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향기)

[스크랩] 문경 기행(4) : 새재[鳥嶺]의 아픈 이야기

장안봉(微山) 2013. 1. 28. 11:13

 

                      

                            

                                                             문경 聞慶 새재[鳥嶺]의 아픈 이야기


 

문경새재 :

 

백두대간의 조령산마루를 넘는 이 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嶺南 대로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이니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새재鳥嶺는<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으로

초점(草岾 : 풀,억새가 우거진 고개)라고도 하였다.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들이 이 고개를 지나다녔는데

한양에서 들려오는 기쁜 소식을 여기서 듣는다고 聞慶이라...

 

임진왜란 이라는 호된 경험을 한 뒤에

이곳에 3개의 관문(주흘관主屹關, 조곡관鳥谷關, 조령관鳥嶺關 : 사적제147호)를 설치 정비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이곳은 자연 경관이 빼어나고 유서깊은 유적과 설화민요(새재아리랑) 등으로 이름 높은 곳이다.

이곳에는 나그네의 숙소인 원터, 신구新舊 경상도관찰사가 관인官印을 주고 받았다는 교구정交龜亭터가 남아 있다.

 

지금은 아주 잘 다듬어진 요새처럼 보인다...

 

높은 담장

그 담장에 설치된 총과 화살을 쏠 수 있는 시설물

그리고 가로막이등... 

 

그 앞에는 물길을 내어  조금이라도 근점을 어렵게 하였고

다리에는 굳센 짐슴을 새겨 놓아 감히 근접함을 두렵게 했다. 

 

 

 

물길이 흐르는 곳에도 이런 고려를 하였다.

 

 

다른 쪽의 물길의 모습...

 

 

그러나 임진왜란에서의 처절한 경험을 잊어서는 안된다.

제2관문 가까이에는 <이진터>라 적힌 작은 나무판이 있다.

 [ 부산에 왜군이 상륙하자 신립은 군사 8000명을 이끌고 새재에 진을 친다.

    제2진의 본부를 바로 이 길목에 설치했다 하여 <이진터>다.

    하나 신립은 이 천혜의 복병 장소에 병사를 배치하고 않는다.

    대신 조령산 능선에 조선군으로 위장한 허수아비를 세운 뒤

    충주 탄금대로 물러가 배수진을 친다.

    왜군은 여기에 필시 조선군이 매복해 있으리라 판단하고

    세 번이나 초병을 보내 조령산을 정탐한다.

    왜군 초병은 조선군 허수아비의 머리에 새가 앉는 것을 목격하고

    조선군이 철수했음을 알아차린다.

    왜군은 춤을 추며 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신립의 부대는 탄금대에서 전멸한다. ]

 

 

이 뼈아픈 역사를 되새기고자함인지...

문경새재길 옆에는 KBS드라마 촬영장이 있고

촬영에 쓰이는 소품들인양 옛 모습의 병장기 들이 있다.

 

 

 

 

 

 

옛 이야기를 드라마로만 찍고 있기에는 너무도 안쓰럽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이라

옛날의 쓰라린 경험을 거울 삼아

오늘의 나라의 방패에 힘써야 할 터...

그러나 곳곳에서 뚫리고 깨어지고 ...

전자교란 당하고,

컴퓨터 해킹 당하고...

 

그러나 안에서는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소란스럽기만 하다.

못난 것이 잘 난채 하는 것에 대한 벌을 줄 수는 없나...

제 밥그릇 챙기는 것 이외에는 어느 하나 마음을 맞춰 일을 해 나가는 것이 없다.

 

 

(제1관문 - 제3관문 : 7㎞)의 길을 걸으면서... 

상쾌한 공기와는 달리 마음을 복잡하게 하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촬영장 담너머는 너무도 평화스러워 보인다.

영원히 평화가 지속된다면야 이처럼 좋을 수야 없겠지만.

안에서 적을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임진왜란 때의 이야기를 좀 더 상세히 적어 본다.

1592년 임진년 4월 13일(이하 음력) 부산 앞바다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1만8000여 명의 왜군 1진이 상륙하자마자 부산포를 함락시키고 연이어 동래성을 쳤다.

동래부사 송상현이 반나절을 버텼지만 이틀 만인 15일 왜적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그 후 왜군은 아예 거칠 것이 없었다.

말 그대로 파죽지세였다.


왜적의 침입 사실이 서울 조정에 알려진 17일

이후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 벌어진 크고 작은 일들 속에서 조선의 운명은 결정 났다.

왜적의 침략 소식을 듣고 대신들과 비변사가 빈청에 모여 임금을 뵙고자 했다.

그러나 선조 임금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촌각을 다퉈 중대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최종 결정권자는 뒤에 숨어 있었다. 

급한 대로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삼아 경상도로 내려 보내려 했지만 병사가 없었다.

병사라고 해야 대부분 관복을 입고 옆구리에 책을 낀 채 나온 아전과 유생들뿐이었다.

결국 이일은 사흘이 지나도록 전장으로 떠날 수조차 없었다.

징비록』을 쓴 류성룡은,

뒤늦게 오합지졸을 이끌고 나선 이일이 상주에 닿아 왜군과 맞닥뜨리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말을 버리고

의복도 벗어던진 채 머리도 풀어헤치고 알몸으로 달아났다고 적었다.

이것이 당대 조선 최고의 장군이란 이의 모습이었다.


이일이 패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벌써부터 도망칠 궁리가 시작됐다.

하지만 상륙한 지 불과 10여 일 만에 상주까지 파죽지세로 치달은 왜군 역시 처음으로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상주에서 문경 가는 길에 험준한 산세에 고모성이라는 옛 성이 있는데

왜군은 조선 병사들이 매복해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척후병을 보내 몇 번씩이나 살펴보며 시간을 지체했다.

하지만 조선의 병사는 아예 없었다.

다만 조선의 험준한 지세만이 왜군을 하루라도 멈추게 했을 뿐이다.

만약 도망갈 궁리가 아니라 제대로 싸울 궁리를 했다면 왜군의 그런 심리와 상황을 간파해 역공할 수 있었을 텐데….


당시 영남에서 서울로 오려면 조령, 죽령, 추풍령 중 한 곳을 지나야 했다.

왜군 1진은 조령을 택했다. 바로 문경새재다.

그 조령에서 매복해 승부를 냈어야 했는데 조선 제일 명장이라 불리던 신립申砬은 어찌된 일인지 뒤로 물러나 충주 탄금대에 진을 쳤다.

결과는 참담했다.

후에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퇴각하는 왜군을 쫓아 조령을 지나가다 이렇게 탄식했다.

<이런 천혜의 요새지를 두고도 지킬 줄을 몰랐으니 신총병(신립)도 참으로 부족한 사람이로구나.>

훗날 숙종 때 만들어진 조령 3관문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마패령을 올라 주흘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위에서 바라보면 조령의 깊은 협곡이 더욱 뚜렷하다.

임진년 당시 이 협곡에 매복해 양쪽에서 화공이라도 펼쳤다면 역사는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신립 장군의 패착의 근본 원인은 오만傲慢이었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열흘 전쯤 류성룡이 왜군의 조총을 경계하라고 말하자 신립이 대꾸했다.

<아 그 조총이란 것이 쏠 때마다 맞는답니까?>

신립은 기마용병에 능한 장수로 두만강 유역 등 북방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바 있었다.

하지만 그 성공 전력이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

신립은 자신의 기마용병술을 너무 확신한 나머지 조령에서의 매복작전을 거두고 대신 탄금대에서의 일전을 꾀했다.

물론 그것은 결정적 패착이었다.

교훈을 남겼다.

<밖에서 쳐들어오는 것만 적이 아니다. 진짜 큰 적은 내 안에 있다. 오만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에도 자신의 맡은 바 소임을 다하였던 충신들도 있었다.

옛길박물관으로 들어 서기 전에 신길원현감충렬비가 그것을 말해준다.


신길원현감충렬비 申吉元縣鑑忠烈碑 : 유형문화재 제145호

임진왜란 때 순절한 문경聞慶 현감 신길원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문경 향회鄕會가 편찬한 기록에 의하면 신길원은

조선 명종 3년(1548)에 출생하여 선조 9년(1576)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동왕 23년(1592)에 문경 현감으로 부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왜의 대군이 공격해 오자 그는 현의 군사 수십인과 더불어 왜적에 대항하다가 총상을 입고 붙잡혔다.

왜장이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그에 굴복하지 않고 꾸짖으며 항거하다 사지를 절단 당하여 장렬히 순국하였다.

이후 조정에서 그를 좌승지로 추증하고 그 충절을 전하고자 숙종 32년(1706)에 이 비를 세웠다.

원래 이 비는 문경초등학교 옆에 있던 것을 1976년 문경 새재 제1관문 안의 비석군에 옮겼다가 1998년 현 위치에 비각을 세우고 새롭게 단장하였다.

 

 

[추도문]

충신은 반드시 효자 집안에서 구한다더니 신길원 현감의 경우가 바로 그 좋은 예이다.

공은 어려서 이미 효성이 지극하여 자기 손가락을 자른 피를 약에 섞어 어머니를 연명케하였고

열네살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슬피울며 삼년상을 마치니 보는 이가 눈물을 흘리었다.

효행이 알려져 선조가 효자 정문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병자년에 사마시에 합격한 뒤 태학의 추천으로 참봉 벼슬 등을 거쳐

문경 현감이 되어 백성을 정성으로 다스리고 항상 성리학의 책을 읽어 규범으로 삼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문경으로 왜적이 다가오자 모두 형세 불리함을 들어 피할기를 권하였으나

공은 소리 높혀 말하되 내가 맡은 고을이 곧 내가 죽을 곳인데 어찌 피하리요 하고 적은 군사를 독려하더니

적병이 이르자 잘아나지 않은 이가 없고 홀로 종 하나만이 가지 않고 있거늘

의관을 바로 하고 관인을 차고 앉으니

적병이 칼을 빼어 들고 속히 항복하라 을 가르키라고 협박하였다.

공은 손을 들어 목을 가르키며 내가 너를 동강내어 죽이지 못함을 한탄하니

빨리 죽여서 나를 더럽히지 말라 하니

적병이 성내어 먼저 한 팔을 바르고 계속  위협하였으나

공은 얼굴빛도 바꾸지 않은 채 꾸짖기를 마지 않으니

마침내 살을 발라내는 모진 죽음을 당하였다.

때는 사월 이십 칠일이요 나이는 마흔 다섯이었다.

사람이란 조그마한 이해가 있어도 지킬 바를 바꾸지 않는 이가 드물거늘 하물며 시퍼런 칼날 밑에서이랴.

공이야말로 충렬의 선비이다.

좌승지로 추증된 공의 자는 경초慶初요, 본관은 평산平山인데

장절공 숭겸 壯節公 崇謙의 후예이며, 아버지는 사헌부 지평 국량國樑이다.

                                                        <원비문 : 숙종 32년(1706) / 글 사간원정언 채팽윤蔡彭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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