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리

[스크랩] 위임의 성공학

장안봉(微山) 2013. 4. 18. 07:45

- 이백예순세 번째 이야기
2013년 3월 25일 (월)
위임의 성공학
격(格)이라는 것이 있다. 격에 맞지 않으면 실격이 된다. 모든 분야가 다 그렇겠지만, 직위를 가진 사람은 더더욱 격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말도 격에 맞게 해야 하고, 행동도 격에 맞게 해야 한다. 업무 수행도 격에 맞게 해야 하고, 마인드도 격에 맞게 가져야 한다.

고위직의 격은 얼마나 위임을 잘 했느냐로 판단할 수 있다. 고위직으로 갈수록 서류 작성 같은 실무적인 일은 줄어들지만, 반대로 판단을 내려야 할 일은 늘어간다. 다양한 분야에 신경을 분산해야 하므로 자칫하면 판단을 그르칠 수도 있다. 하위직이 할 일까지 일일이 간섭하다 보면, 그럴 확률은 더욱 높아진다.

신이 살펴보건대, 옛날 제갈량(諸葛亮)이 친히 장부와 문서를 처리하자, 부하 양옹(楊顒)이 간언하기를, “앉아서 이치를 살피는 자를 ‘재상’이라고 하고, 일어서서 그것을 행하는 자를 ‘유사(有司)’라고 합니다. 그래서 진평(陳平)은 전곡(錢穀)에 관한 내용을 몰랐었고, 병길(丙吉)은 싸우다 죽은 것에 대해 묻지 않았던 것입니다.”라고 하니, 제갈량이 사과하였습니다. 재상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임금이겠습니까.
신이 삼가 들으니, 사방에서 올라오는 송사와 크고 작은 문서가 대부분 성상의 재가를 거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임금은 수고롭고 신하는 편안하게 될 것이니, 그 어긋남이 심합니다.
정신이 날로 피폐해지고 지기(志氣)가 날로 손상되어, 작은 것은 살피면서 큰일은 빠뜨리고, 대강(大綱)은 폐하면서 세목(細目)은 거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상께서 청단(聽斷)을 부지런히 하면 할수록 현혹됨은 더욱 심해지고, 아랫사람이 기만하기를 교묘하게 하면 할수록 그 해악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공경(公卿)이나 보필(輔弼)이 될 만한 사람을 정밀하게 선발한 다음 직책을 맡겨 책임지게 하고, 임금은 큰 줄기만을 잡음으로써 저절로 모든 것이 통솔되게 하는 것만 하겠습니까.
지난해 대내(大內)를 수리할 때, 이른바 재상이라는 자가 직접 옷을 말아 올리고 소매를 걷은 채 뭇 장인들 사이를 오가면서 그 역사를 감독한 일이 있었는데, 사방에서 전해가며 비웃었습니다. 이는 모두 어진 이를 재상에 두지 않아, 그 재상이 스스로 비천한 일을 맡아서 하고 임금이 격을 낮추어 그 일을 한 것이니, 주자(朱子)가 이른바 “한 등급을 떨어뜨렸다.”는 경우입니다. 공자가 순(舜)임금의 무위지치(無爲之治)를 칭송한 것은 바로 아홉 명의 관원을 임명하고 열두 목(牧)의 수령에게 자문을 구한 효과 때문이었습니다. 성상께서는 부디 유념하소서.

臣按。昔諸葛亮自治簿書。楊顒諫曰。坐而論道謂之宰相。起而行之謂之有司。故陳平不知錢穀。丙吉不問鬪死。亮謝之。夫宰相猶然。況人主乎。臣竊聞。四方詞訟大小文書。多經睿財云。如此則君勞臣逸。其舛甚矣。精神日弊。志氣日耗。小察大遺。綱廢目擧。上之聽斷愈勤。而其眩愈甚。下之蒙蔽愈巧。而爲害愈深。豈若精選公卿輔弼之人。委任責成。而一人提綱挈領。自無不摠也哉。頃年。修葺大內。所謂相臣褰衣攘袂。出入衆工之間。以董其役。四方傳笑。是皆置相不以賢而自任卑。人君下行其事。朱子所謂遞低一等者也。孔子稱舜之無爲而治者。是乃命九官。咨十二牧之效也。乞留聖念。

* 自任卑 : 원문의 주석에 “비(卑)자 아래에 글자가 빠진 듯하다.”라고 하였다.

- 송시열(宋時烈, 1607~1689), 「기축봉사(己丑封事)」,『송자대전(宋子大全)』권5

▶ 우암 송시열 초상, 국보 제239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암(尤菴) 송시열이 갓 즉위한 효종(孝宗) 임금에게 올린 「기축봉사」 중의 한 단락이다. 봉사는 밀봉한 상소에 해당하는 것으로, 임금에게 기밀이 담긴 건의를 올릴 때 쓰는 형식이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우암의 이 글은 주로 효종 당시 시도되었던 북벌(北伐)과 관련된 사료로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는 경영자의 자세와 관련하여 눈여겨 볼만한 내용도 들어있다.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책사로, 창업의 일등공신이었던 진평(陳平)이 훗날 좌승상(左丞相)이 되었을 때였다. 하루는 고조가 그에게 한 해 동안의 전곡(錢穀)의 수입과 지출이 얼마나 되는지를 물었는데,


“그 일은 따로 담당하는 유사가 있습니다.”

라고 하고는, 구체적인 숫자를 모르는 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로부터 100여 년 뒤 무제(武帝) 때, 정승인 병길(丙吉)이 길을 가다가 소가 숨을 헐떡이는 것을 보고는 수행하던 부하를 시켜 이유를 물어보게 했다. 부하가 의아해하며,

“아까는 길에서 싸우다 죽은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시더니, 소가 헐떡이는 것은 어째서 관심을 두십니까?”

하고 묻자,

“사람이 죽은 것이야 담당하는 관리가 처리할 일이니,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재상(宰相)인 나의 직분은 음양(陰陽)을 조화시키는 것인데, 한여름도 아닌 철에 소가 헐떡이는 것은 혹시 음양이 조화를 잃은 것이 아닌가 하여 물어본 것이다.”

라고 하였다.

유교문화권에서 재상의 리더십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고사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사람들은 대체로 이런 전통적인 리더십보다는, 자잘한 일까지 직접 꼼꼼하게 챙기고 다방면으로 능력을 보여주는 리더십에 더 높은 점수를 준다.

물론 일에 전혀 무관심하고 무능한 것보다는 낫겠지만, 다양화되고 전문화된 사회에서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여 어쭙잖게 모든 일에 간섭하다가는 자칫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정신의 과도한 분산과 기력의 저하로 말미암아 자신의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은 물론이고, 부하들까지도 의욕을 잃거나, 나태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유교문화권 제왕학(帝王學)의 대표적 고전인 『서경(書經)』에는,

“머리인 임금이 자잘한 일까지 직접 챙기면 팔다리인 신하가 게을러져서 만사가 엉망이 될 것이다.[元首叢脞哉 股肱惰哉 萬事墮哉]”

라고 하였고, 씨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전 미국 대통령은,

“가장 훌륭한 리더는 유능한 인재들을 발탁하여 자신의 주변에 둘 수 있는 뛰어난 감각의 소유자이다. 또한 그들이 자신의 일을 수행할 때 전혀 간섭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자기 절제력이 충분히 갖추어진 사람이다.”

라고 하였으니, 위임을 통한 효율성 제고에 대해서는 동서고금의 인식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이치를 안다고 해서 다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이치를 몰라서 행하지 못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당시로써는 고령이라고 할 수 있는 54세의 몸으로 원정 부대의 대소사를 직접 처리하다가 부하의 충고를 받았던 제갈량의 경우에서도 그런 사례를 볼 수 있다. 우암이 인용한 양옹(楊顒)의 간언에는 다음 내용이 더 들어있다.

“다스림에는 일정한 규범이 있는 법이니, 상하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노비들이 할 일을 주인이 직접 맡아서 처리한다면 심신이 지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그런 일에 대한 지식이 노비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천하의 지략가라는 제갈공명(諸葛孔明)조차도 그러한 우를 범했던 것을 보면, 윗사람이 되어서 잠자코 보고만 있기란 결코 쉽지 않은가보다.



권경열 글쓴이 : 권경열
  •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사업본부장
  • 주요역서
      - 국역 갈암집공역, 민족문화추진회. 1999
      - 국역 오음유고, 민족문화추진회, 2007
      - 국역 국조상례보편공역,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 국역 매천집 3, 한국고전번역원, 2010
      - 국역 가례향의, 국립중앙도서관, 2011 외 다수

출처 : 공주대학교대학원 동양학과 모임
글쓴이 : 겸사 이시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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