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릉은 세종의 장자 조선 제5대 왕 문종과 그의 비 현덕왕후 권씨의 능이다.
1452년(문종 2) 문종이 죽자 건원릉(健元陵) 동쪽 산에 장사지냈다. 현덕왕후는 1457년(세조3) 단종 복위운동과 관련되어 신주가 철거되었다가 1513년(중종 8) 왕릉 왼쪽 산으로 옮겨왔다.
문종은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해 학자를 가까이 했으며, 측우기 제작에 직접 참여했을 정도로 천문, 역수 및 산 술에 뛰어났고, 서예에도 능했다. 또한 성격이 유순하고 자상하여 누구에게나 호평을 받았으며, 거동이 침착하고 판단이 신중하여 남에게 비난을 받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착하고 어질기만 하여 문약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문종은 언관의 언론에 관대한 정치를 펴 이 시대의 언관들의 언론은 정치 전반에 걸쳐 영향력이 증대되었다. 척불언론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세종 말기에 세종과 왕실에 의해 이루어진 호불정책에 의해 각종 불교 행사가 행해졌고 궁에 내불당이 조성되는 등 불교 융성 정책이 활발했지만, 유신들은 이를 막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문종이 즉위하자 유학 중심의 언관들은 왕실의 불교적 경향을 불식하고 유교적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안간 힘을 썼으며, 이는 대부분 문종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언관의 언론이 활성화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종은 언로를 더 넓히는 정책을 폈다. 그래서 6품 이상 의 신하들에 대해서는 윤대(돌아가면서 왕을 만나는 것)를 허락해 벼슬이 낮은 신하들의 말에 대해서도 경청했다. 이와 같이 관대한 정책을 기본 통치 방향으로 설정한 문종은 우선적으로 '동국병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대학연의주석' 등을 편찬하게 했다.
문종은 세자 시절부터 진법을 편찬하는 등 군정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런 연장선상에서 보면 '동국병감'의 편찬은 병법의 정비와 군정의 안정을 위한 조치였다. 그는 즉위 초에 스스로 군제 개혁안을 마련해 총 12사로 분리돼 있던 군제를 5사로 집약시키고, 군제상의 세세한 부분들을 개선, 보완하기도 했다. 문종은 이렇듯 유연함과 강함을 곁들인 정책을 실시했으나, 건강 악화로 재위 2년 3개월 만에 3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야만 했다. 이 때가 1452년 5월이었다.
문종은 3명의 부인에게서 1남 2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현덕왕후 권씨에게서 단종과 경혜공주를, 사측 양씨에게서 경숙옹주를 얻었다. 현덕왕후도 이 곳에 함께 묻혀 있다.
현릉은 동원이강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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