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당 이식(澤堂 李植)
1584(선조 17)∼1647(인조 2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남궁외사(南宮外史)·택구거사(澤癯居士). 좌의정행(荇)의 현손(玄孫)이다. 아버지는 좌찬성에 증직된 안성(安性)이고 어머니는 무송 윤씨(茂松尹氏)로 공조참판옥(玉)의 딸이다.
이식은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1613년 세자에게 경사(經史)와 도의(道義)를 가르친 정7품에 해당하는 설서(設書)를 거쳐 1616년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이듬해에 선전관을 지냈다.
1618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정계에서 은퇴하여 경기도 지평(砥平:지금의 양평군 양동면)으로 낙향했다. 그 후에 남한강변에 택풍당(澤風堂)을 짓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했다. 호를 택당이라 한 것은 여기에 연유한다. 1621년 관직에 나오라는 명을 계속 받았으나 이를 거부했다. 그래서 왕의 명령을 어겼다는 죄로 구속되기도 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교분이 있었던 친구들이 조정의 주요직에 진출하게 되자 발탁되어 이조좌랑에 등용됐다. 이듬해에 부수찬·응교·사간·집의 등을 역임했다.
1625년(인조 3) 예조참의·동부승지·우참찬 등을 역임했고 다음해에 대사간·대사성(大司成)·좌부승지 등을 지냈고 1632년까지 대사간을 세 차례 역임했다. 임금의 종실을 사사로이 기리고 관직을 이유 없이 높이는 일이 법도에 어긋남을 논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 간성현감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1633년에 부제학을 거쳐 1638년 대제학과 예조참판·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식은 1642년에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청나라를 배척할 것을 주장한다고 하여 중국의 심양(瀋陽)으로 잡혀갔다. 돌아올 때에 다시 의주(義州)에서 청나라 관리에게 붙잡혔으나 탈출하여 돌아왔다. 1643년 대사헌과 형조·이조·예조의 판서 등 조정의 주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1646년 별시관(別試官)으로 과거 시험의 문제를 출제하였는데 그가 출제한 문제에 역모의 뜻이 있다고 하여 관직이 삭탈되기도 했다.
이식은 문장이 뛰어나 신흠(申欽)·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와 함께 한문사대가로 꼽혔으며 그의 문하에서 많은 문인과 학자가 배출됐다.
문집으로는 『택당집』이 전하는데 한시의 모든 갈래에 두루 능숙했고 많은 작품을 남겼다. 대체로 정경의 묘사가 뛰어나고 감상에 치우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풍광을 읊은 시가 많다. 고체에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고 오언율시에 특색을 발휘했다.
『초학자훈증집(初學字訓增輯)』·『두시비해(杜詩批解)』 등을 저술했으며 『수성지(水城志)』·『야사초본(野史初本)』 등을 편찬했다.
김택영(金澤榮)에 의하여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그의 문장은 우리나라의 정통적인 고문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에는 「사간원차자(司諫院箚子)」 등의 6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에 제향됐으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686년 영의정에 추증됐다.
덕수이씨 세장지비
택당 이식 묘역 전경-좌측이 외재 이단하의 묘이고 중간이 택당의 부친되는 이안성의 묘이며 우측이 택당의 묘이다
문층공 외재 이단하(文忠公 畏齋 李端夏)
1625(인조 3)∼1689(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자는 계주(季周)이다. 호는 외재(畏齋)·송간(松磵)이다. 섭(涉)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안성(安性)이다. 아버지는 판서 식(植)이며, 어머니는 심엄(沈掩)의 딸이다.
선조의 덕으로 공조좌랑으로 재직했다.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그 뒤 정언·부교리·용안현감·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북평사로 있을 때 감사 민정중(閔鼎重)과 함께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정문부(鄭文孚)의 사적(史蹟)을 조사해 조정에 알려 관직을 추증시켰다. 또한 사당을 세워 충렬사(忠烈祠)라는 사액을 내리게 했다.
부교리로 있을 때는 귀양 중인 대신들을 속히 사면할 것을 주청하기도 했다. 1669년 이조정랑이 되어 각 사(司) 노비의 공안(貢案)을 정리할 것을 청하여 신공(身貢)을 반 필씩 줄이게 했다. 이어 교리로 경서교정청(經書校正廳)의 교정관이 되었다. 훈련별대(訓鍊別隊)의 창설을 주청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그 뒤 응교·사간·사인 등을 역임하고, 1671년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이조참의가 되어 중종의 폐비 신씨(愼氏)의 신주를 신씨 본손의 집으로 옮기게 했다. 1674년 대사성으로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이어 숙종이 즉위한 뒤, 서인으로서 제2차 복상문제로 숙청당한 의례제신(議禮諸臣) 처벌의 부당성을 상소하다가 파직되어 이듬해 삭직당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풀려났다. 이듬해 홍문관제학이 되어 ≪현종개수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682년 대사헌으로 각 능 기신(忌辰) 제사에 올리는 유과(油果) 및 과일 위를 덮는 채색꽃을 줄여 제사비용을 줄이도록 했다.
1684년 예조판서가 되어 <사창절목 社倉節目>과 ≪선묘보감 宣廟寶鑑≫을 지어 올렸다. 1686년 우의정이 되어 사창 설치의 다섯 가지 이익을 건의했다. 그리고 죽을 죄인에게 삼복(三覆 : 三審制)을 실시할 것을 청했다.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행판돈녕부사로 있다가 죽었다.
이단하는 무력해진 의정부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비변사를 의정부의 직방(直房)으로 만들고, 그 곁에 한 방(房)을 비변사로 만들어 의정부와 통하게 했다. 또한 좌우찬성의 자리를 비워 두지 말고 참찬과 함께 삼공을 도와 정치를 의논하게 할 것을 주장하였다.
사창제도를 철저히 실시해 굶주리는 백성을 돌볼 것을 역설하였다. 송시열의 문하에서 자라나 조선 후기 경학을 대표할 만한 학자이다. 용안(龍安)에 영당이 있다. 저서로는 문집인 ≪외재집≫과 편서로 ≪북관지 北關誌≫가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좌의정 외재 이단하선생 묘소 전경-뒷쪽이 조부 이안성(李安性)의 묘소이다
외재 이단하선생 묘 후경
외재의 조부 이안성(李安性 ) 묘소 전경
외재 이단하의 아버지 문정공 택당 이식(文靖公 澤堂 李植)선생 묘소 전경
이식선생 묘 후경
이식선생 묘에서 바라본 이안성(중간 쌍분)묘 이단하 묘
택당 이식의 조부 이섭(李涉) 묘 전경
이섭 묘 후경
재실-박아재(白鵶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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