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새재와 과거길
문경 새재의 길은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을 터이다.
그중에서도 관심을 가지는 길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던 선비들의 자취이다.
사람마다 시험에 대한 징크스는 오늘날에도 다양하고 흥미롭다.
전통사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올가가는 길은 문경새재와 추풍령, 죽령이 대표적인 고개였다.
과거를 보러가던 선비들은 유독 문경새재를 고집했다.
문경聞慶이라는 지명이<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의 뜻이고
옛 이름이었던 문희聞喜 역시 <기쁜 소식을 듣는다>라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죽령과 추풍령을 넘기 싫어한 이유는
죽령을 넘으면 과거시험에 <죽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득이 추풍령 앞에 이르게 되면 옆쪽의 괘방령掛榜嶺을 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문경새재는 조선팔도 고갯길의 대명사로서 영남대로가 지나는 곳이며,
당시 사람과 물류가 가장 많이 이동하는 나라 안의 가장 큰 길이었다.
또한 관방시설로 인하여 군사들이 지키는 곳이어서 과거길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동래에서 한양까지 과거길에 오른다고 가정할 때 문경새재는 가장 짧은 길이기도 했다.
문경새재 길은 열나흘, 죽령 길은 보름, 추풍령 길은 열엿새가 걸렸다.
* 고리도시락 : 조선시대
휴대용 도시락으로 삼베보자기에 밥과 반찬을 싸서 넣었다.
조선의 과거제도
조선시대 과거에는 소과, 문과, 무과, 잡과 등 4종류가 있었으며
정기시定期試와 부정기시不定期試로 구분되었다.
정기시에는 식년시式年試 하나만 있었으나
부정기시에는 증광시增廣試, 별시別試, 알성시謁聖詩, 정시庭試, 춘당대시春塘臺試 등 다양했다.
식년시는 고향에서 <초시=생원진사시>를 치르고, <복시>를 치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가며
별시는 초시부터 한양에서 치게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대과大科,文科를 치르게 된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는 실력 위주의 인재등용 방식이었으며
실력을 키운 인재들은 저마다의 청운의 꿈을 품고 과거길에 올랐다.
* 과거 시험을 치루는 모습...
과거시험지 卷子/試券 : 조선시대
과거를 볼 때 글을 지어 올리던 종이이다
붉은 색으로 성적(次下)이 기록되어 있다.
백지 과거 시험지 白紙試券 : 조선시대
근봉과 직인이 찍혀 있다.
문과 합격 교지 : 홍패교지 紅牌敎旨 : 조선시대 1800년 가경嘉慶5년
* 종이의 바탕 색깔이 붉은 것이 홍패이다.
생원 이현상의 문과 합격 교지
문과文科 병과丙科 23인중에서 23등하였다는 내용...
(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 --- 모두 33명을 합격시킴
갑과 3명 합격자 중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자가 장원급제자 임)
생원 합격 교지 : 백패교지 白牌敎旨 : 조선시대 17680년 건륭乾隆 33년
유학 이종렬의 생원 합격교지
생원3등급중에서 43등으로 합격하였다.
과거합격자 명단 : 사마방목司馬榜目 : 조선시대, 금속활자본
생원 진사 시험 합격자 명단이다.
* 이중에는 역리驛吏 김상추金尙秋도 합격자에 이름이 있다.
신분상승을 위해 시험을 치루었나 보다...
장원급제길 :
영광의 금의환향錦衣還鄕
과거에 급제한 이들에게는 다채로운 의식과 축하행사가 펼쳐졌다.
급제의 여부는 방榜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국왕은 문무과의 급제자에게 종이로 만든 꽃인 어사화御賜花와 왕을 만날 때 손에 쥐는 술과 과일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급제자들에게는 은영연恩榮宴이라는 축하연을 베풀어 주었다.
* 은영연
다음 날에는 급제자들이 모두 문과 장원의 집에 모인 후 대궐에 들어가 국왕에게 사은례謝恩禮를 올렸다.
그 다음 날에는 무과 장원의 집에 모여 공자를 모신 문묘文廟에 가서 알성례謁聖禮를 올렸다.
그 후 삼일유가라 하여 친지를 불러 잔치를 하거나 선배의 집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거나 시관試官을 초대하여 은문연恩門宴을 열기도 하였다.
* 삼일유가
고향으로 내려오는 영광의 귀향길에는 연회자들이 초청되어 고향에 이를 때까지 삼현육각을 연주하고 각종 연회를 펼치기도 하였다.
고향에 도착하면 그곳 수령과 향리들의 환영을 받았다.
향교에서 알성례를 올리고 나면, 수령이 급제자와 그 부모를 불러 주연을 베풀었다.
말 그대로 영광스러운 장원급제의 길이었다.
낙방의 길 :
눈물을 머금은 낙방거자落榜擧子
급제자의 금의환향 길과는 덜리 낙방자들은 절망과 좌절 속에 귀향길에 올랐다.
그 과정에서 느낀 쓰라린 심정을 글로 남기기도 하였다.
[ 해마다 올라오는 한양이었으나 금년처럼 우울하고 쓸쓸한 여행 길은 없었다.
길동무도 없이 가는 발길이 너무 무거웠다. - 박득녕 (1808-1886) ]
[ 지난해 새재에서 비를 만나 묵었더니,
올해는 새재에서 비를 만나 지나갔네.
해마다 여름비, 해마다 과객 신세,
필경엔 허망한 명성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 - 우유잠 (1575-1635) ]
그러나 모든 낙방자 들이 허탈한 마음으로 곧바로 귀향길에 올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한양 명승지를 유람하며 마음을 위로하는 경우도 있었다.
과거에 낙방한 자들이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두루 유람한 한양의 명승지 중에서
송파진이 가장 대표적인 장소였다.
송파나루는 서울과 광주廣州를 잇는 중요한 나루였다.
암행어사의 길 :
마패 :
소지와 암행어사의 판결 소지所志 : 조선시대
경상도 창원 사는 유학 김종묵의 토지와 관련된 송사리이다.
암행어사가 가지도 있던 마패를 직인으로 사용하였다.
소지와 암행어사의 판결 소지所志 : 조선시대
전라도 장성읍 서면 구암의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올린 송사이다
암행어사가 가지고 있던 마패를 직인으로 사용하였다.
작은 행복을 함께 나누는
'여행이야기(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문경 기행(2) : 영남대로 嶺南大路(1) (0) | 2013.01.28 |
---|---|
[스크랩] 문경 기행(4) : 새재[鳥嶺]의 아픈 이야기 (0) | 2013.01.28 |
[스크랩] 문경 기행(7) : 규방문화 閨房文化 (0) | 2013.01.28 |
[스크랩] [재미] 손금 보는 방법 (0) | 2013.01.24 |
[스크랩] 옛책(사마방목-대동역사-동국문헌) (0) | 2013.01.20 |