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진주(晉州). 자 경임(景任). 호 우복(愚伏)·일묵(一默)·하거(荷渠). 초시(初諡) 문숙(文肅). 개시(改諡) 문장(文莊). 경상북도 상주(尙州)에서 출생하였다. 1582년(선조 15) 진사를 거쳐 1586년 알성(謁聖)문과에 급제,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로 등용된 뒤 검열·봉교(奉敎)를 거쳐 1589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워 수찬(修撰)이 되고 정언·교리·정랑·사간(司諫)에 이어 1598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광해군 때 정인홍(鄭仁弘)과 반목 끝에 삭직(削職)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제학에 발탁되고, 전라도관찰사·대사헌을 거쳐 1629년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이르렀다. 이듬해 겸 춘추관지사로서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편찬을 담당하였다. 성리학에 밝았고 이기설(理氣說)에서 이황(李混)의 학설에 반대, 이이(李珥)에 동조하였으며 특히 예론(禮論)에 밝아서 김장생(金長生) 등과 함께 예학파(禮學派)로 불렸다. 시문(詩文)과 서예에도 뛰어났다. 찬성(贊成)에 추증되고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 강릉의 퇴곡서원(退谷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우복집(愚伏集)》《상례참고(喪體參考)》《주문작해(朱文酌解)》 등이 있다.
- 정심(鄭杺) 어상공의 10대손으로 문장공 정경세의 아들이다. 자는 문중(文中)이고 1624년에 진사가 되고, 그해 증광시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으나 이듬해 역질로 세상을 떠났다. 사초(史草) 2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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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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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심(鄭杺) , 1597년 ~ |
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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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晉陽) |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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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文仲) |
출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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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
출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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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
분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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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시 공검면 |
입사경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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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4년 8월에 사마양시 급제, 9월 대과 급제 |
내관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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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문원 권지부정자, 예문관 검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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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몽, 생활 등 |
정경세의 장남이며, 자는 문중(文中)이다. 나이 열 여섯에 창석(蒼石) 이준(李埈)에게 요청하여 지은 자이다. 어려서부터 아주 빼어났으나 겨우 말을 배움에 미쳐서는 여지도를 펼쳐 놓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곳은 아무 고을이고, 이곳은 아무 고을이다.”라고 하면서 가르쳐 주었는데, 그 뒤에 물어보면 마치 메아리가 응답하듯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고 한다.
1624년(인조 2) 8월에 사마양시에 급제하고,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제수되어 관직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해 9월에 대과에 급제하였다. 1623년(인조 원년) 가을부터 향시와 성시(省試)에 모두 열 차례 응시하였는데 한 번도 급제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1625(인조 3) 사람됨이 단아(端雅)하고 또 예학(禮學)을 알았다고 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에 선발되어 보임되었다가 얼마 뒤에 예문관 검열로 옮겨졌다. 3월에 사원(史院)에서 숙직하다가 두역(痘疫)에 걸려 나왔으며,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는데 그때 나이가 겨우 스물아홉 살이었다.
부음을 아뢰자 임금이 몹시 놀라 애도해 마지않았으며, 동궁도 역시 슬퍼하면서 부의 물품을 더 내렸다. 4월에 널을 싣고 고향으로 돌아와 11월에 함창현에 있는 공검지 서쪽에 있는 묘향(卯向)의 산등성이에 장사 지냈다. 군수 이의활(李宜活)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두었다. 가정의 교훈을 잃지 않았고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곧 사국(史局)에 보임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서울에서 객사하니 사람들이 모두 애도하였다. |
가족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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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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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관(鄭汝寬) |
생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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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세(鄭經世) |
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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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이씨(眞寶李氏) 결(潔)의 딸 |
형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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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학(鄭㰒), 정력(鄭櫟)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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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이력, 가족 이야기 등 |
1612년(광해군 4)에 김직재(金直哉)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우복도 연루되어 심문을 받았다. 광해군이 사람을 보내 가택을 수색하여 문서를 압수해서 보니 임금을 언급한 곳에서는 반드시 상평(上平, 글을 쓸 때 존칭어를 행을 바꿔 앞의 행과 나란하게 쓰는 것)하였다.
광해군이 측근에게 이르기를, “공경스럽고 삼가함이 이와 같으면서 어찌 역적에 붙을 사람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심(杺)이 15세였는데 함께 체포되었다.
광해군이 직접 심문하기를, “네 아비가 네게 무엇으로 가르쳤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다만 충효(忠孝) 두 자로써 가르쳤습니다. 아비 경세가 항상 의가 아닌 것은 하지 말도록 경계하였고, 자제들을 훈교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충(忠) 자와 효(孝) 자로 말하고서 어찌 역모를 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여 광해군이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
동생 정학은 나이 12세였는데, “묻는 일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왕이 좌우에게 의논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노인과 어린아이는 증거에 의거하여 죄를 정하게끔 율문에 정해져 있습니다. 이런 어린아이들은 신문하지 않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이이첨, 최유원 등은 아뢰기를, “이런 어린아이들까지 추문(推問)한다면 성상의 살리기 좋아하는 덕에 손상이 될까 우려됩니다.”하자, 왕이 이르기를, “대저 미열(迷劣)한 아이가 무엇을 알겠는가. 나의 의견도 아뢴 뜻과 같다.” 고 하여 얼마 안 되어 석방되었다.
정심(鄭杺)이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 정경세(鄭經世)가 관직을 내놓고 돌아가 아들의 상장(喪葬)을 치르기를 청하자 왕은 답하기를, “경의 소장을 살펴보고 또 경의 간절한 사정을 알았다. 정심(鄭杺)이 끝내 구제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매우 슬프고 애석한 일이다. 경이 현임에서 해직되기를 청하는 것은 지극한 정리에서 취해진 일이니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아들의 상을 당했다는 것으로 해직하는 것은 실로 법례가 아니니, 경은 다시 말하지 말고 지극한 정리를 억제하여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 하였다. 정심은 가정의 교훈을 잃지 않았고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곧 사국(史局)에 보임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서울에서 객사하니 사람들이 모두 애도하였다. 왕이 일로(一路)에 명하여 그의 상을 호송하게 하였다. 군수 이의활(李宜活)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두었다. |
학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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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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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학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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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배움 이야기 등 |
정심(鄭杺)은 어려서부터 아주 빼어났으며, 겨우 말을 배울 나이에 여지도를 펼쳐 놓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곳은 아무 고을이고, 이곳은 아무 고을이다.”라고 하면서 가르쳐 주고, 그 뒤에 물어보면 마치 메아리가 응답하듯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처음에 역사서를 배웠는데 “하후씨(夏后氏) 우(禹)는 곤(鯀)의 아들이라.”라고 하는 부분에 이르러 묻기를 “이것은 윗글에서 극곤(極鯀)이라고 한 곳의 그 곤입니까?”라고 하기에, 성인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또 다시 묻기를 “순 임금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는데도 신하로서 그를 섬기다니, 성인이란 참으로 이와 같은 것입니까?”라고 하기에, 말하기를 “임금과 아버지는 서로 간에 경중이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죄가 없는데도 임금이 죽였다면 의리에 있어서 섬길 수가 없는 것이지만, 아버지가 죄가 있어서 주벌을 받았다면 임금을 원망할 수는 없는 법이다.”하고 하니, 고개를 끄덕이기는 하면서도 미심쩍어하였다. 이에 또 말해 주기를 , “이른바 극이라는 것은 죽인 것이 아니라 단지 옥에 가둔 것일 뿐이다.”라고 하니 그제서야 의심이 풀리는 것 같았다.
또 도간(陶侃)이 날개가 부러지는 꿈을 꾼 일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것은 무고입니다. 도간은 현인이었으니 반드시 발호(跋扈)하려는 마음이 엇었을 것입니다. 가령 그가 어질지 않아서 화를 일으키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면 반드시 꿈꾼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럴 경우 누가 알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의 영특함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자라서는 책을 좋아하여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공부를 하라고 독려하지 않아도 능히 스스로 학문을 배우고 문장을 배우는 일에 힘을 쏟았다. 또 제자의 직분이 문사를 익히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을 잘 알아 집 안에 있을 때에는 어버이를 섬기고 동생과 우애롭게 지내는 데에 온 마음을 다하였다.
마을에서 행동할 때는 공손하고 겸손하여 일찍이 화내는 말이나 오만한 기색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애중하였다. 우복의 가학을 이어 받아 아들인 정도응(鄭道應)에게 전하였으며, 정도응이 다시 정종로에게 이어지는 영남학파의 가교 역할을 하였다고 하겠다. |
저작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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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편찬 이야기 등 |
정심(鄭杺)은 안타깝게도 과거에 급제하고도 큰 뜻을 채 펴 보지도 못하고 2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문집을 남기지도 못하였고, 또 특별한 저술도 전해지는 것이 없다. 너무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하직했기 때문에 친구의 아들이자, 아들이 친구인 정심(鄭杺)을 위해서 월간 이전이 제문을 남겼는데 소개한다.
아! 슬프도다. 가정에서 이어진 학문이요 세상에 상서로운 문장이로다. 큰 나무는 하늘로 높이 오르고 아름다운 옥은 곤산에서 나왔도다. 어진 임금 만나서 옥이 울면 퉁소가 응하도다. 바야흐로 크게 되기를 바랐더니 불행하게도 수명이 짧도다. 나라에서는 뛰어난 인재를 잃었고 선비들은 의지해 배울 곳이 없어졌도다. 대대로 이어져온 친분을 생각해보면 늙은이의 눈물이 옷깃을 적시노라. 내가 어릴 때부터 존당에서 배우면서 깨우쳤는데 어리석음 깨우쳐 계발하여서 고질 같은 둔한 것을 훈계로 고치셨도다. 또한 즐겁게도 우리 아이가 그대를 만나서 벗을 삼았다. 취향은 바르고 정의는 두터웠도다. 학문과 덕행 닦아 큰 자질로 유익한 벗이 되어 백년의 오랜 세월 교우하면서 영원토록 이 즐거움 누리길 바랐더니 한번 병에 걸려 갑자기 여기에 이를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관이 처음 돌아왔을 때에는 마마병이 한창 심할 때였고 상사(喪事)와 병환과 근심에 휘둘리어 마음속이 다 썩어버렸도다. 한번 곡하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 뒤졌으니 인정을 저버린 것이 한갓 부끄러울 뿐일세. 옛 집을 지금 지나가니 마음속의 슬픔이 더욱 깊구나. 조촐한 제수로 슬픔을 고하니 와서 흠향하기 바라네. |
- 정도응 문장공 정경세의 손자이다. 자는 봉휘(鳳輝)이고 호는 무첨재이다. 1649년에 유일로 천거되어 왕자의 스승인 대군사부가 되고, 시강원자의를 역임하였다. 단성현과 창녕현의 현감을 지냈다. 저서는 <소대명신행적(昭代名臣行蹟)>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