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기도)

[스크랩] [경기도 여주] ?충숙공 원유남(忠肅公 元裕男) 묘역

장안봉(微山) 2012. 12. 11. 07:04

충숙공 원유남(忠肅公 元裕男)

 

1561(명종 16)∼1631(인조 9).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관보(寬甫).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송수(松壽)이고, 아버지는 수군절도사 호(豪)이며, 어머니는 상주김씨(尙州金氏)로 승훈랑(承訓郎) 광후(光厚)의 딸이다.

1583년(선조 16) 무과에, 1586년 무과중시에 각각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공을 세우고, 1596년 강원ㆍ충청ㆍ강로(江路) 등의 조방장(助防將)을 지냈다. 이듬해 정유왜란이 일어나자, 분의복수군(奮義復讐軍)의 장령(將領)으로 활약하였다.

1605년 창성부사(昌城府使)를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고,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녹훈되고 원계군(原溪君)에 봉해졌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명을 받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서 재상 윤방(尹昉)과 더불어 서울을 지켰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원유남 묘역-앞에서 부터 원경렴(元景濂)-원만석(元萬石)-원유남(元裕男)의 묘이다

 

 원유남 묘소 전경-묘를 전후로 썼다

 

 

 

 

 

 원유남 묘 후경

 

원만석(元萬石)

 

1623(인조 1)∼1667(현종 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군옥(君玉), 호는 고산(孤山). 서울 출신. 수군절도사 호(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유남(裕男)이고, 아버지는 좌상 두표(斗杓)이며, 어머니는 사간 최동식(崔東式)의 딸이다.

 

일찍이 부조(父祖)의 세력을 믿고 사람을 죽였다는 죄목으로 하옥된 바 있으나 인조의 특명으로 방면되었다. 1649년(인조 2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에 기용되고, 1652년(효종 3) 지평(持平)ㆍ정언(正言)ㆍ문학을 역임하였다.

1654년 세자시강원사서로 있을 때 시폐 열가지를 상소하여 왕의 특별한 비답을 받았다. 이듬해 장령(掌令)이 되고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을 거쳐, 1656년 경상도에 전대미문의 흉년이 들었을 때 왕명으로 진구어사(賑救御使)가 되어 열 읍을 순회하면서 민정을 보살피고 기민을 구제하여 은덕을 폈다.

그 해 헌납(獻納)을 지내고 이듬해 동래부사가 되어 어려운 왜금(倭禁:왜구의 침입을 막음)의 책임을 완수하였다. 1659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그해 사우(祠宇)의 신주(神主)를 도둑맞는 일이 생겨서 추고(推考 : 허물을 심문하고 살핌)의 처분을 받았다.

1662년(현종 3) 병조참지가 되고 이듬해 좌부승지를 거쳐, 1664년 우승지에 올랐다. 성격이 쾌활하여 일을 처리함에 과단성이 있었고, 민정을 잘 살펴 국민과 조정에 교량구실로 시폐를 논하여 시정을 촉구하였다. 한때 권력을 남용하였다는 반대세력의 비평을 받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명관으로 알려졌다.

 원만석 묘소 전경

 

 

 

원경렴(元景濂)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도원(道源), 호는 소재(疎齋)이다. 1704년(숙종 30) 종3품 무관직 대호군(大護軍)을 지낸 원명설(元命卨)의 아들로 태어났다. 1734년(영조 10) 높은 벼슬을 한 아버지 덕에 과거를 거치지 않고 음보(蔭補)로 참봉이 되었고 후에 지방의 목사를 지냈다. 1757년(영조 33) 과거에 응시하여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북도병사와 경기수사를 역임하였다. 이어서 병조참판을 지내고 원흥군(原興君)에 봉해졌다. 1767년(영조 43)에 죽었으며, 묘는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장암리에 있다.  [출처] 원경렴 | 두산백과

 원경렴(元景濂) 묘 전경

 

 

 

 

 

원경렴의 신도비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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