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기도)

[스크랩] [경기도 여주] 원호, 원두표(元豪, 元斗杓) 묘역

장안봉(微山) 2012. 12. 11. 07:04

충장공 원호(忠壯公 元豪)

 

1533(중종 28)∼1592(선조2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중영(仲英).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송수(松壽)이며, 어머니는 순흥안씨(順興安氏)로 생원 순(珣)의 딸이다. 김덕수(金德秀)에게 글을 배워 어려서부터 경사(經史)에 통달하여 촉망을 받았으며, 김육(金堉)의 증조부 김이진(金頤眞)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문(文)을 버리고 무(武)를 택해서 1567년(명종 22) 무과에 급제하였다. 선전관에 이어 내외직을 두루 거치고 경원부사로 있을 때에는 이탕개(尼湯介)의 침입을 격퇴하였다. 1587년(선조 20) 전라우도수군절도사로 재직중 전라좌도에 침입한 왜구를 막지 못하여 인책, 유배되었다. 얼마 뒤에 풀려나와 몇몇 관직을 역임하고 고향에 은퇴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원도조방장(江原道助防將)으로서 패잔병과 의병을 규합, 여주의 신륵사에서 적병을 크게 무찔렀으며, 패주하는 적병을 구미포(龜尾浦)에서 섬멸하였다.

그 공으로 경기ㆍ강원방어사 겸 여주목사로 임명되었다. 얼마 뒤 강원감사 유영길(柳永吉)의 격문을 보고, 병을 이끌고 가다가 김화에 이르러 적의 복병을 맞아 분전하다가 전사하였다. 병조판서ㆍ좌의정에 추증되었고, 김화의 충장사(忠壯祠)ㆍ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충익공 원두표(忠翼公 元斗杓)

 

1593(선조 26)∼1664(현종 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건(子建), 호는 탄수(灘叟)ㆍ탄옹(灘翁). 첨지중추부사 송수(松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수군절도사 호(豪)이며,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유남(裕男)이다. 박지계(朴知誡)의 문인이다.

 

광해군의 정치가 점점 문란하여지자 의사(義士)들과 인조반정 모의에 협찬하였고, 반정이 성공한 뒤에는 그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원평부원군(原平府院君)에 봉하여졌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전주부윤이 되고, 나주목사를 거쳐 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당시 어영부사로서 남한산성을 지키고, 1642년 형조판서로 승진되었으며, 뒤이어 강화부유수ㆍ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이 동안에 있어서 그는 서인 중 공서(功西)에 속하여 청서(淸西)를 탄압하다가 같은 파에 속한 김자점(金自點)과의 정권다툼으로 분당하여 원당(原黨)의 영수가 되었다.

1649년(효종 즉위년) 호조판서로서 한때 파직당하였고, 1651년에는 좌참찬ㆍ좌찬성을 지냈으며, 1654년 병조판서가 되어 김육(金堉)이 적극 추진하려는 대동법(大同法)의 실시를 반대하는 동시에, 역시 김육에 의하여 추진된 동전유통보급방법(銅錢流通普及方法)을 논의하는 데 참여하였다.

1656년 우의정을 거쳐 1662년에는 좌의정에 올라 내의원과 군기시의 도제조(都提調)를 겸직하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원호 원두표 묘역 전경

 원호 신도비(우)와 원두표 신도비(좌)

 

 

 

 원두표 신도비

 

 

 

 

원호장군 묘소 전경-모자쓴 노옹은 관리인 이신가(?) 묘역내 잡초를 제거하고 계셨다

 

 

 

 

 

 

 

 

원두표 묘소 전경- 뒷쪽이 조부 원호의 묘소이다

 

 

 

 

 

 

 

 

 

 

 

 

원몽은(元夢殷) 묘소 전경-원두표는 부인 삭녕최씨와의 사이에 3남1녀(원만석,원만리,원만춘)를 두었는데 장남 원만석은 후사가 없어 삼남 원만춘의 아들 원몽은으로 후사를 이었으니 원몽은은 원두표의 장손이 된다

 

 

원호 원두표 묘역 전경-제일 앞쪽이 원몽은 묘 그 뒤가 원두표 묘 제일 뒷쪽이 원호의 묘이다

원유남 묘역에서 바라본 원호 원두표 묘역- 원유남의 묘는 길을 건너 낮은 구릉에 있다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