 유키나까에게 체포되어 적장이 총애하게 되는데 애당초 조선의 명장 김경서 장군의 애인이었던 桂月香은 거짓으로 마음을 주는 척 하면서 김경서 장군의 평양성 공격일시에 맞추어서 적장을 대취하게 만들면서 성문을 개방하여 적장도 살해하고 평양성도 수복하게 되는 결정적 수훈을 세웠습니다.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한 후 김경서 장군을 만난 계월향은 그간 적장에게 수모를 당한 죄책감을 사죄하고 나간 후 자결하였다 하니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긴 만해 한 용훈이 그를 흠모하며 桂月香 에게라는 시를 남겼습니다.

3. 결 론 : ⑴, ⑵.

⑴. 우리나라 미인들에 대한 내용을 살펴 알아보니 미인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外的 아름다움도 重要하지만 內面의 아름다움(眞, 善, 知慧의 아름다움)이야 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임이 아닌가 생각하게 합니다. 知慧와 德으로 政治的으로 또는 軍事的으로 業績을 남기기도 하고 藝術的 재능으로 風流를 즐기면서 당당하게 살아온 아름다움이야 말로 그들을 몇 백 년 아니 몇 천 년 이 지난 오늘 날에도 미인으로 이야기하게 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⑵. 또한 웅녀, 유화, 樂浪公主, 허 황옥, 平岡公主, 연 수영(최초의 女將軍), 眞聖女王, 문정황후, 申師任堂, 許蘭雪軒, 論介, 昭顯世子 비 강씨, 임 윤 지당(朝鮮時代 최고의 여성 性理學者), 明成皇后 等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歷史는 여성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많은 미인들이 빠졌을 것입니다. 드라마 배역을 보면서 상상해본다 善德女王하면 이 요원, 천추태후하면 채 시라, 黃眞伊하면 하 지원, 善花公主하면 이 보영 等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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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구름산의 易 安 齋
글쓴이 : 황인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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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나라 역사 속의 美人과 10代 美人!
작성자 송철효
작성일 2011-05-16 조회수 373

* 우리나라 역사속의 10代 美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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