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전라도)

[스크랩] 전주(全州.. 조선왕조의 발상지) ..경기전, 전주사고 조경묘

장안봉(微山) 2013. 5. 14. 12:09

 

 

 

 

 

 

 

 

 

 

 

 

조선 3대 임금 태종(太宗)은 1410년에 전주(全州), 경주(慶州), 평양(平讓)에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어진(御眞)을 봉안하고 제사하는 전각(殿閣)을 짓고 어용전(御容殿)이라 하였다. 경기전(慶基殿)은 조선왕조의 발상지라 여기는 전주(全州)에 세운 전각으로, 세종(世宗) 때 붙인 이름이다.   

 

 

 

 

                                                        전주                 全州

 

 

 

 

 

전라북도 전주(全州)는 결국 왕을 낳았다. 왕의 관향(貫鄕) 즉, 왕조(王朝)의 조상 뼈가 묻힌 거룩하고도 신성한 땅이다. 조선시대 서거정(徐巨正)은 '공북루기(拱北樓記)'에서 ' 아조선근본지지 (我朝鮮根本之地) ' 즉 우리 조선(朝宣)의 근본이 되는 땅이라 하여, 전주를 각별히 상서로운 곳으로 높여 불렀다.

 

 

또 ' 아조종풍패지지이남국인재지연수야  (我朝宗豊沛之地 而南國人材之淵藪也) '라고 하여, 전주는 조선의 발상지이며, 호남지방 인재의 못자리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전주(全州)를 왕가(王家)의 발상지라 여기어 거룩히 섬기고, 주(州)를 높여 부(府)로 삼았다.

 

 

 

 

 

                                                              경기전                    慶基殿

 

 

 

 

 

경기전(慶基殿)은 조선왕조를 창업한 이성계(李成桂)의 영정(影幀)을 봉안하기 위하여 1410년(태종 10)에 창건되었으며, 왕기(王氣)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태조(太祖)의 어용(御容)을 봉안하였다. '전(殿)'이라는 명칭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왕조 창시자의 영정(影幀)을 모신 곳 답게 한강(漢江) 이남에서 유일(唯一)하게 궁궐식으로 지은 건물이다.  

 

 

 

                                        하마비                      下馬碑

 

 

 

 

 

 

 

 

 

이곳 경기전(慶基殿)에 들어서기 전에 먼저 하마비(下馬碑)를 만나게 된다. 두 마리의 돌짐승은 비석(碑石)을 등에 지고 힘겨운 듯 앉아 지나가는 행인들을 바라보고 있다. 비석에는 '지차개하마잡인모득입 (至此皆下馬雜人母得入) '이라 새겨져 있다. 이곳에 이르는 자는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貴賤)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雜人)들은 경기전의 출입을 금한다는 뜻이다.

 

 

풍상(風霜)에 닳아 글씨가 역사를 짐작하게 하고, 경기전(慶基殿)이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상징인 태조 이성계 (太祖 李成桂)의 어진(御眞)을 봉안한 중요한 곳이기에 수문장(守門將)으로서 하마비의 위력 또한 대단하였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언뜻보면 이 두 마리의 돌짐승이 해태상 같이 보이지만 실은 사자(獅子)이다. 하나는 입을 다물고 있고, 또 하나는 입을 벌리고 있으며, 두 마리인 것으로 미루어 암컷과 수컷 한 쌍이다. '암수'의 구별을 물으면 어른들은 뒤로 돌아서서 엉덩이의 크기를 확인하고, 초등학생들은 무엇인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한다고 하나, 입을 벌리고 있는 사자(獅子)는 아금강(아! 金剛)이며 숫놈이고, 입을 다물고 있는 사자는 음금강(음!金剛)으로 암놈이다. 결국 맹수의 왕 암수 사자(獅子) 한 쌍이 음양(陰陽)의 조화를 이루면서 경기전을 지키고 있다.     

 

 

 

 

 

 

 

 

 

 

경기전(慶基殿)은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초상화를 모신 곳이다. 태종(太宗)은 1410년 전주, 경주, 평양에 태조(太祖)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를 봉안하고 어용전(御容殿)이라고 하였다. 그 후 태종 12년(1412)에 태조 진전(太祖 眞殿)이라 부르다가, 세종 24년(1442)에 와서 전주(全州)는 경기전(慶基殿), 경주(慶州)는 집경전(集慶殿), 평양(平讓)은 영흥전(永興殿)으로 달리 이름을 지었다. 경기전(慶基殿)은 임진왜란 때 전소(全燒)된 것을 1614년, 광해군(光海君) 6년에 다시 고쳐 지었다.

 

 

 

 

                                                      경기전의 구성

 

 

 

 

경기전 경내에는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 경기전(慶基殿 .. 보물 제   호)과 그의 22대조(22代祖)이며,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시조(始祖)인 신라 사공공(司空公) 이한(李翰) 부부(夫婦)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조慶廟)가 있다.

 

 

경기전은 옛 전주부성(全州府城) 내 동남쪽에 광대한 면적을 점유하고 있었으나,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그 서쪽을 분할(分割)하여 일본인 전용(專用)인 심상소학교(尋常小學敎)를 세우므로써 경기전 절반(切半) 이상의 땅을 상실하였으며, 부속된 건물은 이때 거의 철거되었다. 현존 건물인 전각은 다포식 맞배지붕 건물로서, 전면에 하마비(下馬碑), 홍살문, 외삼문(外三門), 내삼문(內三門) 등이 있다.   

 

 

 

 

 

                                          

 

                                             

 

 

 

 

 

 

 

경기전 건물들의 구성은 본전(本殿), 본전(本殿) 가운데에서 달아낸 헌(軒), 본전 양 옆 익랑(翼廊)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두르고 있는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등으로 공간을 분할하고 있다. 본전(本殿)은 남향하고 있는 다포식(多包式) 맞배지붕 건물로, 높게 돋우어 쌓은 석축(石築) 위에 앞면 3칸, 옆면 3칸으로 세웠는데, 건물 안의 세번 째 기둥렬(柱列)에 고주(高柱)를 세우고 그 가운데에 단(壇)을 놓았다.

 

 

이 단(壇) 양 옆에는 일산(日傘)과 천개(天蓋)를 세웠다. 본전 앞에 내달려 있는 헌(軒)은 본전보다 한 단 낮게 쌓은 석축기단 위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이익공식(二翼工式) 포작(包作)을 짜올린 맞배지붕 건물이다. 본전과 헌(軒)이 이루는 구성은 왕릉에 제사를 지내려고 세운 정자각(丁字閣)의 구성과 같다. 

 

 

또한 본전(本殿) 양 옆에는 익랑(翼廊 .. 문의 좌우편에 잇대어 지은 행랑) 2칸, 무(蕪 ..전각 주위에 세운 행랑) 4칸이 있다. 내삼문은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된 삼문(三門)으로 그 양 옆에 익랑(翼廊) 2칸을 두었다. 외삼문(外三門)은 앞면 3칸, 옆면 1칸인 맞배지붕 건물로 익랑(翼廊)을 두지 않았으며 옆면 가운데에 사이기둥을 세워 삼문(三門)을 달았다.     

 

 

 

 

                                              정전                   正殿

 

 

 

 

 

 

 

 

경기전 정전(正殿)은 지대석과 면석(面石) 및 갑석(甲石)으로 이루어진 춤 높은 기단(基壇)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계(多包系) 형식의 맞배집이다. 그 전면에 바로 붙여 춤이 약간 낮은 기단을 정전(正殿)의 기단과 접속시켜 앞으로 돌출시키고 그 위에 첨각(添閣)을 두어 마치 능침(陵寢)의 정자각(丁字閣)과 같은 평면을 이루어다. 

 

 

이 첨각(添閣) 기단의 동,서,남면에는 각 1개씩 계단을 두어 벽돌을 깐 보도(步道)와 연결하였다. 이곳에 남아 있는 경기전 조경묘 도형의 그림을 보면 지금은없어진 부속건물들과 별전(別殿)이 있었고, 서남쪽에 전사청(典祀廳), 동재(東齋), 서재(西齋), 수복방(守僕房), 제기고(祭器庫) 등과 북동쪽에는 별전(別殿)과 조산(造山)을 만드는 등 광범위한 것이었다.

 

 

 

 

 

 

 

 

 

 

 

 

 

 

 

 

 

                                    이성계 영정                    李成桂 影幀

 

  

 

 

경기전(慶基殿)은 1410년(태종 10)에 지은 건물이다. 처음에는 어용전(御容殿)이라 부르다가, 태종 12년에는 진전(眞殿)이라 개칭하였는데, 1442년(세종 24)에 다시 경기전(慶基殿)이라 개명하고 영정(影幀)도 이때 새로 그렸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참봉 '오희길'은 태인의 선비 '손홍록' 등이 전주사고(全州史庫)에 소장되었던 조선왕조실록,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피난시키는 행렬을 따라 영정(影幀)을 받들고 정읍 내장산(내장산)을 거쳐 이듬해 충청도 아산(峨山)으로 피난시켰다. 그리고 영정(影幀)은 다시 강화도를 거쳐 1597년에는 평안도 묘향산의 보현사(普賢寺) 별전(別殿)에 안치되었다.

 

 

경기전에 영정이 다시 봉안케 된 것은 1614년(광해군 6)이었다. 전라감사 '이경전(李慶田)'에 의하여 경기전이 중건(重建)되자 조정에서는 승지 '이호의'와 이조참이 '김개' 등을 묘향산에 파견하여 전주(全州)까지 영정(影幀)을 호송, 봉안케 한 것이다.

 

 

또한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을 피하여 무주의 적상산성(赤裳山城)으로 영정을 옮겼던 일이 있었는데, 1674년에는 이러한 쓰라린 경험을 거울삼아 위봉산성(威鳳山城)을 쌓고 그곳에 행궁(行宮)을 두어 유사시에 피난할 수 있도록 하였고, 다음 해에는 전주사고(全州史庫)가 있던 경기전 동편에 별전(別殿)을 지어 본전(本殿)을 보수할 때까지의 임시 봉안소로 정하였으나, 10년 후에 이 건물이 화재로 전소(全燒)되었다.

 

 

이러한 국난(國難) 중에도 훼손당하지 않고 보전된 태조(太祖)의 영정은 이곳 경기전이 영정 하나뿐이다. 그래서 1688년 숙종(淑宗)은 경기전의 영정을 다시 서울로 모셔와 모사(模寫)하여 서울에 봉안케 하고, 이름을 영희전(永禧殿)이라고 하였다.

 

 

모사(模寫)가 끝난 영정은 다시 전주 경기전에 돌아와 봉안되었는데, 1872년에 이 영정(影幀)이 오래되어 낡았다는 이유로 새로 모사(模寫)하여 봉안하고, 여러 차례의 국난(國難)을 겪으면서도 4백여 년을 보존하여 왔던 유일한 영정을 불살라 버렸다.      

 

 

 

 

                                       동학운동과 위봉사  .... 영정의 피난

 

 

 

 

 

고종 31년인 1894년, 정읍시 고부에서 일어난 동학군(東學軍)은 이해 4월27일 전주성을 점령하고, 전봉준(全琫準)은 선화당(宣化堂)에 앉아 진군(進軍)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때에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은 겁에 질려 달아날 궁리만 하고 있다가 면직(免職)되었고, 후임으로 외무협변(外務協辨) 김학진(金鶴鎭)을 임명하였다. 신임 감사 김학진(金鶴鎭)은 부임 도중 전주의 동정을 살폈더니 심상치 아니하므로 성내(城內)에는 들지 못하고, 삼례(參禮)에서 머무적거리고 있었다.

 

 

신임 감사가 삼례에서 머물며 전주성에 들어오기를 피하기만 하자 김문현(金文鉉)은 어쩔 수 없이 주저앉아  감사(監事)의 직무를 보게 되었으나, 관민의 통솔이 제대로 서지 못하고 동학군은 밀려오는데, 당황한 나머지 4월27일 공주(公州)로 도망친 후 서울로 올라가 동학군의 실상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한편 판관(判官) 민영승(閔泳昇)은 감사보다 하루 늦은 4월27일에 관복을 벗어던지고, 농민으로 위장하고 그의 처가인 완주군(完州郡) 이연일(李演一)의 집으로 도망쳤다.

 

 

민영승(閔泳昇)은 일단 처가(妻家)로 피신하였으나, 깊은 수심에서 헤어나지 못하였다. 처남(妻男) 이연일(李演一)은 매형 민영승에게  자초지종을 물으니, 조경묘(조慶廟)에 모셔져 있는 시조 사공공(始祖 司空公)의 위패(位牌)와 경기전에 모셔져 있는 태조의 영정(影幀)을 이봉(移奉)하지 못하였으니 살아남을 수 없는 대죄(大罪)를 지었다는 것이었다.

 

 

감사 김문현(金文鉉)이 면직되었으니, 태조의 영정을 봉안할 책임은 판관(判官)인 민영승(閔泳昇)의 책임이었다. 이날 밤 이연일(李演一)은 전주성에 잠입하여 조경묘와 경기전에 들려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나와 영모당(永慕堂)에 임시로 봉안하고, 이튿날 민영승(閔泳昇)은 위패와 영정을 시봉(侍奉)하고 위봉산성(威峰山城) 안에 있는 위봉사(威鳳寺) 대웅전(大雄殿)에 이안(移安)한 후 이를 호위하였다. 

 

 

 

 

 

 

 

 

 

 

여러 기록에는 판관 민영승(閔泳昇)이 직접 위봉사(威峰寺)에 이안(移安)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그 이면(裏面)에는 이와 같은 우여곡절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판관(判官)을 은익한 일로 완주(完州)의 처가(妻家)마을은 동학군(東學軍)에 의하여 전소(全燒)되었다.

 

   

 

 

 

 

 

 

 

 

경기전에는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영정 뿐만 아니라 1999년 세종(世宗)과 영조(英祖) 그리고 2000년에는 정조(正祖)와 철종(哲宗), 2001년에는 고종(高宗)의 영정이 경기전에 봉안되어다. 그를 시발점으로 2003년 8월에 조선왕조 마지막 황태자인 순종의 어진(御眞)도 경기전에 봉안되었다. 조선왕조의 임금 중 국내 현존하는 7명의 어진(御眞)이 한꺼번에 봉안된 것이다.

 

 

 

 

 

 

 

 

 

 

 

                                         위봉산성                  威鳳山城

 

 

 

 

 

 

 

 

 

 

전라북도 기념물 제17호이다. 1407년(태종 7)에 축성(築城)하여 1675년(숙종 1)에 중수하였는데,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하여 축성하였다. 위봉산성(威鳳山城)은 '동국문헌비교(동국문헌비고)'의 기록에 ' 재동40리우축주5097파여첩2437내재정45저수피9염산1숙종운년축 (在東四十里 右築周五千九十七把 女堞二千四百三十七 內在井四十五 儲水陂九鹽山一 肅宗元年築) '이라고 하였으며, '완산지(完山誌)에는 ' 肅宗乙卯 兼府尹權大載啓聞甁築營建行宮又移眞殿 '이라 기록되어 있다.

 

 

위봉진사례(威鳳鎭事例)에 의하면, 행궁(行宮) 6칸, 정자각(丁字閣) 2칸, 좌우의 익랑(翼廊)각 5칸, 내외3문(內外三門) 각 3칸 등이고, 전주, 익산, 김제, 금구, 임실, 고산, 진안, 용안, 함열등 9읍(邑)이 소속되어 각 군기고(軍器庫)와 군향창(軍餉倉)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현재 성곽은 석축(石築)으로 서, 동, 북에 3개의 성문(城門)이 있는데, 북문은 폭포 서편의 통로상에 있고, 동무옆에는 장대(將臺)가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파괴되고 높이 3m, 너비 3m의 아치형 석문(石門)만이 현존하고 있다. 성내(城內)에는 위봉사(威鳳寺)가 남아 있고, 북방 수구(水口) 자리에는 위봉폭포가 있어 전주팔경(全州八景)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전주사고              全州史庫

 

 

 

 

전주사고(全州史苦)는 경기전 내부에 설치되었던 사고(史庫)이다. 전주(全州)에 사고(史庫)를 설치한 것은 이곳이 조선 왕실의 본관지이며, 이미 1410년(태종 10)에 태조의 어진(御眞)이 경기전에 봉안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실록각(實錄閣)이 처음부터 마련되지 않아 실록(實錄)을 여러 차례 옮겨 보관하였기 때문이었다.

 

 

 

 

 

 

 

 

 

세종(世宗) 27년인 1445년 처음으로 전주(全州)에 실록(實錄)을 봉안할 때, 전주부(全州府)의 성(城) 안 승의사(僧義寺)에 두었다가, 1464년(세조 10) 가을에 진남루(鎭南樓)로 이안(移安)하였다. 당시 세조(世祖)는 전라도에 명하여 실록각(實錄閣)을 건립하도록 하였으나, 연이은 흉년(凶年)으로 공사를 시작하지 못하고 미루었다.

 

 

1472년 (성종 3) 봄, 세조, 예종 등 두 임금의 실록이 만들어지자 성종(成宗)은 양성지(梁誠之)를 봉안사(奉安使)로 삼아 이를 전주사고(全州史庫)에 봉안하게 하였다. 이때 춘추관의 구신(舊臣)이었던 김지경(金之慶)이곳 관찰사로 나와 있으면서 애써 실록각(實錄閣)을 건립하고자, 양성지(梁誠之)와 더불어 경기전(慶基殿)의 동편에 자리를 잡고 계(啓)를 올렸다.

 

 

이에 이웃 여러 포(浦)의 선군(船軍) 300명을 역군(役軍)으로, 전주부윤 조근(趙瑾)을 공역(工役) 책임자로, 순창군수 김극련(金克鍊)은 공사를 감독하도록 하여 1473년 5월을 지나 공사를 마쳤다. 실록각이 완성되자 그해 6월 진남루(鎭南樓)에 봉안하고 있던 실록을 모두 이곳으로 옮겨 보관하였다.

 

 

그 뒤 120년간 실록과 기타 서적이 잘 보관되어 오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그 병화(兵禍)에 소실(燒失)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실록을 1592년 6월22일에 정읍현 내장산 은봉암(隱峯庵)으로 옮겼다. 이 때 경기전 참봉 오희길(吳希吉)과 유신(柳訊), 수직유색(守直儒生)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의 공로가 컸다.

 

 

그후 9월28일에는 다시 비래암(飛來庵)으로 옮겼다. 전주사고본 실록(實錄)과 태조 어진(御眞)은 정읍의 내장산에서  1년 18일을 숨겨 보존하다가 뒤에 해로(海路)로 해주(海州)를 거쳐 영변의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별전(別殿)으로 옮겨 난(亂)을 피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보현사(普賢寺)의 전주사고본 실록을 다시 영변의 객사(客舍)로 옮겨 두었고, 1603년 5월에는 등서(騰書)와 재인(再印)의 편의를 위해 다시 강화도(江華島)로 옮겼다. 전주사고본 실록과 이를 바탕으로 재 인쇄된 4질(帙)을 합한 5질(帙)의 시록을 봉안하기 위하여 5사고(五史庫)가 정비되나, 전주사고는 계승 복구되지 못하였다.          

 

 

 

 

 

                                             조경묘                 肇慶廟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을 봉안하기 위해 지는 경기전(慶基殿) 경내 북쪽에 있으며,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조(英祖) 47년인 1771년에 이득리(李得履) 등 7도(道) 유생(儒生)들의 상소로 창건(創建)된 것이다.  

 

 

 

 

 

 

 

 

 

 

 

조경묘(肇慶廟)은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시조(始祖) ' 이한(李翰) '부부의 위패(位牌)를 봉안한 전각이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전주(全州)에서 발생하였다고 하나 당시까지만 해도 시조묘(始祖廟)가 없었다.

 

 

시조(始祖)인 이한(李翰)은 태조의 21대조로서 신라시대에 사공(司公) 벼슬을 지냈으며, 전주 동교의 발산 아래 자만동(滋滿洞)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이안사(李安社)가 강원도 삼척을 거쳐 함경도 덕원 땅에 옮겨갈 때까지 19대가 전주(全州)에 세거(世居)한 셈이 된다.

 

 

조경묘(肇慶廟)에 봉안된 영정(影幀)은 태조의 영정과 함께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의 전화(戰禍)를 피해 내장산 용굴암을 비롯하여 충청도 아산과 적상산성 등으로 옮겨 다니다가 1614년 경기전(慶基殿)의 중건(重建)된 후 다시 돌아왔다. 1854년 조경묘(肇慶廟)는 경기전과 함께 중건(重建)되었으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때는 전주부성이 점령되려 하자, 영정(影幀)들을 위봉사(威鳳寺)의 행궁(行宮)에 안치하였다가 그해 7월17일 다시 전주로 옮겨왔다. 

 

 

영조(英祖)가 친필로 써서 보낸 ' 시조고신라사공신위 (始祖古新羅司公神位) '와 ' 시조비경주김씨신위 (始祖妃慶州金氏神位) '라고 쓴 위패(位牌)가 모셔져 있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조경묘의 창건 경위에 관하여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경내에 있던 대부분의 건물들이 철거되고 경기전 정전(正殿)과 조경묘(肇慶廟)만 남아 있다가 최근 부속건물을 복원하였다.      

 

 

 

 

 

 

 

 

 

 

 

 

 

출처 : 김규봉 ... 사는 이야기
글쓴이 : 非山非野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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