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상도)

[스크랩] 흥양이씨 체화당 이야기

장안봉(微山) 2012. 12. 20. 12:20

 

 

 

 

 

 

명 칭 :  체화당(棣華堂)
소 재 지 :  상주시 청리면 가천리 659
(원소재지 :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가천리)
건 축 주 :  이신규(李身圭)
건축시기 :  1632년(숙종 14)
소 유 자 :  이병훈
문 화 재 :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78호


건축 배경
월간(月澗) 이전(李㙉)은 1558년생이고 창석(蒼石) 이준(李埈)은 1560년생이다. 나이 차이가 두 살인데 어려서부터 두 형제의 우애는 각별하였다. 학통상에서는 『주자서절요』를 전수한 서애의 적통이며 평생을 선비로 학문에 전심하였다.
42세에 두 개의 낙사계를 합계하는데 동참하였으며,1604년에는 수선서당을 중건하였고, 1606년에는 도남서원의 창설에 공을 세웠다. 55세 때인 1612년에는 정경세, 조찬한 등과 함께 집에서 매화를 완상하는 문회를 열었다.
1622년에는 5월에 연악서당에서 문회를 가지고 『연악문회록』을 남겼으며, 7월에는 낙동강에서 배를 띄우고 시를 짓는 임술범월행사를 가지면서 『임술범월록』을 남겼다.

위와 같은 행사에서 두 형제는 늘 함께 하였던 것이다. 특히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 의병을 모집하여 싸우던 중 모동의 백화산에서 일본군에게 쫒기게 되었을 때 동생이 갑자기 곽란을 만나 위험하게 되자, 형이라도 피신하여 살아가지고 집안의 대를 이으라고 하자, 형이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고 하며 동생을 업고 위기에서 탈출한 사실이 있을 정도로 두 분 간의 우애는 각별한 것이다.

우복 정경세의 문하에서 수학한 월간 이전의 셋째 아들인 이신규는 두 분의 우애를 생각하여 휴식공간을 마련하여 체화당이라고 한 것이다.


건축 특징
체화당은 높은 기단과 층고 그리고 처마선 때문에 큰 규모로 보이며, 가옥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누각이나 정자로 언급되는 경우도 있다. 협문에서 몇 단 내려와 물길이 지나고 마당으로 내려가는 계단과 체화당의 기단으로 오르는 계단이 만나며 재미있는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체화당은 목구조가 잘 드러나 보이는데 대청에서 대들보와 도리 서까래 등 다양한 부재가 드러나 있고, 측면의 벽에서도 가새 역할을 하는 부재까지 드러나 있어서 면구성을 해 놓은 듯하다. 전면에 걸쳐 구성된 툇마루는 측면에서 볼 때도 프레임을 만들며 대청에서 행랑채를 볼 때는 양측의 기둥이 보이게 되며 프레임을 더욱 극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외문을 통하여 들어가면 정면에 강당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주거가 가능한 방이 달여 있어서 당(堂)과는 구별이 간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동재(東齋) 역할을 담당하는 건물이 있다.
이 주거 공간에서 벗어나면 내삼문을 통하여 들어가면 사당이 있다. 그러니까 애초에는 앞의 주거건물만 있었는데 훗날 사당을 짓게 된 것이다.
월간사당인 체화당과 이곳에서 약 500미터 북쪽으로 올라가면 창석사당이 있는데, 창석사당도 체화당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건축 구성
체화당은 정면 4칸이며, 측면 2칸 반의 팔작지붕이다. 외문을 통해 들어가면 체화당이 있고, 체화당 뒤에는 월간사당이 있다. 월간사당은 정면 3칸이며 측면 한 칸 반이다.
창석사당은 월간사당과 구조가 같으넫 대문채는 정면 5칸인데 좌측에서부터 문간방, 대문간, 고방, 방, 부엌의 순서로 되어 있었으나 대문간은 전면 쪽을 토벽으로 막고 고방은 전면을 개방하여 마루로 개조하였다.

 

관련이야기
- 월간과 창석 두 분의 우애는 아주 각별하다.
월간과 창석 두 분의 우애는 아주 각별하다. 월간선생은 1558년에 출생하고 창석은 1560년에 출생하여 어릴때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 쫓고 따르며 희롱하면서 놀다가 조금 커서는 같은 스승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산사에서 독서하며 잠시라도 서로 따르지 않을 때가 없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하늘이 주는 큰 재앙을 맞이하였으나 친척도 드물다보니 오직 두 사람이 천명으로 하여 서로 의지하였던 것이다. 1593년 봄에 창석 선생은 월간 선생을 따라서 현재는 모동지역인 중모현(中牟縣)에 있는 고모담(錮鉧潭)에서 군대를 일으킨 상의군(尙義軍)의 향병소에 있었다. 그때 왜적이 들이닥쳤는데 창석선생은 토사곽란이 갑자기 일어나서 형인 월간성생에게 “나는 병으로 죽게 되었으니 형님은 빨리 이곳을 벗어나서 선조의 제사를 받드십시오”라고 하니, 형은 창석 선생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예전에 형제가 서로 내가 죽겠다고 한 일도 있었는데 내가 어찌 혼자 살겠다고 너를 버리고 갈 수 있겠느냐?”라고 하면서 창석 선생을 업고 백화산으로 올라가서 모두 위기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훗날 창석 선생이 중국에 서장관으로 가서 위와같은 사실을 중국의 화공에게 이야기 하니 그들이 감동이 되어 그림을 그려 주었는데 그 그림에다가 서문과 시문을 넣어서 ≪형제급난지도(兄弟急難之圖)≫를 만들었다.

또 계묘년과 갑오년 두해에 흉년이 들어 굶주림이 심하였는데 월간과 창석 두 분은 한 집에서 같이 살면서 고락을 같이 하면서 기근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동생인 창석 선생이 도와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월간 선생은 “우리가 집안을 보전하고 자손들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너희들의 숙부의 은혜이니 너희들은 숙부 섬기기를 마땅히 나를 섬기는 것과 같이 하라”라고 자제들에게 훈계하시며, “형제간의 우애의 돈독함이 누가 우리 형제와 같은 사람이 있겠는가?”라고 하신 것이다.

이에 월간과 창석의 자제들은 사촌간이지만 서로가 형제처럼 우애롭게 지내며, 선대(先代)의 우애를 아랫 대에까지 이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관련인물
- 이 전 (李 㙉)
1558(명종 13)∼1648(인조 26).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숙재(叔載), 호는 월간(月磵). 수인(壽仁)의 아들이다. 동생 준과 함께 류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퇴도(退陶)의 학설을 배워 주자서(朱子書)를 전심으로 공부하였다.
임진왜란 때 준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적중에 포위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동생을 등에 업고 적진 탈출에 성공하여 형제가 무사할 수 있었다. 뒤에 준이 감복하여 화공을 시켜 이 모습을 그리게 하고 〈급난도 急難圖〉라고 하니, 당시의 명공·거경들이 이 일을 가영(歌詠)하였다고 한다.
1603년(선조 36) 사마시에 합격하여 세마를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 때에는 지례현감을 제수받았으나 사퇴하였다.
42세에 두 개의 낙사계를 합계하는 데 동참하였으며,1604년에는 수선서당을 중건하였고, 1606년에는 도남서원의 창설에 공을 세웠다. 55세 때인 1612년에는 이준, 정경세, 조찬한, 김지복, 정호선, 전이성 등과 함께 집에서 매화를 완상하는 문회를 열었고, 1617년에 옥성서원에서 강회를 열 때는 임숙영, 고인계, 최현 등 많은 분들이 모이게 되었다.
1622년에는 5월에 연악서당에서 문회를 가지고 연악문회록을 남겼으며, 7월에는 낙동강에서 배를 띄우고 시를 짓는 임술범월행사를 가지면서 임술범월록을 남기었다. 상주의 옥성서원(玉城書院)에 배향되었다.
- 이 준(李埈)
1560(명종 15)∼1635(인조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숙평(叔平), 호는 창석(蒼石). 조년(兆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탁(琢)이고, 아버지는 수인(守仁)이며, 어머니는 신씨(申氏)이다.
류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1582년(선조 15) 생원시를 거쳐 1591년(선조 24)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이듬 해 경상도도사가 되었으며, 이 때 중국 역대 왕들의 덕행과 신하들의 정사(正邪)를 밝힌 ≪중흥귀감 中興龜鑑≫을 지어 왕에게 바쳤다. 당시 정인홍(鄭仁弘)이 세력을 키워 많은 사람들을 주변에 모았으나 가담하지 않았다.
1597년 지평이 되었으나 류성룡(柳成龍)이 국정운영의 잘못 등으로 공격을 받을 때 함께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같은 해 가을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군비를 정비하는 등 방어사(防禦使)와 협력해 일하였다. 이어 예조정랑·단양군수 등을 거쳐, 1603년 수찬으로 불려 들어와 형조와 공조의 정랑을 거쳤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했고, 조도사(調度使)에 임명되어 곡식을 모았으나 화약이 맺어지자 수집한 1만여 섬의 군량을 관에 인계하였다. 이 공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628년 승지가 되고 1634년 대사간을 거쳐 이듬 해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선조 대에서 인조 대에 이르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국방과 외교를 비롯한 국정에 대해 많은 시무책(時務策)을 제시했으며, 정경세와 더불어 류성룡의 학통을 이어받아 학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남인세력을 결집하고 그 여론을 주도하는 중요한 소임을 하였다. 상주의 옥성서원(玉城書院)과 도남서원에 배향되었고, 풍기의 우곡서원(愚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창석집≫을 남겼으며, ≪형제급난지도 兄弟急難之圖≫를 편찬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상주 > 남동권 > 청리면 가천리
- - 서산의 유래
리면과 공성면 그리고 외남면에 걸쳐 있는 509m의 산이다. 옛 청효현[청리]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산이라고 했다. 이 산이 홍수로 떠내려 가는 것을 보고 어떤 여인이 놀라 고함을 지르자 산이 멈추어 섰기 때문에 서산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가 왜군을 쫒아 묘향산에서 내려 오다가 이 산에 잠시 머물 때,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꽂은 후 이 지팡이에서 싹이 나서 크게 자라 나무가 죽으면 내가 죽을 줄 알라고 하였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 유천의 유래
영숙골 마을의 북쪽과 안골 마을 남쪽에 있는 마을 뒷산이 닭의 형상이고 또 닭이 마을 앞 시냇물을 먹는 형상이라고 하여 닭내[달래]라고 하며, 이것을 한역하여 유천(酉川)이라고도 부른다. 행정 구역상으로는 가천(佳川)1리이다. 서산의 아래 이수(伊水)의 위에 있다.

달래라는 말은 산의 옛말이 달이다. 그러므로 달내는 ‘산의 내’가 된다. 또 ‘달 내 고개’를 ‘도장 골 고개’라고 한 것으로 보면 이곳은 ‘산의 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 가천
1880년 달래에 살던 선산김씨들이 마공천 하류와 가천이 접하는 북동쪽 시냇가에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그 후로 이곳에 마을을 형성한 곳이다. 원래는 청남면에 속했는데 1914년 유천과 부담 그리고 사계리를 합하여 가천리라고 하여 청리면에 편입시켰다.

- 숭례묘가 있다
가천리 211 - 2번지에 영숙골에서 남쪽 150m 지점 산기슭에 선산김씨으 재실이 있다. 그 재실은 가운데 마루방 한칸과 좌우로 온돌방 1칸을 둔 3칸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이다.

- 창석선생의 사당과 묘
가천리 650번지에 창석사당이 있다. 1986년 12월에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자료 제178-2호로 지정되었다.
사당에서 왼쪽으로 약 50여보 서산에 올라가면 묘가 있는데 묘역은 약 50평이며 망주석, 무인상, 비석 등이 있다. 한편 달래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창석선생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 조암과 수옥대
조암은 달래 서쪽에 있는데, 구유처럼 생겼다고 하여 조암(槽巖)이라고 하고, 창석 선생이 남긴 시도 있다.
수옥대는 달내 마을 위에서 흐르던 두 골짜기 물이 하류 100여보 위치에서 만나는데 여러 가지 모양을 한 돌이 서로 뭉쳐서 자연스런 대가 되었으니 수옥대(漱玉臺)라고 한다.

출처 : 수산
글쓴이 : 군계일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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