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상도)

[스크랩] 풍양조씨 오작당 이야기

장안봉(微山) 2012. 12. 20. 12:21

 

 

 

 

 

 

 

 

 

 

 

 

 

 

 

명 칭 :  오작당(悟昨堂)
소 재 지 :  상주시 낙동면 승곡리 132-2
(원소재지 : 상주시 낙동면 승곡리 132-2)
건 축 주 :  조대윤(趙大胤)
건축시기 :  1661년
중건시기 :  1781년
문 화 재 :  경상북도지정 민속자료 제32호, 1982년 2월 24일 지정

건축 이야기
상주에서 선산으로 가기 위해서 거동을 지나 굴티고개를 넘어서 옥류정을 지나서 조금만 가면 길가 오른쪽에 오작당이 있는데, 흰자갈이 깔린 마당은 담벼락에 피어난 온갖 꽃들과 어울려 한가롭다. 일자형 구조로 좌측은 마루와 방이 중문 건너편에는 행랑채가 있다. 전형적인 안채모습. 수더분하면서도 범접이 용이치 않을 듯한 기운이 서렸지만, 사람이 사는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훈훈함이 전해온다. 우측 아래에 부엌을 내고 위에는 다락, 5칸중 3칸을 마루가 차지하고. 우측에는 방을 내었다. 좌우측을 돌출시켜 맞배지붕으로 마감하여 마치 工자형 구조 같다. 앞쪽은 가묘, 뒷편 지붕만 보이는 건물은 조정 선생 위패를 모신 불천위 사당이다.

건축 특징
겹집과 홑집이 공존하는 형태로, 안채는 겹집이며 본래 좌우에 익사가 있었으나 없어졌다. 부재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조각, 기둥의 모접과 부엌의 판문, 격자창 등이 고식의 중후함을 보이며 보아지와 장혀받침에 파련각(波蓮刻)이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보이나 양편이 익사처럼 된 지붕으로 용마루 모양이 ‘H’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인근에 있는 상주 양진당(養眞堂)의 원초형이다. 부재의 세장한 조각, 기둥의 모접과 격자창 등은 고식의 중후감을 더한다. 현재는 안채, 사랑채, 사당 등 3동이 남았다. 건축물의 일부 수법이 옛 양식을 간직하고 있고 인근 양진당보다 오래된 건물로 추정되어 주목받고 있다.

현판
오작당(悟昨堂)
구당(舊堂)

 

문중 이야기
- 풍양조씨 사천파(思泉派) 사백년의 면모
입재(立齋) 조대윤(趙大胤)의 후손을 사천파(思泉派)라 한다. 대대로 학문과 덕행을 숭상했고 홍유석학(鴻儒碩學)을 많이 배출하였으며 효우를 가규(家規)로 하며 가문의 명성을 크게 드높힌 분들이 많았다. 유집이 있는 분이 17명이며, 문과급제한 분이 4명이며, 생진시에 합격한 분이 2명이다. 특히 구당(舊堂) 조목수(趙沐洙)는 퇴계학통의 큰 흐름을 이은 대유학자로 명성이 높으며, 창석(蒼石) 이준(李埈, 1560~1635)이 최초로 편찬한 상주의 역사서라 할 『상산지(商山誌)』를 속록(續錄)하였다. 입재 조대윤의 자손은 현재 그 수가 1,500여명에 이른다.


관련유물
- 풍성세고(豐城世稿)
1921년 조현구(趙顯九), 조남각(趙南珏)이 선조들의 유고들을 한데 모아 편집 간행하였다. 총20권으로 여기에는 조정(趙靖)의 『검간선생일고(黔澗先生逸稿)』, 조영원(趙榮遠)의 『유담공고(儒潭公稿)』, 조릉(趙稜)의 『모암공고(慕菴公稿)』, 조대윤(趙大胤 )의 『입재공고(立齋公稿)』, 조시경(趙時經)의 『중애공고(中厓公稿)』, 조석룡(趙錫龍)의 『만낙재공고(晩樂齋公稿)』, 조석철(趙錫喆)의 『정와공고(靜窩公稿)』, 조석목(趙錫穆)의 『정사공고(精舍公稿)』, 조목수(趙沐洙)의 『구당공일고(舊堂公逸稿)』, 조학수(趙學洙)의 『가은공고(可隱公稿)』, 조상덕(趙相悳)의 『위재공고(危齋公稿)』, 조동좌(趙東佐)의 『총계공고(叢桂公稿)』 등이 포함되어있다.

상주 > 남동권 > 낙동면 승곡리
- 상주시의 동단에 위치하며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의성군, 구미시, 상주시 중동면에 접하고, 서쪽은 국사봉을 경계로 상주시 동성동, 신흥동과 인접하고 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 때 외동면과 장천면이 병합됨에 따라 낙동강의 이름을 따서 낙동면으로 개칭했다.
양진당이 소재한 승곡리는

- 승곡리(升谷里)
원래 장천면 지역이며 勝長寺가 있었으므로 "승장골" 승장곡(勝長谷) 또는 "승장"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언상(言上), 언중(言中), 언하(言下), 제동(齊洞), 요포(繞浦), 통사(通仕), 옥곡(玉谷), 송천(松川), 승상(升上), 승중(升中), 승하(升下) 등 여러 마을을 병합하고 승곡이라 개칭하였다.

- 양진당(養眞堂), 요포(繞浦)

처음은 요포라 했으나 인조 4년(1626)에 건립한 지방문화재 85호인 양진당을 짓고 나서 마을 이름도 양진당이라 부르게 되었다.

- 옥가실, 옥곡(玉谷)

이 마을은 청주한씨가 임란 때 이곳에 후 그대로 정착 한 마을로 마을 뒷산에는 큰 바위들이 많고 바위 사이로 항상 맑은 물이 있으며 마을이 들어서 있는 터에도 옥같이 생긴 바위들이 많이 깔려 있다.

- 퉁사동, 통사동(通仕洞)

이 마을에는 일제 초엽 용포오리원의 관아를 뜯어 와서 영효재란 재실을 지었는데 그때부터 마을이 이루어졌고 마을사람들 은 양진당의 선비들과 잘 통한다는 뜻으로 마을 이름이 통사동(通仕洞)이 되었다.

- 승장(勝粧)

고려 말기에 승장사(勝粧寺)란 절이 있었기 때문에 승장으로 불러지게 되었으며 윗 승장과 아래 승장이 있다.

참나무진

일제 때 상산김씨가 은거하여 살면서 개척한 마을로 일대에 참나무가 잘 자라고 참나무 그늘이 좋아서 마을 사람들이 그늘을 정자삼아 모여 논다 하여 마을 이름이 참나무 정이 되었다 한다.

 

 

입재 조대윤선생

성명 : 조대윤(趙大胤) , 1638년 ~ 1705년
본관 : 풍양(豊壤)
: 계창(季昌)
: 입재(立齋)
출생지 : 상주
출신지 : 상주
분묘지 : 상주 갑장산 동록
증직및기타 : 통덕랑(通德郞)
태몽, 생활 등
조대윤(趙大胤)의 본관은 풍양이다. 자는 계창(季昌)이며, 호는 입재(立齋)이다. 아버지는 성균진사 릉(稜)이며, 어머니는 개성왕씨(開城王氏) 준도(遵道)의 따님이다. 1638(인조 16) 4월 20일 상주의 자택에서 태어났다.

부모를 잘 섬겨 부모가 편안하게 여겼고 작은 아들이기 때문에 세간을 나서도 항상 부모한테 와서 살았다. 맛있는 음식을 잘 익히어 봉양을 깨끗이 하였다. 그 부인 김씨 또한 현능하여 뜻을 받들어 잘 이행함에 어김이 없었고, 모든 수요 되는 일이 있으면 먼저 공급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가문이 안팎으로 조용하여 마치 사람이 없는 것과 같았다.

부친에게 이상한 병이 나서 다방면의 치료를 하였으나 효과가 없었다. 밤이 되면 으레 가마에 모시고 집 주위를 돌기에 날을 새웠는데 이와 같이 몇 해를 하는 동안에도 부축해 드리기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아니하고 하루같이 하면서 응대하고 쾌적하게 해드림에 반 걸음도 후퇴하는 적이 없었다.

그리고 틈이 나면 부부가 함께 재계하고 밤낮으로 기도를 하였다. 얼마 후 꿈에 신령이 찾아와 약을 일러주므로 그 밤으로 수십 리 길을 달려가 의원에게 물었더니 의원의 말도 합치되기로 드디어 한 차례의 보약으로 낫게 되었다.

부모를 낙동강 동쪽에 장시지내고 나서는 조그만 별장인 봉황대를 영건하여 서로 마주 바라보게 하고 아들이 장성했기 때문에 그 집안 살림을 맡기면서 말씀하기를「제사와 손님에 대한 일이 아니면 나를 관련시키지 말라」하였다.
별장 남쪽으로 큰 소나무 몇 그루가 있는 곳에 나아가 그 아래를 공략하여 망송정이라 하고 날마다 찾아가 배회하면서 친산을 바라보며 사모하였다.

진즉부터 허약한 데다가 또 상제 노릇하기에 손상을 받았기 때문에 드디어 쇠약증세에 걸려 밥을 먹지 못한 지 수십 년이었다.
숙종 31년 여름에 병이 더욱 깊어갔다. 조카 연(淵)에게 가 있다가 얼마 후에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 그 자녀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병이 들었다. 여기는 내가 죽을 자리가 아니다. 자리를 잃을라. 빨리 나를 집으로 돌아가게 하라.」하였다. 좀 우선 할 때까지 기다릴 것을 청하니 웃으면서 말씀하기를「우선해질 수 있겠느냐. 나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여기에 머물러 있다가 나를 곤란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하였다. 이에 함께 가마에 모셔 뜰 아래로 내려오니 말하기를「나에게 의관을 갖추게 하고 또 나를 땅위에 내려놓고 사당 쪽으로 향하게 하라. 내가 마지막으로 하직을 해야겠다. 나는 다시 여기에 오지는 못한다.」하고 땅에 엎드려 두 번 머리를 조아리고 나서 숨을 거두었다.

 

가족이야기

: 조영원(趙榮遠)
생부 : 조릉(趙稜)
: 개성왕씨(開城王氏) 준도(遵道)의 딸
형제 : 조계윤(趙啓胤)
집안 이력, 가족 이야기 등
-조릉(趙稜)
1607년(선조 40)~ 1683년(숙종 9). 자는 자방(子方)이며, 호는 모암(慕庵)이다. 대윤의 아버지이다.
자품이 후중하여 어려서부터 이미 어른스런 기국과 풍도가 있어 12세에 모친상을 당했을 때, 슬퍼하기를 성인과 같이 하였다. 장성하자 문학에 뜻을 돈독하게 하여 탐구와 토론을 좋아하고, 수불석권하니 문예가 빨리 성장하여 대소 향시에는 우등하기 8․9회하였으나, 예조의 복시에 불리하니 그때의 의론들이 억울하다 하였다.

상주목사가 명성을 듣고 어떻게든지 도와주고 싶던 처지에 마침 좌도시원(左道試院)에 부시(赴試)하게 되었는데, 재하(在下)함으로 해서 마땅히 좌도(左道)에 부거(赴擧)하기를 피해야 할 것이므로 공첩(公帖)을 작성하여 주었으나 가지 아니하니 목사가 돌아와서 나무라기를, “그대만이 지금 세상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어찌 이처럼 고집스런고?” 하였다.

상주 목사로 오는 사람들이 명망 있는 사람 들이 많았는데 오는 이 마다 인정하여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고 또 말하기를, “이 다음에 서울에 오거든 꼭 찾아달라.”하였으니 그 사람들이 서울에 가서는 상계하여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도 과거 일로 해서 상경은 하였으나 찾아보지 아니하였다.

어머니상을 당하고 나서 아버지가 재취하지 않고 소실을 두고 지냈는데 공이 한뜻으로 순종하여 거역하는 일이 없이 하니 집안이 흡연히 화목하였다. 경진년에 아버지의 상을 당함에 슬퍼하기 거의 실성할 정도였고 치장이나 장제를 예법대로 넘치지 않게 하였으며, 새로이 산소 자리를 잡아 돌아간 모부인을 이장 합부하였다. 서제 8 명과 누이동생 1인이 3인의 어머니에게서 나왔고 모두 성인이 되기 전에 모친을 조실하였는데, 잘 어루만지고 거두어 더불어 침식을 함께 하면서 잘 교도하고 제 때에 혼가를 시켜 그들로 하여금 설 곳을 잃지 않게 하였다.

갑오년에 비로소 사마(진사)가 되었으나 진취에는 서두르지 않았으며 살아 오는 요포의 사당 아래에 집 한 채를 지어 사우당(四友堂)이란 편액(현판)을 달고 새벽이면 사당에 뵈옵고 나서 시와 술로 스스로 즐겼는데 찾아오는 손님으로 출입문에는 언제나 신발이 가득하였다.

만년에는 사천에다 조그만 재실을 짓고 그곳에서 일생을 마치려는 계획을 세웠다.

부인은 개성왕씨(開城王氏)이니 고려왕족이요 부호군(副護軍) 준도(遵道)의 따님이다. 성품이 온화하고 유순하여 내치를 잘하였고 봉제사 접빈객이며, 부당에서 처신하고 이웃과 대하는 범절을 모두 알맞게 하였다 시부모들이 평소에 부인에게 간엄하여 두 번 다시 말하지 않았는데도, 서제매를 자신이 낳은 것 같이 길러내니 모두 감탄하여 친어머니 같이 우러러 보았고 부인이 돌아갔을 때 전염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치상에 심력을 다하였다.

 

학문이야기

학파 : 퇴계 학파
스승, 배움 이야기 등
어려서부터 학업에 힘써 사부(辭賦)를 전공하였는데, 장성하여서는 한 두 편만 읽고서도 대의를 통달하였으며, 번거롭게 시키지 않아도 부지런히 하여 조금도 싫어하지 않았다.

소학(小學)과 사서와 여러 경전을 베껴 외우지 않은 것이 없이 깊이 빠져들어 좋아하였다. 가끔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잠자기를 잊고 탐구하였다. 매번 말하기를, “소학과 대학은 성현이 되고, 덕에 들어가는 기초이다.” 라고 하여 스스로 힘써 탐구하였으며, 다른 사람에게도 힘써 권하였다. 항상 조그만 병을 책상 밑에 두고 글을 한 번 읽을 때마다 콩을 한 알씩을 넣어 병이 차는 것으로 척도를 삼았다.

사위인 이사인(李思仁)에게 글을 보내기를, “지금 사위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꼭 토지나 노비 같은 재산을 별도로 주는데, 나는 한권의 대학을 준다. 이 서적의 내용은 하나의 경(敬)이지만 시행되는 것은 넓어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에 이르기까지 실리지 않은 것이 없다. 효를 응용하여 충을 하는 것도 모두 여기에 있다.” 고 하였다.

향시는 응시하여 오다가 부모가 돌아간 후로는 그만 두었다. 그리고 사서(四書)를 취하여 날마다 송독하고 익혔으며, 퇴계와 한강 등 몇몇 군자들의 아언(雅言)과 상제(喪制)에 관한 여러 학설을 손수 베껴 권질을 이루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단해하고 섬실하여 참고하는 데에 좋은 척도가 되었다.

여러 서적에서 발췌하여 이름 지은 계치록(戒癡錄)과 동현의례문답(東賢疑禮問答) 1질이 있으며, 문장을 짓는 데는 말의 뜻이 잘 전달될 수 있게 쉬운 방법을 취하고, 어려운 문구는 숭상하지 않았으며, 시를 지은 것도 또한 깨끗하여 우아한 흥취가 있다.

 

저작이야기

집필,편찬 이야기 등
《풍성세고(豊城世稿)》는 풍양조씨(豊壤趙氏) 조정(趙靖), 조영원(趙榮遠), 조릉(趙稜), 조대윤(趙大胤)등의 시문집이다. 1921년 후손 조현구(趙顯九), 조남각(趙南珏)이 함께 편집, 간행하였다.

《풍성세고(豊城世稿)》권 2에 입재공고(立齋公稿) 로 구성되어 있다. 문집의 양은 그다지 많지 않다. 문집은 시, 만사, 서(書),제문, 잡저, 행록, 부록의 순서로 편집되어 있다.

조정(趙靖)
1555년(명종 10)∼1636년(인조 14). 자는 안중(安仲)이며, 호는 검간(黔澗)이다. 광헌(光憲)의 아들이며, 한강(寒岡) 정구(鄭逑) 및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문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다. 1599년 천거로 참봉(參奉)이 되고, 1603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1605년 좌랑(佐郞)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公州)까지 호가(扈駕)하였으며, 경술(經述)과 문장에 뛰어났다.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고, 의성(義城)의 속수서원(速水書院)과 상주(尙州)의 추원당(장천서원(長川書院))에 배향되었다.

조영원(趙榮遠)
1577년(선조 10)∼1640년(인조 18). 자는 경장(景長)이며, 호는 유담(儒潭)이다. 아버지는 정(靖)이며,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 극일(克一)의 딸이다. 지기(志氣)가 굳세고 덕행(德行)과 도학(道學)에 있어 남달라 남방의 여러 선비들이 그를 매우 중히 여겼다고 한다. 종사랑(從仕郞)에 제수되었다.

조릉(趙稜)
1607년(선조 40)∼1683년(숙종 9). 자는 자방(子方)이며, 호는 모암(慕菴)이다. 영원(榮遠)의 아들로 1654년(효종 5)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그는 덕행이 준수하여 주위에서 장차 향리를 짊어질 중요한 인물이라고 칭송하였다.

조대윤(趙大胤)
1638년(인조 16)∼1705년(숙종 31). 자는 계창(季昌)이며, 호는 입재(立齋)이다. 릉(稜)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이 병환 중에 있을 때 지극 정성으로 봉양하였다. 오작당을 현재의 자리에 옮겨지었다. 통덕랑(通德郞)에 제수되었다.

출처 : 수산
글쓴이 : 군계일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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