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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1102번지에 위치한 이 종택은, 서애 류성룡의 셋째 아들인 수암(修巖) 류진(柳袗)이 37세에 가사리(佳士里)에 터를 잡은 데서 비롯되며 풍산류씨 우천파 종택으로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 낙파(洛波) 류후조(柳厚祚)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등 석학과 명공이 이 집에서 태어났다. 이 집은 속리산, 팔공산, 일월산의 지기가 모이고 낙동강과 위강이 합류하는 삼산이수(三山二水)의 명당지로 알려진 곳에 서 있다. 얕은 야산이 삼면을 둘러싸고 남쪽이 훤히 터져 멀리 낙동강이 바라보이고 강 건너 사모관복을 입고 당나귀를 타고 오는 형상을 한 나각산(螺角山)이 바라보이는 조망이 좋은 곳에 독가로 남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1986년 12월 11일 경상북도민속자료 제70호로 지정되었다. 후손 유영하가 소유, 관리한다. 이강정사(二江精舍), 우천세가(愚川世家) 또는 대감댁이라고도 불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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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1102번지에 위치한 이 종택은, 서애 류성룡의 셋째 아들인 수암(修巖) 류진(柳袗)이 37세에 가사리(佳士里)에 터를 잡은 데서 비롯되며 풍산류씨 우천파 종택으로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 낙파(洛波) 류후조(柳厚祚)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등 석학과 명공이 이 집에서 태어났다. 이 집은 속리산, 팔공산, 일월산의 지기가 모이고 낙동강과 위강이 합류하는 삼산이수(三山二水)의 명당지로 알려진 곳에 서 있다. 얕은 야산이 삼면을 둘러싸고 남쪽이 훤히 터져 멀리 낙동강이 바라보이고 강 건너 사모관복을 입고 당나귀를 타고 오는 형상을 한 나각산(螺角山)이 바라보이는 조망이 좋은 곳에 독가로 남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1986년 12월 11일 경상북도민속자료 제70호로 지정되었다. 후손 유영하가 소유, 관리한다. 이강정사(二江精舍), 우천세가(愚川世家) 또는 대감댁이라고도 불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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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년대 중기에 건축하였는데 이강정사(二江精舍) 또는 우천세가(愚川世家)라고도 한다. 전체적으로 ‘ㅁ’자형 몸채와 ‘ㄴ’자형 녹사청(祿事廳), ‘一’자형 사당채로 구성되어 있다. 정침(몸채)은 정면 6칸, 측면 6칸의 합각지붕 건물이다. 막돌로 쌓은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으며 ‘ㅁ’자형의 정면 6칸 규모이다. 안마당으로 드나드는 중간칸과 사랑방 부엌은 통칸으로 되어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에 이르는데 정면 4칸 중 왼쪽 2칸은 툇마루와 그 뒤쪽에 안방이 차지했고 오른쪽 2칸은 안대청이 자리 잡았다. 안방 왼쪽의 부엌은 마당 쪽으로 길게 3칸으로 만들었고 그 앞에 마루를 깔아 놓은 고방과 흙바닥 고방을 한 칸씩 만들어 앞채인 중간칸에 닿게 했다. 고방 지하에는 광을 만들어 계단을 통해 부엌으로 드나들게 했다. 안대청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대청 오른쪽에는 마루방과 상방을 각 1칸씩 배치하였는데 마루방은 바닥을 45㎝ 가량 들어 올려 누마루같이 만들었다. 녹사청은 7칸이며 ‘ㄴ’자 모양 정면 4칸, 측면 4칸의 우진각지붕 집이다. ‘ㄴ’자로 꺾어지는 부분에 설치된 부엌 1칸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방 1칸, 마루방 2칸을 배치했고, 동쪽에는 온돌방 2칸과 마루방 1칸을 꾸몄으며 ‘ㄴ’자의 안쪽으로 쪽마루를 돌려서 다른 방들과 연결되게 했다. 이 녹사청은 주인의 비서가 기거하며 녹봉을 지고 오는 지방 관리들을 영접하고 쉬어가게 하던 특별한 역할을 담당한 건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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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정사(二江精舍) |
수암종택의 또 다른 이름이다. 낙동강과 위강이 합쳐지는 곳에 지어진 집이라는 뜻이다. 마루 오른쪽 방문 위벽에 걸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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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씨 집안의 '백비탕'(白沸湯) |
맹물을 끓인 것을 점잖게 표현하면 백비탕이 된다. 조선시대 선비집안에서 손님접대를 할 때, 밥상에다가 반드시 국(羹)을 올려놓는 것이 예법이었다. 그러나 형편이 어려워 국을 마련할 수는 없고, 접대는 해야 하는 상황에서 궁여지책으로 올려놓는 탕이 바로 백비탕이었다고 한다. 대원군이 안동김씨에게 밀려 지방을 떠돌아다닐 때였다. 대원군은 사람 욕심이 많아서 그 지방에 인물이 있다는 소문이 있으면 찾아가 만나보곤 하였다. 상주의 낙동(洛東)을 지나다가 청렴강직하기로 이름 높은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 1762-1834)을 만나게 되었다. 강고는 집을 찾아온 대원군과 만나 나라의 정세와 학문을 논한 다음에 밥 먹을 때가 되었다. 밥상에는 김치와 된장, 간장 한 종지, 보리밥, 그리고 백비탕이 전부였다. 백비탕이 올라간 밥상이었지만 강고는 부끄러움이 없었다. 며칠 동안 이 밥상을 받다가 대원군은 예정보다 빨리 작별을 고했다. 강고는 떠나가는 대원군에게 노잣돈을 쥐어주었다. 이 돈은 친정을 다녀온 강고의 며느리가 가져온 몇 푼 안 되는 돈이었다. 헤어져서 얼마쯤 길을 가다가 대원군은 달려오는 강고의 하인을 만났는데, "노자로 준 그 돈을 다시 돌려 달라"는 전갈이었다. 강고가 대원군을 보내고 난 직후에 강고의 사돈이 돌아가셨다는 전갈이 왔고, 사돈 부의금이 더 급했던 것이다. 이 일로 해서 대원군은 강고의 당당함과 청빈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후일 정권을 잡은 다음에 강고의 아들인 낙파(洛坡) 류후조(柳厚祚)를 중용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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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진(柳袗) |
1582(선조 15)∼1635(인조13).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자는 계화(季華)이며, 호는 수암(修巖)이다. 아버지는 영의정 성룡(成龍) 이다.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우고 1610년(광해군 2)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1612년 해서지방에서 김직재(金直哉) 의 무옥(誣獄)이 일어났을 때에 무고를 당하여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616년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뒤 다시 학행으로 천거되어 봉화현감 이 되었다. 수령으로 있으면서 전무(田畝)와 부세(賦稅)를 바로잡았다. 이듬해 형조정랑 이 되었는데,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원옥(寃獄)을 해결하여 판서 이서(李曙) 의 경탄을 샀다. 1627년에 청도군수 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수포장인(收布匠人)에 대한 보고에 허위가 있다 하여 파직되었다. 1634년 지평으로 있을 때 장령 강학년(姜鶴年) 이 당시 서인정권의 정책을 크게 비판하여 심한 논란이 일어났는데, 이때 그를 두둔하여 대간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고관대작을 역임하지는 않았지만 세신(世臣)의 후예답게 깨끗하고 성실하게 생애를 보냈다. 이조참판 에 추증되었으며, 안동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수암집(修巖集)》이 전한다. - 류심춘(柳尋春) 1762(영조28)~1834(순조34).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자는 상원(象元)이며, 호는 강고(江皐)이다. 류성룡(柳成龍)의 후손으로, 광수(光洙)의 아들이다. 발(潑)에게 입양되었다. 10세에 내형(內兄/외사촌형) 구당(舊堂) 조목수(趙沐洙), 가은(可隱) 조학수(趙學洙) 에게 수학하여 덕업을 스스로 세웠다. 18세에 향시에 장원하였으며, 25세(정조 10년, 1786년)에 생원복시(生員覆試)에 합격하고 27세에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 나아가 위기지학에 더욱 정하니 당세에 독행군자(篤行君子)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1795년(정조 19) 예조참판(禮曺參判) 이익운(李益運)과 좌승지(左承旨) 임제원(林濟遠)이 공의 경학(經學)과 행의(行誼)를 왕에게 천거하니 왕이 전벽(殿壁)을 돌아보며 "류심춘의 이름은 익숙하게 듣고 기록해 두었다"하고 구전으로 돈용교위용양위부사용(敦勇校尉龍驤衛副司勇)을 특명하였으며 익년 2월에 승정원 가주서(承政院 假注書)를 제수하였다가 다음날 장사랑 효릉참봉(將仕郞 孝陵參奉)을 제수하였다. 1797년 장수현감(長水縣監)이 되어 교숙(校塾)을 수축하여 유학을 부흥시키고 향약을 만들어 풍속을 바로잡았다. 1798년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승자(陞資)되고 원자궁(元子宮)강학청(講學廳)의 요속(僚屬)에 선발되어 청양현감(靑陽縣監)으로 전임되었다. 1800년 정월(正月) 원자(元子)의 관례(冠禮)와 책례(冊禮)를 병행함에 특명으로 어모장군 세자익위사 우익위(禦侮將軍 世子翊衛司 右翊衛)가 되었으며 1811년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를 제수받고, 익년 4월 세자(翼宗) 책봉시 다시 익위사 좌익찬(翊衛司左翊贊)이 되어 6월의 동궁상견례(東宮相見禮)와 7월의 책례(冊禮)에 참여하였다. 1815년에 의성현령이 되었다가 익년 7월에 사임하였으며1829년 王世孫(헌종) 책례시(冊禮時) 위종사좌장사(衛從司左長史)를 제수받았고 1830년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에 승진되었다. 1832년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올랐으며 1841년에 청백리로 뽑히고, 1854년(철종 4) 아들 후조(厚祚)가 급제하였으므로 다시 통정대부에 올랐다. 1847년 장수군 장계면 송천리 도암서원(道巖書院)에 봉향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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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반도이다. 남쪽은 낙동면, 서쪽은 낙동면과 상주시 동문동, 사벌면이 접한다. 동남으로는 대구 팔공산에 원류를 두고 낙동강에 합류되어 유명한 합강봉이란 이름을 남겼으며, 합강봉의 부근에는 봉황성 및 양처사굴이 있다. 동쪽은 의성군 다인면과 단북면, 단밀면이 접하고, 북으로는 건지봉이 우뚝 솟아 황금의 준봉(峻峰)을 격(隔)하여 예천군 풍양면과 인접되어 있다. 중동면은 신라 점해왕 때 중동으로 불렀다고 전한다. | |
낙동강과 위강으로 인하여 열한 곳의 나루를 통하여 내왕이 가능 하였으므로 역사적으로 외침이 거의 없었던 지역으로 인심이 순후하다. 1,600년을 전후하여 지역에 들어온 풍산류씨와 의성김씨 문중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된 선비의 고장이다. 수암종택이 있는 곳은 우천 또는 “우무실”로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동구에 낙동강과 위강이 합류하고 앞의 낙동강 건너에는 속리산에서 뻗어온 나각산이 솟아 있고, 뒤에는 일월산에서 남으로 내려온 비봉산이 둘러싸고, 옆에는 팔공산에서 뻗어온 토봉이 다가서 있는 가운데 강안에는 천인대, 봉황대, 관란대와 이어선 “벼루”그리고“용바위”등 기암과 같은 천혜의 경관이 있다. 이에 더하여 송암정,타맥대, 합강정, 계정, 독송정과 봉황성 등이 쌓이고 세워져서 인걸과 지령을 실감하게 한다. 원래 우물, 우무실, 우물곡으로 불려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가사리 사동과 단남면의 정곡을 병합하여 우물(遇勿)을 우물리(于勿里)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물리를 구성하는 마을은 다음과 같다. - 우무실 임란 시 남원양씨가 처음 정착하였고 그 후 풍산류씨가 정착하였다, 처음지명은 우천이라 하였으며 “작은마”, “큰마”로 나누어져 있고 안에는 “안골”이 있고 서북쪽에는 마곡이 있고 “작은마”북쪽에는 “범갈미”가 있으며 “물댕이”에는 작은 나루가 있어 물량과 내왕하고 “샘디”와 “재궁”에도 “나루”가 있어 강 건너와 통하고 있다. 이 우무실에 낙파 류후조가 세거한 강산고택이 있는 좋은 마을이다. - 뱀 골(뱀골, 사동) 우무실 북쪽에 있는 마을로 말지천의 북서쪽에 있는데 의성군 다인면 산내리와 경계를 이룬다. 강과 산이 모두 길게 뻗어 흐르므로 지형을 따라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 가 실 동쪽에 유정이 있고 서쪽에 서당골이 있으며 뒤에 자리가 있는 가운데 위강이 연하여 마을이 형성 되었다.이지명은 150여 년 전에 마을에 서당이 있어 훌륭한 선비가 많이 배출 된다고 하여 가사리라 하였다. - 사곡, 사대 속칭“셋대”, “셉디”이다. 임란 후 성산이씨와 남원양씨가 정착하여 세거 하였으며 낙동강과 위강이 합류되는 넓은 강변에 옛날에 모래 언덕이 쌓였다 하여 사대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하며 일설에는 이곳이 잡목의 밀림지대인 관계로 각종 새떼가 많이 모여 부락민들이 새떼골 이라고 부르던 것이 변음 되어 샘디로 불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 솥 골 정곡 “솥골”이다.1592년 임란 때 밀양박씨가 정착하여 조선 솥을 만들던 곳으로 지금도 자취가 남아 있으며 솥골 혹은 정곡이라 하며 대구팔공산이 원류인 위강의 하구에 위치하고 있다. “솥골나루”에서 “쉰등골”로 내왕 한다.이 진두에 우암이 있는데 검간 조정의 별업이라 한다. |
낙파 류후조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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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자는 재가(載可)이며, 호는 매산(梅山), 낙파(洛坡) 또는 영매(嶺梅)이다. 서애 류성룡(柳成龍)의 8대손이며, 수암(修巖) 류진(柳袗)의 주손으로 돈령부도정(敦寧府都政)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의 아들이다. 1798년(정조 22) 안동의 고성이씨(固城李氏) 종택인 임청각(臨淸閣) 우물방에서 태어났다. 이 우물방은 약봉(藥峯) 서성(徐渻1558~1631)과 류후조(柳厚祚) 그리고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1858~1932)을 포함한 9명의 독립유공자가 태어난 명당이라 하는 곳이다. 1837년(헌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60세 되던 1858년(철종 9) 별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고, 장수, 장흥부사를 역임하였다. 영상(領相) 김좌근(金左根)의 추천으로 공조참의(工曹參議), 승정원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를 역임했다. 이어 형조참판(刑曹參判),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1864(고종 원년)에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이조참판(吏曹參判), 공조판서(工曹判書)를 거쳐, 1866년(고종 3) 우의정에 이르렀다. 그 해 가례책봉주청사(嘉禮冊封奏請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중국에 와있는 서양인들의 동태를 보고하였다. 병인양요 때에는 상주에 살던 아들 주목에게 의병을 일으키게 하였다. 1867년 좌의정(左議政) 올랐으며, 1872년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로 퇴임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
가족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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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정월 고종이 류후조(柳厚祚)를 우의정에 임명하면서 내린 교서의 첫 마디는, "대관령 남쪽은 본디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일컬어진 곳이며, 더욱이 경은 '경의 가문' 사람이다. 내가 경을 시험해 보고 경험해 보았으니, 꿈을 꿀 것도 없고 점을 쳐 볼 것도 없이 나의 재상은 이미 결정 난 것이다." 라 하였다. '경의 가문'이라고 한 것은 영남의 대표적 명문인 류성룡(柳成龍) 가문이라는 뜻이다. 고종이 류후조를 재상으로 삼으면서 제일 먼저 강조한 것이 그가 영남의 명문 집안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 이후 남인들은 권력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었고, 특히 안동 김씨 등 서울의 노론 유력 가문들이 권력을 독점하던 19세기 전반 세도정치 하에서 남인들은 관직에 오르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류성룡이 재상이 된 이래 영남사람으로서는 270여년 만에 두 번째 재상이 탄생한 것이다. 지방 출신 남인으로서 재상이 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파격이었다. 류후조가 재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권력자이던 대원군의 의도 때문이었다. 대원군은 그동안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세력들, 즉 종친이나 남인, 북인, 무장들의 세력을 신장시킴으로써 노론 외척 가문들을 견제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
학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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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退溪)와 서애(西厓)의 학맥은 정경세가 상주 출신이고 류성룡의 셋째 아들 류진이 상주에서 살았기 때문에 상주지역에 그 학맥이 전해지고 있었다. 류후조의 부친인 류심춘은 처음 종숙부(從叔父) 류광렴에게 나아가 학업을 익혔으나 다시 정종로(鄭宗魯)에게 나아가 학문을 닦았다. 그것은 정종로의 6대조인 정경세가 류성룡을 통하여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아 '도산재전(陶山再傳)의 적(嫡)'(퇴계 제자인 서애의 제자 우복을 퇴계嫡統)이라고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종로가 류성룡의 학통을 이은 '우리집 학문연원(吾家淵源)'이라고 하면서 스승으로 모셨다. 그 후 류심춘과 류후조의 아들 류주목(柳疇睦)의 문하에는 안동의 학자들이 많이 출입하였다. 서애의 학문은 안동 하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학맥은 철저히 가학의 형식을 띠고 전수되었다. 서애가 일찍이 퇴계의 문하에 나아가니 “이 사람은 하늘이 낳은 인물로 장차 반드시 나라에 크게 쓰일 것이다.” 는 칭찬이 있었는데 박약(博約)하고 장경(莊敬)하여 마침내 그 도를 전하였다. 수암(修巖) 류진(柳袗)이 그 뒤를 이었고,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에게 다시 전하여 졌다. 그 후로 상주에서는 정종로(鄭宗魯)를 사사한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 에게로 이어진다. 류후조 역시 서애의 영향을 받은 가학의 전수 받음과 전수하는 큰 다리의 역할을 하였다고 하겠다. |
저작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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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창의록(戊申倡義錄)》 1874년(고종 11) 에 류후조가 목판본으로 5권 3책으로 편집, 간행한 책이다. 내용은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경상도에서 기병한 의병에 관한 기록을 모은 책이다. 구성은 경상도창의사적, 호소사조덕린사적, 소모사황익재사적 및 별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가 되는 것은 경상도무신창의사적으로 안동, 상주, 예천, 순흥, 영주, 의성, 예안, 풍기, 영천, 진보, 영양, 봉화, 용궁 등 13개 지역의 창의사적이다. 의병의 조직상황과 활동을 규정한 절목, 의병의 조직 과정, 난의 경과를 기록한 일기, 의병조직에 차여를 호소하는 통문과 격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외에 군령, 전령, 의병의 군량지원을 위해 각 지역의 원, 서당, 역원 등에서 보내온 쌀, 사환등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서술해 놓았다. 이 책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절목과 일기로서 절목은 장정의 의병참가를 의무적으로 하게 하였으며, 의병기피자는 엄한 규율로 다스리고 있다. 일기는 3월 15일부터 난이 평정되어 의병을 파하는 4월 7일 까지의 난의 발생과 의병조직, 통문의 수발, 난의 진행과정을 기록하였다. 순흥과 영주의 일기에는 다른 사료에는 나타나지 않는 구체적인 난의 진행과정이 기록되어 있으며, 정희량(鄭希亮)에 관한 내용도 있다. 별록은《감란록(勘亂錄)》 및 기타 읍지에서 관련기사를 옮겨 적은 내용으로, 안동, 상주, 영주, 예천 등지의 사인들의 활약을 기록하였다. 의병을 조직한 사람은 거의 전 관료이거나 지방의 유생들이 많으며, 향교나 서원, 서당 등에서 물자와 인력을 동원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
강고 류심춘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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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영조 38) ~ 1834(순조 34).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상주 우천에 살았다. 자는 상원(象遠)이며, 호는 강고(江皐)이다. 영의정 성룡(成龍)의 8대손으로, 수암 류진의 7대손이다. 광수(光洙)의 아들로 백부 발(潑)에게 출계하였다. 입재 정종로(우복 정경세 6대손, 불천위)의 문인이다. 일찍부터 학문에 침잠하여 이황(李滉), 류성룡(柳成龍), 정경세(鄭經世), 정종로(鄭宗魯), 류심춘(柳尋春)으로 이어지는 영남 성리학의 계통을 이어 나갔다. 성리학에 조예가 있었으며 병파(屛派)의 학통을 지켰다.《주자대전(朱子大全)》을 탐독하였고 시문에도 능하였다. 18세에 향시에 장원하였고 25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고, 학행으로 천거를 받아 세자익위사익찬(世子翊衛司翊贊)을 지내고 익위(翊衛)가 되었다. 1800년(정조 24) 왕에게 경연(經筵)에 힘쓸 것을 상소하였으며, 1830년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에 올랐다. 장수현감이 되어 학교를 지어 교육에 힘쓰며 향약을 제정하여 풍속을 바로 잡았다. 통훈대부로 승계되고 청양현감에 이어 세자 책봉 시 좌익찬이 되어 동궁상견례와 책례에 참여하였고, 돈령부도정에 승진, 용양위부호군(龍馬+襄衛副護軍)에 올랐으며, 죽은 후 1841년 청백리(淸白吏)에 뽑혔고 장수 도암서원에 봉향되었으며 문집으로 《강고집(江皐集)》이 전한다. |
가족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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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진(柳袗)의 자는 계화(季華)이며, 호를 수암(修巖)이라고 했는데 풍산류씨(豊山柳氏)이다. 부친은 서애 류성룡이며 모친은 전주류씨이다. 류심춘의 6대조 이며, 우천리에 입향 한 분이다. 1582년 7월 27일에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아름다운 자질이 있어서 어릴 때부터 단정하게 하였으며, 정직하고 근면하며 공손하여 행동에 분란함이 없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문충공을 따라가서 사촌자형인 이문영이 피난하여 영동의 산간에 전전하다가 종종 왜적을 만났을 때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을 경험하며 1년 정도를 보내게 되었는데 11살이면서도 능히 상황에 임하는 자세는 아주 신중하여 어른들도 미칠 수 없는 행동을 하였다. 1607년 아버지의 병세를 알아보기 위해서 변을 맛보고 차도를 살피며 근심하는 기색이 용모와 말씨 가운데에 저절로 넘치고 있으니 이를 보는 사람들이 모두가 감복했다고 했다. 청도군수가 되어서 그 지역의 유생들에게 교화하는 글을 지어서 말하기를 “옛날에 순임금이 명계(命契)하기를 ‘백성들이 친애하지 않고 오품이 순조롭게 행해지지 않는다. 그대를 사도의 관직에 임명하니, 그대는 오교를 공경히 시행하되 관대한 방향으로 펼치도록 하라.’라고 한 이 말은 교학(敎學)에서 비롯된다는 말이다. 예천군수로 재임 시에는 선생의 고향과 이웃에 있어서 모두가 친척이고 옛 친구이다 보니 많은 일에 견철되었으니 공은 공평하게 법대로 처리하여 모두 감복시켰다. 나중에 떠날 때에 이르자 한사람도 법을 어기거나 정치에 간예된 사람이 없으니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했다라고 하더라. 그 해 겨울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갈 때 고을의 백성들이 그때를 추억하며 잊을 수 없다고 하면서 비석을 세워서 선생을 송축하였다. |
학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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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심춘은 10세에 내형(內兄) 구당(舊堂) 조목수(趙沐洙), 가은(可隱) 조학수(趙學洙) 양공(兩公)에게 수학하여 덕업을 스스로 세웠다. 27세에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 나아가 위기지학에 더욱 정진하니 당세에 독학군자(篤行君子)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18세에 향시에 장원하였으며 25세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1795년(정조 19) 예조참판(禮曺參判) 이익운(李益運)과 좌승지(左承旨) 임제원(林濟遠)이 그의 경학(經學)과 행의(行誼)를 왕에게 천거하니 왕이 전벽(殿壁)을 돌아보며 ″류심춘의 이름은 익숙하게 듣고 기록해 두었다″하고 구전으로 돈용교위용양위부사용(敦勇校尉龍양衛副司勇)을 특명하였으며 익년 2월에 승정원 가주서(承政院 假注書)를 제수하였다가 다음날 장사랑 효릉참봉(將仕郞 孝陵參奉)을 제수하였다. 1797년 장수현감(長水縣監)이 되어 교숙(校塾)을 수축하여 유학을 부흥시키고 향약을 만들어 풍속을 바로잡았다. 1798년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승자(陞資)되고 원자궁(元子宮)강학청(講學廳)의 요속(僚屬)에 선발되어 청양현감(靑陽縣監)으로 전임되었다. 1800년 정월(正月) 원자(元子)의 관례(冠禮)와 책례(冊禮)를 병행함에 특명으로 어모장군 세자익위사 우익위(禦侮將軍 世子翊衛司 右翊衛)가 되었으며 1811년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를 제수받고, 익년 4월 세자(翼宗) 책봉시 다시 익위사 좌익찬(翊衛司左翊贊)이 되어 6월의 동궁상견례(東宮相見禮)와 7월의 책례(冊禮)에 참여하였다. 1815년에 의성현령이 되었다가 익년 7월에 사임하였으며 1829년 王世孫(헌종) 책례시(冊禮時) 위종사좌장사(衛從司左長史)를 제수받았고 1830년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에 승진되었다. 1832년 용양위 부호군(龍?衛 副護軍)에 올랐으며 1841년에 청백리로 뽑히고, 1854년(철종 4) 아들 후조(厚祚)가 급제하였으므로 다시 통정대부에 올랐다. 1847년 도암서원(道巖書院)에 봉향하였다 . |
저작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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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고집(江皐集)』19권 10책은 조선 후기의 학자 류심춘(柳尋春)의 시문집이다. 이 책은 서(序)와 발(跋)이 없어 언제 발간되었는지는 자세하지 아니하고, 목활자본으로 간행된 것이다. 권 일은 시 180수와 아래 목록으로 제시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시는 호방하면서도 물외의 한가함을 동경하는 경향이 있다. 「자술(自述)」에서는 장주(莊周)의 호대한 사상을 숭배하여 자신도 구만리장천을 나는 대붕이 되기를 갈구하였다. 권 이의 소(疏) 중 동궁보익편(東宮輔翼篇)은 69세의 고령으로 왕세손의 위종사좌장사(衛從司左長史)의 직에 있을 때 올린 것으로, 동궁은 왕이 될 고귀한 신분이므로 어릴 때부터 지선하고 고귀하게 부익하지 아니하면 성군이 되는 자질에 결함이 생긴다고 지적하면서, 옛날 성현들의 격언이나 가모(嘉謨)를 인용하여 보도(輔導)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서(書)는 250편에 달하는 방대한 양으로 저자의 학문, 사상, 언행의 집성이라 할 수 있는데, 첫 부분의 상입재서(上立齋書)는 스승인 정종로(鄭宗魯)에게 올린 글이며, 상강재서(上剛齋書)는 송치규(宋穉圭)에게 올린 것으로, 정치, 경제, 시사, 성리, 예설 등 다방면에 걸쳐서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 「주서차의」는 『주자대전(朱子大全)』 중에서 의심나는 부분을 뽑아 그 아래에 선유들의 설을 인용하여 입증, 해석하고, 이따금 자신의 소견을 첨가하거나 알기쉽게 풀이하여 후학의 주자학연구에 편의를 제공한 것이다. 청무강의(靑武講義)는 상주의 청무서당에서 강의한 내용인 사서에 대한 자료를 정리한 것으로, 『중용』의 인심과 도심에 대한 해석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자명록(自銘錄)은 공부하면서 수양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여 그 중에서 자기가 평생에 실천하고 지켜야 할 부분을 기록한 것으로 행동의 지침서라 할 수 있다. |
출처 : 수산
글쓴이 : 군계일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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