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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學
善行第六
선행(善行)은 한대(漢代) 이후의 현자들이 행한 선한 행실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가르침의 시작(立敎), 인륜을 밝힘(明倫), 몸을 삼감(敬信)의 가르침을 실증하였다.
모두 81편으로 ‘입교를 실증한다’(實立敎), ‘명륜을 실증한다’(實明倫), ‘경신을 실증한다’(實敬身)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善行,001
呂滎公名希哲, 字原明. 申國正獻公之長子. 正獻公居家, 簡重寡黙, 不以事物經心, 而申國夫人, 性嚴有法度, 雖甚愛公, 然, 敎公, 事事循蹈規矩.
甫十歲, 祁寒暑雨, 侍立終日, 不命之坐, 不敢坐也. 日必冠帶, 以見長者, 平居雖甚熱, 在父母長者之側, 不得去巾襪縳袴, 衣服唯謹.
行步出入, 無得入茶肆酒肆, 市井里巷之語, 鄭衛之音, 未嘗一經於耳, 不正之書, 非禮之色, 未嘗一接於目.
正獻公通判潁州, 歐陽公適知州事. 焦先生千之伯强, 客文忠公所, 嚴毅方正, 正獻公招延之, 使敎諸子. 諸生小有過差, 先生端坐, 召與相對, 終日竟夕, 不與之語, 諸生恐懼畏伏, 先生方略降辭色.
時公方十餘歲. 內則正獻公與申國夫人敎訓, 如此之嚴, 外則焦先生化導, 如此之篤. 故公德器成就, 大異衆人. 公嘗言, 人生內無賢父兄, 外無嚴師友, 而能成者, 少矣.
여형공(呂滎公)의 이름은 희철(希哲), 자는 원명(原明)으로 신국정헌공(申國正獻公-註1)의 맏아들이다. 정헌공이 집에 있을 때에 대범하고, 무게 있고, 말이나 행동이 과묵했으며 세속적인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다. 신국의 부인도 성품이 엄격하고 법도가 있었다. 아들을 매우 사랑했지만, 아들이 매사에 절도와 법도를 그대로 따르도록 가르쳤다.
여형공이 겨우 열 살 때, 몹시 춥거나 무덥고, 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부모를 온종일 모시고 서 있으면서 부모가 앉으라는 명이 없으면 감히 앉지 아니하였다. 날마다 반드시 관을 쓰고 띠를 맨 정제된 차림으로 어른을 만나 뵈었다. 평상시 비록 날씨가 매우 덥더라도 부모와 어른들의 곁에 있을 땐, 두건과 버선, 행전을 벗지 않았으며 의복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조심했다.
볼 일을 위한 출입에 찻집이나 주막 같은 곳에 들어가는 적이 없으며, 시정(市井)과 거리에서 쓰는 비속한 말과 鄭, 衛나라의 음란한 음악도 듣는 적이 없었다. 또 바르지 아니한 글과 예가 아닌 색을 한 번도 눈에 접하지 아니 하였다.
정헌공이 영주(穎州)의 감독벼슬(通判)로 있을 때 구양공(歐陽公-註2)이 지주사(知州事)로 있었다. 초(焦)선생 천지백강(千之 伯强)이 문충공 구양공(文忠公 歐陽公)의 빈객으로 있었는데, 몸가짐이 올발랐다. 정헌공이 초선생을 모셔 자제들을 가르치게 했다. 자제 중에 조금이라도 허물이나 어그러진 일이 있으면 선생은 단정히 앉아서 그 학생을 불러서는 마주 앉아 날이 저물거나 밤이 새거나 말없이 함께 있다가 배우는 생도들이 두려워하며 엎드려 죄를 빈 다음에야, 선생은 비로소 말과 얼굴빛을 조금 풀고 마음을 가라 앉히셨다.
이때 공의 나이가 십여 세였다. 집안에서는 정헌공과 신국부인의 가르침이 엄격하였고, 집밖에서는 곧 초선생의 교화와 지도가 이처럼 독실하니, 공이 너그러운 도량과 어진 재능을 지닌 사람으로 자라 뭇 사람들과 크게 달랐다. 여형공은 “사람이 나서 집안에 어진 부모와 형제가 없고, 밖에 엄한 스승과 벗이 없으면서, 능히 성취하는 자가 드물다”라고 말했다. -呂氏家傳-
*不經心 : 마음에 경영하지 않음. *祁寒기한 : 큰 추위. *巾襪건말 : 건과 버선.
*縛袴박고 : 박은 요(繞)와 통하니 행전을 말한다. 袴는 바지고. 사타구니 과
*鄭衛之音 : 주 나라때 제후의 나라인 정나라와 위나라의 음률로 음난하기로 유명함
*通判 : 송나라때 정부 구조의 하나로 권지주사를 보좌했음.
*畏伏 : 두려워하여 잘못했다고 비는 것.
*潁州영주: 지명이다. 潁은 이삭 영. 강이름 영.
註1 : 정헌공(正獻公): 신국정헌공(申國正獻公)은 북송의 정치가로 이름은 공저(公著), 자는 회숙(晦叔), 시호는 정헌(正獻)이다. 사마광과 함께 국정을 장악해 왕인석의 개혁정치를 반대했다. 죽은 다음에 신국공(申國公)으로 추존됐다.(윤호창의 소학)
註2 : 구양공(歐陽公)은 북송의 사상가로 아름은 수(修), 자는 영숙(永叔),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문장이 뛰어났으며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저서에 신당서(新唐書), 신오대사(新五代史) 등이 있다.(윤호창의 소학)
善行,002
呂滎公長夫人, 待制諱昷之之幼女也. 最鍾愛, 然, 居常至微細事, 敎之必有法度. 如飮食之類, 飯羹許更益, 魚肉不更進也. 時張公已爲待制河北都轉運使矣.
及夫人嫁呂氏, 夫人之母, 申國夫人姊也. 一日來視女. 見舍後有鍋釜之類, 大不樂, 謂申國夫人曰, 豈可使小兒輩私作飮食, 壞家法耶. 其嚴如此.
여형공(呂滎公)의 장부인(張夫人)은 대제(待制)를 지낸 장온지의 작은 딸이다. 부모들은 그녀를 가장 귀여워했지만, 평소에 지극히 세세한 일에도 반드시 가르침의 법도가 있었다. 이를테면 음식을 먹을 때에 밥이나 국은 더 먹는 것을 허락했지만 생선이나 고기는 더 주지 않았다. 이 무렵에 장공은 이미 대제 하북도전운사(河北都轉運使)로 있었다.
부인이 여씨집안에 시집을 갔는데, 부인의 어머니는 신국부인(申國夫人)의 언니였다. 하루는 부인의 어머니가 딸을 보러 왔는데 집 뒤에 냄비와 가마솥 따위가 있는 것을 보고 매우 언짢게 생각했다. 그녀는 동생인 신국부인에게 “어떻게 어린애들로 하여금 사사롭게 음식을 만들어 먹도록 해서 집안의 법도를 무너뜨리는가”라고 말했다. 이처럼 장씨 집안의 가법이 엄격했다. -童蒙訓-
*待制諱昷之대제휘온지 : 대제는 벼슬이름이고 諱휘는 죽은이의 이름을 일컷는 말이고 온지는 장온지를 말한다. 자는 경산(景山)이며 천장각대제(天章閣待制) 하북도전훈사를 지냈다. 昷온 어질 온.
善行,003
康陽城爲國子司業, 引諸生告之曰, 凡學者, 所以學爲忠與孝也. 諸生有久不省親者乎. 明日謁城還養者, 二十輩. 有三年不歸侍者, 斥之.
당(唐)나라 양성(陽城)이 국자사업(國子司業-註)으로 있을 때의 이야기다. 하루는 학생들을 불러 “학문을 하는 것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기 위해서다. 제군들 중에 오랫동안 부모에게 문안을 드리지 않는 자가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튿날 양성을 뵙고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겠다는 학생이 스무 명이나 되었다. 삼년이 되도록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모시지 않는 자가 있자, 양성은 그를 내쫓아 버렸다. -唐書 楚行列傳-
*陽城 : 자는 원종(元宗)이다.
*國子司業 : 국자는 국자감(國子監)을 일컷는 말로 국립대학원이고 사업은 국자감의 수석 교수를 말함.
註 : 국자(國子)는 오늘날의 국립대학에 해당된다. 고대 중국의 최고 교육기관으로 수, 당, 원, 명, 청은 국자감으로 불렀으며, 진나라에서는 국자학, 북제에서는 국자서로 불렀으며, 청말에 폐지되었다. 사업(司業)은 국자감의 수석교수이다.(윤호창의 소학)
善行,004
安定先生胡瑗, 字翼之. 患隋唐以來, 仕進尙文辭而遺經業, 苟趨祿利.
及爲蘇湖二州敎授, 嚴條約, 以身先之, 雖大暑, 必公服終日, 以見諸生, 嚴師弟子之禮, 解經至有要義, 懇懇爲諸生, 言其所以治己,
而後治乎人者. 學徒千數. 日月刮劘, 爲文章, 皆傅經義, 必以理勝, 信其師說, 敦尙行實. 後爲太學, 四方歸之. 庠舍不能容.
其在湖學, 置經義齋治事齋. 經義齋者, 擇疏通有器局者居之, 治事齋者, 人各治一事, 又兼一事. 如治民治兵水利算數之類. 其在太學亦然.
其弟子散在四方, 隨其人賢愚, 皆循循雅飭. 其言談擧止, 遇之不問可知爲先生弟子. 其學者, 相語稱先生, 不問可知爲胡公也.
안정(安定) 선생 호원(胡瑗)의 자는 익지(翼之)다. 수(隋) 나라와 당(唐) 나라 이래로 벼슬에 나아가려는 사람들이 과거 보기 위하여 글 솜씨나 자랑하면서, 경서(經書) 공부는 버려두며, 벼슬 봉급(祿俸)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을 근심하였다.
소주(蘇州)와 호주(湖州) 두 주의 교수가 되어서는 규율과 약속을 엄격하게 지켜 자신이 먼저 솔선수범했다. 선생은 찌는 듯한 더운 날씨에도 반드시 관복을 입고 온종일 제자들을 만났으며, 스승과 제자 사이의 예절을 엄격하게 지켰다. 또 경서를 풀이할 때에 중요한 뜻이 있는 곳에 이르면 학생들에게 자기 자신을 먼저 다스린 다음에 남을 다스려야 하는 까닭을 간곡하게 설명하였다.
이런 가르침 때문에 배우는 학생들이 천여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날마다 마음의 때를 벗겨내고 몸을 닦았으며, 문장을 지을 때도 모두 경전의 뜻에 의거해 반드시 이치를 밝혔다. 그들은 선생의 말을 믿었으며 행실을 돈독하게 닦았다. 선생이 후에 태학(太學)의 교수가 되었을 때는, 배우려는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교사(校舍)에 모두 수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선생이 호주(湖州)의 학교에 있을 때에 경의재(經義齋)와 치사재(治事齋)를 설치했다. 경의재에는 기질이 명민하고 그릇이 큰 사람을 뽑아 머물도록 했으며, 치사재에는 사람마다 각각 한 가지 일을 전공하게 하고, 또 다른 한 가지 일을 겸해서 익히도록 했다. 이를테면 백성을 다스리는 일, 군사를 다스리는 일, 수리(水利), 산수(算數) 따위와 같은 것이다. 그는 태학에 있을 때도 그렇게 했다.
그의 제자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제자들은 현명한 사람은 현명한 대로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은 대로 모두 법도를 지켰으며, 행동이 단아하고 조심스러웠다. 그들의 말과 행동거지를 보면 묻지 않아도 선생의 제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학자들이 서로 선생이라고 부를 때는 묻지 않아도 호공(胡公)을 가르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宋名臣言行錄-
*以身先之 : 몸으로 앞장섬.즉 나자신이 먼저 모법이 됨.
*刮劘괄마 : 마음의 때를 긁어내고 몸을 닦음. 劘(靡+刀):깍을 마. 벨 마.
*皆傅經義개부경의 : 傅는 의와 같으니 모두 경서의 뜻에 의거함.
*後爲太學 : 호원이 후에 구자감직강이 되었기 때문에 하는말
*隨其人賢愚 :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의 예법을 지키고 마음과 몸을 신칙함.
*循循雅飭순순아칙 : 순순은 질서를 지켜서 예법을 따르는 것이고 아칙은 행동을 단아하게 하고 몸가짐을 신칙함.
善行,005
明道先生言於朝曰, 治天下, 以正風俗得賢才, 爲本.
宜先禮命近侍賢儒及百執事, 悉心推訪, 有德業充備足爲師表者,
其次有篤志好學材良行修者, 延聘敦遺, 萃於京師, 俾朝夕相與-講明正學.
其道必本於人倫, 明乎物理, 其敎自小學灑掃應對以往, 脩其孝悌忠信, 周旋禮樂.
其所以誘掖激勵漸摩成就之道, 皆有節序. 其要在於擇善脩身, 至於化成天下, 自鄕人而可至於聖人之道.
其學行皆中於是者, 爲成德. 取材識明達可進於善者, 使日受其業,
擇其學明德尊者, 爲太學之師, 次以分敎天下之學.
擇士入學, 縣升之州, 州賓興於太學, 太學聚而敎之, 歲論其賢者能者於朝.
凡選士之法, 皆以性行端潔, 居家孝悌, 有廉恥禮讓, 通明學業, 曉達治道者.
명도 선생이 조정에 진언(進言)하기를 " 천하를 다스림은 풍속을 바르게 하고 현명한 인재를 얻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먼저 예(禮)를 갖추어 가까이 뫼시는 어진 선비와 백관(百官)에게 명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성의를 다하여 덕행(德行)과 학업을 충분히 갖추어서 족히 사표(師表)가 될만한 자를 찾게 하소서.
그 다음으로 뜻이 독실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자질(資質)이 뛰어나고 행실이 아름다운 자가 있거든 각 관(官)에서 예를 갖추어 맞이하고 융숭하게 대우하여 경사(京師)로 올려보내되, 경사에 모여 아침 저녁으로 함께 바른 학문을 강론(講論)하여 밝히게 하소서.
그 도(道)는 반드시 인륜(人倫)에 근본을 두고 사물의 이치를 밝혀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가르침은 <소학>의 쇄소(灑掃), 응대(應對)에서부터 시작하여 효, 제(悌), 충(忠), 신(信)의 도리를 닦고, 예(禮)와 악(樂)에 맞추어 동작하게 해야 합니다.
그들을 유도(誘導)하고 격려하여 물이 스며들 듯, 옥을 다듬듯 성취시키는 길은 모두 절차와 순서가 있습니다. 그 요점은 선한 일을 가려서 실천하고 몸을 수양하여 교화(敎化)가 천하에 이루어지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한낱 시골 사람도 성인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학문과 덕행이 모두 여기에 맞는 사람이라면 덕을 완성한 사람이니, 자질과 식견이 명달(明達)하여 선(善)에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을 가려서 날마다 그 가르침을 받게 하소서.
그중에서도 학문이 고명(高明)하고 덕이 높은 자를 가려서 태학의 스승으로 삼고 그 다음가는 사람으로 나누어 천하의 학교에서 가르치게 하소서.
선비를 입학시키되 현학(縣學)에서 우수한 자를 추천하여 주학(州學)에 올리고, 주학에서 다시 우수한 자를 추천하여 태학에 올리며, 태학에서는 이들을 모아 가르쳐서 해마다 그 현명한 자와 유능한 자를 논정(論定)하고 조정에 추천해야 합니다.
무릇 선비를 가려 뽑는 법은 모두 그 성품과 행실이 단정하고 깨끗하며, 집에 있어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염치(廉恥)와 예양(禮讓)이 있으며, 학업에 정통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를 밝게하는 자를 뽑아야 한다." 하였다.
*悉心推訪실심추방 : 성심을 다하여 찾음. *延聘연빙 : 예를 갖추어서 맞이함.
*俾비 하여금 비. 좇을 비. 더할 비. 오로지 비.
*擇善修身 : 선을가려서 실천하고 몸을 닦음.
*化成天下 : 교화가 천하에 이루어 짐.
*中於是者 : 여기에 맞는 것.쇄소 응대는 소학의 가르침이고, 교화가 천하에 이루어짐은 대학의 가르침이니 즉 소학과 대학에 맞는 것임.
*賓興 : 향음주례(鄕飮酒禮)에서 귀빈으로 대우하고 태학에 추천함. *曉達효달: 밝게 아는 것.
善行,006
伊川先生看詳學制. 大槪以爲學校, 禮義相先之地, 而月使之爭, 殊非敎養之道.
請改試爲課, 有所未至, 則學官召而敎之, 更不考定高下.
制尊賢堂, 以延天下道德之士, 鐫解額, 以去利誘,
省繁文, 以專委任, 勵行檢, 以厚風敎,
及置待賓吏師齋, 立觀光法. 如是者, 亦數十條.
이천 선생이 학제(學制)를 자세히 살펴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체로 학교는 서로 예의를 앞세우는 곳인데도, 달마다 시험을 치러 경쟁시키는 것은 결코 학생들을 가르치고 키우는 방법이 아니다.
매월 치르는 시험을 폐지하고 과제물을 내는 것으로 대체해야 한다. 그래서 과제물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학관(學官)이 불러서 가르쳐야 하고, 다시는 성적의 높고 낮음을 고정시켜서는 안 된다.
존현당(尊賢堂)을 세워 천하의 덕망 있는 선비들을 맞아들이며, 국학(國學)에 입학하는 학생의 정원을 줄여서 이익으로 유인하는 종래의 폐단을 없애야 한다.
또 번잡한 행정상의 문서를 생략하여 교관(敎官)으로 하여금 교육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도록 하고 몸가짐을 바르게 가지도록 독려해 교화가 제대로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대빈재(待賓齋)와 이사재(吏師齋)를 설치하고, 천하의 선비들이 국학을 견학할 수 있도록 관광법(觀光法)을 제정해야 한다." 이와 같은 내용들이 수십 조항이나 되었다. -二程全書-
*看詳學制간상학제 : 국학의 모든 제도를 살펴서 잘잘못을 검토함.
*禮義相先 : 예의를 서로 먼저지키려고 함.
*待賓吏師齋 : 대빈재와 이사재, 대빈재는 덕행이 높아서 빈객으로 대우할 만한 이를 거처하게 하는 집이고 이사재는 정치하는 길에 밝아서 관리의 스승이 될만한 사람을 거처하게 하는 집.
善行,007
藍田呂氏鄕約曰,
凡同約者, 德業相勸. 過失相規. 禮俗相交. 患難相恤.
有善則書于籍, 有過若違約者, 亦書之, 三犯而行罰, 不悛者絶之.
남전 여씨(藍田呂氏)의 향약(鄕約)에 말하기를
"이 향악에 참가한 모든 사람은 덕행과 착한 일로 서로 권면(勸勉)하며 과실이 있으면 서로 충고하여 바로잡으며, 예의의 풍속으로 서로 사귀며 환난(患難)에 서로 돕는다.
착한 일이 있으면 문부에 기록하고, 허물이 있거나 약속을 어기는 일이 있어도 기록한다. 세번 향약을 어기면 벌을 주되 고치지 않는 자는 제명(除名)한다." 하였다. -宋史 呂大方列傳-
*藍田呂氏 :남전은 송 나라때의 고을 이름이다.
善行,008
明道先生敎人. 自致知至於知止, 誠意至於平天下, 灑掃應對至於窮理盡性, 循循有序.
病世之學者, 捨近而趨遠, 處不而闚高. 所以輕自大而卒無得也. 右, 實立敎.
명도선생은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사물의 이치를 미루어 지식을 밝히는 단계에서 시작하여, 지극히 선한데 머무를 줄 아는 단계로 나아가며, 뜻을 정성스럽게 하는 단계에서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단계로 나아가며, 물뿌리고 쓸며 응대하고 대답하는 쇄소응대(灑掃應對)의 소학 가르침에서 이치를 궁구하고 본성을 발현하는 궁리진성(窮理盡性)의 단계로 나아가도록 해 가르침에 순서와 차례를 두었다.
세상의 학자들이 삶과 가까운 것은 버려두고 고원한 것만 추구하며, 낮은 곳에 있으면서도 높은 것을 엿보는 경향이 있다. 선생은 이처럼 경솔하게 스스로 존대하는 까닭에, 결국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二程全書-
*致知 : 사물의 이치를 미루어 지식을 밝히는 것.
*窮理盡性 : 치지에서 시작하여 지선에 이르는 것은 도리를 깨달음이 궁극에 도달한 것이고, 성의에서 평천하에 이르는 것은 인성을 다하는 것이니 진성이 된다. (大學)
*闚규 : 엿 볼 규. 기웃이 볼 규.
善行,009
江革少失父, 獨如母居. 遭天下亂, 盜賊並起, 革負母逃難, 備經險阻, 常採拾以爲養.
數遇賊, 或劫欲將去. 革輒悌泣求哀, 言有老母. 辭氣愿款, 有足感動人者. 賊以是不忍犯之, 或乃指避兵之方. 遂得俱全於難.
轉客下邳, 貧窮裸跣, 行傭以供母, 便身之物莫不畢給.
강혁(江革)이 소시(少時)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천하가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도적이 아울려 일어나니, 혁이 어머니를 등에 업고 난리를 피하여 험난하고 위태로운 길을 가면서 항상 풀뿌리를 캐고 나무 열매를 따서 봉양했다.
여러번 도적을 만났는데, 혹시 겁박(劫迫)하여 데리고 가려고 하면, 혁이 문득 눈물을 흘리며 애걸(哀乞)하여 늙은 어머니가 계심을 말했다. 말씨와 기색(氣色)이 정성스럽고도 간곡하여 족히 사람을 감동시키는 바가 있었으니, 도적이 이것으로 하여 차마 침범하지 못했으며, 혹 병란(兵亂)을 피하는 방향을 가르쳐 주기도 하니 마침내 모자가 모두 난리 속에서 몸을 보전함을 얻었다.
유랑(流浪)하여 하비(下비)에서 나그네 생활을 했다. 가난하고 곤궁하여 헐벗은 몸과 맨발로 돌아다니며 품팔이하여 어머니를 공양했지만 어머니 몸에 편안한 물건은 모두 넉넉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後漢書-
*備經險阻비경험조 : 험난하고 위태로운 길을 두루 거침.
*採拾 : 채는 풀뿌리를 캐는 것이고 습은 나무열매를 따는 것.
*辭氣愿款사기원관 : 말씨와 기색이 정성스럽고 간곡함.
*裸跣나선 : 헐벗고 맨발로 다님. *行傭행용 : 돌아다니며 품팔이함.
善行,010
薛包好學篤行. 父娶後妻而憎包, 分出之, 包日夜號泣不能去. 至被毆杖, 不得已廬于舍外,
旦入而灑掃, 父怒, 又逐之, 乃廬於里門, 晨昏不廢. 績歲餘父母慚而還之. 後服喪過哀.
旣而弟子, 求分財異居, 包不能止, 乃中分其財, 奴婢引其老者曰, 與我共事久. 若不能使也.
田廬取其荒頓者曰, 吾少時所理. 意所戀也. 器物取其朽敗者曰, 我素所服食. 身口所安也.
弟子數破其産. 輒復賑給.
설포(薛包)는 학문을 좋아하고 돈독했다. 아버지가 후처(後妻)에게 장가들고 나서 포를 미워하여 분가시켜서 내보냈다. 포가 밤낮으로 울부짖으며 차마 가지 못하다가 매맞기에 이르자 할 수 없이 집 밖에다 초막(草幕)을 짓고 살았다.
아침에 집 안으로 들어가 물뿌려 소제 하니 아버지가 성내어 또 쫓아 냈다. 이에 마을 입구에 초막을 짓고 살면서 이른 새벽과 밤으로 문안 드리는 예절을 폐하지 않았다. 한 해가 넘으니 부모가 부끄럽게 여겨 돌아오게 했고, 그 뒤 부모의 상을 당하여 슬퍼함이 지나칠 정도였다.
얼마 안되어 아우의 아들이 재산을 나누어 따로 살기를 요구하니, 포가 능히 말리지 못하여 그 재산을 반씩 나누게 되었는데, 노비(奴婢)로는 늙은 자를 이끌면서 말하기를 " 나와 함께 일한지 오래이니 너는 부릴 수 없을 것이다." 하였고,
전지(田地)와 농막은 거칠고 기울어진 것을 차지하면서 말하기를 " 내 어렸을 적부터 관리하던 것이니 마음에 미련이 있다." 하였다.
아우의 아들이 여러 번 그 재산을 없앴는데 그 때마다 다시 구제해 주었다. -資治通鑑-
*薛包 설포 : 여남(汝南)사람으로 자는 맹상(孟嘗)이다.
*被毆杖 피구장 : 몽둥이로 구타 당함.
*晨昏不廢신혼불폐 :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는 예절을 폐하지 않음. *弟子: 아우의 아들,
*中分其財 : 그 재산을 절반으로 나눔.
*荒頓황돈 : 황은 전지가 거치른 것이고 돈은 집이 기울어지고 허술함.
善行,011
王祥性孝. 蚤喪親, 繼母朱氏不慈, 數譖之. 由是失愛於父, 每使掃除牛下, 祥愈恭謹,
父母有疾, 衣不解帶, 湯藥必親嘗, 母嘗欲生魚. 時天寒冰凍,
祥解衣, 將剖冰求之. 冰忽自解, 雙鯉躍出, 持之而歸.
母又思黃雀炙. 復有雀數十, 飛入其幕, 復以供母. 鄕里警嘆, 以爲孝感所致.
有丹柰結實, 母命守之, 每風雨祥輒抱樹而泣, 其篤孝純至如此.
왕상(王祥)은 성품이 효성스러웠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주씨(朱氏)가 자애(慈愛)하지 못하여 자주 헐뜯어 말하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에게 사랑을 잃어 매양 쇧똥을 소제하게 했는데, 상은 더욱 공순(恭順)하고 삼갔다.
부모가 병이 있으면 옷의 띠를 풀지 않았고 약을 달이면 반드시 몸소 맛을 보았다. 어머니가 일찍이 생어(生魚)를 먹고자 했는데, 이때 날이 추워서 얼음이 얼었다.
상이 옷을 벗고 얼음을 깨고서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니, 얼음이 저절로 홀연히 풀리면서 두 마리의 잉어가 뛰어나와 가지고 돌아왔다.
어머니가 또 참새구이를 먹고 싶어 하니, 다시 참새 수십 마리가 그의 방 안으로 날아들어서 또 어머니에게 공궤(供饋)했다, 향리(鄕里) 사람들이 이말을 듣고 놀라고 감탄하여,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켜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했다.
단내(丹奈)가 열매 맺은 것이 있어 어머니가 지키기를 명했는데, 바람 불고 비올 때마다 상이 문득 나무를 안고서 울었다. 그 독실한 효성이 순수하고 지극함이 이와 같았다. -晉書 王祥列傳-
*王祥 : 낭야(낭揶)사람으로 자는 휴징(休徵)이다. *蚤 일찍이
*譖之참지 : 譖참소 함 .거짓말 참.
*湯藥親必嘗 : 아비의 한약을 달이면 몸소 맛보는 것. *剖氷求之부빙구지 :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구함.
*雙鯉쌍리. 잉어 두마리.*黃雀炙황작자 : 참새 구이.
*孝感所致 효감소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켜서 그렇게 된것. *丹奈단내 과일 이름.
善行,012
王裒字偉元. 父儀爲魏安東將軍司馬昭司馬. 東關之敗, 昭問於衆曰, 近日之事誰任其咎. 儀對曰, 責任元帥. 昭怒曰, 司馬欲委罪於孤耶. 遂引出斬之.
裒痛父非命, 於是隱居敎授, 三徵七辟, 皆不就, 廬于墓側, 旦夕, 常至墓所, 拜跪, 攀栢悲號, 涕淚著樹. 樹爲之枯.
讀詩, 至哀哀父母, 生我劬勞, 未嘗不三復流涕. 門人受業者, 並廢蓼莪之篇.
家貧躬耕, 計口而田, 度身而蠶. 或有密助之者, 裒皆不聽. 及司馬氏簒魏, 裒終身未嘗西向而坐, 以示不臣于晉.
왕부(王裒)의 자는 위원(偉元)이다 아버지 의(儀)가 위(魏)나라 안동 장군(安東將軍) 사마소(司馬昭)의 사마(司馬)가 되었다. 동관(東關)의 싸움에서 패하고 나서 소가 사람들에게 묻기를 " 근일(近日)에 있었던 일는 누가 죄를 받아야 하나?" 하니,의가 대답하기를 "책임이 원수(元帥)에게 있읍니다." 하였다. 소가 성내어 말하기를" 사마는 죄를 고(孤)에게 씌우려는가?" 하고 드디어 끌어내서 목베어 죽였다.
부는 아버지가 비명(非命)에 죽은 것을 슬퍼하여 숨어 살면서 후진(後進)을 가르쳤다. 조정에서 세번 부르고, 군국(郡國)에서 일곱 번 거용(擧用)했으나 모두 가지 않았다. 무덤 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거처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항상 묘소에 이르러 절하고 꿇어 앉아 잣나무를 붙들고 슬피 울부짖었는데 , 눈물이 나무에 묻으면 나무가 시들었다.
시경을 읽다가 " 애닯다 부모님 나를 낳으심이 수고로우셨네." 하는 글귀에 이르면 일찍이 세번 되풀이 하여 읽고서 눈물 흘리지 않는 때가 없었다. 그의 문인(門人)들이 모두 육아(蓼莪)의 편(篇)을 빼버리고 외우지 않았다.
집이 가난하여 몸소 농사지었다. 식구를 계산하여 밭 갈고, 옷 입을 몸을 헤아려 누에를 쳤는데, 혹시 남모르게 도와 주는 이가 있어도 부는 모두 받지 않았다. 사마씨(司馬氏)가 위(魏)나라를 찬탈(纂奪)하니 부는 몸이 마칠 때까지 끝내 서쪽을 향하여 앉지 않아서 진(晉) 나라에 대하여 신하 노릇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다, -晉書 혼우列傳-
*王裒왕부: 위 나라 사람으로 자는 위원. *裒부. 모을 부, 감할 부.
*東關之敗 : 위(魏) 나라 가평(嘉平) 4년에 오(吳) 나라의 장군 제갈각(諸葛恪)이 동관에서 위나라 군대를 깨뜨렸음.
*三徵七辟삼징칠벽 : 辟벽. 피할 피. 임금 벽, 여기서는 부를 벽. (세상(世上)을 피(避)하여) 숨어서 사는 선비를 임금이 부르던 일
*跪궤 : 꿇어 앉을 궤. 拜跪 절하고 꿇어앉음 *攀반 휘어잡을 반. 당길 반. *度身而蠶 : 옷 입을 사람을 헤아려서 누에를 침. *司馬氏纂魏사마씨찬위: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司馬炎)이 위나라를 멸하고 진 나라를 세웠음. 纂찬. 신하가 무력으로 나라를 빼앗는 것. *蓼육 여뀌 료. 풀입긴모양 육.
善行,013
晉西河人王延事親色養. 夏則扇枕席, 冬則以身溫被, 隆冬盛寒, 體常無全衣, 而親極滋味.
진 나라 서하(西河) 사람 왕연(王延)이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얼굴 빛을 온화하고 즐겁게 하여 봉양했다. 여름이면 베게와 자리에 부채질하고, 겨울이면 몸으로 이불을 따뜻하게 했으며, 깊은 겨울 심한 추위에도 몸에 항상 온전한 옷이 없으면서도 어버이에게는 맛있는 음식을 극진히 대접했다. -晉書 혼우列傳-
善行,014
柳玭曰, 崔山南昆弟子孫之盛, 鄕族罕比. 山南曾祖王母長孫夫人, 年高無齒, 祖母唐夫人, 事姑孝, 每旦櫛縰笄, 拜於階下, 卽升堂, 乳其姑. 長孫夫人, 不粒食數年而康寧.
一日疾病, 長幼咸萃. 宣言無以報新婦恩. 願新婦有子有孫, 皆得如新婦, 孝敬, 則崔之門, 安得不昌大乎.
유변이 말하기를 " 최산남(崔山南)은 형제 자손의 번성(繁盛)함이 한 고을 안의 다른 집안에 비할 이가 드물었다. 산남의 증조모 장손부인(長孫夫人)은 나이 많고 치아가 없었는데 조모 당부인이 시어머니 섬김을 효성으로 했다. 아침마다 머리 빗고, 검은 비단으로 머리를 묶고 , 비녀 꽂고서 (시어어니의 처소에 나아가) 섬돌 아래서 절하고, 곧 마루에 올라 시어머니에게 젓을 먹였다. 장손부인은 곡식 한 알 먹지 않은 지 몇 해가 되어도 몸이 건강했다.
하루는 장손 부인이 병이 위독하여 어른과 어린이가 모두 모였는데, 장손 부인이 선언(宣言)하기를 모두 며느리와 효도하고 공경하는 것 같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최씨의 가문(家門)이 어찌 번창하고 성대하지 않으랴." 하였다. -唐書, 柳玭列傳-
*櫛 빗 즐.빗 질할 즐. 즐비할 즐. *縰쇄 머리싸게 사. 비단댕기 사. *笄계 : 비녀 계.
*曾祖王母 : 왕은 大와 통하여 존칭이니 증조모를 높여서 부르는말.
善行,015
南齊庾黔婁爲孱陵令, 到縣未旬父易在家遘疾. 黔婁忽心驚, 擧身流汗, 卽日棄官歸家. 家人悉驚其忽至.
時易疾始二日. 醫云, 欲知差劇, 但嘗糞甛苦. 易泄利, 黔婁輒取嘗之. 味轉甛滑, 心愈憂苦, 至夕每稽顙北辰, 求以身代.
남제(南齊)의 유검루(庾黔婁)가 잔릉(孱陵) 고을의 영(令)이 되었는데 고을에 도임(到任)한지 열흘도 채 못되어서 아버지 이(易)가 집에서 병에 걸렸다. 검루가 홀연히 마음이 놀라면서 온 몸에 땀이 흘렀으므로, 그날로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오자, 집안 사람들은 모두 별안간 돌아온 것에 놀랐다.
이때 이가 병든지 이틀이었는데 의원(醫院)이 말하기를 " 병이 더하고 덜한 것을 알려면 오직 똥이 달고 쓴 것을 맛보는 방법 밖에 없다." 하였다. 이가 설사를 하니, 검루가 곧 찍어서 맛보았는데 맛이 달고 미끄러웠다. 검루가 마음으로 더욱 근심하고 괴로워하여 밤이 되면 매양 북극성(北極星)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면서 자기의 몸으로 아버지의 병을 대신하기를 빌었다. -南史, 庾黔婁列傳-
*南齊 : 남조(南朝)이 제(齊)나라을 일컷는 말임
*嘗糞甛苦상분첨고 : 똥이 달고 쓴것을 맛봄.
*稽顙北辰계상북신 : 계상은 이마를 땅에 대고 절하는것이고 북신은 북극성 . 稽顙 계상①극진(極盡)히 존경(尊敬)하여 이마가 땅에 닿도록 몸을 굽혀 절함. 계수(稽首). 돈수 ②계상 재배(稽顙再拜)
善行,016
海虞令何子平, 母喪去官, 哀毁踰禮, 每哭踊頓絶方蘇. 屬大明末東土饑荒, 繼以師旅. 八年下得營葬, 晝夜號哭,
常如袒括之日, 冬不衣絮, 夏不就凊凉, 一日以米數合, 爲粥, 不進鹽菜.
所居屋敗, 不蔽風日, 兄子伯興欲爲葺理, 子平不肯曰, 我情事未申. 天地一罪人耳. 屋何宜覆.
蔡興宗爲會稽太守, 甚加矜賞, 爲營塚壙.
해우(海虞)의 영(令) 하자평(何子平)이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 왔으며, 슬퍼하여 몸을 손상함이 예의 한도(限度)를 넘었다. 몸부림쳐 통곡할 때마다 갑자기 숨이 끊어졌다가 겨우 살아 나곤 했다.. 때는 대명(大明) 말년으로 동쪽지방이 흉년이 든데다 전쟁이 계속되어 8년 동안이나 장사를 지낼 수 없게 되자 밤낮으로 부르짖어 통곡했다.
항상 처음 상사(喪事)를 당한 때와 같이 하여 겨울에 솜옷을 입지 앟았고, 여름에 서늘한 곳에 가지 않았으며, 하루에 쌀 두어 홉으로 죽을 끓여 먹고 소금과 채소를 먹지 않았다.
거처하는 집은 지붕이 무너져서 바람과 햇볕을 가리지 못하니 형의 아들 백흥(伯興)이 지붕을 덮고 수리하고저 해도 자평이 즐겨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 내가 정례(情禮)를 다하지 못했으니 하늘과 땅 사이의 한 죄인이다. 지붕을 어찌 덮으랴." 하였다.
채흥종(蔡興宗)이 회계 태수(會稽太守)가 되자 그를 매우 불쌍히 여기고 가상(嘉賞)하여 무덤을 만들어 장사지내게 했다. -南史, 孝義列傳-
*哭踊 곡용 : 곡하고 뜀 용은 슬픔을 표시하는 의식. *頓絶돈절 : 갑자기 숨이 끊어 짐.(소식등이) 끊어짐
*袒括단괄 : 윗옷을 벗고 머리를 묶는 것.처음 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하는예법임.
*葺里즙리: 지붕을 덮어 집을 수리하느것. 葺 (지붕을) 이다.깁다.
善行,017
朱壽昌生七歲, 父守雍. 出其母劉氏, 嫁民間. 母子不相知者, 五十年. 壽昌行四方, 求之不已, 飮食罕御酒肉, 與人言輒流涕.
熙寧初棄官入奏, 與家人訣, 誓不見母, 不得還. 行次同州, 得焉. 劉氏時年七十餘矣. 雍守錢明逸以事聞, 詔壽昌還就官. 繇是天下皆知其孝.
壽昌再爲郡守. 至是, 以母故通判河中府, 迎其同母弟妹以歸. 居數歲母卒, 涕泣幾喪明. 拊其弟妹益篤, 爲買田宅居之,
其於宗族, 尤盡恩意, 嫁兄弟之孤女二人, 葬其不能葬者十餘喪. 盖其天性如此.
주수창(朱壽昌)이 나이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옹주(雍州)의 수령(守令)으로 있으면서 그 어머니 유씨(劉氏)를 내보내서 민간(民間) 사람에게 시집가게 했다. 그 후 모자가 서로 소식을 알지 못한 지 50년이 되었다. 수창이 사방으로 찾아 다녔으나 찾지 못하자, 음식을 들 때 술과 고기를 먹는 일이 드물었으며 남과 말하다가 문득 눈물을 흘리곤 했다.
희녕(熙寧) 초에 벼슬을 버리고 진(秦)으로 들어가면서 집안 사람과 결별(訣別)하기를 "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면 맹세코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하였다. 길을 가다 동주(同州)에 투숙(投宿)했을 때 어머니를 만났는데, 그때 유씨의 나이 70여 세였다. 옹주의 수령 전명일(錢明逸)이 이 일을 조정(朝廷)에 보고하니, 조서(詔書)를 내려 수창에게 돌아가 벼슬에 나아가라고 했다. 이 일로 하여 천하 사람이 모두 그 효성을 알게 되었다.
수창이 다시 군수가 되더니, 어머니를 위하여 동주에 가까운 하중부(河中府)의 통판(通判)이 되어서 그 동모제(同母弟)와 누이를 맞아 돌아 왔다. 몇 해를 지낸 뒤 어머니가 죽으니 눈물을 흘려서 거의 실명(失明) 할 뻔했다. 그 아우와 누이를 사랑하고 돌보기를 더욱 극진히 하며, 전지(田地)와 집을 사주어서 살게 했다.
그리고 자신의 종족에 대해서도 은정(恩情)을 극진히 하고, 그 형과 아우의 아버지를 여읜 딸 두 사람을 시집보내 주었으며, 그 종족 중에 집이 가난하여 장례(葬禮)를 치르지 못하는 것을 장사지내 줌이 열(十)을 넘었다. 그 천성(天性)이 어질기 이와 같았다. -宋史, 孝義列傳-
*守雍 : 옹주의 수령.*行次同州 : 숙소를 정하여 투숙하는 것.
*繇 말미암을 유.역사 요. *通判河中府: 통판을 수령을 보좌하는 벼슬아치.관리. 河中府 고을이름.
*孤女 :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만 있는, 상중에 있는 여자(女子)가 자기(自己)를 일컫는 말. 아비 없는 딸.
善行,018
伊川先生家, 治喪. 不用浮屠. 在洛亦有一二人家化之.
이천 선생 집의 치상(治喪)에 부도(浮屠)를 쓰지 않았는데, 낙양(洛陽)에서 한두 사람의 집이 그 감화를 받았다. -이정전서(二程全書)-
*浮屠 :중. 불교의식을 말함.
註 : 이천 선생의 집 상사에 불교의식을 쓰지 않음을 논했다. 이 글로 미루어서 송나라 시대에도 불교가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이기석의 소학)
善行,019
霍光出入禁闥二十餘年, 小心謹愼, 未嘗有過. 爲人沈靜祥審, 每出入下殿門, 進止有常處. 郎僕射竊識視之. 不失尺寸.
곽광이 궁궐 문을 드나든 지 20여 년에 조심하고 삼가서 일찍이 허물이 없었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고요하여 자세히 살핌으로, 궁궐을 드나들 때마다 전문(殿門)에서 수레를 내릴 때 나아가고 멈추는 곳이 일정했다. 낭(郎)과 복야(僕야)가 남모르게 그 위치를 표지해 두고 보니 한 자 한 치도 어김이 없었다. -漢書, 霍光列傳-
註 : 곽광(霍光, ?~BC 68)은 전한(前漢)의 정치가로 자는 자맹(子孟), 시호는 선정(宣政)이다. 하동 평양(河東平陽: 山西省 臨汾縣) 출생.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霍去病)의 이복 동생이었지만 곽거병과는 달리 성격이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무제 사후 소제를 보필, 정사를 집행했다. 소제의 형인 연왕 단의 반란을 기회로 상관걸 등 정적을 타도, 실권을 장악하였다. 소제 사후 창읍왕의 제위를 박탈하고, 선제를 즉위시켜 20여 년 동안 권력을 누렸다.
善行,020
汲黯景帝時, 爲太子洗馬, 以嚴見憚. 武帝卽位, 召爲主爵都尉. 以數直諫, 不得久居位. 是時太后弟武安侯田蚡爲丞相. 中二千石拜謁, 蚡弗爲禮. 黯見蚡未嘗拜, 揖之.
上方招文學儒者. 上曰, 吾欲云云. 黯對曰, 陛下內多欲而外施仁義. 奈何欲效唐虞之治乎.
上怒變色而罷朝. 公卿皆爲黯懼. 上退謂人曰, 甚矣. 汲黯之戇也.
群臣或數黯, 黯曰, 天子置公卿輔弼之臣, 寧令從諛承意, 陷主於不義乎. 且已在其位. 縱愛身, 奈辱朝廷何.
黯多病, 病且滿三月, 上常賜告者, 數, 終不癒. 最後嚴助爲請告. 上曰, 汲黯何如人也. 曰, 使黯任職居官, 亡以癒人, 然至其輔少主守成, 雖自謂賁育, 弗能奪也. 上曰, 然. 古有社稷之臣. 至如汲黯, 近之矣.
大將軍靑侍中上踞厠視之, 丞相弘宴見, 上或時不冠, 至如見黯, 不冠而見也. 上嘗坐武帳. 黯前奏事. 上不冠, 望見黯避帷中, 使人可其奏. 其見敬禮如此.
급암이 경제(景帝) 때 태자세마(太子洗馬)가 되었는데, 엄격함으로써 타인의 꺼림을 받았다. 무제(武帝)가 즉위하자 불러서 주작도위(主爵都尉)를 삼았으나 자주 직간(直諫)함으로서 오래도록 그 자리에 있지 못했다. 이때 태후(太后)의 아우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이 승상(丞相)으로 있었는데 , 중이천석(中二千石)이 가서 절하여 뵈니 분이 답례를 하지 않으므로, 암이 분을 볼 때에는 절하지 않고 읍(揖)만 했다.
임금이 바야흐로 문학하는 선비를 부르고 있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 내 장차 이러이러하게 말 하리라." 하니, 암이 대답하기를 " 폐하께서 마음속에는 욕심이 많고 겉으로만 인의(仁義)를 베푸시면서 어떻게 당우(唐虞)의 정치를 본받으려 하십니까?" 하였다.
임금이 성내어 얼굴 빛을 변하고 조회(朝會)를 파하니, 공 경(公卿)이 모두 암을 위하여 두려워했다. 임금이 물러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 심하다. 암의 어리석음이여." 하였다.
신하들 중에 어떤이가 암을 나무라니, 암이 말하기를 " 천자가 공경(公卿) 같은 보필(輔弼)하는 신하를 두는 것이 어찌 순종하고 아첨하여 뜻을 받들어서 임금을 불의(不義)에 빠뜨리게 하려는 것인가, 그리고 이미 그 벼슬 자리에 있으니, 비록 몸을 사랑하나 어찌 조정을 욕되게 버려둘 수 있겠는가." 하였다.
암은 병이 많았으며 병이 석달이 찼다. 임금이 말미를 줌이 여러번이었으나 끝내 낫지 못했다. 최후로 엄조(嚴助)가 암을 위하여 말미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 급암은 어떻한 인물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 암에게 직책을 맡겨 벼슬 자리에 있게 한다면 남보다도 나을 것이 없으나, 어린 임금을 도와 왕업(王業)을 지켜 이루는 일에 이르러서는 비록 스스로 맹분(孟賁). 하육(夏育)의 용맹이 있음을 일컫는 자라도 능히 그 절조(節操)를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 그렇다 옛날에 사직의 신하(社稷之臣)가 있다고 했는데, 급암은 여기에 가깝다>" 하였다.
대장군(大將軍) 위청(衛靑)이 궁중에서 모실 때에는 임금이 평상(平床) 가에 걸터앉아서 보고, 승상 공손 홍(公孫弘)이 한가로이 뵈오면 어떤 때는 관(冠)을 쓰지 않기도 했으나, 급암을 볼 때에는 관을 쓰지 앟고는 보지 않았다. 임금이 일찍이 무장에 앉았는데 암이 앞으로 나아가 말을 아뢰었다. 임금이 관을 쓰지 않고 있다가 암을 바라보고는 장막 안으로 몸을 피하고 사람을 시켜 그 아룀을 옳다 했으니, 그 공경하는 예절을 보임이 이와 같았다. -漢書, 汲黯列傳-
*蚡분 : 두더지 분, *太子洗馬 : 태자궁의 벼슬아치.
*以嚴見憚 : 엄격함을 가지고 꺼림을 받음.급암을 경계하고 꺼림. *中二千石 : 1년의 녹봉이 2천석에 이름을 말함.
*唐虞之治당우지치 : 요 순(堯舜의 정치를 말함. *戇은 어리석을 당. 戇愚 당우 어리석음.
*公卿 : 삼공(三公), 구경(九卿)으로 임금을 보필하는 중요한 벼슬아치.
*病且滿三月 : 병들어서 만 3개월이 됨 *亡以踰人무이유인 : 남보다 나을 것이 없는 것. 亡 없을 무.
*厠측 : 평상가장자리 치. 뒷간 치. 섞일 치. 기울 칙.
*靑: 위청(衛靑), 자는 중경(仲卿)으로 흉노를 처서 대장군이 됨, *宴見연현: 한가로운 때 임금을 뵙는 것.
*帷 휘장 유. 장막유.
註 - 급암(汲黯) : 중국 전한(前漢) 무제 때의 간신(諫臣, ?~B.C.112). 자는 장유(長孺). 성정이 엄격하고 직간을 잘하여 무제로부터 ‘사직(社稷)의 신하’라는 말을 들었다. 무제 때 주작도위(主爵都尉)가 되었으며, 9경(九卿)의 한 사람이 되었다. 승상(丞相) 장탕(張湯)과 어사대부(御史大夫) 공손 홍(公孫弘) 등을 법률 만능주의자요 천자에게 아첨하는 영교지도(쌍巧之徒)라 비난하고, 황로지도(黃老之道) · 무위(無爲)의 정치를 주장하며 왕에게 간(諫)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회양태수(淮陽太守)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善行,021
初魏遼東公翟黑子, 有寵於太武. 奉使幷州, 受布千疋. 事覺,
黑子謀於著作郎高允曰, 主上問我, 當以實告. 爲當諱之.
允曰, 公帷幄寵臣. 有罪首實, 庶或見原, 不可重爲欺罔也.
中書侍郞崔鑑公孫質曰, 若首實, 罪不可測. 不如姑諱之.
黑子怨允曰, 君奈何誘人就死地. 入見帝, 不以實對, 帝怒, 殺之.
帝使允授太子經. 及崔浩以史事被收, 太子謂允曰, 入見至尊, 吾自導卿. 脫已尊有問, 但依吾語.
太子見帝言, 高允小心愼密, 且徵賤. 制由崔浩. 請赦其死.
帝召允問曰, 國書皆浩所爲乎. 對曰, 臣與浩共爲之. 然浩所領事多. 總裁而已, 至於著述, 臣多於浩.
帝怒曰, 允罪甚於浩. 何以得生. 太子懼曰, 天威嚴重. 允小臣. 迷亂失次耳. 臣曏問. 皆云, 浩所爲.
帝問允, 信如東宮所言乎. 對曰, 臣罪當滅族. 不敢虛妄. 殿下以臣侍講日久. 哀臣, 欲丐其生耳, 實不問臣, 臣亦無此言. 不敢迷亂.
帝顧謂太子曰, 直哉. 此人情所難, 而允能爲之. 臨事不易辭信也. 爲臣不欺君貞也. 宜特除其罪, 以旌之. 遂赦之.
他日太子讓允曰, 吾欲爲卿脫死, 而卿不從何也. 允曰, 臣與崔浩實同史事. 死生榮辱, 義無獨殊. 誠荷殿下再造之慈, 違心苟免, 非臣所願也. 太子動容稱嘆.
允退謂人曰, 我不奉東宮指導者, 恐負翟黑子故也.
처음에 위(魏) 나라의 요동공(遼東公) 적흑자(翟黑子)가 태무(太武)에게 총애(寵愛)를 받았다. 명을 받들어 병주(幷州)에 사신으로 가서 베 1000필(匹)을 뇌물로 받았다가 일이 발각되었다.
흑자가 저작랑(著作郞) 고윤(高允)에게 의논하여 말하기를 "주상(主上)께서 내게 물으시거든 마땅히 사실대로 고(告)할까, 은휘(隱諱)하여 말할 까?" 하니,
윤이 말하기를 " 공(公)은 유악(帷幄)의 총애받는 신하입니다. 죄가 있어 사실대로 자수(自首)하면 혹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임금을 거듭 속여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중서시랑(中書侍郞) 최감(崔鑑)과 공손 질(公孫質)이 말하기를 " 만약 사실대로 자수하면죄를 예측할 수 없다. 잠시 은휘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흑자가 윤을 원망하여 말하기를 " 그대는 어찌하여 남을 유인(誘引)하여 죽음의 땅으로 나가게 하는가." 하고 들어가 임금을 뵙고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임금이 성내어 흑자를 죽였다.
임금이 윤으로 하여금 태자(太子)에게 경서(經書)를 가르치게 했다. 최호(崔浩)가 나라의 사기(史記)의 일로 제포 되자, 태자가 윤에게 말하기를 " 들어가 임금에게 뵙고 내 스스로 그대를 살 길로 인도(引導)하겠다. 만일 임금께서 물으심이 있거든 다만 내말대로 하라." 하였다.
태자가 가서 임금을 뵙고 말하기를 " 고윤이 일을 조심하고 삼가며 또 지위가 미천(微賤)합니다. 글을 만들어 모두 최호에게서 나왔으니 첯컨대 그 죽음을 사(赦)하십시오." 하였다.
임금이 윤을 불러 묻기를 " 국서(國書)는 모두 호가 만든 것인가?"하니, 대답하기를 " 신과 호가 함께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호는 맡아 보는 일이 많아서 전체를 총괄하여 결재(決裁)했을 뿐이고, 글을 만든 것은 신이 호보다도 많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성내어 말하기를 " 윤의 죄가 호보다도 더하니 어찌 살아 남을 수 있겠는가." 하니, 테자가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천위(天威)가 엄중하신지라, 윤은 조그만 신하가 되어 정신이 아득하고 어지러워서 말이 차례를 잃은 것입니다. 신이 지난 번에 물으니 모두 호가 만든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윤에게 묻기를 " 참으로 동궁이 말한 것과 같은가?" 하니, 대답하기를 " 신의 죄는 멸족(滅族)에 해당합니다. 감히 허망한 말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신이 곁에 모시어 강론(講論)함이 오래임을 가지고 신을 가엽게 여기시어 살려주심을 빌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실지는 신에게 묻지도 않으셨고 신도 또한 이같은 말을 한 일이 없습니다. 감히 정신이 아득하고 어지럽다고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태자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 곧도다. 이는 인정(人情)이 하기 어려운 것인데도 윤이 능히 했구나. 죽음에 임하여 말을 바꾸지 않음은 믿음이고, 신하가 되어서 임금을 속이지 않음은 곧음이다. 특별히 그 죄를 면제하고 정표애햐 마땅하다." 하고 마침내 그 죄를 용서해 주었다.
다른 날에 태자가 윤을 꾸짖어 말하기를 " 나는 그대를 죽음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했는데, 그대가 좇지않음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윤이 대답하기를 " 신이 최호와 더불어 실지로 나라 사기(史記)의 일을 함께 했으니, 사생 영욕(死生榮辱)을 으리로 보아 저 혼자만 달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진실로 목숨을 사려주시려는 전하의 인자(仁慈)하신 뜻을 받았습니다만 양심을 어겨서 구차하게 죄를 면하는 것은 신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태자가 얼굴빛을 움직이며 감탄하여 칭찬했다.
윤이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 내가 동궁의 지도(指導)를 받들지 않은 것은 적흑자를 저버릴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하였다. -北史, 高允列傳-
*魏 : 여기서는 원위(元魏)를 말하고 척발위(拓跋魏)또는 북위(北魏)라함.
*太武 : 원위의 3대 임금 세조(世祖)를 말함.
*帷幄유악 : 대장(大將)이 작전 계획을 세우는 진영안의 군막(軍幕). 帷 장막 유. 휘장 유.
*疋 필 필. 발 소. 피륙.匹(옷감을 세는 단위)
*曏향 : 지난번 향. 향할 향. 밝을 향. 접때 향. *旌之정지 : 정 표. 선행을 표창하는 것.
*丐 빌 개. 거지 갈. 줄 갈.
적흑자는 병주(幷州)로 사신으로 가서 베 1000필을 뇌물로 받고 일이 발각되어 임금의 신문(訊問)을 받게 되자 , 사실대로 고하지 않고 거짓을 말했다가 자기 몸 뿐이 아니고 일족(一族)이 모두 죽음을 당했다. 고윤은 위나라 사기(史記)를 편수(編修)한 필화 사건으로 임금의 신문을 받았는데 태자의 옹호를 물리치고 바른 대로 고하여 죄를 용서받았을 뿐만아니라 표창하는 은전(恩典)까지 입었다. 허물이 있을 때는 솔직히 고하고 벌을 받아야지 억지로 모면하려 거짓말을 하다가는 도리어 더 큰 재앙을 부르게 된다는 교훈이다.
善行,022
李君行先生名潛. 虔州人. 入京師. 至泗州, 留止. 其子弟請先往,
君行問其故. 曰, 科場近. 欲先至京師, 貫開封戶籍, 取應.
君行不許曰, 汝虔州人, 而貫開封戶籍, 欲求事君, 而先欺君, 可乎. 寧遲緩數年, 不可行也.
이군행(李君行) 선생의 이름은 잠(潛)으로 건주(虔州) 사람이다, 경사(京師)에 들어 갔다가 사주(泗州)에 이르러 머물러 있으니, 그 자제가 먼저 가기를 청했다.
군행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 과거볼 날이 가까웠습니다. 먼저 경사로 가서 개봉(開封)의 호적(戶籍)에 이름을 넣어 응시(應試)할 자격을 받고자 합니다." 하였다.
군행이 허락지 않고 말하기를 " 너는 건주 사람이면서 개봉의 호적에 이름을 넣는다면, 임금을 속이는 것이다. 어찌 옳다고 하랴. 차라리 몇 해 늦어지더라도 그런 일은 해서는 안된다." 하였다. -童蒙訓-
善行,023
崔玄暐母盧氏嘗誡玄暐曰, 吾見姨兄屯田郞中幸玄馭. 曰, 兒子從宦者, 有人來云, 貧乏不能存. 此是好消息, 若聞貲貨充足, 衣馬輕肥. 此惡消息. 吾嘗以爲確論.
比見親表中仕宦者, 將錢物, 上其父母父母但知喜悅, 竟不問此物, 從可而來. 必是祿俸餘資, 誠亦善事, 如其非理所得, 此如盜賊何別. 縱無大咎, 獨不內愧於心.
玄暐遵奉敎誡, 以淸謹見稱.
최현위(崔玄暐)의 어머니 노씨(盧氏)가 일찍이 현위를 경계하여 말하기를 " 내가 이종형 둔전랑중(屯田郞中) 신현어(辛玄馭)를 만나보니 말하기를 '자식으로서 벼슬에 종사하는 자에 대하여 남이 와서 말하기를, 가난하고 궁핍하여 살기 어렵다고 한다면 그것은 좋은 소식이지만, 만약 재물이 풍족하여 옷이 가볍고 말이 살찌더라고 한다면 그것은 나쁜 소식이다.' 하니 , 나는 일찍이 이 말을 확론(確論)으로 생각했다.
요사이 보니, 동성(同姓)과 외성(外姓)의 친족 중에 벼슬살이 하는 자가 돈과 물건을 가져다가 그 부모께 드리면 부모는 오직 기뻐할 줄만 알고, 마침내 그 물건이 어디에서 나온 것임을 묻지 않는다. 반드시 녹봉(祿俸)을 받아 쓰고 남은 것이라면 참으로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도리에 맞지 않게 얻어진 것이라면 이는 도적과 무엇이 다르랴, 설사 큰 허물을 받음이 없다 하더라도 홀로 내심에 부끄럽지 않으랴." 하였다.
현위는 훈계(訓戒)를 지켜서 청념하고 근신하기로 세상 사람의 칭송을 받았다. -唐書, 崔玄暐列傳-
*從宦: 벼슬에 종사하는것. *貲貨 자화: 재물. 貲자: 재물 자.
*終無大咎종무대구 : 설사 큰죄를 받음이 없다 해도,(끝내 큰 허물이 없어도)
善行,024
劉器之待制初登科, 與二同年, 謁張觀參政. 三人同起身, 請敎,
張曰, 某自守官以來常持四字. 勤謹和緩.
中間一後生應聲曰, 勤謹和旣聞命矣. 緩之一字某所未聞. 張正色作氣曰, 何嘗敎賢緩不及事.
且道世間甚事不因忙後錯了.
대제 유기지가 처음 과거에 올랐을 때 동년(同年)의 두사람과 함께 참정(參政) 장관(張觀)을 가서 뵈었다. 세사람이 일제히 몸을 일으켜서 가르침을 청하니,
장이 말하기를 " 나는 벼슬길에 나온 뒤로 네 글자를 마음에 간직하고 있으니, 부지런할 근(勤), 삼갈 근(謹), 화할 화(和), 느릴 완(緩)이다." 하였다.
그중의 후생(後生)이 그 말에 응하여 말하기를 "부지런할 근, 삼갈 근, 화할 화 석자는 이미 가르침을 들어서 알겠습니다만, 느릴 완 한 글자는 아직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장(張)이 얼굴빛을 바르게 하고 기운을 엄숙히 하여 말하기를 " 어찌 어진 선비에게 이완(弛緩)하여 일을 제 때 처리하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랴.
다시 말하거니와 이 세상의 무슨 일이든 바쁘게 처리하여 그릇치지 않는 것이 있었단 말인가." 하였다. -宋名臣言行錄-
*劉器之 : 이름은 안세(安世), 기지는 자임
*張觀參政장관참정 : 참정은 참지정사(參知政事)의 준말.張觀의 자는 사정(思正)으로 산서(山西)의 강주(絳州) 사람. *中間一後生 : 그중의 한 젊은 이.
*緩不及事 : 일을 더디게 하여 제때 처리하지 못함.
註 : 유기지(劉器之)는 북송의 정치가로 이름은 안세(安世), 자는 기지(器之). 사마광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벼슬이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이르렀다. 강직한 성품으로 널리 세상에 알려졌으며, 사람들은 그를 원성(元城)선생으로 불렀다. (윤호창의 소학)
善行,025
伊川先生曰, 安定之門人, 往往知稽古愛民矣. 則於爲政也何有.
이천선생이 말하기를 " 안정(安定)의 문인(門人)이 왕왕 옛일을 상고하여 백성을 사랑할 줄 아니, 정사(政事)를 하는데 무엇이 어려움이 있으랴." 하였다. -二程全書-
*安定 : 안정선생 호원(胡瑗)을 말함.
*稽古愛民 : 옛사람의 행적을 상고하여 백성을 사랑하는 도리를 아는것.
善行,026
呂滎公自少官守處, 未嘗干人擧薦. 其子舜從守官會稽, 人或譏其不求知者,
舜從對曰, 勤於職事, 其他不敢不愼. 乃所以求知也.
여형공이 소시(少時)로부터 벼슬 자리에 대하여 일찍이 남에게 천거해 주기를 부탁하는 일이 없었다. 그의 아들 순종(舜從)이 회계(會稽)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은 것을 나무라니,
순종이 대답하기를 " 맡은 바 직무에 부지런하고 그밖의 일들을 감히 삼가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이 바로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는 것이다." 하였다. -童蒙訓-
*干人擧薦 : 간은 求와 같고, 거천은 천거하는 것이니, 남에게 천거해주기를 부탁하는것.
*舜從 순종: 여형공의 둘째 아들. 의문(疑問)을 말함
善行,027
漢陳孝婦年十六而嫁, 未有子. 其夫當行戍, 且行時屬孝婦曰, 我生死未可知. 幸有老母. 無他兄弟備養. 吾不還, 汝肯養吾母乎. 婦應曰, 諾.
夫果死不還, 婦養姑不衰, 慈愛愈固, 紡績織紝, 以爲家業, 終無嫁意.
居喪三年, 其父母哀其少無子, 而早寡也, 將取嫁之.
孝婦曰, 夫去時, 屬妾以供養老母, 妾旣許諾之. 夫養人老母, 而不能卒, 許人以諾, 而不能信, 將何以立於世. 欲自殺,
其父母懼, 而不敢嫁也, 遂使養其姑. 二十八年姑八十餘. 以天年終, 盡賣其田宅財物, 以葬之, 終奉祭祀.
淮陽太守以聞, 聞使使者, 賜黃金四十斤, 復之, 終身無所與. 號曰, 孝婦.
한 나라때 진(陳) 땅의 효부(孝婦)는 나이 16세에 시집갔으나 아들이 없었다. 그 남편이 수자리를 살러가게 되었는데, 떠나갈 때 효부에게 부탁하기를" 나의 생사(生死)는 알 수 없다. 다행이도 늙은 어머니께서 생존하여 계시나 봉양할 다른 형제가 없다. 내 살아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그대가 내 어머니를 즐겨 봉양하겠는가?" 하니, 아내가 대답하기를 "부탁하신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남편이 죽고 돌아오지 않았다. 며느리의 시어머니 봉양이 조금도 변함이 없으니, 시어머니의 며느리에 대한 자애(慈愛)와 며느리의 시어머니 사랑함이 더욱 굳었다. 길쌈으로 생업을 삼으면서도 종시 다른 데로 시집갈 뜻이 없었다.
3년상을 마치자, 그녀의 친정 부모가 딸이 자식도 없이 일찍 홀로 된 것을 가엾게 여겨 장차 데려다가 시집모내려 했다.
효부가 말하기를 " 남편이 떠날 때 첩(妾)에게 늙은 어머니 봉양하기를 부탁했고, 첩은 이미 그것을 허락했습니다.남의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여 능히 그 일을 마치지 못하고, 남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허락하고서 신의(信義)를 지키지 못한다면 장차 어떻게 세상에 설 수 있겠습니까?" 하고 스스로 죽으려고 했다.
그녀의 부모가 두려워하여 감히 시집보내지 못하고 드디어 시어머니를 봉양하게 했다. 28년만에 시어머니가 80여 세의 나이로 천명(天命)에 죽으니, 그 전지와 집과 재물을 모두 팔아서 장사지내고 끝까지 제사를 받들었다.
회양태수(淮養太守)가 이 일을 조정에 보고하니, 임금이 사신을 보내어 황금 40근을 주고, 복호(復戶)하여 죽을 때까지 호역(戶役)에 참여함이 없게 했으며,이름하여 효부라고 했다. -後漢書, 烈女傳-
*行戍 행수: 국경의 수비병으로 복무하러 가는것.
*慈愛愈固 자애유고 : 시어머니와 며느리에 대한 애경(愛敬)이 더욱 굳어 짐.
*紡績織紝방적직임 : 모두 길쌈함. 紝: 길쌈할 임. 짤 임.
*將取嫁之 : 장차 데려다가 시집보내려 함.
*復之 : 충신. 효자. 절부(節婦)의 집을 복원해주고 부역이나 잡세를 면체해주었음.
善行,028
漢鮑宣妻桓氏, 字少君. 宣嘗就少君父學. 父奇其淸苦, 故以女妻之.
將送資賄甚盛, 宣不悅, 謂妻曰, 少君生富驕, 習美飾. 而吾實貧賤. 不敢當禮.
妻曰, 大人以先生修德守約, 故使賤妾侍執巾櫛. 旣奉承君子, 惟命是從. 宣笑曰, 能如是, 是吾志也.
妻乃悉歸侍御服飾, 更著短布裳. 與宣共挽鹿車. 歸鄕里, 拜姑禮畢, 提甕出汲, 修行婦道. 鄕邦稱之.
한나라 포선(鮑宣)의 아내 환씨(桓氏)의 자는 소군(少君)이다. 선(宣)이 일찍이 소군의 아버지에게 나아가 글을 배웠는데, 소군의 아버지가 그의 청백하고 근고(勤苦)함을 기특히 여겼기 때문에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치장(治裝)하여 보내는 재물이 마우 풍성하니, 선이 기뻐하지 않으며 아내에게 말하기를 " 소군은 부유하고 교만하게 자라나서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익혔는데 나는 실로가난하고 미천(微賤)하여 그와 같은 예절을 감당할 수 없소." 하였다.
아내가 말하기를 " 아버지께서 선생이 덕을 닦고 검약을 지킨다고 생각한 까닭에 천첩(賤妾)으로 하여금 뫼시어 건즐(巾櫛)을 잡게 한 것입니다. 이미 군자(君子)를 받들기로 했으니, 오직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하니, 선이 웃으며 말하기를 " 능히 그와같이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나의 뜻이오." 하였다.
아내는 곧 하인과 의복과 장식품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짧은 베치마로 갈아 입고서 선과 함께 작은 수레를 끌고 향리(鄕里)로 돌아 갔다. 시어머니께 절하여 예를 마치고, 동이를 들고 나가서 물을 길어 부도(婦道)를 잘 행하니, 온 마을과 고을이 칭송했다. -漢書, 烈女傳-
*鮑宣 : 자는 자도(子都)로 발해(渤海) 사람이다.
*裝送資賄장송지회 : 시집 보낼 때 보내는 재물.
*侍執巾櫛시집건즐 : 뫼시어 수건과 빗을 손에 잡는 것. 시중 드는 것
善行,029
曹爽從弟文叔妻, 譙郡夏侯文寧之女. 名令女. 文叔蚤死, 服闋, 自以年少無子. 恐家必嫁己, 乃斷髮爲信.
其後家果欲嫁之, 令女聞, 卽復以刀截兩耳, 居止常依爽. 及爽被誅, 曹氏盡死, 令女叔父上書, 與曹氏絶婚, 彊迎令女歸.
時文寧爲梁相一作州. 憐其少執義, 又曹氏無遺類. 冀其意阻, 乃徵使人-風之, 令女嘆且泣曰, 吾亦惟之. 許之是也. 家以爲信, 防之少懈,
令女於是竊入寢室, 以刀斷鼻, 蒙席而臥, 其母呼與語, 不應, 發被視之. 血流滿床席, 擧家驚惶, 往視之, 莫不酸鼻.
或謂之曰, 人生世間, 如輕塵棲弱草耳. 何辛苦乃爾. 且夫家夷滅已盡. 守此欲誰爲哉.
令女曰, 聞仁者, 不以盛衰改節, 義者, 不以存亡易心. 曹氏全盛之時, 尙欲保終, 况今衰亡. 何忍棄之. 禽獸之行, 吾豈爲乎.
조상(曹爽)의 종제(從弟) 문숙(文叔)의 아내는 초군(譙郡)의 하후문녕(夏侯文寧)의 딸로 이름은 영녀(令女)다. 문숙이 일찍 죽으니 복상(服喪)을 마치고 나서 스스로 나이 젊고 자식이 없음을 이유로 친정집에서 반드시 자기를 시집보낼 것을 두려워하여 머리털을 끊어서 맹세 했다.
그 뒤 친정집에서 과연 시집보내고저 하니, 영녀가 이 말을 듣고 다시 칼로 두 귀를 끊고 생활을 항상 상에게 의지 했으나 조상이 사형(死刑)을 당하기에 이르러 조씨 일문이 모두 죽으니, 영녀의 숙부가 글을 올려 조씨와의 혼인관계를 끊고 강제로 영녀를 데리고 갔다.
이때 문녕이 양주(梁州)의 관원으로 있었다. 그 젊은 나이로 절개를 지키는 것을 불쌍히 여기고, 또 조씨 가문이 살아 남은 자가 없음을 알고 그 뜻이 꺾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은밀히 사람을 시켜 마음을 움직여 보았다. 영녀가 탄식하고 울면서 말하기를 " 나도 생각해 보니 허락하는 것이 옳다." 하므로 집에서는 참말로 여겨서 방비(防備)를 조금 게을리 했다.
영녀가 이 틈을 타서 가만히 침실로 들어가서 칼로 코를 끊고 이불을 쓰고 누었다. 그 어머니가 부르면서 말을 했으나 대답하지 않으므로 이불을 열고 보니 피가 흘러 침상과 자리에 가득 했다. 온집안 사람들이 놀라 가서 보고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 영녀에게 말하기를 " 사람이 세상에 사는 것은 마치 가벼운 먼지가 약한 풀에 앉는 것과도 같다. 어찌 그다지도고생을 하는가. 그리고 남편의 집안은 이미 멸족을 당하여 모두 죽어 없어 졌는데 누구를 위하여 절개를 지키랴."하니
영녀가 말하기를 " 내 들으니 어진 자는 그 성하고 쇠(衰)함을 가지고 절개를 고치지 않고, 의로운 자는 그 존재하고 멸망함을 가지고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고 했다. 조씨 가문이 전성하던 때에도 오히려 뜻을 보전하여 몸을 마치려 했거늘, 하물며 이제 멸망했으니 어찌 차마 버리랴. 금수(禽獸)의 행실을 내 어찌 하야." 하였다. -三國志, 魏志-
*曹爽 조상: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황족(皇族)으로 무안후(武安侯)에 봉해지고 대장군이 되었으나 반역죄로 3족(族)이 주멸(誅滅) 되었다.
*服闋복결 : 복상(服喪)을 마침.闋결: 문닫을 결.쉴 결. 마칠 결. 다할 결. 解喪
*譙郡 초군: 고을 이름. 譙초 꾸짖을 초.
*截兩耳절양이 : 두 귀를 짜르는 것. 截 끈을 절.
*冀其意阻기기의조 : 그 절개를 지키려는 뜻이 저지되기를 바람.
*蒙被而臥몽피이와 : 이불을 두집어 쓰고 눕는 것. *酸鼻 : 코가 시큰 함. 슬픔을 뜻함.몹시 슬프고 애통함
*輕塵棲弱草경진서약초 : 가벼운 먼지가 연약한 풀에 앉는 것. 가벼운 먼지는 흩어지기 쉽고, 연약한 풀은 의지하기 어렵다. 인생의 덧 없음을 말함.
善行,030
唐鄭義宗妻, 盧氏略涉書史, 事舅姑, 甚得婦道. 嘗夜有强盜數十, 持杖鼓噪, 踰垣而入. 家人悉奔?, 唯有姑自在室, ,盧冒白刃, 往至姑側, 爲賊捶擊, 幾死.
賊去後家人問, 何獨不懼. 盧氏曰, 人所以異於禽獸者, 以其有仁義也. 隣里有急, 尙相赴救, 况在於姑, 而可委棄乎. 若萬一危禍, 豈宜獨生.
당 나라 정의종(鄭義宗)의 아내 노씨(盧氏)는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대략 읽었으며,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섬김이 매우 며느리의 도리에 맞았다. 일찍이 밤에 강도(强盜) 수십명이 몽둥이를 손에 들고 고함을 지르면서 담을 넘어 들어오니, 집안 사람이 모두 달아나 숨고 오직 시어머니 만이 방에 있었다. 노씨가 흰 칼날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 시어머니 곁에 이르러서 도적에게 매를 맞아 거의 죽게 되었다.
도적이 간 뒤에 집 안 사람이 묻기를 " 어찌 혼자서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하니 , 노씨가 말하기를 "사람이 금수와 다른 것은 인의(仁義)가 있기 때문이요. 이웃 마을에 위급한 일이 있어도 오히려 달려가 구하려 드는데 하물며 시어머니를 버려둘 수 있으랴. 만약 시어머니가 위화(危禍)를 당한다면 어찌 혼자만 살아 남으리오." 하였다. -唐書, 烈女列傳-
*悉奔竄 실분찬: 모두 달아나 숨는 것. *捶擊추격: 매맞음. 捶 :때릴 추. 종아리칠 추. 짓찧을 추.
*噪조 : 떠들썩할 조.뭇새지저귈 조. 鼓噪고조 : 옛날에 출전할 때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기세를 높이다.
善行,031
唐奉天竇氏二女, 生長草野, 幼有志操. 永泰中群盜數千人, 剽掠其村落,
二女皆有容色, 長者年十九. 幼者年十六. 匿巖穴間, 曳出之, 驅迫以前. 臨壑谷深數百尺,
其姊先曰, 吾寧就死, 義不受辱. 卽投崖下而死, 盜方驚駭. 其妹繼之自投, 折足破面流血, 群盜乃捨之而去.
京兆尹第五琦, 嘉其貞烈, 奏之, 詔旌表其門閭, 永蠲其家丁役.
당 나라 봉천(奉天) 두씨(竇氏)의 두 딸은 시골에서 생장하되 어려서 지조(志操)가 있었다. 영태(永泰) 연간에 떼도적 수 천명이 그 고을을 침범하여 노략질 했다.
두 처녀는 모두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었는데 맏이는 열하홉 살이고, 아우는 여여섯 살이었다. 바이 굴 속에 숨어 있었으나, 도적이 끌어내어 협박하고 앞으로 몰고 갔다. 길이 구렁에 임하여 골짜기의 깊이가 수 백 척이 되었다.
그 언니가 먼저 말하기를" 나는 차라리 죽을 지언정의리(義理)에 욕됨을 당할 수 없다." 하고 곧 벼랑 밑으로 몸을 던져 죽었다. 도적이 비로소 놀랐다. 그 아우가 계속하여 스스로 몸을 던져서 다리가 부러지고 얼굴이 깨어져 피가 흐르니 도적이 버리고 가버렸다.
경조윤(京兆尹) 제오기(弟五琦)가 그 곧은 절개를 어여삐여겨 조정에 아뢰니, 임금이 조서(詔書)를 내려 그 마음의 문에 정표(旌表)하고 그 집의 부역(賦役)을 영구히 면제해 주었다. -唐書, 烈女列傳-
*永泰 : 당 나라 대종(代宗) 때의 연호 *剽掠표략 : 협박하여 노략질 함.
*驅迫 구박: 핍박하여 몰고 감.못 견디게 굶.
*京兆尹 : 경조는 고을 이름이고 尹은 고을 의 장관을 말함.
*第五琦 : 제오는 성이고 기는 이름. *蠲견 : 밝을 견, 조촐할 견. 덜 견.
善行,032
穆肜少孤, 兄弟四人, 皆同財業. 及各取妻, 諸婦遂求分異, 又數有鬪爭之言,
肜深懷忿嘆, 乃掩戶自撾曰, 穆肜汝修身謹行, 學聖人之法, 將以齊整風俗. 奈何不能正其家乎.
弟及諸婦聞之, 悉叩頭謝罪, 遂更爲敦睦之行.
목융이 어렸을 적에 아버지를 여의고, 형제 네 사람이 재산과 생업을 함께 하더니, 가기 아내를 맞기에 이르러, 여러 제수(弟嫂)가 재산을 나누어 따로 살기를 요구하고 또 자주 싸우고 다투는 말이 있었다.
융은 깊이 분하고 한탄하는 마음을 품어서 방문을 닫고 스스로 자기 몸에 매질하여 말하기를 " 융아 네가 몸을 닦고 행실을 삼가서 성인의 법을 배우는 것은 장차 풍속을 바로 잡으려는 것인데, 어찌하여 자기 집 조차도 바로 잡지 못한단 말인가?" 하였다.
아우와 여러 제수가 듣고 모두 머리를 조아려 사죄(謝罪)하여 마침내 다시 돈목(敦睦)하게 되었다. -後漢書, 篤行列傳-
*穆肜목융: 자는 예공(豫公) 한 나라 사람이다.
*肜융 다스릴 융. 화할 융.
*撾과 : 칠 과. 두드릴 과. 매질 하는 것.
*叩頭謝罪 고두사죄: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하며 사죄하는 것.
善行,033
蘇瓊除南淸河太守. 有百姓乙普明兄弟爭田, 積年不斷, 各相援據. 乃至百人.
瓊召普明兄弟, 諭之曰, 天下難得者兄弟. 易求者田地. 假令得田地, 失兄弟心, 如何. 因而下淚, 諸證人莫不灑泣.
普明兄弟叩頭, 乞外更思, 分異十年, 遂還同住.
소경(蘇瓊)이 남청하 태수(南淸河太守)에 임명되어 갔는데, 백성 중에 을보명(乙普明) 형제가 있어 전지를 다투어 소송(訴訟)하여 여러 해가 되도록 해결을 보지 못했으며, 각기 증인(證人)을 끌어대니 100명이나 되었다.
경이 보명형제를 불러서 타이르기를 "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것은 형제이고 구하기 쉬운 것은 전지다. 가령 전지를 얻는다 한들 형제의 정의를 잃게 되니 어찌하나." 하고 이어서 눈물을 흘리니, 모든 증인이 눈물을 뿌려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보명형제가 머리를 조아리며 밖에 나가서 다시 생각할 수 있게 해 주기를 빌었다. 재산을 나누어 따로 산 지 10년 만에 마침내 돌아가 함께 살았다. -北齊書, 循吏列傳-
*援據 : 증거가 될만한 사람을 끌어 대는 것. *灑泣쇄읍 : 눈물을 뿌리며 우는 것.
善行,034
王祥弟覽母朱氏, 遇祥無道. 覽年數歲, 見祥被楚撻, 輒涕泣抱持, 至于成童, 每諫其母. 其母少止凶虐. 朱屢以非理使祥, 覽與祥俱, 又虐使祥妻, 覽妻亦趨而共之. 朱患之, 乃止.
왕상(王詳)의 아우 람(覽)의 어머니 주씨(朱氏)가 왕상을 대우함이 무도(無道)하니, 람의 나이 두어 살 때 상이 매맞는 것을 보고 문득 울면서 상을 껴안았다. 성동(成童)하기에 이르러, 매양 그의 어머니에게 간(諫)하니 그의 어머니가 흉포(凶暴)한 짓을 조금 멈추었다. 주씨가 자주 도리에 맞지 않는 일로 상을 부렸지만, 람이 상과 함께하고 또 상의 아내를 사납게 부리면 람의 아내가 또한 달려가서 함께하니, 주씨가 근심하여 마침내 무도한 짓을 그만 두었다.
*遇詳 : 왕상을 대우하는 것. *成童 : 아이가 자라서 열 다섯 살 되는 것.
善行,035
晉右僕射鄧攸永嘉末沒于石勒, 過泗水. 攸以牛馬負妻子而逃, 又遇賊, 掠其牛馬, 步走, 擔其兒及其弟子綏.
度不能全, 乃謂其妻曰, 吾弟早亡, 唯有一息. 理不可絶. 止應自棄我兒耳. 幸而得存, 我後當有子. 妻泣而從之, 乃棄其子而去之. 卒以無嗣.
時人義而哀之, 爲之語曰, 天道無知, 使鄧伯道無兒. 弟子綏服攸喪三年.
진(晉) 나라의 우복야(右僕射) 등유(鄧攸)가 영가(永嘉) 말년에 석륵(石勒)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사수(泗水)를 지날때 소와 말에 처자를 싣고 달아났다. 또 도적을 만나 소와 말을 빼앗기고 걸어서 달아 나면서 그의 아들과 아우의 아들 수(綏)를 등에 업었다.
둘 다 보전할 수 없음을 알고 그의 아내에게 말하기를, " 내 아우가 일찍 죽고 오직 이 아들이 있을 뿐이니 도리상 후사(後嗣)를 끊을 수 없고 응당 내 아들을 버려야 할 것이요. 다행이도 살아 남을 수 있다면 나는 뒤에 자식을 둘 수 있을 것이요." 하니 아내가 울면서 이 말에 좇아 그 아들을 버리고 갔는데, 마침내 후사가 없었다.
그때의 사람들이 그를 의롭게 여기고 또 슬퍼하여 말하기를 " 천도(天道)가 알음이 없어서 등백도(鄧佰道)로 하여금 자식을 없게 했다." 하였다. 아우의 아들 수가 유의 상(喪)에 3년복을 입었다. -晉書, 良吏列傳-
*右僕射 : 벼슬이름. 射는 쏠 사. 맞쳐취할 석. 여기는 벼슬이름 야.
*沒于石勒 : 석륵에게 포로가 됨. 영가 말년에 등유가 석륵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사수에서 탈출 했음 석륵은 오랑케 사람으로 후조를 세웠음. *掠: 빼앗을 량. 여기서는 노략질 할 략.
善行,036
晉咸寧中大疫. 庾袞二兄俱亡, 次兄毗復危殆, 癘氣方熾, 父母諸弟皆出次于外,
袞獨留不去, 諸父兄强之, 乃曰, 袞性不畏病. 遂親自扶持, 晝夜不眠, 其間復無柩, 哀臨不輟.
如此十有餘旬, 疫勢旣歇, 家人乃反. 毗病得差, 袞亦無恙.
父老咸曰, 異哉. 此子. 守人所不能守, 行人所不能行, 歲寒, 然後知松柏之後凋. 始知疫癘之不能相染也.
진(晉) 나라 함녕(咸寧) 연간에 역질(疫疾)이 크게 유행하여 유곤(庾袞)의 두 형이 모두 죽고, 그 다음 형 비(毗)가 또 위독했다. 역질의 기세가 바야흐로 치성(熾盛)하므로 부모와 여러 아우는 모두 밖에 나가 있었다.
곤이 혼자 머물고 떠나가지 않으니 부형(父兄)들이 강권(强勸)하거늘, 곤이 말하기를 " 곤의 성품은 병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고, 드디어 몸소 병을 간호하여 밤낮으로 자지 않았으며 그 사이 사이에 또 형들의 관을 어루만지며 슬퍼하기를 마지않았다.
이와 같이 하기를 십여 순(旬)에 이르자 역질 기세가 꺾였고, 집 안 사람들이 돌아와 보니 비의 병이 차도(差度)가 있었으며, 곤 또한 아무 탈이 없었다.
부로(父老)가 모두 말하기를 " 기이하다. 이 아이는 사람이 지키지 못하는 도리를 지키고, 사람이 행하지 못하는 일을 행했구나, 날씨가 추워진 뒤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나중에 시드는 것을 안다더니 비로소 역질이 서로 전염하지 못하는 것을 알았다." 하였다. -晉書, 孝友列傳-
*咸寧 : 무제 때 연호. *癘氣 : 역질의 기세. 癘려 염병려. 창병 려.
*扶持 : 환자를 간호함.
善行,037
楊播家世純厚, 並敦義讓, 昆季相事, 有如父子. 椿津恭謙, 兄弟旦則聚於廳堂, 終日相對, 未嘗入內, 有一美味, 不集不食.
廳堂間往往幃幔隔障, 爲寢息之所, 時就休偃, 還共談笑.
椿年老, 曾他處醉歸, 津扶持還室, 假寢閤前, 承候安否.
椿津年過六十, 並登台鼎, 而津常旦莫參問, 子姪羅列階下. 椿不命坐, 津不敢坐.
椿每近出, 或日斜不至, 津不先飯, 椿還然後共食. 食則津親授匙箸, 味皆先嘗, 椿命食然後食.
津爲肆州椿在京宅. 每有四時嘉味, 輒因使次, 附之, 若或未寄, 不先入口. 一家之內男女百口. 緦服同爨, 庭無間言.
양파(楊播)의 집안은 대대로 순후(純厚)하고 또 예의(禮義)와 겸양(謙讓)을 숭상했다. 형제가 서로 섬기기를 마치 아버지와 자식같이 하더니, 춘(椿). 진(津)이 공경하고 겸손하여, 형제가 아침이면 대청 마루에 모여 온종일 서로 대하여 앉아서 일찍이 내당(內堂)에 들어가는 일이 없었으며, 한 가지라도 맛있는 음식이 있었으면 서로 모이지 않고는 먹지 않았다.
대청 마루에 가끔 휘장으로 사이를 막아 잠자고 쉬는 장소를 만들어서, 때로 휴식을 취하고 돌아와서는 다시 담소(談笑)를 함께 했다.
춘이 나이 늙어서 다른 곳에서 술취하여 돌아오면 진이 부축하여 방에 들어가 쉬게 하고 자신은 옷을 벗지 않은 채로 방문 앞에 누어서 안부를 살폈다.
춘과 진이 나이 60세가 넘어서 모두 삼공(三公)의 지위에 올랐건만, 진이 항상 아침 저녁으로 들어가 문안하면 자질(子姪)이 섬돌 아래 나열(羅列)하여 섰으며, 춘이 앉기를 명하지 않으면 진이 감히 앉지 못했다.
춘이 매양 가까운 곳에 나가서 해가 지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진이 먼저 밥먹지 않고 춘이 돌아온 뒤에야 함께 먹었다. 먹을 때에는 진이 친히 숟가락과 젓가락을 드리고 음식을 모두 먼저 맛보았으며, 춘이 먹기를 명한 뒤에야 먹었다.
진이 사주 자사(肆州刺史)로 있을 때 춘은 서울집에 있었는데, 매양 사철의 맛좋은 식품이 있을 때마다 문득 심부름가는 인편(人便)에 부쳤으며 만약 부치지 못하면 먼저 입에 넣지 않았다. 한집안에 남녀 식구가 백을 헤아렸건만 시복(媤服)의 친족이 같은 솥의 밥을 먹었으며 집안에는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北史, 양파列傳-
*昆季 : 형제를 말함.
*幃幔위만: 휘장. 幃위 : 향낭 위. 홑 휘장 위. 幔만: 휘장 만.
*休偃 휴언: 쉬는 것. *假寢 : 옷입고 잠자는 것. *閤前 합전: 방문 앞. 閤은 쪽문 합.
*台鼎 태정: 태는 삼태성(三台星)이니 삼태성이 마치 솥의 세발가 같다는 뜻에서 삼공을 말함.
*旦莫 단모: 모는 暮와 통하니 아침 저녁을 말함.
*參問 참문: 뵙고 문안하는 것. *(四時嘉味 : 철마다 새로 나오는 맛좋은 식물.
*緦服同爨시복동찬 : 시복은 시마복을 말하니, 유복친중에 가장 소원한 친족의 복제임 고조(高祖)와 같이하는 8촌에 대한 복(服)임. 同爨동찬은 밥을 같이 끓인다는 뜻이니 한 솥의 밥을 먹는 것. 8촌까지 한 집에 같이 사는 것. 緦服 석달 동안 입는 喪服.
*緦시 :삼베 시. 시마복(緦麻服) 시. 석달복 시. 爨찬 : 부뚜막 찬. 불땔 찬. 아궁이 찬.밥지을 찬.
善行,038
隋吏部尙書牛弘弟弼, 好酒而酗. 嘗醉. 射殺弘駕車牛,
弘還宅, 其妻迎謂弘曰, 叔射殺牛. 弘聞, 無所怪問. 直答曰, 作脯.
坐定, 其妻又曰, 叔射殺牛. 大是異事. 弘曰, 已知. 顔色自若, 讀書不輟.
수(隋)나라 이부상서(吏部尙書) 우홍(牛弘)의 아우 필(弼)은 술을 좋아하고 주정이 심하더니, 일찍이 술에 취하여 홍(弘)의 수레를 끄는 소를 쏘아 죽였다.
홍이 집에 돌아오니 그 아내가 홍을 맞아 말하기를 " 시동생이 소를 쏘아 죽였읍니다." 하였으나. 홍이 듣고 괴이히 여겨 묻지 않고 대답하기를, "포(脯)를 만드시요." 하였다.
자리에 앉자, 그 아내가 또 말하기를 " 시동생이 소를 쏘아 죽였으니 매우 괴이한 일입니다." 하였으나 홍이 말하기를 " 이미 알았오." 하고는 얼굴빛을 태연히 하고 글 읽기를 쉬지 않았다. -隋書, 牛弘列傳-
*酗후 : 주정할 후.
善行,039
唐英公李勣, 貴爲僕射, 其姊病, 必親爲然火煮粥. 火焚其鬚, 姊曰, 僕妾多矣. 何爲自若如此.
勣曰, 豈爲無人耶. 顧今姊年老, 勣亦老. 雖欲數爲姊煮粥, 復可得乎.
당나라의 영공(英公) 이적(李勣)이 몸의 귀히 됨이 복야(僕射)에 이르렀건만 누님이 병들면 반드시 몸소 불을 때서 죽을 끓였는데 불이 그의 수염을 태웠으므로 누님이 말하기를 " 하인이 많은데 어찌하여 수고로움이 이같은가?" 하니,
적이 대답하기를 " 어찌 사람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 겠습니까 생각컨데 이제 누님의 나이 늙고 적도 또한 늙었읍니다. 비록 자주 누님을 위하여 죽을 끓이려 한들 또다시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唐書, 李勣列傳-
*李勣 : 자는 무공(懋功), 공로가 있어 재상(宰相)이 되고 영공(英公)에 봉해 졌슴.원래는 서(徐)씨인데 당고조(당高祖)가 이씨의 성을 내렸음.
善行,040
司馬溫公與其兄伯康, 友愛尤篤. 伯康年將八十. 公奉之如嚴父, 保之如嬰兒, 每食少頃則問曰, 得無饑乎. 天少冷則拊其背曰, 衣得無薄乎.
사마온공(司馬溫公)과 그의 형 백강(伯康)은 우애가 지극히 돈독했다. 백강의 나이 80세가 되어가니, 공이 받들기를 엄부(嚴父)와 같이 하고, 보호하기를 어린이와 같이 했다. 매양 밥먹고 조금있다가 묻기를 " 배고프지 않습니까?" 하고, 날이 조금 차면 그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 옷이 얇지 않습니까?" 하였다. -宋名臣言行錄-
*伯康 : 사마온공의 형으로 이름은 旦이고 백강은 자임. *拊부 : 어루만질 부. 두드릴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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