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릉(綏陵)은 조선 제23대 왕 순조의 세자 효명세자(후 익종, 문조로 추존)와 비 신정왕후 조씨의 합장능이다.
효명세자는 1809년 9월 순조와 순원왕후의 장자로 태어났다. 1812년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819년 음력 10월에 세자빈(신정왕후)과 가례를 올렸다. 1827년에는 아버지 순조의 명에 따라 대리청정을 하며,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견제하고 처가인 풍양 조씨의 인물을 중용하였으나 4년 만인 1830년에 서거하였다.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왕으로 즉위한 뒤 《익종》(翼宗)으로 추존하였으며, 1899년 고종에 의해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재추존 되었다.
신정왕후 조씨는 1808년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의 딸로 태어나, 1819년효명세자와 가례를 올리고 세자빈이 되었다. 그러나 1830년에 남편인 효명세자가 승하하였고, 1834년에 순조가 승하하고 아들 헌종(憲宗)이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王大妃)가 되었다. 1890년 음력 4월, 83세의 나이로 경복궁 흥복전에서 승하하여 합장되게 된다. 그래서 수릉은 단릉이 아니라 합장릉이다.
순조 30년 1830년 효명세자가 승하하자 성북구 석관동 의릉 왼쪽 언덕에 세자의 무덤형식인 원(園)으로 능을 조영하고, 《연경묘》라고 하였다. 그 후 아들 헌종이 1835년 즉위하여 익종으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수릉이라고 하였다. 헌종 13년 1846년 풍수상 불길하다는 의논이 제기되어 천장하기로 하고, 현궁을 발굴하여 정자각에 봉안하고, 그 해 5월 발인하여, 20일에 양주 용마산 아래로 천장하였다. 철종 6년 1855년 8월에 다시 능을 발굴하여 건원릉 좌측 언덕으로 천장하였다. 고종 27년 1890년에 신정왕후를 수릉에 합장하여 모셨다.
순조(純祖) 비 순원왕후(純元王后)가 결혼을 한지 7년이 다되어 가던 1809년(순조 9) 8월 9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아들을 낳았다. 순조는 그 아들을 1812년 7월 6일에 왕세자로 책봉을 하고, 1819년 10월 13일에는 풍양조씨(豊壤趙氏)인 판서 만영(萬永)의 딸에게 장가를 들게 하였다. 1827년(순조 27) 2월 18일부터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던 왕세자가 1830년 5월 6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병으로 승하하였다. 능동(陵洞)의 도장곡에 장지를 정하여 조성을 하던 중 옛 무덤의 흔적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어 양주 천장산(天藏山) 자락에 장지를 다시 정하였다. 그 해 8월 4일에 동향(酉坐卯向)으로 장사를 지내고, 시호를 효명(孝明)으로 묘호는 연경(延慶)으로 하였다. “내룡이 삼각산에서부터 나누어져 전지(田地)를 뚫고 골짜기를 지나 별도로 성봉하여, 기세는 마치 말이 달리는 것 같고, 모양은 용이 내려오는 것같이 더욱 벗겨지고 바꿔지면서 그 변화가 극도에 이르러서는 다시 천장산을 만들어 문득 구천(九天)에 호랑이가 날아가는 형국을 이루었으며, 혈성이 풍후하며 청룡과 백호가 겹으로 감싸고, 주변 산은 손을 마주 잡고 조회하는 듯하다.”고 풍수적으로 연경묘를 평가 하였었다.
1835년에 왕위에 오른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憲宗)은 효명세자를 익종(翼宗)으로, 묘호를 수릉(綏陵)으로 추존을 하였다. 헌종은 1846년(헌종 12) 윤5월 20일에 “수릉의 국세가 산만하여 마음이 늘 불안하다.”면서 양주의 용마봉(龍馬峰) 아래 언덕(癸坐丁向)으로 천장을 하였다. 다시 1855년(철종 6) 8월 26일에는 “큰 비가 내리면 무덤 앞이 범람한다.”는 이유로 건원릉 왼쪽 자락으로 2번째 천장을 하였다. 당시에 철종은 “복지(卜地)가 진실로 좋은 곳이어서 이에 여덟 능의 영혼이 달빛 아래 노니는 자리이니, 신리(神理)와 인정에 거의 유감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또 황형의 효성에 감동된 소치이니, 황형께서 보이지 않는 가운데 도와준 것입니다.”고 표현하였다.
1890년(고종 27) 4월 27일 효명세자빈(神貞王后, 일명 趙大妃)이 경복궁 흥복전에서 승하하자, 고종은 신정왕후의 뜻을 받들어 수릉의 국내를 살펴보도록 지시하였다. 당시에 상지관들은 수릉을 “주산에서 뻗어 나온 내룡은 변화무쌍하며, 좌우의 청룡과 백호는 주인을 호종하듯 잘 감싸고, 혈판은 토층이 두텁고 앞이 둥글어 아름다우며, 혈판 앞의 명당은 평탄하고, 안산은 주인을 맞이하는 듯하며, 명당수가 혈판을 잘 감싸 도는 길지(吉地)다.”라고 평하였다. 수릉이 대체적으로 아름답고 장지로서 문제가 없는 곳이라는 설명을 들은 고종은 신정왕후를 수릉에 합장을 하도록 지시하여, 그 해 8월 30일에 남향(壬坐丙向)으로 안장하였다.
수릉은 동구릉을 들어서면서 재실을 지나 첫 번째로 만나는 오른쪽에 있는 능으로 마치 어린아이가 외출한 부모님을 동구(洞口) 밖으로 마중 나와 기다리는 느낌을 주는 바로 그 무덤이다. 동구릉의 왼쪽 산줄기에서 뻗어 나온 내룡은 현릉(顯陵, 문종과 현덕왕후 능)의 내청룡으로 과협처를 만드는 등 변화하면서 왼쪽으로 방향을 돌려 혈을 만들었다. 과협이 다소 긴 영향으로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해 내룡이 혈을 만들기 전에 넓게 퍼지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순한 어린용의 성격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대리청정까지는 하였는데 왕위에 등극하지 못한 효명세자의 아쉬운 마음이 잘 나타나는 곳이다. 효명세자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2번씩 옮겨 다녀야 하는 우여곡절 끝에서야 주인의 성격에 걸 맞는 곳에 묻힐 수 있었다.
“무덤 앞에 있던 커다란 나무를 베어 버리니 앞 산 언덕에 자신의 아들인 헌종과 며느리의 무덤인 경릉(景陵)이 보여 더 할 나위 없이 행복한 자리가 되었다.”고 국조보감에 기록되어 있다. 얼마만큼 자신의 가족 곁에 잠들고 싶어 했는지를 표현해주는 내용이다. 실제로 수릉에서는 남서쪽으로, 경릉에서는 북동쪽으로 서로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고종은 1899년 11월 21일에 익종을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신정왕후를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로 다시 추존하여, 수릉은 추존된 문조와 신정왕후의 무덤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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