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기도)

[스크랩] 창덕궁[昌德宮] 1 - 돈화문 / 금천교 / 진선문

장안봉(微山) 2013. 4. 11. 00:04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보물 383호이다. 태종 12년(1412)에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광해군 원년(1609)에 다시 지었다. 현재 남아있는 궁궐 정문 중 가장 오래된 것이며 조선 궁궐문 중에서 유일하게 5칸의 문으로 되어 있다.


지금 있는 건물의 앞쪽은 도로포장공사로 지면이 높아져 약간 묻혀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무게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1층 5칸 가운데 3칸은 2짝씩 문짝을 달았지만 양쪽 끝칸은 모두 벽을 쳐서 실제로 3칸만 이용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태종 13년(1413) 문에 동종(銅鐘)을 걸었다는 기사가 있다. 문에 종을 걸었다는 것은 보기 드문 예라 할 수 있지만, 지금 있는 문은 다시 세운 것이므로 실록을 통해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창덕궁 돈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인 창경궁 홍화문과 함께 조선시대 궁의 위엄을 살리기 위해 세운 문루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창덕궁은 서울 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조선시대 궁궐로 사적 제122호이다. 1405년(태종 5)에 이궁(離宮)으로 조성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7년(선조 40)부터 다시 짓기 시작하여 1610년(광해군 2)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때 인정전(仁政殿)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타 1647년에 다시 짓기 시작했다. 그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있었으며, 특히 1833년(순조 33)의 큰 화재 때 대조전(大造殿)과 희정당(熙政堂)이 불탔으나 곧 다시 중건되었다.

 

 1908년에 일본인들이 궁궐의 많은 부분을 변경했으며, 1917년에 큰 불이 나자 일제는 불탄 전각들을 복구한다는 명목 아래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들을 헐어내고는 이 가운데 극히 적은 재목들을 사용하여 창덕궁을 변형·복구했다. 이 궁궐은 창경궁과 이어져 있고, 뒤쪽에 후원이 조성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정궁은 경복궁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1867년에 복원되었기 때문에 광해군 때부터 300여 년 간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단봉문.

 금호문.

 궁궐의 배치는 지세에 따라 자연스럽게 전각들을 배치하여 조선시대 5대 궁궐 가운데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원래 정문인 돈화문을 들어서 북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꺽인 곳에는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흐르는 금천(禁川) 위에 금천교가 놓여 있고, 이 다리를 건너면 진선문(進善門)과 그 양옆에 월랑(月廊)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이것을 모두 헐어버려 지금은 볼 수 없다.

 돈화문 누각으로 올라가는 계단.

 돈화문 안, 왼편에는 천연기념물 회화나무가 서있다.  

 금천교 - 조선 왕궁에는 북에서 발원하여 외당(外堂)을 돌아 흐르는 명당수가 있고, 이 명당수 위에 석교(石橋)가 설치되어 있다. 경복궁의 영제교(永濟橋), 창경궁의 옥천교(玉川橋), 창덕궁의 금천교 등이 그것이다. 금천교는 길이 12.9m, 너비 12.5m로 1411년에 조성되어 서울에 남아 있는 석교 중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서편 난간의 석수.

 난간.

 북편 난간의 석수.

 북편 금천교 거북돌.

 남쪽에서 본 금천교 - 금천교는 교각을 2개의 홍예(虹霓)로 구성하였는데, 물 속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돌로 홍예를 틀었으며 양쪽 교대(橋臺)를 석성(石城)처럼 쌓았다. 중앙에 홍예가 모이는 곳에 큼직한 홍예 기석(基石)을 놓아 지복석(地覆石)을 삼았으며, 하마 형상의 석수(石獸)를 배치하였다. 용의 형상은 마치 귀면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진선문 - 조선왕조실록에 1409(태종 9)년부터 진선문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창덕궁이 창건될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908년 탁지부(度支部)에서 인정전 개수 공사를 할 때 헐렸다가 1996년 복원을 착수, 1999년 완공하여 지금에 이른다. 태종대와 영조대에는 이 곳에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여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었다.

   ‘진선(進善)’은 ‘선한 말을 올린다’는 의미와 ‘훌륭한 사람을 천거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정전이 임금의 정전(正殿)이므로 진선문을 통하여 바른 말을 올리거나 인재를 천거하여 임금이 바르게 되고 바른 교화[正敎]가 펴지기를 기원하는 이름이다. 전자의 용례로 『후한서』 「채무전(蔡茂傳)」에서는 “교화를 일으킴은 반드시 착한 말을 올리는 데서 연유한다.”라고 하였다. 후자의 용례로 한나라 때 반고(班固, 32~92년)가 편찬한 『백호통의(白虎通義)』의 「고출(考黜)」 편에서 “현명한 사람이 많으면 훌륭한 사람을 천거할 수 있고, 훌륭한 사람을 천거하면 악인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다.

본래의 현판은 정난종(鄭蘭宗, 1433~1489년)의 글씨인데, 1999년 복원하면서 서예가 정도준이 새로 쓰고 중요무형문화재 각자장 오옥진이 새겼다.

  진선문 내 권역.

 

 

 

 원래는 이 곳 월랑에 각 부서의 방이 배치되어있었으나 일제때 모두 헐어 버렸다.  

숙장문은 진선문에서 인정문을 지나 마당을 따라 마주 보이는 문이다. 1475(성종 6)년 문 이름을 지었다. 숙장문과 진선문 사이 남쪽 행각에 내병조(內兵曹), 호위청(扈衛廳), 상서원(尙瑞院) 등이 있어서 이 인정문 뜰과 조정 마당에서 공식적인 궁중 의식이 많이 치러졌다. 이 일대는 일제 때 헐리어 화단으로 꾸며졌다가 최근 모두 복원되었다.

숙장(肅章)’은 ‘엄숙하고 문채(文彩)난다’는 의미이다. ‘숙(肅)’은 ‘엄숙하다’, ‘장(章)’은 ‘아름답게 빛난다’는 뜻이다.

 원래 현판은 정난종 글씨였는데 최근 복원하면서 정도준이 새로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동궐도』에는 현판이 바깥에 그려져 있어 지금과 다르다. 이를 두고 화공의 실수라고 하기도 하고 잘 보이도록 일부러 바깥에 그렸다는 논란이 있다.

출처 : 바람 통신
글쓴이 : 문화 탐험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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