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개국 일등공신 계림부원군 양경공 정희계 묘소 입구'라고 쓰인 경주 정씨 양경공파 문중 묘역.
경주 정씨 문중묘역에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으로 활약하였고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하는 데에 참여한 정희계를 비롯하여 아들인 정길상과 손자인 정지례 등의 묘소가 있다. 정희계는 이성계를 추대한 공으로 개국공신 일등으로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좌참찬(左參贊) 등을 거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치사하였다. 묘역이 있는 곳은 이성계가 정희계에게 사패(賜牌)한 땅으로 넓이가 661,157m²이 넘는다.
오른편 묘가 정희제의 부친 정휘와 모친 광산 김씨의 합장묘이다.
정 지례 묘.
정지례 신도비.
정지례는 부인 여흥민씨와 함장묘를 쓴다.
정지레 묘에는 옛 석물로 보이는 묘표와 장명등이 있다. 묘표는 하엽형으로 보이는데, 연봉 부분은 떨어져 나갔다.
묘표는 하엽형으로 보이며 규모는 비좌 49㎝×26㎝×11㎝, 비신 40.5㎝×15㎝×88㎝, 관석 51㎝×16㎝×21㎝이다. 비신 전면에 ‘자헌대부한성부윤정지례지묘정부인민씨□□(資憲大夫漢城府尹鄭之禮之墓貞夫人閔氏□□)’라 새겼다.
정희계 신도비.
정길상과 원주 원씨의 합장묘.
정길상 묘에는 옛 석물로 보이는 문인석이 있는데, 전체적으로 마모가 심한 상태이다.
정희계의 부인 서원 염씨의 묘.
양경공 정희계의 첫번째 아내 서원 염씨는 수가 짧아 1남 1녀를 낳고 향년 27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 딸이 중추원부사 우계(羽溪) 이만(李蔓)에게 시집을 갔다.
정희계의 첫번째 부인[初配]인 서원 염씨는 정희계 묘 앞에 있고 단분에 호석을 둘렀다. ‘계림군정희계처곡성군부인염씨지묘(鷄林君鄭熙啓妻曲城郡夫人廉氏之墓)’라 새겼다.
경주 정씨 양경공파(良景公派). 파시조 정희계의 묘.
정희계(鄭熙啓, ? ~ 1396)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고려의 시중 연제신의 사위이고 염흥방의 매제이다.
묘는 단분 합장이고, 좌향은 서북방이다. 묘역은 2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양석·장명등·문인석 등이 자리한 하단 앞에 높은 단을 쌓고 상단으로 오르는 돌계단을 두었다. 상단에는 봉분과 상석·묘갈 등이 자리하고 있다.
정희계는 경주에서 정휘(鄭暉)의 아들으로 태어났다. 공민왕 때 총애를 받아 근시(近侍)가 되었다가 대호군(大護軍)에 이르렀고, 1360년(공민왕 9) 밀직상의로 있을 때 왜구가 김화(金化), 평강(平康)을 침입하자, 남좌시(南佐時) · 안소(安紹) 등과 함께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우왕 때 최영(崔瑩)의 막하에 들어가서 서북면도순문사(都巡問使)를 거쳐 밀직사(密直使)에 이르렀다. 최영이 패한 뒤 이성계(李成桂)가 실권을 잡자 그의 인친(姻親)임을 고려하여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에 등용하였으나, 1390년 (공양왕2) 이성계를 해치려는 이른바 이초(李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안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국대비(國大妃)의 생일 때 풀려났다.
1392년 이성계의 도움으로 판개성부사에 이어 문하평리로서 응양위상호군(鷹揚衛上護軍)을 겸임하였다. 이해 1392년 7월 17일, 남은(南誾)과 함께 공양왕을 폐하는 교지를 반포하는 등 이성계를 추대하는 데 참여하여 개국공신 1등으로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 팔위상장군(八衛上將軍)에 올라 계림군(鷄林君)에 봉하여졌다. 이어 판팔위사(判八衛事) · 좌참찬(左參贊) 등을 거쳐 제2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1396년 7월 12일에 졸(卒)하였다.
정희계와 영산 신씨의 합장묘. 신묘갈 전면에는 ‘보국숭록대부행판한성부사계림군증우의정시양경정공계희지묘배정경부인영산신씨부좌(輔國崇祿大夫行判漢城府事鷄林君贈右議政諡良景鄭公熙啓之墓配貞敬夫人靈山辛氏祔左)’라고 새겼다.
봉상시(奉常寺)에서는 정희계의 시호를 안양(安煬)·안황(安荒)·안혹(安惑) 등으로 하여 올렸는데, 이를 보고받은 태조 이성계는 "정희계는 원훈(元勳)인데 시호를 왜 이다지도 심하게 하였느냐?"하며 노하였다. 이로 인하여 봉상시 중에서 최견(崔蠲)은 교형(絞刑)에 처해졌고, 4명이 유배되었으며 4명이 파직되었다. 이후 태조는 다시 양경(良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희제 가족관계 - 부(父) 정휘(鄭暉) - 부인 광산김씨
- 부인 파주염씨, 염제신의 딸 ( 1350~1376, 1남 1녀를 둠 )
- 아들 정길상(鄭吉祥) ( 1367 ~ 1420 )
- 손자 정지인(鄭之仁) ( 정길상의 아들 )
- 손자 정지의(鄭之義) ( 정길상의 아들, 병조참판, 부인 광산김씨)
- 손자 정지례(鄭之禮) ( 정길상의 아들, 판윤 )
- 손자 정지지(鄭之智) ( 정길상의 아들, 교리, 부인 하음봉씨)
- 손자 정지신(鄭之信) ( 정길상의 아들, 세마, 부인 양천허씨)
- 부인 령산신씨, (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조카, 1357~1419, 2남 2녀를 둠 )
- 아들 정효상(鄭孝祥) ( 1380 ~ 1423, 이조판서, 부인 수성나씨 )
- 아들 정계상(鄭契祥) ( 충청도병마절도사 )
- 손자 정광윤(鄭光潤) ( 정계상의 아들, 춘천방어사, 부인 연안이씨 )
- 사위 이만 ( 우계이씨, 중추원부사사재감 )
- 사위 곽덕연 ( 현풍곽씨, 장령 )
- 사위 최도일 ( 전주최씨, 창승)
- 장인 염제신 / 처남 염보국 / 처남 염흥방
- 처제 신비 염씨, 우왕의 후궁
- 자손 정발(鄭撥) - 정희계의 6세손
묘역이 조성될 때 문인석 등을 배치하였고, 근래에는 신묘표·상석·혼유석·주순석·신묘갈 등을 갖췄다. 호석을 두른 것도 근래의 일이다. 묘역의 서편에도 근래에 신도비 3기를 세웠다.
최근에 조성된듯한 경주 정씨의 묘소. 경주 정씨 묘역은 조선 전기 상류층 가문의 묘역 조성이 어떠한 양식이며 그 특징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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