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기도)

[스크랩] 창덕궁 2 - 인정전 / 선정전

장안봉(微山) 2013. 4. 11. 00:04

인정문은 정전의 정문이며 그 양쪽에 있는 월랑은 'ㄷ'자형으로 인정전을 감싸고 있다. ㄷ자형의 마당 안에는 인정문으로부터 시작된 어도(御道)가 있고, 그 북쪽 끝에 있는 중앙의 높은 월대 위에는 정전인 인정전이 자리잡고 있다. 인정전 월랑의 동북쪽에는 편전(便殿)인 선정전이 위치해 있다. 선정전의 주위에는 여러 행각이 있는데, 그 남쪽에 있던 여러 칸의 행각들은 일본인들이 모두 헐어버렸고, 뒤쪽에 있는 행각만 남아 있다. 동북쪽에는 희정당과 내전인 대조전 영역이 서남향으로 지세에 맞추어 배치되어 있다.

 인정문과 인정전의 양회에는 조선의 문장인 오얏꽃이 새겨져 있다. ‘인정(仁政)’은 특히 『맹자(孟子)』에서 강조하는 정치 사상이다. 『맹자』에서는 「양혜왕장구상(梁惠王章句上)」을 비롯하여 무려 10군데에 걸쳐 ‘인정’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즉 인정은 바로 맹자가 강조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맹자는 공자가 가장 중요시한 인(仁)에서 비롯하는 예치주의(禮治主義)를 한걸음 발전시켜 덕치(德治)를 왕도정치의 바탕으로 삼았다.

  인정문은 1405(태종 5)년 창덕궁의 창건 때 다른 전각들과 함께 지어졌다. 임진왜란으로 본래의 건물이 불타 없어지자 광해군이 즉위한 해에 창덕궁을 재건하면서 다시 세웠는데,1744(영조 20)년 10월에 인접한 승정원에 불이 났을 때 옮겨 붙어 좌·우 행각과함께 소실되었다가 이듬해인 1745년 3월에 복구되었다. 그 후 1803(순조 3)년 12월에 선정전(宣政殿) 서쪽 행각에서 화재가 나 인정전 등이 소실되어 이듬해 12월에 재건된 일이 있는데, 인정문도 그 때 함께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1910년대에 일제가 인정문과 그 주위 행랑을 왜식(倭式)으로 일부 변형했으나 1988년 현재와 같이 원상을 회복하였다.

인정문은 국왕의 즉위식이 거행된 장소로 그 의미가 큰 곳이다. 왕세자는 앞 임금이 별세한 궁궐의 빈전(殯殿: 왕의 빈소)에서 옥새를 받고 그 궁궐의 정전이나 정전의 정문에서 즉위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앞 임금이 창덕궁에서 별세할 경우 다음 임금은 인정전이나 인정문에서 즉위한 것이다. 특히 즉위식은 인정전보다는 주로 인정문에서 치러졌다.

 옛 박석과 복원된 박석.

 차일 고리.

 품계석.

 인정전에서 선정전으로 가는 북편 회랑.

답도.

 

일제 때 잔디를 심어 놓은 것을 지금은 거둬내고 박석으로 복원해 두었다.

 문살의 색이 황색인 것은 고종의 대한 제국을 선포 한 후 황제국가로서의 위상을 밝히려 한 것이다. 

인정전은 임금이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던곳이다. 조정의 각종 의식과 외국 사신의 접견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릴 때에도 이 곳을 이용했다. 또한 왕세자나 세자빈을 정했을 때나 국가의 커다란 경사가 있을 때에도 왕이 인정전으로 나아가 신하들의 축하를 받았다.

인정전은 1405(태종 5)년에 창덕궁을 세우면서 함께 지었는데 그 뒤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다. 1428(태종 18)년에 인정전이 좁다고 해서 다시 짓게 하였으며, 그 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09(광해군 원)년에 중건했다. 1803(순조 3)년에 화재로 불에 타서 이듬해인 1804(순조 4)년에 재건하였고, 1857(철종 8)년에는 낡아서 다시 고쳐 지었다.

 향실 앞의 우물.

 향실은 의례 때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곳으로 인정전 서쪽 행각 끝에 위치한다. 교서관 소속으로 책임직은 충의(忠義)인데, 직급이 높지는 않지만 공신의 자손이 임명되었다. 향관은 참하문관(參下文官)이 맡았고, 이틀에 한 번 숙직하였다. 명종의 신임을 돈독히 받은 상진(尙震,1493~1564년)과 영·정조 때의 문신 박세채(朴世采, 1631~1695년)가 이 곳을 거쳐 정승에까지 오른 일이 유명하다.  편액 글씨는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월대에 놓인 드므와 부간주.

 

선정문.

선정전은 창덕궁의 편전(便殿)으로 평상시 임금이 신하들과 국사를 논의하던 용도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그러나 1471년(성종 2년)에는 왕비가 친잠례(親蠶禮)를, 1553년(명종 8년)에는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행하는 등 다른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순조 이후에는 희정당이 편전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1405년(태종 5년) 창덕궁 창건 시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461년(세조 7년)에 조계청(朝啓廳)으로 불리우던 것을 선정전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임진왜란 시에는 다른 전각들과 같이 소실되었으나 1609년(광해군 원년)에 재건하였으나 인조반정 시에 다시 화재를 당하여 1647년(인조 25년)에 중건하였다. 당시 중건공사에는 인경궁(仁慶宮)의 전각을 헐어 사용하였다. 이후 1674년(현종 15년) 건물이 손상된 것을 고치라는 분부가 있었으나 현종이 동년 8월에 병으로 승하하여 그 시행여부는 알 수가 없다. 따라서 현재의 건물은 인조 때 중건된 당시의 모습을 간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선정전은 일제강점기에 변모되어 최근까지 원형을 잃어버린 상태로 존속해 왔다. 동궐도를 살펴보면 선정전과 선정문을 잇는 복도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선정문 전면에도 다시 행각이 설치되고 조정문(造政門)이 있었다. 최근 정비공사를 통하여 선정전과 선정문을 잇는 복도는 복원되었으나 선정문 전면의 행각과 문은 복원되지 못하였다. 남행각과 서행각은 정비공사를 통하여 연결되었으며 북행각의 동측끝은 2칸이 복원되었다. 그러나 동행각은 희정당이 원래의 모습에서 많이 변형되어 공간적 여유가 없어 복원하지 못하고 담장으로 대신하였다.

 기단은 장대석을 1단 이용하여 쌓았으며 그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장방형 평면 규모로 선정전을 축조하였다. 기단 상부는 박석으로 마감하였던 것을 최근 정비공사 시 방전(方塼)으로 교체하였다. 기단 전면에는 월대(月臺)를 구성하였는데 최근 정비공사 직전까지 바닥에 묻혀 있던 것을 발굴하여 장대석 3단 위에 장대석 갑석을 한단 얹은 원래의 모습을 되살렸다. 월대 상부는 다른 궁궐과 같이 박석으로 마감하고 청동제 드므를 2개소 설치하였는데 이는 화마를 막기 위한 벽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전면에는 장대석으로 축조한 3개소의 계단을 두고 측면에는 각각 1개소의 계단을 설치하였다. 좌우측면의 돌계단에는 전면과 달리 둥근 형태의 소맷돌을 놓아 장식하였다.  

내부 바닥은 귀틀과 마루짢는 방식이 변형되어 있던 것을 바로잡아 최근에 전통 우물마루로 다시 깔았다. 초석은 둥근 원형의 주좌가 있는 것으로 단면상 타원형으로 위가 약간 줄어 드는 형태이다. 이런 초석은 경희궁 홍화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기둥은 12개의 둥근 기둥을 사용하였으며 2개의 고주(高柱)를 사용하였다. 고주는 후면쪽은 생략하는 감주법(減柱法)을 사용하고 전면쪽으로만 설치하였다. 후면에는 측면 평주열에서 뒤로 물러나 작은 직경의 기둥을 세우고 여기에 의지하여 후벽(後壁)을 만들었다. 이러한 평면 형식은 편전 용도로 사용하는 경복궁 사정전과 유사하다. 다만 사정전의 경우는 후벽을 이루는 기둥이 측면 평주열과 동일선상에 위치하며 기둥 직경이 전면의 것과 동일하다는 점이 차이가 있다.

내부 어칸에는 어좌(御座)가 배설되어 있으며 그 뒤에는 일월오악병풍이 둘러져 있다. 상부 천장에는 1단을 함입시켜 보개(寶蓋)를 만들어 장엄하고 있다. 보개는 장방형 평면의 4모서리를 모접기하고 다포계의 공포로 장식하였다. 보개의 천판(天板)에는 군주를 상징하는 두 마리의 봉황이 구름사이를 노니는 모습으로 장식하였다. 정전인 인정전 어좌 상부도 역시 사정전과 같이 봉황으로 장식하고 있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기와는 드물게 청기와를 사용하여 마감하여 궁궐 내에서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청기와는 경복궁 발굴 시에도 발견되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선정전이 유일하다. 용마루와 내림마루에는 취두와 용두로 장식하였으나 추녀마루에는 잡상을 생략하였다. 한편 마루에는 양성을 생략하였는데 이는 최고급의 재료인 청기와를 사용한 집에 굳이 양성으로 마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출처 : 바람 통신
글쓴이 : 문화 탐험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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