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향기)

[스크랩] 문경 기행(2) : 영남대로 嶺南大路(1)

장안봉(微山) 2013. 1. 28. 11:15

 

                                                         문경 기행(2) :  영남 대로 嶺南大路(1)

 

 

영남대로 嶺南大路 :

 

문경새재 입구에 문경새재의 상징문의 현판 [嶺南大路]의 글씨가 있다.

예로부터 이 곳을 지나는 길은 나라의 큰길로서 <영남대로>라고 불려 왔다.

 

영남대로는 조선왕조 성립과 함께 구체적으로 윤곽이 드러난 교통로이다

개국 초에 개성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한양을 중심으로 한 X자형 간선도로망이 이루어졌다.

조선조 이전에는 중부지방과 경상도 사이에는 교통량이 많았지만

대동맥이라 할 만한 도로가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 개국과 동시에 조정은 동래를 종착지로 정하고

한양과 동래를 연결하는 간선도로의 노선을 확정했는대 이것이 영남대로이다,

영남대로가 통과한 지역은 조선시대에 인구가 조밀하고

산물이 풍부하여 경제적으로  중시되던 곳이었다.

전국의 10대 도시의 반 이상이 분포했으며

우수한 인재를 배출한 고장이 많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행정적으로 큰 비중을 두었다.

 

                        *  문경새재의 상징문의 현판 [嶺南大路]의 원본 글씨이다.

                              - 이 글씨는 우리나라 서예계의 대가인 초정 권창륜 선생이 썼다.

 

 

문경 새재는 길의 일부이다.

이 길은 산을 넘어 가는 험한 길이었다.                                                                                                 

우리나라의 국토의 3/4이 산이라고 한다.

그 산이 이어진 산의 줄기의 주된 흐름이 백두대간이다.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호랑이의 등뼈를 타고 주된 줄기가 내려오면서

곳곳으로 가지를 내고

그 가지가 땅을 구분하고 사람의 왕래를 가로 막았다.

사람의 인심이 나뉘고 습성도 달라졌다.

그러나 그들은 단절된 채로 그대로만 지내지는 않았다.

사람은 길을 내었다.

산과 물이 앞을 가로 막으면

둘러가기도 하고 가로질러 가기도 하였다.

다리를 놓고

고개를 넘고...

그 고갯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문경을 지나는 새재이다. 

이름하여 [문경새재].

 

                         * <옛길박물관> 현관 벽에 있는 김정호의 글 중에서...

                        * 길을 따라 조금만 들어가면 고풍의 가옥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삶의 흔적들

                                        * 디딜방아...

 

                                                * 소여물을 주는 구시

                                                       - 소의 머리 높이에 맞춰 구시를 좀 올려달아준 주인의 배려가 보인다...

                                                 

이 문경새재는 영남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가장 가까운 길을 만들어 주었다.

사람이 오고가면 항상 그에 따르는 사연들이 남게 된다.

그 사연들을 오늘에 되돌아 보는 재미도 크다.

그래서 옛 사람들이 지나다니던 길을

지금은 그때보다는 훨씬 잘 만들어진 길이지만

걷기에 익숙하지 못한 지금 사람들은 옛보다 힘들어 하면서도 그 길을 다닌다. 

 

 

        * 첫 관문 문경 새재 영남제1관 주흘관 主屹關 :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숙종 34년(1708)에 설관하였다.

               관문 양쪽에 개울물을 흘러 보내는 수구水口가 있으며

               3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 발 간직하고 있다.

 

 

이 길은 조선 태종 때 처음 닦았다.

문경의 새재란 뜻으로, 새 조鳥 자를 써 <조령鳥嶺>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새재가 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새도 날아서도 넘기 힘드는 고개

억새가 우거진 고개

하늘재를 버리고 새로 닦은 고개

하늘재와 이유릿재(이화령) 사이[새]에 있는 고개

서울로 가는 샛길이 된 고개 등등 여러 가지 의미를 들이대며 추측한다.

 

문경새재가 열리기 전에 충청과 영남은 새재의 북쪽에 있는 하늘재를 통해서 이어졌다.

하늘재는 신라시대 때 뚫린 문헌에 기록된 한반도 최초의 도로이자 고개길이었다.

 

* 사람이 사는 길목마다 우리를 지켜주는  성황당이 있다.

   첫 관문 주흘관에서 산쪽 모서리에도 성황당이 있다.

 

성황사 城隍祠 : 사적 제147호

        경북 문경읍 상초리 141-1번지

문경관문 주흘관 성벽 오른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성황사는 여신女神을 모신 곳으로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75년 성황사 보수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700년경에 건립하여 조선 헌종10년(1844)에 중수한 것으로 추측된다.

문경 제1관문의 축성과 비슷한 시기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새재 성황사 여신은 영험靈驗이 뛰어나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아직까지 끊이지 않고 있으며,

성황신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오고 있다.

조선조 영의정을 지낸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이 젊었을 때 문경새재를 넘게 되었는데

이 성황사 여신이 예쁜 색시의 형상을 하고 나타나 새재를 같이 넘어면서 최명길에게

<장차 나라에 큰 병란이 닥칠 때 청나라와 화친하여 나라를 보전하라>는 말을 하였다.

그 후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나라의 중신들이 청나라와 끝까지 싸우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최명길은 화청和淸을 주장하여 나라를 구하였다는 말이 있다.

 

 

                                                                        안으로 살짝 열어보니...

   

                                      * 제사를 지내는 곳... 

 

 

이 하늘재는 새재가,

새재는 이화령에 있는 터널이,

이화령은 경부고속도로와 중부내륙고속도로가 뚫리면서 그 기능을 잃어갔다.

 

그러나 이 새재를 통하는 길이 

박정희대통령시절 국토 순례 길이라 보존되기도 했고

최근에는 관광 명소로 반듯하고 단장됐다.

 

새재 鳥嶺

                  김만중(1637-1692)

백두산은 남으로 삼천리를 달려와서

큰 고개 가로질러 칠십 고을 나눴네

예부터 제후들 할거할 곳 있었거니

지금까지 그 요새 흔적이 있다네.

 

짓푸른 봉우리 거듭거듭 솟아있고

눈부신 단풍은 나무마다 아름답다.

공명을 세우기엔 내 이미 늙었거니

가던 길 멈추고 개인 하늘 볼 밖에

 

 

# 옛 모습들...

 

조산 造山 :

인위적으로 조성한 산이라는 뜻이다.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공허하거나 취약한 지점에 조산을 만듦으로써 그곳을 보강하자는 의식이 담겨있다.

문경지역에서는 골맥이 서낭당으로 불리며 마을 입구나 경계지점에 세워 안녕과 풍요를 기원한 곳이다.

 

그리고 옆에 있는 쉼터

 

조숙정 鳥宿亭 :

길 가에 이런 쉼터는 많이 있으나 특별히 이곳에는 조숙정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사람만이 쉬어가는 곳이 아닌... 새도 함께 자고 간다는 뜻.

 

 

     * 곳곳에 잠시 쉬어가는 이런 쉼터가 있다.

 

 

지름틀바우 :

기름을 짜는 도구인 기름틀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지름틀]은 기름틀의 경상도 사투리이다.

참께, 들깨, 콩 등을 볶아 보자기에 싼 떡밥을 지렛대의 힘으로 눌러서 짠다.

기름틀은 받침틀과 누름틀로 구성되는데 받침틀 위에 볶은깨를 올려놓고 두터운 누름틀을 덮어 누르면 기름이 흘러내리게 된다.

 

 

등룡정 登龍亭 :

등룡정은 현 서울시 종로구 옥인동에 있었던 사정射亭[활을 쏘는 곳]으로서

삼청동의 운룡정, 사직동의 대송정, 누상동의 풍소정, 필운동의 등과정과 더불어 서촌오사정西村五射亭으로 불리어졌으며,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이 정자는 KBS에서 [불멸의 이순신] 촬영을 위하여  재현한 촬영 세트로,

이순신의 장인이자 스승이며 당대 최고의 강궁이었던 <방진>이 우학을 양성하던 곳이며

임진왜란 당시 서애 유성룡과 원균이 함께 무예를 익힌 곳이다.

 

 

조령원터 鳥嶺院址 : 향토유적

주흘산  1관문 주흘관문과 2관문 조령관문사이에 위치한 조령원터는

고려와 조선조 공용으로 출장하는 관리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공익시설이다.

문경새재는 과거 한양과 영남을 이어주던 길목에 위치하여 수 많은 길손들이 오고가는 중요한 통로였으며,

역과 원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새재내에서만 동화원, 신혜원, 조령원 등 3곳의 원터가 전해지고 있다.

조령원터의 전체 면적은 1980m2(600평)이며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돌담은

너비 2.8-3.0m, 높이 2.9m 내외이고, 동쪽 57.6m, 서쪽 53m, 남쪽 38.9m, 북쪽 37.7m의 대칭변 길이가 모두 다른 남북으로 길게 쌓여진 장방형이다.

서쪽 돌담 중간에 문지가 남아 있는데 돌담을 성벽의 육축 모양으로 마무리하고 그 사이에 2매의 방형 석주를 문설주로 세웠다.

1977년과 1997년 2차례의 발굴조사에서 건물의 터가 두 개층에 걸쳐 발견되었는데

상단의 건물지에 고려시대의 온돌유지와 부엌시설 일부가 드러났다.

기와편, 토기편, 자기편, 어망추, 철제 화살촉, 마구류 등도 출토되었다.

 

 

 

 

무주암 無主岩 :

옛길 오고가는 길목에 있는 바위...

누구나 앉아 쉬었다 갈 수 있는 바위라 주인이 없다는 뜻...

 

             * 막 피어나는 산도화山桃花가 있으니  휴식으로는 그저그만...

 

 

주막 酒幕 :

새재는 조선시대 영남에서 한양을 오가던 가장 큰 길로서,

이 주막은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길로 오르던 선비들,

거부의 꿈을 안고 전국을 누비던 상인들 등 여러 계층의 우리 선조들이 험준한 새재길을 오르다

피로에 지친 몸을 한잔의 술로 여독을 풀면서 서로의 정분을 나누며 쉬어 가던 곳이다.

산수 경관이 수려한 곳에 자리잡은 이 주막은

조국순례사업의 일환으로 옛 형태대로 되살려 선조들의 숨결과 전통 문화의 얼을 되새기고자 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길을 지나면서...

주막에 묵으면서 글을 남겼다.

 

 

             * 踰鳥嶺 宿村家    새재를 넘어 시골집에 묵다

                                                               매월당  김시습(1435-1493)

       嶺分南北與西東   새재는 남북과 동서를 나누는데

       路入靑山中    그 길은 아득한 청산으로 들어가네                            @ 縹 : 휘날릴 표,    緲 : 아득할 묘

       春好嶺南歸不得   이 좋은 봄날에도 고향으로 못 가는데

       鷗啼盡五更風  소쩍새만 울며불며 배벽바람 맞는구나                         @ 鴣 : 자고 고

 

 

             * 宿鳥嶺    새재에서 묵다

 

       登登涉險政斜暉   험한 길 벗어나니 해가 이우는데

       小店依山汲路微  산자락 주점은 길조차 가물가물

       谷鳥避風尋去  산새는 바람 피해 숲으로 찾아들고                        @ 樾 : 나무그늘 월

       童踏雪拾樵歸   아이는 눈 밟으며 나무지고 돌아간다                    @ 邨 : 마을 촌

       啖枯草    야윈 말은 구유에서 마른 풀 씹고                         @ 嬴 : 찰 영,  驂 : 곁마 참,  櫪 : 말구유 역 

       倦僕燃松冷衣   피곤한 몸종은 차가운 옷 다린다.                          @ 熨 : 찜찜할 위 

       夜久不眠 * * 靜   잠 못 드는 긴 밤 적막도 깊은데                           

       漸看霜月透紫扉  싸늘한 달빛만 사립짝에 얼비치네

 

 

            * 宿鳥嶺村店    새재에서 묵다

 

       林風起     살랑살랑 솔바람 불어오고                                       @ 悄 : 근심할 초

       泠泠溪響生    졸졸졸 냇물소리 들려오네                                        @  泠 : 깨우칠 령

       山月自分明   산 위에 뜬 달은 밝기도 해라.

       浮世身如寄   덧없는 세월에 맡긴 몸인데

       殘年病轉   늙그막 병치레 끊이질 않네                                         @ 嬰 : 어린아이 영 

       南來還北去    고향에 왔다가 서울로 가는 길

       簪笏愧虛名    높은 벼슬 헛된 이름 부끄럽구나

 

 

 

* 교귀정 交龜亭 과 :

* 경상감사 도임행차  慶尙監司 到任行次 :

교귀정은 새롭게 도임하는 신임감사와 업무를 마치고 이임하여 돌아가는 감사가 관인官印을 인수인계하던 곳으로

문경새재 용추폭포 옆에 위치하고 있다.

문경 현감 신승명愼承命이  1400년대 후반(1466-1488)에 세웠다고 전한다.

그러나 구한 말에 불에 타 없어졌던 것을 1999년에 중창하였다.

경상감사 도임행차는 조선시대의 미암일기초[尾巖日記草]와  [탐라순력도眈羅巡歷圖]를 기초로 하여 재현한 것이다.

총 300여명으로 구성된 행차의 그림이다.

 

                                                  * 앞뒤로 걸려 있는 두 현판.

 

 

 

* 교귀정 소나무 :

경상감사의교인식이 이루어진 교귀정의 역사와 함께한 나무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나무의 뿌리가 교귀정 방향인 북쪽으로 뻗어있고 줄기는 길손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남쪽으로 향해 있으며,

마치 여인이 춤을 추는 듯하다. 

 

* 交龜院  교귀원

                             이 행  李 (1478-1534)                          @ 筕 : 거친대자리 행

交龜名有自   교귀란 이름은 그 유래 있어도

往跡世無傳   지난 자취는 전해짐이 없어라

幽鳥眞堪慕   어여쁜 새는 진정 마음 쏠리지만

殘花只可憐   시든 꽃은 다만 가련할 뿐이네

古今須一態   예와 이제가 한 가지 모습인데

愚智孰相懸   지혜와 어리석음 무슨 차이 있으랴

幸免前驅導    아직은 견마 잡힐 신세 아니어서

溪山爲我姸   산과 계곡이 반겨 주는 것이리라.

 

 

* 안동부사 추모비 : 교귀정 옆에 있다...

 

또 한켠에는 바위에 바로 새겨진 공덕비가 있다...

 

 

교귀정 앞쪽으로 용추계곡이 있다...

 

바위벽에 새긴 글씨 [龍湫용추]

 

 

 

 

아름다운 곳에는 어디가 시가 떠오르나 보다...

 

*  鳥嶺龍湫亭  새재 용추정

 

誰闢荒原辨勝亭   어느 누가 외진 여기 정자를 지었는지

危欄倚更伶   우뚝한 난간에 기댄 가슴 떨리네                   @ 乍 : 잠깐 사,     俜 : 비틀거릴 빙 

天開石壁扶元氣   하늘은 벼랑 열어 기운을 더해 주고

地劈龍湫巨靈    대지는 몸을 갈라 신령을 안았도다               @ 賴 : 의뢰할 뇌

陰壑深深藏霧雨   깊고 깊은 골짜기엔 물보라 가득하고

晴天隱隱動雷霆   맑디 맑은 하늘인데 우뢰소리 은은하다

洞雲開盡峯增翠   구름 걷힌 봉우리 푸른 빛 새로워

看遍芙蓉萬形   온 세상에 활짝 핀 무궁화 같구나                  @ 朶 : 늘어질 타

 

 

*  龍湫 용추

                                      면곡 어변갑

龍動盤折   용이 꿈틀거리어 소용돌이 헤치니                       @ 渦 : 소용돌이 와

涵天明日新   잠긴 하늘에 밝은 해가 새롭다

晴雷白虹瀉   개인 날 우뢰소리에 흰 무지개 뻗치니

恍惚孰窮神    황홀하구나, 누가 그 신비를 알리

 

* 용추약수 龍湫藥水 :

용추샘은 바닥돌을 파고 깎아 샘을 만들 뒤, 반듯한 청정석과 큰 바우ㅡ를 층층히 쌓아 만들었다.

규모와 형태로 보아 옛 길손은 물론 성내 군사용으로 요긴하게 쓰이던 샘으로 제2관문 조곡관 축성 당시(선조 27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일제강점기에 새재길을 확장하면서 토석에 뭍혔던 것을 2003년 10월에 복원하였다.

 

궁예 :

궁예(870-918)는 신라 왕족으로 901년 후고구려를 건국하여 왕이 되었다.

911년 국호를 태봉으로 개칭하면서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라 하였다.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이라 칭하는 등 폭군으로 전락하여 결국 부하 장수들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자 쫓겨나 평강平康에서 피살되었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어. 인생이 찰나와 같은 줄 알면서도 왜 그리 욕심을 부렸을꼬? 허허허, 이렇게 덧없이 가는 것을...>(궁예의 마지막 독백)

 

                                 * 드라마 <왕건>에서 궁예가 최후를 맞은 곳이 이 근처...

 

 

여기서 좀 쉬어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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