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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풍양조씨 상주양진당 이야기

장안봉(微山) 2012. 12. 20. 12:22

 

 

 

 

 

 

 

 

 

 

 

 

 

 

 

 

명 칭 :  상주양진당(尙州養眞堂)
소 재 지 :  상주시 낙동면 승곡리 214-3
(원소재지 : 상주시 낙동면 승곡리 214-3번지)
건 축 주 :  조정(趙靖)
건축시기 :  1626년에 안동에서 옮겨와서 지음
중건시기 :  1981년
문 화 재 :  국가 지정 보물 제 1568호, 2008년 7월 10일 지정


건축 이야기
양진당은 배산 임수를 갖춘 전형적인 양택 입지조건을 갖춘 경사진 지형에 좌향하였으며, 정면은 9칸이다. 원래는 사랑채가 있어 口자형이었으나 지금은 행랑채를 복원하여 口자형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양진당은 검간 선생의 처가인 안동 임하면 천전동에서 이건해 온 것으로 그 때의 규모로 99칸이었다고 전한다. "그동안 여러 번 중수를 거듭하였는데, 1981년 11월에 해체하는 과정에서 종도리(宗道理)에서, "숭정후(崇禎後) 180년 정묘(丁卯) 11월 18일 을묘(乙卯) 상택주(上宅主) 조술겸(趙述謙)"(1807년 순조 7년)이란 기록과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상량문에는, "천계 6년 병인(天啓六年 丙寅) 12월 28일 병진(丙辰) 상감훈(上籃薰) 조기원(趙基遠)" 이란 기록이 있어 1626년(인조 4) 임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보면, 양진당은 1626년에 건립하고 1807년에 중수하였으며, 1980년에 건물을 해체하고 1981년에 다시 복원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건축 특징
이 건물은 약간 경사진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원래는 99칸의 ‘ㅁ’ 자 형의 집이었다. 그 후 부속건물 대부분이 없어지고 지금은 좌우가 약간 다른 ‘ㄷ’ 자 형으로 남아있다. 즉 앞면 9칸, 왼쪽 옆면 4칸, 오른쪽 옆면 6칸이며, 왼쪽에는 창고를 두고, 오른 쪽에는 방을 만들었으며, 앞면의 왼쪽 3칸은 방이고, 오른쪽은 마루이다. 지붕은 ‘ㅅ’ 자 모양의 단순한 맞배지붕이며, 앞면과 곁채에는 툇마루를 두었으며, ‘田’ 자 형으로 배치된 방 옆에 대청마루를 둔 것이 이 집의 특색이다.

- 사당 복원

사당이 있던 원래의 자리인 안채(정침)의 우측에 2008년 복원하였다.


건축 구성
- 안채

정면 9칸의 안채는 다소곳한 주거공간이라는 느낌보다는 호방한 사랑채 분위기다. 더구나 고상형 형태를 취하면서 온돌을 깐 특이한 구조다. 흔히 온돌과 마루를 우리 고유의 주거문화로 인식하지만, 온돌은 추운 북방식이며, 마루는 비가 많고 습한 남방의 주거 형태로 두 가지 문화의 접경이 우리나라이다.

이런 고상형 구조는 습한 기후와, 강우량, 강물의 범람 등 자연환경과 기후를 고려한 효과적인 선택으로 보여 진다. 실제로 강물의 범람으로 사랑채가 무너졌다고 한다.

고상형 구조로 인해 출입 계단을 별도로 좌우에 설치하였다. 퇴주 아래는 방형이며 위는 두리기둥이다. 도편수의 미적 감각인지, 우리고유의 천원지방을 고려했는지 알 수 없어도 이채로운 모습이다.
사는 사람의 편의를 고려하여 안마당에서 경사로를 조성하는 경우는 우리고택에서 종종 볼 수 있지만 이런 유형은 유일무이한 구조로 보인다.

사람이 사는 공간에서 느낄 수 없는 장엄미가 풍기지만 안채 공간에 특별한 의미부여보다는 고상형 구조로 인한 조형으로 판단되며, 머름을 높여 툇마루로부터 방으로 출입을 은근히 금하고 있는 구성이다.

- 겹집 구조 온돌방

남부지방의 日자형 홑집 구조와 달리 전후에 방이 놓인 田자형 겹집구조를 갖추었다. 일반적으로 추운 북부지방에서 방온을 극대화하기 위한 구조이다.

- 복원된 행랑채

사랑채가 있어야 할 곳에 행랑채를 복원했는지 모르겠다. 부지 확보의 어려움으로 그랬을까? 차라리 그대로 두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풍양 조씨 교육원으로 활용하는 공간인데 행랑채에서 안채를 바로 바라보는 구조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현판
양진당(養眞堂)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의 작품이다.

 

문중 이야기
- 교육의 장으로서의 양진당(養眞堂)
양진당은 검간(黔澗) 조정(趙靖)께서 1626년 창건한 이래 조선시대에는 상주지역 유학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검간공의 자손들 중 많은 훌륭한 인사들이 도남서원과 속수서원 등을 중심으로 유학을 교육하고 발전시키면서 어지러운 시속을 바로잡는 중추적 역할을 하셨다. 일제시대 이후에도 풍양조씨 문중에는 신교육을 위한 교육기관을 설립하신 분들이 많은데, 그중에서 특히 양진당과 관련된 것만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검간 조정의 11대 종손인 조남호(趙南琥, 1867~1934)께서 1911년 2월 26일 사립풍창학교(私立豊昌學校)를 설립하는 인가신청서를 경상북도 도장관에게 제출하였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교주는 조남호, 교장은 조남식(趙南軾, 1867~1920)으로 되어있으며, 학교 설립에 문중 각파의 유력한 인사들이 총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학교설립은 우여곡절 끝에 일제의 불허로 좌절되었다.
1920년에는 만당(晩堂) 조태연(趙泰衍, 1877~1934)께서 낙동면 운평리 속칭 널미의 화락재(和樂齋)에 낙운사숙(洛雲私塾)이라는 신교육기관을 세웠다. 또한 만당 조태연께서는 운창조합(雲昌組合)을 설립하여 농민의 자활을 도우면서 또한 그 운영수익을 낙운사숙의 재정기금으로 사용하였다. 상주의 낙동면과 중동면 및 인근의 선산과 의성 등지에서 모인 학도수가 처음에는 50여명이었으나 100여명으로 급격히 늘어 낙운사숙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되자 1921년 학교를 양진당으로 옮기고 교명을 조명강습소(朝明講習所)로 개칭하였다. 양진당에서는 학도수 100여명을 갑, 을, 병 3개반으로 나누었으며, 당시의 강사들은 소남(小南) 김영현(金榮炫, 1883~1974), 낙재(樂齋) 조태연(趙台衍, 1895~1945), 백담(白潭) 조상연(趙相衍, 1897~1965) 등으로 모두 민족운동을 하여 옥고를 치룬 우국지사들이다. 조명강습소는 1923년 낙동보통학교(현 낙동초등학교)의 개교와 함께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교되게 되었다.
양진당은 6.25동란 직후에는 전쟁 시기에 폭격으로 소실된 낙동보통학교의 분교장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풍양조씨문중은 1984년 7월 26일 양진당에 풍양조씨연수원을 개원하였다. 양진당에서 매년 8월에 전국의 풍양조씨 대학생을 대상으로 뿌리교육을 하여왔는데, 현재는 뿌리교육의 참가범위가 대학생, 중고생, 일반청장년, 부녀층에까지 확대되었다.


관련유물
- 조정임진란기록(趙靖壬辰亂記錄) 6종 7책(보물 제1003호, 1989년 5월 23일 지정)
이것은 1592년(선조 25)부터 1597년(선조 30)까지 약 6년간의 사실이 수록되어 있는 글이다. 이 일기는 총 6종 7책인데 『임진일기(壬辰日記)』 상·하 2책, 『남행록(南行錄)』, 『진사록(辰巳錄)』, 『일기부잡록(日記附雜錄)』, 『서행일기(西行日記)』, 『문견록(聞見錄)』 각 1책 등이다. 기술형식은 월·일 별로 행을 구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간혹 기사가 없는 날은 날씨만 기록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에 관한 기록으로는 여러 사람이 손수 적은 수십 건이 있으나, 조정의 『임진일기』는 임진년 10일 정도의 기록이 빠진 부분을 제외하고는 약 6년간의 기록이 다른 어떤 것보다 충실하고 상세하다. 이는 당시 사회상과 군대의 배치상황, 의병의 활동상 등을 살필 수 있는 임진왜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 조정종손가소장문적(趙靖宗孫家所藏文籍)(보물 제1004호, 1989년 5월 23일 지정)
분재기(分財記) 7점 : 분재기는 외가와 처가에서 분재받은 것과 형제와 자녀에게 분재한 것
교지(敎旨) 24점 : 교지는 선생과 배위에게 내린 것(1991년 12월 16일 추가 지정된 1점 포함)
전적(典籍) 7종 7책 : 『삼봉선생집(三峰先生集)』, 『양약재선생학음집(煬若齋先生學吟集)』, 『필원잡기(筆苑雜記)』, 『논어언해(論語諺解)』, 『한서(漢書)』, 『송조명현오백가번방대전문수(宋朝名賢五百家璠芳大全文粹)』, 『전산성법(田算成法)』 등
시권(試券) 2점 : 조정연사십육세시시권(趙靖年四十六歲試券), 조정문과병과제이십일인급제시권(趙靖文科丙科第二十一人及第試券) (1991년 12월 16일 추가 지정)

분재기는 당시 사회·경제사 연구에, 교지류는 인사행정제도의 연구에 각각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전적은 빠진 부분이 많기는 해도 조선 전기에 간행된 것으로 서지학, 교육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들이다.
- 유품(遺品) 7종
친필필첩 2책, 문집 4책, 소장(疎狀), 『삼변사조칠필(三邊四祖親筆)』 1책, 한강선생만(寒岡先生挽), 거연기우제(巨淵祈雨祭), 탁영(濯纓), 삼족당양선생묘산수호문(三足堂兩先生墓山守護文) 등

- 이상 관련유물들을 상주박물관에서 기증받아 전시 및 관리하고 있다.

 

관련인물
- 조정(趙靖)
1555(명종 19)~1636(인조 14). 본관(本貫)은 풍양(豊壤)이며, 광헌(光憲)의 아들이다. 자(字)는 안중(安仲)이며, 호(號)는 검간(黔澗)이다. 선친의 묘소 아래에 검계(黔溪)라는 작은 개울이 있어 호로 삼았다. 김성일(金誠一), 정구(鄭逑)의 문인(門人)이다. 1592년(선조 25) 왜적이 침입하자 함창(咸昌) 황영사(黃嶺寺)에서 창의(倡義)하여 이봉(李逢)의 좌막(佐幕)이 되었다.

뒤에 순찰사(巡察使) 김성일(金誠一), 안동수성장(安東守城將) 김용(金涌)등에게 찾아가 토적(討賊)에 관해 건의하였다. 그해 12월에는 창의장(倡義將) 이봉(李逢)의 대신으로 보은(報恩)에 가서 여러 의병장들과 의거(義擧)에 관해 정약(定約)하였다.

1596년(선조 29)에 도체찰사(都體察使) 류성룡(柳成龍)의 막하종사(幕下從事)로 활약하였고, 이듬해에 기원(基遠)과 영원(榮遠) 두 아들을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에게 보내어 화왕산성(火旺山城) 의병에 참여케 하였다.

1599년(선조 32)에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임명되어 광흥창(廣興倉), 군기시(軍器寺)의 주부(主簿) 등을 지냈다. 1603년(선조 3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였다.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내고, 1605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고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예조좌랑(禮曹佐郞), 대구판관(大邱判官), 경주제독(慶州提督)을 지냈다. 이어 해남현감(海南縣監), 공홍도(충청도)도사(公洪道都事), 청도군수(淸道郡守)등을 지내면서 치적이 있었다.

인조반정후(仁祖反正後)에 김제군수(金堤郡守)를 지내고 이괄(李适)의 난(亂) 때에는 왕(王)을 공주(公州)로 호종(扈從)하였다. 1626년에 형조정랑 겸 춘추관기주관(刑曹正郞 兼 春秋館記注官)과 통례원상례 겸 춘추관편수관(通禮院相禮 兼 春秋館編修官), 그리고 사섬시정(司贍寺正)을 지내고 이듬해 봉상시정(奉常寺正)으로 전직하였으며, 1632년에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642년(인조 20)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贈職)되고 1730년(영조 6)에 의성(義城 : 당시는 상주(尙州)에 속했음)의 속수서원(涑水書院)에 추향(追享)되었으며, 2008년 상주(尙州)의 장천서원(長川書院) 추원당에 배향되었다. 시문(詩文)을 모은 『검간집(黔澗集)』과 자필본(自筆本)인 『임란일기(壬亂日記)』 7책이 전한다.
- 조기원(趙基遠)
1574(선조 7)~1652(효종 3). 검간(黔澗) 조정(趙靖)의 장자이다. 자는 경진(景進)이고 호는 초은(樵隱)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를 따라 화왕산성 의병에 참여하였으며, 사담사 직장, 사헌부 감찰, 황간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큰 흉년에 "비용을 절감하고 국가재정을 절감하여 민본을 중하게 여기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고 빈한한 자들을 성심으로 구호하여 상주지역 백성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크게 노력하였다. 행장을 종6대손인 구당(舊堂) 조목수(趙沐洙)가 지었다.
- 조예(趙秇)
1608(선조 41)~1661(현종 2). 자는 수보(守甫)이고 호는 가곡(柯谷)이다. 조정(趙靖)의 손자이며, 초은(樵隱) 기원(基遠)의 장자이다. 명(明)나라가 망하자 벼슬길에 나가길 포기하였으나 부음(父蔭)으로 통사랑(通仕郞)의 위계를 받았다. 청간정(聽澗亭)을 지었다.
- 조균(趙稛)
1610(광해 2)~1663(현종 4). 자가 성경(成卿)이다. 초은(樵隱) 기원(基遠)의 둘째이며 18세 때 종조부인 가규(可畦) 조익(趙翊)의 사손(嗣孫)으로 출계하였다. 양가의 외삼촌이 김자점(金自點)으로 정승자리에 있었으나 김자점의 농권(弄權)을 비판하고 몸을 깨끗이 하여 후에 자점이 패망하였어도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사옹원(司饔院)과 선공감(繕工監)의 직장(直長), 청암도(靑巖道) 찰방(察訪), 종묘서령(宗廟署令), 연천현감(漣川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일처리가 질서정연하였고, 매우 청빈하여 생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형님에게 환원함으로써 생가의 조카인 용슬헌공에게 물려주었다.
- 조원윤(趙元胤)
1633(인조 11)~1688(숙종 14). 초은(樵隱) 기원(基遠)의 손자이고 예(秇)의 장자이다. 자가 선백(善伯)이고 호가 죽파(竹坡)이다. 소시부터 힘써 공부하여 의리를 연구하였으며, 공자묘(孔子廟)의 위판(位版)을 새로 조성하는 것과 관련된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기 위해 상소문을 올렸으며, 또한 대동균혜법(大同均惠法)을 시행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려 서민의 생활고를 개선하는 경제정책이 바로 수립되도록 노력하였으며, 상주객사(현 商山館)의 이건 구기(舊基) 상량문을 썼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제자이며, 익암서당(益巖書堂)을 짓고, 또한 청간정과 익암서당에 미수 허목이 쓴 전서의 현판을 걸었다.
- 조진윤(趙振胤)
1635(인조 13)~1709(숙종 35). 예(秇)의 둘째 아들이다. 자는 숙기(叔起)이고 호가 용슬헌(容膝軒)이다. 효우와 문학이 세간에 추증되었으며,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행적을 찬하고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이 묘갈명을 지었다. 유집이 있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제자이며, 원윤(元胤)과 더불어 익암서당(益巖書堂)을 짓고, 또한 청간정과 익암서당에 미수 허목이 쓴 전서의 현판을 걸었다.

 

상주 > 남동권 > 낙동면 승곡리
- 상주시의 동단에 위치하며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의성군, 구미시, 상주시 중동면에 접하고, 서쪽은 국사봉을 경계로 상주시 동성동, 신흥동과 인접하고 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 때 외동면과 장천면이 병합됨에 따라 낙동강의 이름을 따서 낙동면으로 개칭했다.
양진당이 소재한 승곡리는

- 승곡리(升谷里)
원래 장천면 지역이며 勝長寺가 있었으므로 "승장골" 승장곡(勝長谷) 또는 "승장"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언상(言上), 언중(言中), 언하(言下), 제동(齊洞), 요포(繞浦), 통사(通仕), 옥곡(玉谷), 송천(松川), 승상(升上), 승중(升中), 승하(升下) 등 여러 마을을 병합하고 승곡이라 개칭하였다.

- 양진당(養眞堂), 요포(繞浦)

처음은 요포라 했으나 인조 4년(1626)에 건립한 지방문화재 85호인 양진당을 짓고 나서 마을 이름도 양진당이라 부르게 되었다.

- 옥가실, 옥곡(玉谷)

이 마을은 청주한씨가 임란 때 이곳에 후 그대로 정착 한 마을로 마을 뒷산에는 큰 바위들이 많고 바위 사이로 항상 맑은 물이 있으며 마을이 들어서 있는 터에도 옥같이 생긴 바위들이 많이 깔려 있다.

- 퉁사동, 통사동(通仕洞)

이 마을에는 일제 초엽 용포오리원의 관아를 뜯어 와서 영효재란 재실을 지었는데 그때부터 마을이 이루어졌고 마을사람들 은 양진당의 선비들과 잘 통한다는 뜻으로 마을 이름이 통사동(通仕洞)이 되었다.

- 승장(勝粧)

고려 말기에 승장사(勝粧寺)란 절이 있었기 때문에 승장으로 불러지게 되었으며 윗 승장과 아래 승장이 있다.

참나무진

일제 때 상산김씨가 은거하여 살면서 개척한 마을로 일대에 참나무가 잘 자라고 참나무 그늘이 좋아서 마을 사람들이 그늘을 정자삼아 모여 논다 하여 마을 이름이 참나무 정이 되었다 한다.

 

 

검간 조정선생

성명 : 조정(趙靖) , 1555년 ~ 1636년
본관 : 풍양(豊壤)
: 안중(安仲)
: 검간(黔澗)
출생지 : 서울 연지동
출신지 : 상주 동문 밖 외가 댁
입사경로 : 선조(宣祖) 38년 (1605) 을사(乙巳)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21위
내관직 :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형조정랑(刑曹正郞),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 봉상시정(奉常寺正)
외관직 : 해남현감, 청도군수, 김제군수
증직및기타 : 이조참판(吏曹參判)
태몽, 생활 등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검간 선생은 한양의 연지동(蓮池洞)에서 태어났다고도 하고 , 혹은 상주의 동문 밖 사제(私第)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대개 연지동은 선생의 본가이기 때문이요 상주의 동문 밖은 선생의 외가이기 때문에 전해오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세대가 오래되어 고증할 수가 없다.

5세에 비로소 글을 배워서 문장을 잘 짓고 말은 문득 남들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 6세에는 성의의 의표(儀表)와 도량이 있어서 능히 분잡하고 화려한 것을 보면 정색을 하고서 이를 훈계하듯 경계하니 모부인께서 웃으면서 “이게 참말로 내 아들이다”라고 하셨다.

할아버지 직장공께서는 집안을 다스리기를 엄정하게 하여 자손 가르치기를 한결같이 하여 가법을 준수하도록 했다. 선생은 가정의 가르침에 순응하며 부지런히 글을 읽어서 채근하지 않아도 스스로 힘써 덕행과 기량이 날로 진보되어 성숙하다는 일컬음이 있었다.

1604년에 이호민, 김륵, 이준, 이민석 등과 함께 영남의 38명이 한양에서 영남회(嶺南會)를 조직하고서 계회도(契會圖)를 만든 적이 있으며, 1606년에는 고을의 여러분들과 함께 도남서원을 창설하게 되었다. 상주에는 옛날부터 서원이 없어 선비들이 강습할 장소가 없자 우복 정경세, 창석 이준, 우곡 송량, 월간 이전, 석천 김각 등과 함께 창건하게 되었다. 그때 선생께서는 서원의 원장으로 추대되었고 선생은 전심으로 경영하여 서원 안의 과조를 백록동서원의 고사에 의거하여 만들었다.

그리고 또 임진왜란 때 일기를 남겼는데 이 임진왜란일기는 선조25년부터 정유재란때까지의 일기를 기록한 것인데 일기, 서행록, 남행록, 잡록, 견문록 등 각각 다른 책으로 엮어져 있다. 이 일기는 의병활동에 관한 내용, 각 지방의 전황, 왜적의 경로 등 전반적인 중요한 자료가 되어 보물로 지정이 되어 있다.

가족이야기

: 조희(趙禧)
생부 : 조광헌(趙光憲)
: 남양홍씨
형제 : 조익(趙翊), 조굉(趙竤), 조준(趙竣)
집안 이력, 가족 이야기 등
1565년에 공은 11세이었는데 영남의 선비인 개암 김우굉, 송오 여응구, 송파 조휘 등 여러분이 스님 보우(普雨)를 죽일 것을 청하는 소장을 가지고 서울에 올라와서 연지동으로 공의 할아버지인 직장공을 찾아왔었다. 직장공께서는 마침 교외에 출타중이시고 아버지인 승지공도 영남에 내려가 있어서 선생과 아우인 가규공(可畦公)이 나와서 절을 하며 맞이하는데 예절이 있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술과 과일을 갖추어 대접하는 모습이 매우 예의가 있었다. 여러분들이 기특하고 귀여워하면서 경탄하여 소청일기(疏廳日記)에 기록하기를 ‘몇일날에 조 직장공을 찾아 갔었더니 부자 두 분이 모두 출타 중인데 두 아이가 나와서 절을 하며 대구를 하니 진실로 중국 양씨가문(楊氏家門)의 아이가 손님을 맞아 접대하던 그런 아이였다’라고 했다.

1592년 4월에 왜적이 침입하자 선생은 어머님을 모시고 난을 피하여 속리산으로 들어갔다. 학봉선생이 경상우병사로 상주를 지나가는데 선생은 길가에서 학봉 선생을 맞이하여 인사를 했다. 왜적에 관한 소식이 매우 급박함을 듣고 어머님을 모시고 속리산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러나 선생은 문경의 노동에 나와 있으면서 적의 동태를 살폈다. 이렇게 어머님을 봉양할 때에는 모든 것을 갖추는데 힘을 다하여 조금도 모자라거나 음식이 떨어지는 경우가 없게 되었다.

모부인 상을 당했을 때 그 당시는 군사들이 기근으로 사람도 서로 잡아먹는 판국인데도 공은 제수(祭需)할 물품을 정성으로 마련하고 거상하는 예절도 조금도 어긋나게 하지 않았다.

경오년에 모부인을 반장(返葬)할 때 80의 나이로 상여를 잡고 울부짖기를 젊을 때와 다름이 없었다. 제사에 마음을 다하여 의물과 품식을 한결같이 주문공의 가례를 따라서 하였고, 비록 난리 중이라도 목욕재계하고 마음 닦기를 평소와 같이 하였다. 특히 중양절에는 “계추는 원래 부모를 제사 드리는 달이다. 이제 그 날을 맞이함에 서글픈 생각이 있다”라고 하며 약간의 어물과 제수를 갖추고 제사를 올렸다.

학문이야기

향사 : 속수서원(涑水書院), 승곡리추원당(장천서원)(升谷里追遠堂(長川書院))
학파 : 퇴계 학파
스승, 배움 이야기 등
13세에 동생인 조익과 함께 탁상에 나란히 앉아서 단정한 자세로 밤낮으로 공부를 하니 당시 사람들이 원방(元方)과 계방(季方)이라고 칭찬했다. 15세에는 상주 갑장산의 동쪽에 있었던 승장사에서 동생과 함께 뜻을 다듬고 독실하게 3년간 공부에 전념하였다.

16세에는 한강 정구의 문하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였는데 한강 선생이 한번 보고는 기특하게 여겨 뜻을 허락하여 소학과 심경 등을 배웠다. 선생은 가르침을 마음에 간직하여 잊지 않고 부지런히 하여 안으로 향하는 내실지학(內實之學)을 알았다고 한다.

17세에는 서애 류성룡을 배알하였는데 서애 선생은 특별히 장려하고 힘쓰라고 칭찬하였다. 18세인 1572년에는 학봉 김성일의 문하에 들어가서 유학을 하게 되며 주자서절요를 수학하였다. 학봉 선생은 약봉 김극일의 동생인데 그곳에 출입하면서 학봉 문하에서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주자서를 읽고 더욱 스스로를 노력하게 하였다.

43세인 1597년 3월에 선생은 우복 정경세, 사서 전식 등과 함께 삼청동에서 유람한 적이 있다. 그때 선생은 쓸쓸한 생각에서 좌우를 돌아보며 ‘풍경은 예나 다를 바 없지만 눈을 들어 살펴보면 옛날과 오늘에 다름이 있다. 삼궁(三宮)은 모두 폐허가 되고 임금님이 다니던 길에 잡초가 우거져 몇 날이나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요사스런 기운이 소탕하고 다시금 태평성대를 찾아야겠다’고 하였다.

1601년에는 휴가를 얻어서 친구 14인과 함께 배를 타고 조수(潮水)를 따라 내려가 공암어소(孔巖漁所)에서 잤다. 1604년 3월에는 한양에서 이호민, 김륵, 이준, 이민성 등과 함께 영남회를 조직하여 계를 만들었다. 그때의 장면을 여러 사람의 초상을 그리고 관직과 성명을 화폭 하단에 쓰고서 이름하여 영남계회도라고 하였다.

1622년 7월 16일에는 낙동강에서 배를 띄우고 시를 지으며 문회를 가졌는데, 그때 참석한 상주의 선비들은 이전, 이준, 강응철, 유진, 전식, 등 당대 상주의 명유(名儒)들이었다. 선생은 ‘임술지추칠월기망(壬戌之秋七月旣望)’이라는 적벽부 원문을 가지고 분운(分韻)하였을 때 ‘술’자를 얻어서 40구의 한시를 지었다.

저작이야기

집필, 편찬 이야기 등
문집은 원집(原集) 4권과 진사일록(辰巳日錄) 합 4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권수에는 이광정(李光庭)의 서문과 총목록이 실려 있다.

권1은 시(詩)로 140여 수의 시가 실려 있는데, 각 체의 시가 구분없이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으며 그중 약 40여 수가 만시(挽詩)로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제목 아래 달린 주는 주로 저작의 배경이나 당시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대부분 편자의 주인 듯 한데 저자의 주는 ‘자주(自註)’라고 표기되어 있다.
〈제난이기사후(題亂離記事後)〉, 〈증괴산쉬이봉(贈槐山倅李逢)〉 등 임진란 기간 중 충의에 북받쳐 강개한 심정을 읊은 시가 많으며, 아우인 조익(趙翊)과 주고받은 시가 많다.

권2는 소(疏), 전(箋), 장(狀), 서(書)이다.
이 중 〈청친정소(請親征疏)〉는 1596년(선조 29) 다시 전운이 짙어지자 조정의 의논이 분분한 것을 보고 올린 상소로 상이 친히 나아가 왜적을 정벌할 것을 주청한 글인데 다음 해 1597년 3월까지 향론(鄕論)을 규합하여 모두 3차례 올린 것이다. 전(箋)은 모두 형식적인 하전(賀箋)이며, 장(狀)은 방백과 통제사, 병마절도사에게 올린 것이다.

권3에는 잡저(雜著)와 논(論), 제문(祭文)이 실려있다.
잡저의〈통도내오당문(通道內吾黨文)〉은 1597년에 〈청친정소(請親征疏)〉를 올릴 것을 의논하기위해 도내(道內)에 보낸 통문으로, 부록의 소청일기(疏廳日記)와 연결되는 내용이다.
〈해남현두미상정기(海南縣斗米詳定記)〉는 해남현감으로 부임하여 1609년(광해군1) 두미법(斗米法)을 개정할 당시, 옛 두미법(斗米法)이 시행되던 때의 폐단과 해남현감으로 부임하여 정한 두미법(斗米法) 등에 관한 글이다.
그 밖에 스승인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의 유사(遺事)는 임진년의 행적이 특히 자세하며, 〈장준해이강론(張浚劾李綱論)〉은 송대(宋代)의 인물들을 빌려 당시 당파의 구분에 따라 서로를 비난하던 풍습을 논한 것이다. 제문은 서애(西厓)와 한강(寒岡) 등 사우(師友)와 가족에 대한 제문이다.

권4는 연보(年譜)와 부록(附錄)이다. 부록에는 이광정(李光庭)이 지은 행장(行狀)과 정온(鄭蘊)이 지은 묘표(墓表), 조정융(曺挺融)이 지은 묘지(墓誌), 이전(李㙉)이 지은 행적(行蹟), 만사(挽詞), 제문(祭文)과 이재(李栽)가 지은 속수서원봉안문(涑水書院奉安文) 등이실려있다.
권말에는채헌징(蔡獻徵)이1707년에 쓴 〈서검간집부록후(書黔澗集附錄後)〉가 있다.
진사일록(辰巳日錄)은 1592년 4월 14일 왜구의 침입을 처음 들은 날로부터 1593년 10월 선조(宣祖)가 환도(還都)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날까지의 정치관계 기사, 의병(義兵)의 활동상 등을 자세히 기록한 것으로 임진왜란 연구의 주요 자료이다.
<소청일기(疏廳日記)〉는 1596년 11월부터 1597년 3월 17일까지 친정(親征)을 주청하는 소를 올리기 위해 향론(鄕論)을 모으고 의사를 결정해 소(疏)를 올리는 과정이 자세히 쓰여 있어 당시 향론의 형성과정을 엿볼 수 있는 특이한 자료이다.

권말에는 경상도민(慶尙道民)에게 내린 교서(敎書)가 부기되어 있다.

 

출처 : 수산
글쓴이 : 군계일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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